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추존 황제
정조 선황제 | 正祖 宣皇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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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2대 국왕
정조 | 正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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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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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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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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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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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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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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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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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세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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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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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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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교양에서 다룬 정조 관련 방송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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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22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정조(正祖)이며, 선왕인 영조(英祖) 재위기인 영조 28년(1752년)에 사도세자(思悼莊獻世子, 1735~1762)와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전에 형인 의소세손이 어린 나이에 일찍 요절하여 실질적 장남이었다.[5]
1752년(영조 28년)에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년)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로부터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되어 왕통(사위)을 이었다.
1775년(영조 51년)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1776년(영조 52년), 할아버지 영조가 83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만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4년간 재위하다 1800년(정조 24년)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할아버지 영조와 함께 조선 최후의 부흥기를 이끈 임금으로 평가받는다.[6]
파란만장했던 정조의 생애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남겨 후세에 많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2. 생애[편집]
(전략) 왕은 성인(聖人)이었다. 사도(斯道)의 정체를 밝혀내고 사도(斯道)가 지향할 바를 주장하였다[7]. 왕이 한 일은 복희·신농·문왕·무왕이 했던 일이며, 왕이 한 말은 공자·맹자·정자·주자가 한 말이었다. 앞으로 천세 후에 옛것을 논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 이를 《시경》의 청묘(淸廟) 악장에다 실어 연주하여 역시 한 사람이 창(唱)을 하면 세 사람이 감탄을 하리라. 여기에는 특히 남들의 귀와 눈에 배어 있는 천덕(天德)·왕도(王道)만을 추려 뽑아 굉장한 유자(儒子)이고 현철(賢哲)한 임금이었던 그의 법도를 이 정도로 소개했을 뿐이다.
2.1. 임오화변과 초기[편집]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는 임오화변의 무서운 광경을 보고 11세의 어린 정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 영조의 서슬퍼런 어명이 내려지자 세손 정조만이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두손을 빌며 애원하는 눈물겨운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조는 매정하게도 "누가 얘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했느냐. 세손까지 뒤주 안으로 들어가길 바라느냐. 어서 데리고 나가라"며 정조를 쫓아냈다.
사도세자 사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폐서인이 되어 신분이 박탈되었으므로 궁궐에 있을 수 없었기에 외조부 홍봉한이 있는 사가로 내려가지만 곧, 어머니와도 생이별해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경희궁으로 돌아간다. 당시 정조는 상중(喪中)이었지만 영조가 교서를 내려 그(세손)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면서 더이상 상복을 입을 수 없었고 《한중록》은 그 때 정조의 모습을 두고 "슬퍼 우는 소리가 하늘까지 닿았다"고 썼다.
이 때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하는데 영빈 이씨로서는 자식을 대처분이라는 말로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그에 대한 죄책감도 겹쳐 손자(정조)에게 정말 극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8]
이 생이별은 오히려 혜경궁 홍씨의 피눈물을 머금은 가슴 아픈 결단에 가까웠다. 어린 정조가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어하자 영조가 "그래도 어미를 이토록 그리워하는데 같이 사는게 낫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혜경궁 홍씨는 혹시 정조가 할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한다며 영조가 질투할 것을 우려해서 단호하게 떼어놓았다고 한다. 영조의 정신나간 수준의 편집증(의심병)과 그 결과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혜경궁 홍씨의 이러한 걱정은 절대로 기우가 아니었다.[9]
왕세손 시절에는 영조에게서 극진한 총애를 받았는데 《영조실록》에서는 한번도 세손(정조)을 꾸짖지 않고 칭찬만 할 정도다. 영조가 말년에 치매가 매우 의심될 정도로 판단력이 많이 흐려졌음에도, 죽기 직전까지 세손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굳건했다. 아들 사도세자에게는 정신병에 걸리게 할 정도로 혹독하게 대한 것과는 대조적인데 이런 세손에 대한 편애가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영조는 사도세자는 쳐다도 보지 않은 반면 원손인 정조는 심심하면 불러 글을 쓰게 하고 책을 읽어주거나 읽어보게 하는 등 엄청나게 예뻐했다. 결과적으로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정조가 아버지에게 부채 의식을 갖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정조가 죽은 아버지에게 보였던 효심은 트라우마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했는데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어떠한 방향으로든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는 측면이 있다.
