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고려침입
몽골의 1, 2차 침입과 강화 천도
고려 희종 때 몽골 사막에서 일어난 칭기즈칸이 위력을 떨치면서 만주벌판의 판도가 변하여 그 영향이 고려에 미쳤다. 금나라 세력은 약해지고 금나라에 무릎을 꿇었던 거란족 가운데 야율유가가 옛 거란을 부흥시킨다며 융안에서 일어나 반기를 들었다. 그 후 야율유가는 칭기즈칸에게 투항해 버렸다.
금나라의 세력이 꺾이고 대요수국과 동진국이 새로 생기자 고려의 정세는 숨가쁘게 돌아갔다. 이들의 침입을 막으려고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몽골은 거란의 잔당을 친다는 명분으로 고려에 들어왔다. 고려는 몽골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고려 고종 6년 몽골이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해 나가자 그 힘에 밀려 거란 사람들이 고려 영토 안으로 쫓겨 들어왔다. 그러자 몽골군은 거란의 잔당을 친다는 명분으로 고려에 들어왔다. 고려도 거란인을 쫓아내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고려군과 몽골군이 힘을 합쳐 거란 사람들이 몰려든 강동성(江東城)을 함락시켰다. 이때 몽골의 요청으로 형제 맹약이 맺어졌다.
그 후부터 몽골의 사신이 고려를 왕래했다. 그때마다 몽골은 일방적으로 많은 공물을 거두어 갔고 고려는 점차 불만이 쌓여갔다. 고종 12년, 몽골의 사신이 돌아가다가 압록강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빚어졌다. 이를 꼬투리 삼아 몽골은 고려와의 외교관계를 끊어 버렸다. 고려는 이때부터 몽골의 침입을 예상했다.
당시 고려는 최충헌이 죽고 그의 아들 우(瑀, 최이)가 집권하던 때였다. 최충헌은 손청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들 우와 향(珦)을 얻었다. 다시 혼홍윤의 처 임씨를 강제로 빼앗아 아들 성(城)을 낳았다. 그 후 다시 강종의 딸을 얻어 아들 구(球)와 선사(禪師)를 낳았다.
이와 같이 배다른 형제들이 많은 최충헌의 아들들은 골육상쟁의 기미마저 보였다. 상장군 지윤심·유송절 등이 맏아들 우를 제쳐놓고 향을 받들려고 했다. 최우는 선수를 쳐서 지유심·유송절을 처단해 버렸다. 이로써 최우의 집권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최우는 몽골의 침입에 대비책이 없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몽골의 칭기즈칸은 서역 정벌을 마치고 서하 지역을 정복하려다가 죽고, 그의 아들 태종이 즉위하여 금나라를 정복했다. 그리고 살리타이에게 군대를 주어 고려를 침입토록 했다. 살리타이군은 함신진을 포위했다.
“우리는 몽골군이다. 목숨이 아깝거든 성을 열고 항복하라!”
살리타이의 졸개들이 외쳤다. 이에 놀란 성안의 장군 조숙창(趙淑昌)은 살길을 찾아 나섰다. 그는 재빨리 항복하고 나서 그것도 모자라 이따위 소리를 했다.
“나는 옛날 조원수 충의 아들이오. 일찍이 귀국의 합진 원수와 저희 선친은 형제를 맺은 사이요.”
이러고는 성 안의 군사들에게 항복을 권했다.
“진짜 몽골군이다. 항복하라!”
몽골군은 피 한 방울 보지 않고 함신진을 함락한 후 철주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고려 낭장 문대(文大)를 잡아 성 안에 들어가 이렇게 외치라고 했다.
“진짜 몽골군이 왔다. 나가서 항복하자!”
그러나 문대는 엉뚱하게 외쳤다.
“가짜 몽골군이다. 맘 놓고 싸우자!”
그는 곧 몽골군에게 피살되었고, 판관 이희적은 끝까지 싸우다가 역부족을 느끼고 보급 창고에 불을 지른 후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홍복원은 성문을 열고 살리타이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그리고 살리타이의 앞잡이가 되어 화살을 고려군에게 쏘았다.
몽골군은 철주를 점령하고 귀주성(龜州城)을 에워쌌다. 귀주성 안에 김경손·김중온·박서 등과 정주·삭주·위주·태주 등의 수령들이 모여 항전을 전개했다.
