톨스토이
작품세계
톨스토이는 ‘인간의 심리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 분석’을 통하여 최상의 리얼리즘을 성취해 냈다. 이 작가는 일상의 형식적인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거짓, 허위, 가식, 기만을 벗겨내고자 했다.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는 레닌의 말처럼, 톨스토이는 제정러시아에서 혁명이 준비되고 있던 시기를 적확(的確)하게 묘사하면서, 그의 문학과 사상을 사회혁명에 용해시켰다. 나아가서 전 인류의 예술적 발전을 한 걸음 진전시키는 데 그의 문학과 사상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톨스토이의 작품에는‘삶을 사랑하는 톨스토이’와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톨스토이’라는 ‘두 얼굴의 톨스토이’가 있다. 톨스토이의 세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운다. 후기로 갈수록 톨스토이는 ‘삶을 사랑하는 시인’에서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우리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서로 싸우는 그의 세계를 이원론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주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전일성이 드러난 세계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사상가로서 톨스토이를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지 말고, 영적인 탐구심에 기초한 도덕적 태도의 통일성에 기초해서 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그의 창작 세계의 전일성을 인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일반적·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1] 그리고 그는 예술가이자 인생의 교사로서 이런 관념들에 대한 해답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했다.[1] 이러한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에서는 자족적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기 완결적 순환 구조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1] 톨스토이는 자신의 관념을 통하여 그리고 그 관념의 실천을 통하여 절대적 지각자로서의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하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1]
톨스토이의 본성에는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 강한 성적 욕망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성적 욕망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금욕주의와 청교도적 삶을 강조했다. 일상적 삶을 함께했던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 안드레예브나는 남편의 강한 성적 욕망을 받아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망의 분출 이후 피할 수 없이 더 강하게 표출되곤 하던 청교도주의자 톨스토이의 모든 도덕적 부채까지도 견뎌내야만 했다. 그래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쓴 러시아의 문예학자 메레시콥스키는 톨스토이에게 평생 동안 억제하려고 했던 육체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정신적인 것을 성취해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활동
비판적 지식인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바보이반》,《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민중들에게 무관심한 교회(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여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고 1901년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감독기관인 종무원으로부터 파문당했을 정도로 톨스토이는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활약하였다.
행동하는 지식인
톨스토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몸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이어서, 귀족들의 방해로 폐교되기는 했지만 1860년 고향 툴라에서 농민학교를 운영하여, 부모의 강요로 아동노동을 하는 게 전부였던 농민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재미있게 놀기도 하게 해주었다. 당시 부모들은 처음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자녀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톨스토이가 진심으로 농민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이들을 기꺼이 학교에 보냈다. 농민학교는 자유로웠는데, 이는 자유로운 교육을 통해서 진짜 교육이 진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871년에는 직접 교과서를 쓰기도 했는데, 농민과 귀족이 평등하게 교육받도록 한 내용 때문에 자기들보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을 멸시하는 귀족들은 농민들과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거센 반발을 일으켰지만, 자신들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농민들에게는 칭찬을 들었다.
그리스도교 신앙
톨스토이는 예수를 신적 대상으로 추앙하기보다는 따름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교 믿음을 하느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까지 모두 사랑하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실제로 그의 단편소설인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마태오 복음서 25장 40절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라는 단편소설은 폭력은 문제를 더 심하게 만들 뿐,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작품
- 《홀스토메르》
- 《무엇 때문에?》
- 《유년시대》 (1852년)
- 《소년시대》 (1854년)
- 《청년시대》 (1856년)
- 《세바스토폴 이야기》 (1855 ~ 56년)
- 《카자흐 사람들》 (1863년)
- 《전쟁과 평화》 (1865 ~ 69년)
- 《안나 카레니나》 (1875 ~ 77년)
- 《참회록》 (1882년)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885년)
- 《이반 일리치의 죽음》 (1886년)
- 《어둠의 힘》 (1888년)
- 《크로이체르 소나타》 (1889년)《하느님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1894년)-러시아 정교회내 평화주의교회인 두호보르파에 영향을 주었다. 두호보르파는 하느님 외의 권위에 대해서는 복종하지 않았으며, 톨스토이가 쓴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로부터 영향을 받아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하였다. 평화주의 실천때문에 두호보르파가 순교자들이 나올만큼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자, 톨스토이는 1899년 《부활》을 발표하여 생긴 인세로 이들의 캐나다 망명을 지원하였다. 당시 두호보르파 신자들이 톨스토이의 도움을 받아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는 캐나다로 망명하였다.[3]
- 《예술이란 무엇인가》 (1897년)
- 《부활》 (1889 ~ 99년)-《부활》은 젊은 귀족 네플류도프가 자기 때문에 타락하여 죄를 지은 카츄사와 함께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발표했을 때,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감독기관인 종무원에서 파문당했는데, 감옥에서 성찬예배(Eucharist)를 드리는 장면이 트집 잡혔다. 톨스토이는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 등에서 당시 러시아 교회의 위선을 비판하여 교회에서 미움을 받고 있었는데, 《부활》의 한 장면을 트집 잡아서 파문한 것이다. 이 사건은 톨스토이를 존경하는 러시아 민중들이 항의시위를 벌일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톨스토이 자신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단순한데, 교회는 그렇지 않다."며 유감을 표시하였다.[4]
-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도 있다》
- 《바보 이반》- 러시아 귀족들의 무위도식과 탐욕을 비판하고 - 톨스토이는 1881년 직접 도시빈민들의 생활을 조사했기 때문에, 러시아 귀족들이 자신의 힘으로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소득으로 무위도식하며 너무 많은 땅을 가지는 것은 민중들이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임을 알고 있었다. - 땀을 흘려가며 정직하게 일하는 러시아 농민들의 성실함을 찬양하는 사회비판소설이다. 톨스토이는 바보나라의 왕이 된 바보 이반의 입을 빌려 전쟁으로 인해 민중들이 희생됨을 고발함으로써, 민중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와 비폭력주의로 전쟁에 반대할 것을 요구한다.