임오화변 이후 정조는 일부러 꼬투리를 잡으려 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모범적이고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으나 영조의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조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살아남아서 왕위에 오르려면 영조에게 후계자로 인정을 받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다만 이는 임오화변 이후 출궁되었다가 다시 궁으로 들어온 직후에 해당되는 것으로 출궁 당시의 정조는 11세였다.
사도세자 사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폐서인이 되어 신분이 박탈되었으므로 궁궐에 있을 수 없었기에 외조부 홍봉한이 있는 사가로 내려가지만 곧, 어머니와도 생이별해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경희궁으로 돌아간다. 당시 정조는 상중(喪中)이었지만 영조가 교서를 내려 그(세손)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면서 더이상 상복을 입을 수 없었고 《한중록》은 그 때 정조의 모습을 두고 "슬퍼 우는 소리가 하늘까지 닿았다"고 썼다.
이 때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하는데 영빈 이씨로서는 자식을 대처분이라는 말로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그에 대한 죄책감도 겹쳐 손자(정조)에게 정말 극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8]
이 생이별은 오히려 혜경궁 홍씨의 피눈물을 머금은 가슴 아픈 결단에 가까웠다. 어린 정조가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어하자 영조가 "그래도 어미를 이토록 그리워하는데 같이 사는게 낫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혜경궁 홍씨는 혹시 정조가 할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한다며 영조가 질투할 것을 우려해서 단호하게 떼어놓았다고 한다. 영조의 정신나간 수준의 편집증(의심병)과 그 결과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혜경궁 홍씨의 이러한 걱정은 절대로 기우가 아니었다.[9]
왕세손 시절에는 영조에게서 극진한 총애를 받았는데 《영조실록》에서는 한번도 세손(정조)을 꾸짖지 않고 칭찬만 할 정도다. 영조가 말년에 치매가 매우 의심될 정도로 판단력이 많이 흐려졌음에도, 죽기 직전까지 세손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굳건했다. 아들 사도세자에게는 정신병에 걸리게 할 정도로 혹독하게 대한 것과는 대조적인데 이런 세손에 대한 편애가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영조는 사도세자는 쳐다도 보지 않은 반면 원손인 정조는 심심하면 불러 글을 쓰게 하고 책을 읽어주거나 읽어보게 하는 등 엄청나게 예뻐했다. 결과적으로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정조가 아버지에게 부채 의식을 갖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정조가 죽은 아버지에게 보였던 효심은 트라우마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했는데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어떠한 방향으로든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는 측면이 있다.
임오화변 이후 정조는 일부러 꼬투리를 잡으려 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모범적이고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으나 영조의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조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살아남아서 왕위에 오르려면 영조에게 후계자로 인정을 받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다만 이는 임오화변 이후 출궁되었다가 다시 궁으로 들어온 직후에 해당되는 것으로 출궁 당시의 정조는 11세였다.
2.2. 백부의 양자로 입적하다[편집]
정신병이라는 핑계를 대기는 했어도 죄인인 사도세자의 아들로서는 왕위를 이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영조에 의해 죽은 백부인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는 방식으로 왕위 계승권을 유지하게 된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이후 정통성 확보를 위해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했다. 친부는 끝내 추종하지 못했는데 양부는 거의 즉위하자마자 자기 정통성을 위해서 추존할 수 밖에 없었다. 사도세자는 고종 대에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생모를 잃은 연산군과 비교되고는 한다. 다른 점은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이 사실을 숨겼다가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 그런데 사실 연산군도 생모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게 현대의 중론이다. 연산군과 갑자사화 문서 참고.
세손 시절 궁료로서 주위에 둔 측근으로는 홍국영[10], 김종수[11], 정민시[12], 홍대용[13], 서명선[14] 등이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생모를 잃은 연산군과 비교되고는 한다. 다른 점은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이 사실을 숨겼다가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 그런데 사실 연산군도 생모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게 현대의 중론이다. 연산군과 갑자사화 문서 참고.
세손 시절 궁료로서 주위에 둔 측근으로는 홍국영[10], 김종수[11], 정민시[12], 홍대용[13], 서명선[14] 등이 있다.