남문을 지키고 있던 김경손이 수하군사와 별초군에게 말했다.
“너희들 가운데 죽어도 후퇴하지 않을 자만 나를 따르라!”
겨우 수하군사 12명만이 따랐다. 김경손은 12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섰다. 이것을 보고 몽골의 선봉장이 검은 기를 앞세우고 진격해 왔다. 김경손은 강궁을 날렸다. 몽골의 기수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12명의 결사대는 용기백배하여 적진으로 달려갔다.
12명의 결사대는 몽골군을 뒤로 물러나게 한 후 잽싸게 성 안으로 들어왔다. 김경손은 적의 화살에 어깨를 맞았으나 초전을 승리로 장식했고, 성 안에서 싸움을 독려했다.
다음날부터 몽골군은 더욱 극성이었다. 귀주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이었다. 몽골군은 귀주 성주에게 항복을 재촉했다. 살리타이는 항복을 권유하려 위주 부사 박문창을 보냈다.
“항복만이 살 길입니다. 어서 결정을 내리십시오.”
박서가 이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고함을 쳤다.
“이놈아,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천하에 미물만도 못한 놈!”
박서는 박문창의 목을 베어 성 밖으로 던져 버렸다. 고려군이 완강하게 버티자 몽골군 3백여 명이 북문을 공격했다. 몽골군은 큰 차에 나무를 쌓고 그 속에 숨어서 성문 앞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김경손은 이 사실을 알고 쇠를 녹인 철물을 쏟아 부었다. 몽골군은 견딜 수 없어 달아나 버렸다.
몽골군은 고려군의 화살을 막으려고 누차와 커다란 상자를 만들어서 그 속에 숨어 성문 밖에까지 다가와서 성 밑에 땅을 파고 성 안으로 들어왔다. 적군이 거의 성 안으로 들어왔을 때 고려군은 성 밑 땅의 움직임을 알고 구멍을 내어 끓는 철물을 부었다. 그러는 한편 성 위에서 횃불을 마구 던져 적의 누차를 불태워 버렸다.
이번에는 남문으로 적이 대포를 쏘며 들이닥쳤다. 고려군도 큰 포차를 성 위에 내걸고 돌을 넣고 쏘아 적의 전차를 부쉈다.
어느 날 김경손 앞에 적의 대포알이 떨어졌다.
“장군님! 피하십시오. 대포알입니다.”
김경손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다행히 대포알은 터지지 않았다.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셨습니까?”
“내가 대포알이 무서워 피한다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다.”
참모들은 목숨을 걸고 김경손을 따르기로 했다.
몽골군은 달포 동안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귀주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귀주성은 철옹성이었다. 몽골군은 어쩔 수 없이 귀주성을 포기하고 다른 성으로 떠나 버렸다.
다른 성들은 얼마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개경 가까이 쳐들어 왔다. 몽골 사신이 고려 조정에 들어와 위협했다.
“고려가 우리의 말을 거역하면 망할 것이오. 즉시 투항하시오.”
최우는 살리타이의 사신을 우대하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몽골은 사신을 계속 보내어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고려는 살리타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강화를 청하며 흥정을 하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살리타이는 남쪽으로 내려가 각지에 다루가치(단사관) 72명을 두고 고려 땅을 다스렸다. 개경 부근만 남기고 몽골 군대가 장악한 곳은 모두 이 다루가치가 통치했다. 고려는 대가를 치르고 몽골과 겨우 강화를 맺었다. 몽골군은 전리품을 챙긴 후 고려에서 철수했다. 이것이 제1차 몽골의 침입이다.
이후에도 몽골은 사신을 보내어 고려의 조정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사신이 고려 궁중에 머물며 큰소리를 쳤다.
“나는 고려의 국사를 보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강화의 조건 외에 많은 공물을 요구하며 괴롭혔다. 게다가 또다시 몽골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고려 조정은 집권자 최우를 중심으로 중신들이 모여 대비책을 강구했다.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할 것을 제의했다. 이 제의에 모두 두려워서 이의를 제기하는 신하가 없었으나 참지정사 유승단(兪升旦)만이 천도의 불가를 말했다.
“만약 강화도로 천도한다면 육지의 장정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희생당할 것이오. 그리고 노약자는 모두 몽골의 포로가 될 것이오.”
