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왜 강홍립을 후금에 투항시켰을까?

영화 '광해'에서 주인공을 맡은 배우 이병헌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어떤 이는 병자호란 이야기가 나오면 이런 말을 한다.
만약 광해군이 쫓겨나지 않았다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조선의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한 삼전도의 치욕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광해군의 실리외교이고, 실리외교의 근거로 강홍립을 후금에 투항하게 한 것을 내세운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어떤 상황에서 강홍립을 후금에 투항하게 했을까? 그리고 강홍립을 후금에 투항하게 한 것을 왜 실리외교라고 평가하는 것일까? 우선 당시 국제 관계를 한 번 살펴보자.
1598년에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명나라는 혼란 속에서 몰락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반대로 여진족은 새로운 지도자 누르하치가 등장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후 누르하치는 1616년에 국호를 ‘대금大金’이라고 하고 연호를 ‘천명’이라고 하여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누르하치가 세운 금나라를 흔히 후금이라고 일컫는다.)
그러자 명나라 황제 신종은 요동 경략 양호에게 군대를 일으켜 여진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양호는 1618년에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여진과 왜가 조선의 앞뒤로 버티고 있어 서울이고 지방이고 여유가 없는 상황이며, 국력이 넉넉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군사 훈련도 되지 않았다며 에둘러 양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이 글을 본 양호는 조선이 명나라의 여진 정벌에 대해 관망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질타하고, 지원군을 보낼 것을 다시 강력하게 요청했다.
양호는 광해군을 몰아붙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달래기도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강하게 피력했다. 조선의 태도가 계속 관망세를 유지하고 있다면 정식으로 황제에게 보고하여 명나라 조정 차원에서 조선 왕을 징계하도록 하겠다는 협박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양호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지원군을 보낸 사실을 언급하며 그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정유재란 때는 양호도 직접 군무 경리를 맡아 참전하였다. 양호는 그 사실까지 들먹이며 조선에서 지원군을 보내줄 것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광해군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지원군을 보낸 사실을 후금에서 알게 되면, 후금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에 조선은 진퇴양난이었다. 광해군은 고민 끝에 이중전략을 구사하기로 했다.
일단 명나라의 요구대로 병력을 동원하되, 상황에 따라 후금과 강화 협상을 하여 평화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강화 과정에서 후금에 서찰을 보내 조선은 명나라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억지로 군대를 동원했을 뿐, 후금을 공격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말을 전한다는 계획이었다. 일종의 등거리외교이자 중립노선이었다. 광해군은 자신의 이중전략을 조정에는 알리지 않았다. 만약 조정에 알려지면 갑론을박이 있을 것이 뻔했고, 명나라 조정에도 알려져 조선의 처지가 난처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요동에 보낼 1만 3,000명의 지원군을 꾸리게 하고, 형조참판 강홍립을 도원수로,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아 출동하게 하였다. 강홍립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가 1619년 2월에 명나라 장수 유정의 군대와 만났다.당시 유정과 강홍립 부대를 합친 병력은 총 2만 정도였다. 강홍립은 2만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급히 후금을 공격하다간 패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하여 진격을 보류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있던 유정은 강홍립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홍립의 그런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무턱대고 전진만 하던 명나라군과 조선군은 후금군의 기습을 받고 일시에 궤멸되었다. 당시 유정은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먼저 진격하고, 조선군은 강홍립의 지휘 아래 그 뒤를 받치고 있었다. 그런데 후금군의 기습으로 명나라 군대가 궤멸되자, 유정과 휘하 장수들은 화약포 위에 앉은 채 불을 질러 자살했다.
이렇듯 명나라 군대가 졸지에 궤멸되자, 조선군의 좌군과 우군도 함께 궤멸되었다. 이에 강홍립은 중군을 이끌고 뒤로 물러났다가 누르하치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포로가 된 조선군은 무장 해제된 채 후금군 진영으로 끌려갔다.

강홍립이 누르하치에게 항복한 일에 대해 《광해군 일기》는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이에 앞서 왕(광해군)이 비밀리에 회령부의 시장 장사꾼 호족胡族에게 이 일을 통보하게 하였는데, 그 장사꾼 호족이 미처 돌아가기도 전에 하서국(역관)이 먼저 오랑캐의 소굴로 들어갔으므로 노추(누르하치)가 의심하여 감금하였다. 얼마 후 회령의 통보가 이르자 마침내 하서국을 석방하고 강홍립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강홍립의 투항은 대체로 예정된 계획이었다.
이 기록에 나오는 하서국은 광해군이 파견한 여진어 역관이었다. 광해군은 강홍립이 출병할 당시 이미 자신의 이중전략을 비밀리에 알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전투를 멈추고 강화를 맺어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을 명령했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이런 밀명에 따라 누르하치에게 항복한 것이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할 때,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한 것은 광해군의 명령에 따른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당시 광해군은 후금과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의 이런 중립적인 태도를 감안해 보면,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았다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은 충분히 성립 가능하다. 왜냐하면 병자호란은 후금이 조선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 벌인 전쟁 아니라, 조선과 관계를 안정시켜 명나라 공격의 안전판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벌인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런 후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던 광해군은 적어도 조선이 군사력을 키울 때까지는 후금에 대해 저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당시 조정 대신들은 광해군의 이런 실리적 견해를 수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왕비 유씨까지도 언문 상소를 올려 명나라를 섬길 것을 간청했다. 그래도 광해군은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광해군은 명나라를 섬기는 척하면서 후금에 대해서도 우호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광해군은 조선이 힘을 키울 때까지는 이러한 이중전략이 살길이라고 보았다.광해군은 후금에 대해서도 적대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명나라와도 화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곧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교지를 받아내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광해군이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했다는 것을 반정 명분 중 하나로 삼았다.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친 것을 오랑캐에게 투항했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인조가 후금을 적대시하고 명에 대한 사대 외교를 지속하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중립노선의 폐기를 의미했다.
하지만 인조의 이런 친명정책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한 오판의 산물이었고, 그 오판은 임진왜란에 이어 또다시 조선 백성들을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때 만약 광해군이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친명정책을 썼을 리가 없고, 그렇다면 병자호란은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사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5천년사/3대 영웅/을지문덕 (0) | 2024.01.06 |
---|---|
이순신 장군/넬슨제독/나폴레옹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침략을 물리치고 전장에서 전사한 모습은 유사하다. (0) | 2023.08.08 |
몽골 고려의 7차 침입/한족의 한 (0) | 2023.01.07 |
조선의 몰락/정조의 독살 (0) | 2022.12.26 |
인조 반정 (0) | 2022.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