2.3. 즉위[편집]
즉위하면서 한 말이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고 알려져 있다.[15] 그 후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척신(홍인한, 정후겸)들에 대한 척결을 완료했다. 홍술해의 아들인 홍상범과 그의 어머니 효임등이 강용휘와 전흥문[16]을 포섭하여 정조가 밤새 글을 읽던 존현각까지 침투시켰다가 발각된 일(정유역변)이 있었는데 홍계능, 홍상길, 홍신해, 홍이해 등 풍산 홍씨들이 집단으로 연루된 모반이 드러나면서 일대 피바람이 불기도 했다. 홍계희 계열은 이미 홍인한이 사사되는 과정에서 타격을 입은 상태였고 이에 반발하여 사건을 일으켰다.
이 존현각 자객 침투 사건은 강용휘 등의 자객들이 존현각의 지붕을 뜯다가 잠을 자지 않고 존현각에서 밤새 책을 읽던 정조가 그 소리를 듣고 승지 등을 불렀는데 《승정원일기》에는 이매망량이나 쥐 따위로 취급하고 사건을 덮으려 할 때 홍국영이 전격적인 수색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강용휘와 전흥문은 무사히 탈출한 뒤 재차 암살 시도를 꾀하여 들어왔다가 홍국영의 강력한 주장으로 삼엄해진 경비에 암살을 포기하고 궐의 뜰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어 사건이 마무리가 된다.
이 사건으로 풍산 홍씨의 홍계희 계열이 말끔하게 숙청되는데 정조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은전군 이찬을 사사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구에 직면했고 며칠 간 신하들과 대립한 끝에 눈물을 흘리면서 끝내 강제로 사사했다고 한다.
이 존현각 자객 침투 사건은 강용휘 등의 자객들이 존현각의 지붕을 뜯다가 잠을 자지 않고 존현각에서 밤새 책을 읽던 정조가 그 소리를 듣고 승지 등을 불렀는데 《승정원일기》에는 이매망량이나 쥐 따위로 취급하고 사건을 덮으려 할 때 홍국영이 전격적인 수색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강용휘와 전흥문은 무사히 탈출한 뒤 재차 암살 시도를 꾀하여 들어왔다가 홍국영의 강력한 주장으로 삼엄해진 경비에 암살을 포기하고 궐의 뜰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어 사건이 마무리가 된다.
이 사건으로 풍산 홍씨의 홍계희 계열이 말끔하게 숙청되는데 정조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은전군 이찬을 사사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구에 직면했고 며칠 간 신하들과 대립한 끝에 눈물을 흘리면서 끝내 강제로 사사했다고 한다.
2.4. 홍국영 숙청[편집]
이후 왕대비가 된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를 유배보냈고 1780년(정조 4년)에는 심복이던 홍국영을 토사구팽하였다. 사실 진상을 보면 홍국영이 버림받을 짓을 했다고 보는게 옳다. 디테일은 다르지만 큰 줄기만 놓고 보면 태종대의 이숙번과 비슷한 케이스.[17]
홍국영은 정조가 세손이던 시절부터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누구보다 더 받은 사람이었다. 더욱이 정조는 홍국영을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 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힘을 실어주었으니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맞설 사람이 없을 정도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자 홍국영은 정조가 즉위 후에도 자신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에 기고만장해졌는지, 나이 지긋한 신하가 와도 개판으로 맞이하며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홍국영은 정조 즉위 후 그의 최측근으로서 정국을 장악하며, 자신의 여동생인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다. 원빈 홍씨도 빈호를 '으뜸 원(元)' 자로 쓰면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있는데 어떻게 일개 후궁이 '으뜸 원' 자를 쓸 수 있냐며 논란[18]이 되었고, 생전에 마치 중전처럼 조정의 문안을 받았으며, 죽어서도 곧바로 '효휘궁(孝徽宮)'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19], 살아생전이나 사후에도 일개 후궁으로서 무리할 정도의 예우를 받았다.
당연히 자신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궁을 과하게 예우하는 홍국영의 행태는 중전인 효의왕후는 물론, 법도를 중시하는 왕대비 정순왕후와 왕의 생모 혜경궁 홍씨까지 불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중전인 효의왕후에게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후궁까지 되었으니, 정치 판도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홍국영 쪽으로 쏠리게 되면서 정치 균형이 무너지게 되었다.
