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연구

그리스 문명

박송 입니다. 2010. 6. 2. 03:31

 

 

 

그리스 문명

 

 

에게해 문명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며 전기는 크레타, 후기는 미케네라 부른다.

 

 

크레타 문명 (미노아 문명)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2,000년 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문명은 이집트 문명과 가까운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시작되었으며,

초기 300년간은 통일되지 못했고 주변의 수많은 해적들 때문에 안정되지 못했다.

 

이 후 카리스마를 갖춘 미노스 왕이 등장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섬을 통일한 미노스 왕은 강력한 함대를 구성하여 해적을 소탕하였다.

이로써 에게해의 항해가 안전해졌고 200년간 번영을 누렸다.

 

이 후 150년간 서서히 쇠퇴하던 크레타는 아카이아인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아카이아인은 펠로폰네소스를 중심으로 서서히 번영을 이룬다.

 

미케네 문명

 

아카이아인은 무인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여 미케네 문명을 열었다.

그들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유혹하여 납치해가자,

미케네의 4대 강국이 중심이 된 동맹군을 형성하여 트로이를 공격하였다.

 

4대 강국의 대표적인 인물은 다음과 같다.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 아르고스의 아가멤논. 테살리아의 아킬레우스. 이타카의 오디세우스.

이들이 10년 동안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정작 본국은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이때 강성해진 북부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그들의 멸망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결국 미케네 문명은 150년의 생애를 끝으로 멸망하고 이를 침범한 도리아인의 파괴와 살육으로 인해

400년간의 암흑시대가 온다. 이때를 그리스 문명의 중세라 부른다.

(도리아인 = 도리스인)

 

이오니아 문명

 

기원전 800년경 암흑시대가 걷히면서 폴리스라는 도시 국가 시대가 도래한다.

미케네는 이곳에 정착한 도리아인이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폴리스들을 건설하였고

미케네에서 쫓겨난 아카이아인들은 아테네와 그 일대에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아테네는 척박한 농경지를 타개하기 위해 상공업으로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활발한 식민활동과 인구증가를 꾀했다. 이것은 아카이아인들에게 제2의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이 실시한 첫 번째 식민활동은 소아시아 해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오히려 이곳이 아테네보다 먼저 번영을 누리게 되어 이오니아 문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를 비롯하여 히포크라테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등

그리스를 대표하는 수학자와 철학자들을 배출하며 문명의 꽃을 피웠다.

 

당시 200개가 넘는 폴리스들이 서로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는데,

이에 염증을 느낀 폴리스 지도자들이 모여 4년에 한번씩은 전투를 그만두고 경기를 갖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776년에 제1회 올림피아 경기가 열렸다.

 

기원전 750년경, 그리스인들은 두 번째 식민활동지로 지중해와 남유럽을 선택했다.

당시 그리스와 대등한 세력을 가진 나라는 페니키아인이 건설한 카르타고 뿐이었다.

 

아테네

 

아테네는 전설의 폭군 미노스왕을 타도한 테세우스가 건국하였다.

기원전 594년 귀족출신의 솔론이 서민과 인권을 위한 개혁을 단행하여

50년간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으며 해군력이 증강되고 제해권이 확보되었다.

 

그러나 솔론 사후엔 15년의 혼란과 페이시스의 20년 독재가 있었다.

이후 스파르타의 지원으로 독재가 끝나고 혁명지도자 클레이스가

솔론 보다 더 민주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민회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스파르타

 

한편 스파르타는 소수 민족이 군림하는 독특한 지배체제를 갖고 있었는데,

도리아인 5%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85%의 그리스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을 군인으로만 단련시키는데에 집중하여 그리스의 최정예로 손꼽혔다.

 

이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따르는 주변의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점령하여

과두정으로 전환시키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진정한 패자가 되었다.

 

페르시아의 침공

 

기원전 500년경, 오리엔트를 제패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이 소아시아의 폴리스들을 침략하자

아테네가 이에 맞서 군대를 파견하였고 스파르타는 개입하지 않았다.

전쟁 5년만에 소아시아는 페르시아에 넘어갔고 다시 5년후에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침공한다.

 

기원전 490년경, 아테네가 침공을 당하자 이때도 스파르타는 개입하지 않았다.

아테네는 페르시아를 맞아 마라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군사력을 증강하기 시작한다.

이후 해군력에서 카르타고를 앞지르게 된다.

 

480년경,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30만 대군과 전투함 1,000척을 이끌고 아테네를 2차 침공한다.

이때는 스파르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리스의 모든 폴리스들이 연합군으로 나서

테르모펠레전투에서 격전을 치르지만 끝내 페르시아가 승리하게 된다.

이때 스파르타의 정예 300명이 최후까지 항전하다 왕까지 전사하게 되고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70%까지 장악한다.

 

하지만 의기양양했던 페르시아 대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참패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1년후 페르시아가 제3차 침공을 해오지만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군이 플라타니아 평원에서 승리한다.

아테네는 여세를 몰아 페르시아를 침공하여 3년후 소아시아까지 탈환한다.

 

아테네 제국 

 

패권국가가 된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엔 무려 200여개의 폴리스들이 참여하였고

이에 고무된 강경파 지도자 데미스토클레스가 반스파르타 동맹을 추진하다 도편추방을 당한다.

도편추방은 국가에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인물을 투표하여 국외로 10년간 추방하는 제도인데,

이때 투표는 도자기 파편에 이름을 써 내는 것이다.

 

이로써 스파르타와 평화적 공존을 주장하는 온건파가 20년간 민회를 지배하게 되고

강경파의 차기 영수 키몬마저 추방된다. 이후 페리클레스 황금시대가 도래한다.

이때 30년간은 해군력 증강과 상공업 발전으로 아테네는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추방된 강경파의 경고대로 그들의 적은 페르시아나 마케도니아가 아니라 스파르타였다.

아테네의 발전과 스파르타의 질투는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거대한 참사를 부른다.

 

그러나 전쟁을 앞두고 키몬과 페리클레스의 입장은 뒤바뀐다.

키몬은 스파르타와의 협상을 주장했지만, 페리클레스는 전쟁을 주장했다.

어찌보면 키몬은 페리클레스 보다 시대를 꿰뚫어 보는 눈이 더 앞섰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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