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 <추일(秋日)>
띠집은 대숲 길로 이어져 있고 茅齋連竹逕 모재연죽경
가을날 햇살은 맑고 곱기도 하다. 秋日艶晴暉 추일염청휘
열매가 익어서 가지는 늘어지고 果熟擎枝重 과숙경지중
오이도 달리잖은 끝물의 덩쿨 瓜寒著蔓稀 과한착만희
나는 벌은 쉴새없이 잉잉거리고 遊蜂飛不定 유봉비부정
오리는 한가로이 기대어 조네 閒鴨睡相依 한압수상의
몸과 맘 너무나 고요하구나. 頗識身心靜 파식신심정
물러나 살자던 꿈 이루어졌네. 棲遲願不違 서지원불위
초가 한 채있고 그 뒤 대숲사이로 소로가 나있다.
가을햇살은 지붕위에 깁(그물, 명주실로 짠 거친 비단)을 펼쳐 얹었다.
빨갛게 익은 열매가 무겁다고 가지들은 어깨를 축 늘이고,
여름내 입 맛 돋구던 참외도 이제는 가을 서리에 끝물이라.
벌들은 그래도 미련이 남아 겨울 준비에 하루 종일 부산스럽고,
그 옆 연못에선 오리들이 태평스레 목을 감고 졸고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인의 내면에 어느새 기쁨이 물오른다.
몸과 마음이 평온하다. 물러나 쉬자던 소원이 이제야 이루어 졌듯…….
<해제>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벼슬길에 있으면서 재상까지 지내던 작가가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을 마음껏 즐기며 한가로운 삶을 살아가는 만족감을 표출한 한시이다. 조선 전기 사대부의 자신감과 태평성대를 이루어 냈다는 자부심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삶을 그리고 있다.
▪ 개관 정리
갈래 |
한시 (5언 율시) |
성격 |
낭만적, 관조적, 자연친화적 |
제재 |
자연 속에서의 삶 |
주제 |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 속에서 즐기는 삶의 기쁨 |
특징 |
▪ 시선의 이동에 따라 시상이 전개됨 ▪ 선경 후정의 구성 |
<보충 자료>
秋日卽事(추일즉사) / 徐居正(서거정)
秋容濃淡坐開窓(추용농담좌개창) 가을의 경치 짙고 맑아서 창문을 열고 앉으니
舊恨新愁未易降(구한신수미이항) 오랜 한과 새로운 근심 쉽게 다스려지지 않네
細聽隔枝鶯전百(세청격지앵전백) 가지 사이에 여러 꾀꼬리 지저귀는 소리 들으며
閑看掠水燕飛雙(한간약수연비쌍) 물을 차고 나는 한쌍의 제비를 한가히 바라보네
花開함菖비紅霧(화개함창비홍무) 꽃이 핀 연꽃과 창포에는 붉게 안개가 자욱이 끼고
酒潑葡萄漲綠江(주발포도창녹강) 술을 머금은 듯한 포도는 푸른 강물이 넘치듯 하네
把筆題詩時遣興(파필제시시견흥) 붓을 잡고 시를 지으면서 때로는 흥겹게 보내지만
江湖歸夢繞漁쌍(강호귀몽요어쌍)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꿈은 고깃배에 머물러 있네
◈ 문제 풀이
* <보기>의 화자의 고민에 대해 이 글의 화자가 충고할 만한 말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보기>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의 흘러내리는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담아 동해로 흘러가니, 차라리 한강의 남산에 닿게 하고 싶구나. 왕정이 한계가 있고 풍경이 싫지 않으니, 그윽한 회포가 많기도 하구나. 나그네의 걱정도 둘 곳이 없구나. |
① 왕정과 풍경이 공존하는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 보면 왕명을 수행하는
가운 데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② 왕정은 관리로서의 길이요, 풍경을 즐기는 것은 어진 자의 속성입니다. 하지만 둘 중 더 중요한 일을 고른다면 관리로서의 현재
의 책무를 잊을 수 없는 일이니 왕정이 당연히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③ 그 그윽한 회포의 심정을 저도 알지요. 저도 언제나 물러나 살자던 꿈을 품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참 많은 고민을 했지만 이렇게
자연 속에 있으니 물러나 살자던 꿈을 이룬 현재가 너무 좋아 권하고 싶군요.
④고민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실천이 중요한 겁니다. 더 이상의 회한 같은 것은 남기지 말고 공과 사 중 하나를 결정하세요.
그렇게 주저하는 동안에 시간만 가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⑤ 스스로를 나그네라고 칭하고 있으면서 무슨 고민을 하시나요? 나그네면 나그네답게 유랑의 생활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답
니다. 잠시 떠돌면서 공적인 업무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이끌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시적 화자의 태도 파악 <답 ③>
<보기>는 ‘관동별곡’의 일부로 왕정과 풍경 사이에서 갈등하는 화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왕의 명령을 받든 관찰사로서의 임무 수행과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계속 감상하고 싶어 하는 자연인으로서의 마음이 충돌하며, 끝나가는 관동의 여정에 안타까움을 더해 주는 부분이다. (라)의 화자는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 속에서 은거하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만족감을 노래하고 있으므로 ③과 같이 충고할 수 있다.
[오답 풀이]
① (라)의 화자는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 속에서 은거하는 삶 속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왕명을 수행하며 자연을 즐기라는
충고는 적절하지 않다.
② 왕정을 우선시하여 관리로서의 책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충고는 적절하지 않다.
④ 공과 사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은 충고로서 적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