하지만 원빈 홍씨는 원자를 낳아 외척으로 만들어 줄 거라는 홍국영의 기대를 저버리고, 아들은 커녕 자식조차 낳지 못하고 고작 14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다. 이에 홍국영은 완전히 이성겁대가리을 상실했는지 중전 효의왕후를 원빈의 죽음에 대한 배후로 모함하거나, 정조가 다른 후궁을 들이는 것과 그의 섭생(攝生, 자식을 생산하는 일)을 대놓고 반대하는 미친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을 원빈의 사후 양자로 삼고 봉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고친 뒤, 자신의 조카라고 선포하며 왕위 계승권자로 삼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로 완풍군이란 봉호는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 감히 일개 신하에 불과한 홍국영이 자기 집안을 왕실과 같은 위치에 두려 한다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에 완풍군을 가리켜 '가동궁(假東宮, 임시 세자)'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의 정조는 28세의 젊은 나이여서, 후궁을 들인다면 충분히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홍국영은 자신의 권세를 연장하기 위해, 마치 정조가 자식을 절대로 못 보는 몸이라는 식으로 양자를 들이는 걸 강행했다. 이런 행동은 임금을 심각하게 모독하고 억누르는 행위로 여겨졌다.[20]
결국 이렇게 도를 넘은 전횡을 부린 홍국영에게 김종수를 비롯한 동료들마저 등을 돌리고, 끝내 정조가 주도적으로 판을 짠 끝에 숙청당해 유배를 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782년(정조 6년) 이유백, 이택징, 권홍징 등의 모반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조 앞에서 스스로를 '신(臣)'으로 칭하지 않고 '나(吾)'라고 하며 정조를 걸주와 같은 폭군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탕무와 같이 반란으로 정조를 쳐 없앨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홍국영이 추천했던 산림의 영수인 송덕상을 삭탈관직하는 과정에서 호서의 유생들이 통문을 돌리며 반발한 사건이 있었으며[21] 그 이후에도 많은 유생들이 노골적으로 정조의 뜻에 거스르는 행보를 밟다가 유배되었다.
송덕상의 제자라고 자임한 문인방이라는 자는 강원도에서 병사를 모아서 동대문을 치려다가 박서집[22]의 고변으로 처형당했고 문양해라는 자가 가상의 신인을 앞세워 사람들을 선동함과 동시에 정조에게 숙청당한 김귀주, 홍국영 쪽 사람들과 연계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23]
1786년(정조 10년), 권신 홍국영에게 충성하던 훈련대장 구선복[24], 구이겸, 구명겸 등의 무장 일파가 문양해와 내통하여 상계군 이담을 옹립하려던 계획이 정순왕후에 의해 들통나기도 하는 등 정조 초반부는 거의 반란과 역모의 연속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노론 음모론과 무관하게 자기 할아버지 영조 때 역변을 일으킨건 소론 준소와 남인 탁남 세력이었는데 정조 시절에 역변을 일으킨게 대부분 벽파와 시파의 세력을 제외한 비주류 노론들[25]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야사를 신뢰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구선복 개인은 정조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자신의 새로운 울타리이자 정조와 최소한 교각의 역할을 해주던 홍국영의 축출은 구선복 등에게 상당한 압박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홍국영은 정조가 세손이던 시절부터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누구보다 더 받은 사람이었다. 더욱이 정조는 홍국영을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 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힘을 실어주었으니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맞설 사람이 없을 정도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자 홍국영은 정조가 즉위 후에도 자신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에 기고만장해졌는지, 나이 지긋한 신하가 와도 개판으로 맞이하며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홍국영은 정조 즉위 후 그의 최측근으로서 정국을 장악하며, 자신의 여동생인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다. 원빈 홍씨도 빈호를 '으뜸 원(元)' 자로 쓰면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있는데 어떻게 일개 후궁이 '으뜸 원' 자를 쓸 수 있냐며 논란[18]이 되었고, 생전에 마치 중전처럼 조정의 문안을 받았으며, 죽어서도 곧바로 '효휘궁(孝徽宮)'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19], 살아생전이나 사후에도 일개 후궁으로서 무리할 정도의 예우를 받았다.
당연히 자신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궁을 과하게 예우하는 홍국영의 행태는 중전인 효의왕후는 물론, 법도를 중시하는 왕대비 정순왕후와 왕의 생모 혜경궁 홍씨까지 불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중전인 효의왕후에게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후궁까지 되었으니, 정치 판도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홍국영 쪽으로 쏠리게 되면서 정치 균형이 무너지게 되었다.
