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유명 글 모음

헤를렝 강/몽골 시

박송 입니다. 2012. 1. 10. 19:14

헤를렝 강

 

폰츠깅 밧다르츠

 

  

햇빛 아래 출렁이는 은빛 물결진 강이여

잔치 때 부르는 수많은 코러스여

선조들이 내게 들려준 이름난 전설이여

눈처럼 흰 갈매기들 잔잔히 노니는 강이여

가을날엔 검은 빛 되어 출렁이고, 어허

봄날엔 녹아내려 눈물 흘리누나, 어허

구름 한 점 없는 은색 달빛 아래로

반짝이는 태양의 섬광 내리비쳐

갈퀴 잘 다듬어진 준마의 걸음걸이로

내리친 말채찍처럼 굽이굽이, 잔잔히 흘러가느냐

비옥한 여름 석 달의 밤

사나운 등에 힘이 빠진 여섯 채의 뗏목이

물굽이에 끌어당겨져 소리 내며 멈출 때

누가 물가에 새빨간 군불을 지피느냐

헤를렝 강이여 너는 -

선대를 이어 새로 꾸민 가정의

김 오르는 붉은 차 한 잔에 스며 있도다

시집 온 젊은 아낙이 담근

뜨거운 술항아리 속에 담겨 있도다

헤를렝 강이여 -

고개 숙이며 흔들어대는 누런 곡식의

기름진 뿌리를 적시는 토양에 스며 있도다

나와 함께 자라온, 탁탁 소리 내며 걷는 우리 집 말의 기운 속에 녹아 있도다

쇠장식 달린 재갈을 씌운 말 기운 속에 배어 있도다

헤를렝 강이여 -

물가에서 태어나 첫 울음 크게 울며

땅을 딛고 일어선 후손의

뜨거운 몸에 맥박이 뛰며 흐르는

사랑스럽고 귀한 핏방울마다 스며 있도다

(1960)

 

 

 

비니 09.12.30. 22:20

고풍스런 몽골 시 한 편 올립니다. 헤를렝 강은 몽골을 형성하는 3대 강의 하나이죠. 이 시는 몽골시의 한 전통인 '찬양시'인데, 헤를렝 강을 찬양하면서 사회주의 시절 금기시되었던 징기스칸에 대한 자부심을 슬쩍 숨겨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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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정미경 09.12.31. 10:25

굽이 굽이 흘러가는 강물의 뜨거운 맥박이 느껴집니다. 좋은시 감사드려요 비니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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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니 09.12.31. 12:45

고마워요. 정미경 선생님도 새해 복 많이 받고, 좋은 시 많이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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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 09.12.31. 21:51

비니님에게서는 무언가 몽고적인 신비스런 풍모가 느껴지시지요 언젠가 몽고에서 유하던 일이 있었다고 하셨죠 그런 몽환적인 분위기가 시에서 풍기는 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제 시는 그런 분위기가 없는 것 같아서 비니님이 부럽기도 하답니다 앞으로는 비니님을 위시해서 좋은 분들의 시풍을 배우도록 힘쓰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몽고는 제가 가장 가고 싶은 곳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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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니 10.01.03. 22:13

단비 선생님, 꼭 몽골 한번 가보세요. 3시간밖에 안 걸려요. 여행사 통해서 가시면 쉽게 갈 수 있어요. 그리고 참고로, '몽고'가 아니라 '몽골'이라고 해야 돼요. '몽고'는 옛날 중국사람들이 몽골인들을 얕잡아 표현하기 위해 "옛 고'를 써서 '몽고'라고 했대요. 요즘은 전부 '몽골'이라고 하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소등(消燈)

 

 

고 은

 

 

사별했다. 애도조차도 무례하다.

나는 무덤 같은 서울을 떠난다.

길이 단호하다. 인파 저자를 지나고

앰프 마을들도 지나고

시골만이 구원이다.

축하하는 듯한 삼밭 고개 넘어

길은 나루터에서 그쳤다가 저 건너 나루터에서 이어진다.

마침내 길은 들에서 하얗게 타오르는 연기가 되고 만다.

 

저 역경과 같은 들을 지나서 길은 끝날 것인가.

그리고 일생으로 찾았던

한마디의 삶의 인사말이 있겠는가.

그렇다. 사람이 길을 물었을 때

무엇이라고 내가 대답할 것인가.

이것뿐이다. 내 이름을 일러주고

한 이파리 주운 은화에 햇빛이 비칠 때 그 은화가 새끼지빠귀처럼 운다.

 

길은 나루터에서 그쳤다가 나루터에서 이어진다

 

누구의 말이라도 말 속에는

일생의 파도소리가 들어 있다.

이윽고 어린 등불이 꺼진다.

산화(散華)는 꽃만이 아니라 일체의 청춘으로 이룩된다.

내 목이 마르고

길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다.

아아 추위조차 마을마다 다르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다.

 

벌써 가을이다. 늙은 농부는 개토(改土)할 흙을 미리 다지고

빼빼마른 석수장이는 돌을 깬다.

끝내 죽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가을이다. 내 가을이 아니다.

죽어서 없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의 역설이다.

새벽부터 외치는 앰프의 마을이 앰프 소리 끝난 마을로 남아 있을 때

내 고독은 고독으로부터 사별한다.

깊은 어둠이 낳은 또 하나의 어둠이

내 다시 시작한 도보를 받아들인다. 죽은 사람이 나의 삶을 상속한다.

 

 

고은, <오십년의 사춘기> (문학동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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