이때 야별초의 지휘관 김세충이 승단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러자 최우는 김세충을 충의에 따르지 않는 방해자라고 하여 곧 처단해 버렸다. 그 누구도 이제는 천도를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3백여 년이나 도읍으로 정하고 있던 수도 개경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강화도로 옮긴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는 고종에게 건의하여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지만 국왕 고종은 강화도로 가는 것을 반대하며 궁궐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우는 녹전차 백여 대를 동원하여 자기 집 재산을 모두 강화도로 운반시켰다. 궁궐의 모든 기관들도 강제로 강화도로 옮기게 했다. 당시 최우는 강화로 떠나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동시에 군사를 동원하여 강화도에 새 궁궐을 짓게 했다. 결국 그해 6월 장마철임에도 불구하고 고종과 백관들은 강압에 못 이겨 강화도의 새 궁궐로 모두 옮겨갔다.
고려의 도읍이 강화도로 옮겨갔다는 소리를 들은 몽골은 다시금 대병력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였다. 하지만 수전에 미숙한 몽골군은 강화도에 쳐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다만 섬으로 도읍을 옮긴 것을 힐난하면서 국왕이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했다. 몽골의 요구가 위협일 뿐이라고 판단한 강화 조정은 이를 과감히 묵살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왕이나 최우가 강화도 방어에만 힘을 쏟고 있을 무렵, 전국의 백성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백성들은 단지 산성이나 섬으로 피신할 것을 명령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몽골의 침입 기간 중 백성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우는 울릉도가 안전하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백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풍랑으로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울릉도 이민을 중지시켜 버렸다.
당시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은 마치 고려 전역을 마구 유린하는 것이 목적인 듯했다. 백성들의 도륙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재 소실도 극심하였다. 몽골의 2차 침입 때에 부인사의 대장경 조판이 소실되고, 3차 침입 때에는 황룡사 탑도 소실되었다.
이 사이 강화도에서는 앞서 거란이 침입했을 때에 부처의 신통력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하여 이번에도 그 신통력을 빌리려 했다. 때문에 각종 도량을 베푸는 한편, 1236년경에 와서는 대장경판의 재조(再雕)를 계획하여 각판을 서둘렀다. 이것이 해인사에 보관되어 전하는 유명한 《팔만대장경》인데 완성된 것은 고종 38년(1251) 9월의 일이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강화도로 옮겨간 최우는 잠시 병란이 진정되자 호화로운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틈만 나면 호화찬란한 연등을 둘러치고 밤새도록 주연을 베푸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이때 동원된 악공들만도 1천 명이 넘었다. 강화도는 이들의 노랫소리와 악기소리로 천지가 진동할 정도였다.
강화 천도를 하고 난 이듬해 최우는 왕을 모시고 잔치를 벌였다. 잔칫상이 얼마나 호화로웠던지 “다시 오늘과 같이 할 수 있을 것인가.”라며 흡족해 했다. 이렇듯 풍류를 좋아한 최우는 주량 또한 굉장했다. 3품 이상의 고위관원들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한밤중까지 술을 먹곤 했다.
강화도로 천도한 최우와 개경 귀족들이 호사를 누리는 동안 백성들은 이들이 기거할 궁궐을 짓는데 수없이 동원되고 있었다. 당시 강화도에 지어진 궁궐은 그 규모나 배치가 개경 궁궐을 거의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최이는 강화도에 궁궐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도 지었다. 그는 자신의 집 정원을 꾸미기 위해 군사들을 시켜 개경의 나무들을 공수해 오게 했다. 결국 수많은 군사들이 이것을 운반하다 바다에 수장되었다.

강화 천도 후 궁궐을 세웠으나 몽골과 화친이 성립된 후 삼별초 잔당을 소탕한다며 궁궐을 불태웠다. 조선 시대 병인양요때 이궁까지 전소되었다. 현재에는 복원된 일부 건물이 세워져 있다.
'한국사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순신 장군/넬슨제독/나폴레옹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침략을 물리치고 전장에서 전사한 모습은 유사하다. (0) | 2023.08.08 |
---|---|
광해군/강홍립 장군 (0) | 2023.07.21 |
조선의 몰락/정조의 독살 (0) | 2022.12.26 |
인조 반정 (0) | 2022.12.07 |
대몽 항쟁의 기수/김취려 장군 (0) | 2022.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