하지만 원빈 홍씨는 원자를 낳아 외척으로 만들어 줄 거라는 홍국영의 기대를 저버리고, 아들은 커녕 자식조차 낳지 못하고 고작 14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다. 이에 홍국영은 완전히 이성
급기야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을 원빈의 사후 양자로 삼고 봉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고친 뒤, 자신의 조카라고 선포하며 왕위 계승권자로 삼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로 완풍군이란 봉호는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 감히 일개 신하에 불과한 홍국영이 자기 집안을 왕실과 같은 위치에 두려 한다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에 완풍군을 가리켜 '가동궁(假東宮, 임시 세자)'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의 정조는 28세의 젊은 나이여서, 후궁을 들인다면 충분히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홍국영은 자신의 권세를 연장하기 위해, 마치 정조가 자식을 절대로 못 보는 몸이라는 식으로 양자를 들이는 걸 강행했다. 이런 행동은 임금을 심각하게 모독하고 억누르는 행위로 여겨졌다.[20]
결국 이렇게 도를 넘은 전횡을 부린 홍국영에게 김종수를 비롯한 동료들마저 등을 돌리고, 끝내 정조가 주도적으로 판을 짠 끝에 숙청당해 유배를 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782년(정조 6년) 이유백, 이택징, 권홍징 등의 모반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조 앞에서 스스로를 '신(臣)'으로 칭하지 않고 '나(吾)'라고 하며 정조를 걸주와 같은 폭군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탕무와 같이 반란으로 정조를 쳐 없앨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홍국영이 추천했던 산림의 영수인 송덕상을 삭탈관직하는 과정에서 호서의 유생들이 통문을 돌리며 반발한 사건이 있었으며[21] 그 이후에도 많은 유생들이 노골적으로 정조의 뜻에 거스르는 행보를 밟다가 유배되었다.
송덕상의 제자라고 자임한 문인방이라는 자는 강원도에서 병사를 모아서 동대문을 치려다가 박서집[22]의 고변으로 처형당했고 문양해라는 자가 가상의 신인을 앞세워 사람들을 선동함과 동시에 정조에게 숙청당한 김귀주, 홍국영 쪽 사람들과 연계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23]
1786년(정조 10년), 권신 홍국영에게 충성하던 훈련대장 구선복[24], 구이겸, 구명겸 등의 무장 일파가 문양해와 내통하여 상계군 이담을 옹립하려던 계획이 정순왕후에 의해 들통나기도 하는 등 정조 초반부는 거의 반란과 역모의 연속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노론 음모론과 무관하게 자기 할아버지 영조 때 역변을 일으킨건 소론 준소와 남인 탁남 세력이었는데 정조 시절에 역변을 일으킨게 대부분 벽파와 시파의 세력을 제외한 비주류 노론들[25]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야사를 신뢰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구선복 개인은 정조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자신의 새로운 울타리이자 정조와 최소한 교각의 역할을 해주던 홍국영의 축출은 구선복 등에게 상당한 압박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2.5. 은언군의 유배[편집]
한편 상계군 이담은 홍국영이 축출된 이후로 계속 안절부절못하다가 1786년(정조 10년)에 구씨 일가의 반란이 들키기 전에 죽었다. 이 때문에 그의 아버지 은언군 이인을 죽여야 한다는 청이 정조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은언군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사되기 직전까지 가는데 정조가 단식 끝에 유배로 타협한다. 이미 은전군이 죽었는데 또 동생을 죽일 수 없다는 논리에 제주도 유배로 타협을 했으나 다음날 아침 정조가 귀신같이 일찍 일어나 제주로 보내려던 것을 강화 교동도로 날치기해버린다. 이에 신하들이 항의하자 "제주나 강화나 똑같은 섬이다. 무슨 문제냐? 더이상 논하지 마라"고 강하게 찍어누른다.
이후 은언군은 강화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정조가 몰래 불러 만나고 왕대비 정순왕후와 신하들이 반대하는 등 정조가 살아있는 생전에는 목숨을 부지하나 결국 정조 사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정순왕후에 의해 사약을 먹고 죽는다.