톨스토이 작 이 전쟁이야말로, 그에게 빛나는 미래와 영광을 안겨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안드레이의 친구로서, 유학에서 갓 돌아온 피에르는 모스크바 굴지의 자산가 베즈호프 백작의 사생아였지만, 백작의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서 전 재산을 상속받고 일약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여기에 눈독을 들인 후견인 역인 크라긴 공작은, 미모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품행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자자한 자기의 딸 에렌을 피에르와 결혼시킬려고 획책하고 무난히 성공한다. 이 해 11월, 안드레이는 아우스테르리쯔의 결전(決戰)에서 패배한 러시아군으로서, 단신 군기를 들고 적진에 돌격하여 중상을 입지만, 문득 제정신이 들어 머리 위의 푸른 하늘을 쳐다 보고, 그 장엄함에 크게 감동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기의 야심이라든지 명예욕, 위대한 인물로 숭배하고 있었던 나폴레옹 등이, 사실은 보잘 것 없이 사소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한편, 피에르는, 결혼 후 친구 드로포프와 아내 에렌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결투를 신청하여, 상대를 쓰러뜨린 후 아내와 별거를 한다. 그리고 나서부터, 그는 선악이라든지 생사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을 하지만, 프리이메이슨(Freemason; 1723년 런던에서 성립하여 전유럽에 퍼진, 인류애를 위한 세계적인 평화와 행복의 실현을 목표로, 국제적 조직을 가진 비밀 결사)의 지도자를 알게 되고, 새로운 신앙 생활에 들어간다. 전사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던 안드레이가, 뜻밖에 영지(領地)의 벽촌으로 돌아온 바로 그날 밤, 아내 리자는 사내 아들을 낳고 그대로 숨을 거둔다. 안드레이는 이미 자기의 인생은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영지에서 일생을 보낼 결심을 한다. 1809년 봄에, 안드레이는 귀족회(貴族會)의 용무로 로스토프 백작의 집을 방문하고, 생명력이 넘쳐 흐르는 백작의 젊은 딸 나타샤를 만나 마음이 강하게 끌린다. 그 해도 저물어 가는 어느 날, 두 사람은 무도회에서 다시 만나, 곧 사랑하게 되고 약혼을 하지만, 영지의 노공작(老公爵)의 완강한 반대로 1년간의 유예 기간을 두기로 하고, 안드레이는 외유를 한다. 그러나 젊은 나타샤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피에르의 아내 에렌의 오빠 아나토리의 유혹에 빠져, 사랑의 도피를 할 약속을 함에, 안드레이와의 약혼은 파기되고 만다. 1812년에, 다시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나고, 안드레이는 포로지노의 결전에서 중상을 입는다. 러시아군은 패주를 거듭하고, 마침내 모스크바를 적에게 내 주게 된다. 로스토프가(家)에서는 가재(家財)를 운반하기 위하여 준비해 놓은 마차로 부상병들을 수송하기로 결심한다. 피에르는 모스크바에 머물어 농민으로 가장하고, 나폴레옹을 암살할 기회를 노리다가 프랑스군의 포로가 된다. 아내 에렌은 전화(戰火) 속에서도 연신 난행(亂行)을 계속하다가, 낙태약을 잘못 먹고 몸부림을 치면서 죽는다.
주인공 하이라이트
『전쟁과 평화』는 다면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어 주인공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작품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로스토프가(家)의 딸 나타샤이다. 나타샤는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의 생명 긍정의 사상을 체현(體現)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천진 난만하고, 조금의 꾸밈도 없이 항상 자연 그대로 행동을 한다. 백작이라는 귀족의 딸로 태어나 넓은 저택 안에서 고이 자랐지만, 사냥 후, 가난한 지주인 백부의 집에서 민요 가락에 맞추어 멋지게 춤을 춘다. 모든 러시아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그녀는 선천적으로 터득하고 군에서 퇴역한 다음해인 1857년에, 최초의 유럽 여행에서 그는 길로틴(단두대)에 의한 사형집행을 목격하고, 서구 문명에 깊이 절망하였다. 귀국 후에는 교육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62년에, 궁정 시의(宮廷侍醫) 뻬르스의 딸인 18살의 소피아와 결혼하고, 대작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하였으나, 이 무렵부터 인생의 의의라든지, 신(神)의 존재에 관하여, 심각한 사상적 동요를 경험하게 되었고, 마침내 종교에서 구원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참회』『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등의 논문에서, 근대 문명이라든지 국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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