은언군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사되기 직전까지 가는데 정조가 단식 끝에 유배로 타협한다. 이미 은전군이 죽었는데 또 동생을 죽일 수 없다는 논리에 제주도 유배로 타협을 했으나 다음날 아침 정조가 귀신같이 일찍 일어나 제주로 보내려던 것을 강화 교동도로 날치기해버린다. 이에 신하들이 항의하자 "제주나 강화나 똑같은 섬이다. 무슨 문제냐? 더이상 논하지 마라"고 강하게 찍어누른다.
이후 은언군은 강화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정조가 몰래 불러 만나고 왕대비 정순왕후와 신하들이 반대하는 등 정조가 살아있는 생전에는 목숨을 부지하나 결국 정조 사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정순왕후에 의해 사약을 먹고 죽는다.
2.6. 규장각과 초계문신제[편집]
초월적 군주를 자처하면서 홍문관의 기능을 분산한 학술 기관 규장각을 세우고 서얼 출신(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들을 등용하여 서학을 익히게 하고 신해통공을 실시하여 종로 앞거리에 육의전이 차지하는 물품을 제외한 나머지 물품을 취급하는 '사전'을 열 수 있게 하여 조선의 상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만천명월주인옹'(온 세상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라는 뜻의 정조의 호가 바로 이러한 초월적 군주를 지향한 정조의 정치 철학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규장각은 후에 너무도 비대한 권력 기구가 되어 홍문관을 비롯한 대간을 무력화시키고 기존의 성균관마저 유명무실화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문(文)'에는 규장각이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무(武)'에는 왕권 강화를 위하여 장용영(壯勇營)이라는 자신의 직속 친위부대를 만들었는데 이 역시 그 규모의 비대함으로 인해 규장각과 마찬가지의 문제로 정조사후 반대파에 의해 혁파된다.
다만 규장각은 정조의 문치(文治)를 상징하는 기구임에는 분명하고 정조시대는 조선의 그 어떤 다른왕보다 수많은 관찬기록이 생산되었다. 일례로 규장각만 봐도 업무기록물로서 《내각일력》이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호조에서는 《탁지지》 예조에서는 《춘관통고》 등 정조시대에는 기관별 문서작업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이외에 외교 문서집인 《동문휘고》를 편찬한 것도 업적으로 꼽힌다.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기록물인 각사등록에서도 정조년간부터 본격적으로 기록량이 많아진다.
정조 개인부터가 《일성록》을 쓰기 시작했고 《홍재전서》 라는 전세계 그 어떤 군주보다도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그야말로 기록문화의 꽃들이 만개했던 이같은 문예부흥을 두고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라 하는데 후대인 순조시대와도 대비되는 것에서 볼수 있듯이 정조 개인의 역량이 이시대의 기록유산 증가에 지대한 역할했다 할수 있겠다.
다만 규장각은 후에 너무도 비대한 권력 기구가 되어 홍문관을 비롯한 대간을 무력화시키고 기존의 성균관마저 유명무실화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문(文)'에는 규장각이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무(武)'에는 왕권 강화를 위하여 장용영(壯勇營)이라는 자신의 직속 친위부대를 만들었는데 이 역시 그 규모의 비대함으로 인해 규장각과 마찬가지의 문제로 정조사후 반대파에 의해 혁파된다.
다만 규장각은 정조의 문치(文治)를 상징하는 기구임에는 분명하고 정조시대는 조선의 그 어떤 다른왕보다 수많은 관찬기록이 생산되었다. 일례로 규장각만 봐도 업무기록물로서 《내각일력》이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호조에서는 《탁지지》 예조에서는 《춘관통고》 등 정조시대에는 기관별 문서작업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이외에 외교 문서집인 《동문휘고》를 편찬한 것도 업적으로 꼽힌다.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기록물인 각사등록에서도 정조년간부터 본격적으로 기록량이 많아진다.
정조 개인부터가 《일성록》을 쓰기 시작했고 《홍재전서》 라는 전세계 그 어떤 군주보다도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그야말로 기록문화의 꽃들이 만개했던 이같은 문예부흥을 두고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라 하는데 후대인 순조시대와도 대비되는 것에서 볼수 있듯이 정조 개인의 역량이 이시대의 기록유산 증가에 지대한 역할했다 할수 있겠다.
2.7. 탕평책 - 준론탕평[편집]
정조는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가 펼쳤던 탕평책을 역시 들고 나왔다. 하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영조의 탕평책과 전혀 달랐다.
정조가 즉위하던 시기는 척신들에 의한 정계 장악이 심화되었던 때였다. 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척족인 경주 김씨 세력과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척족인 풍산 홍씨 세력이 영조 말기에 권력을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는 이러한 점에서는 왕권의 추구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그리고 기존 영조의 탕평책이었던 쌍거호대식 완론탕평에서 준엄한 의리[26]를 중시하는 탕평인 준론 탕평을 펼치게 된다.
정조 재위 초반에는 준론 탕평에서 유리한 궁료 출신들이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홍국영과 서명선이다. 홍국영은 정조 즉위 이후 숙위대장과 도승지를 겸직하면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였고, 여러 정파들을 아우르면서 이른바 세도를 부렸다. 서명선은 소론 출신으로 정조의 대리청정을 적극 추천하면서 정조의 눈에 띄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인한을 실각시키는 상소를 올리며 역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홍국영 서명선 모두 정조가 꿈꾸던 탕평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홍국영은 세도를 부리고 왕위 후계에 욕심을 내다가 결국 실각당했고, 서명선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남인을 견제하는 바람에 도리어 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을 때 보호 세력이 없어서 결국 실각당했다.
이후 정조는 정계에서 소외당했었던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적극 등용하면서 정계의 중심으로 다시 등장한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조 스스로가 여러 당파를 등용하는 정책[27]인 쌍거호대를 다시 펼치면서 그동안의 파괴적인 정국 운영에서 벗어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즉 영조의 초기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면서도 기존에는 배제되던 소론 준론까지도 포함된 탕평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사와 관련해 이외의 제도적인 해결책으로서 정조는 붕당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조전랑의 추천권을 완전히 폐지하여[28] 탕평책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러 정파를 등용하면서 동시에 사도세자 추숭 문제로 그 세력이 다시금 두 진영 즉 벽파와 시파로 나뉘게 되었고, 이러한 당파 다툼이 그동안 벽파와 시파를 온건하게 규합해오던 김종수와 채제공이 죽은 이후에는 두 세력을 막을만한 기재가 없었고, 그런 가운데 정조의 업무가 격화가 되면서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는 그야말로 탕평 정치가 다 소용
정조가 즉위하던 시기는 척신들에 의한 정계 장악이 심화되었던 때였다. 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척족인 경주 김씨 세력과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척족인 풍산 홍씨 세력이 영조 말기에 권력을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는 이러한 점에서는 왕권의 추구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그리고 기존 영조의 탕평책이었던 쌍거호대식 완론탕평에서 준엄한 의리[26]를 중시하는 탕평인 준론 탕평을 펼치게 된다.
정조 재위 초반에는 준론 탕평에서 유리한 궁료 출신들이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홍국영과 서명선이다. 홍국영은 정조 즉위 이후 숙위대장과 도승지를 겸직하면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였고, 여러 정파들을 아우르면서 이른바 세도를 부렸다. 서명선은 소론 출신으로 정조의 대리청정을 적극 추천하면서 정조의 눈에 띄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인한을 실각시키는 상소를 올리며 역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홍국영 서명선 모두 정조가 꿈꾸던 탕평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홍국영은 세도를 부리고 왕위 후계에 욕심을 내다가 결국 실각당했고, 서명선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남인을 견제하는 바람에 도리어 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을 때 보호 세력이 없어서 결국 실각당했다.
이후 정조는 정계에서 소외당했었던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적극 등용하면서 정계의 중심으로 다시 등장한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조 스스로가 여러 당파를 등용하는 정책[27]인 쌍거호대를 다시 펼치면서 그동안의 파괴적인 정국 운영에서 벗어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즉 영조의 초기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면서도 기존에는 배제되던 소론 준론까지도 포함된 탕평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사와 관련해 이외의 제도적인 해결책으로서 정조는 붕당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조전랑의 추천권을 완전히 폐지하여[28] 탕평책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러 정파를 등용하면서 동시에 사도세자 추숭 문제로 그 세력이 다시금 두 진영 즉 벽파와 시파로 나뉘게 되었고, 이러한 당파 다툼이 그동안 벽파와 시파를 온건하게 규합해오던 김종수와 채제공이 죽은 이후에는 두 세력을 막을만한 기재가 없었고, 그런 가운데 정조의 업무가 격화가 되면서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는 그야말로 탕평 정치가 다 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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