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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
荒山大捷 황산전투(荒山戰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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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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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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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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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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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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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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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명 ~ 2만 명(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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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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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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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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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지휘관 전사
생존자 약 70 명 |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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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연합 세력의 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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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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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대(對) 왜구 전쟁에 전환점 마련.
이성계의 정치적 입지 상승. |
1. 개요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공(公)이여! 공(公)이여!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9월 이성계가 사령관으로 있던 고려군이 현 전라북도 남원인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기세가 절정에 오른 왜구 무리와 싸워 압도적인 대승을 거둔 전투. 순서상으로 보면 진포해전(鎭浦海戰)과 사근내역(沙近乃驛) 전투에 이어서 연달아 벌어진 1380년의 대 왜구 전쟁의 종결판이다. 이 전투들은 별개의 전투이면서도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진포해전으로 시작해 황산대첩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이 한 항목에서 합쳐서 서술한다.
1380년의 전쟁은 고려 말기를 장식했던 왜구와의 치열한 사투에서 가장 극적인 반격이었는데, 황산 전투의 왜구들은 진포해전에 상륙했던 500여 척의 역대 최대 규모 함대 외에도 고려의 내륙에 흩어져 있던 왜구들이 집결한 연합 세력이었다. 이때의 왜구들은 해안가나 노략질하던 과거 해적 세력과는 다르게, 대규모로 내륙까지 침략하여 최영을 유인하여 수도를 빈집털이하는 국가 규모의 전략 기동, 고려의 행정 시스템을 파악하거나, 기병까지 동원하는 훈련받은 정규군에 가까운 특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이전 우왕 3년(1377년) 왜구는 개경의 방어를 담당한 고려 수군을 전멸시켜 서부 경기 지역을 석권하기도 하였다. 우왕 4년(1378년)에는 개경의 길목인 승천부(昇天府)에 왜구가 상륙하여,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겠다고 하여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이때도 최영과 이성계가 막아내어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이렇듯 고려 말의 왜구는 단순한 해적 이상의 군벌집단이었으며 고려라는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했으니, 고려는 실질적으로 국가적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렇게 총 집결한 왜구들은, 마찬가지로 정예군을 집중하여 조직적인 반격에 나선 고려군에게 궤멸되면서 급격하게 몰락했다. 작게는 침입 대상이 한반도의 서부 지역에서 동부 지역으로 전환되는 추세를 보였으며, 침입의 규모나 횟수도 현저하게 감소되기에 이르렀다.[4]
황산대첩은 바로 그 고려군의 반격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아시아의 막장 시대에서 한반도 주변이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는 시기에 벌어진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잔존한 왜구들은 1383년 5월 정지(鄭地)가 이끈 관음포 해전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이후, 창왕 때 박위의 대마도 원정으로 이어진다. 또한 그간의 숱한 전투에서 이미 몇 차례나 나라를 구했던 명장 이성계는 황산대첩을 기점으로 완전한 국가적 전쟁영웅이 되어 조정에서 막대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투이며, 이성계 개인의 입장에서도 큰 전환점이 되는 일생일대의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2.1. 세기 말의 동아시아와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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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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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시간이 흘러 세계 전역에 번진 몽골의 불꽃이 차츰 약화되기 시작했을 즈음, 고려에는 공민왕이라는 영걸이 등장했다. 공민왕은 고려의 부흥을 꿈꾸며 여러 조치를 취했고, 제1차 요동정벌을 시도하여 약 445년만에 요동성에 진출해 보이기도 했다.
당시의 동아시아는 몽골 제국 체제가 붕괴하며 중국과 한반도, 일본 등이 모두 가히 세기말적 현상을 보이던 난세였다. 우선 중국은 초원로를 따라 흑사병이 퍼진데다 멜서스 트랩에 빠져버렸다. 여기에 원나라의 가혹한 지배가 이어지자 홍건적(紅巾賊)을 비롯한 반란군이 천지를 가득 채울 정도로 들끓었으며, 결과적으로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은 고려에까지 번져서 수많은 홍건적의 대군에게 수도가 함락당하는 초유의 사건도 전개되었다. 또한, 원나라 군벌들이나 기황후 일파의 사주를 받은 병력이 고려 국경을 수시로 넘어오는 사건까지 빈번했다.
이렇듯 고려는 북방으로부터의 압력도 버티기 어려웠는데, 마침 일본에서도 남북조시대가 전개되면서 생긴 혼란으로 인하여 무수한 도적세력들이 발생하였고, 이들은 왜구로서 고려의 해안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왜구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있다. 왜구의 갑작스런 증가에 대한 의견들로는 일본 남북조 시대가 전개되면서 전란이 지속되는 통에 민간의 생활이 피폐해진 데다가 중앙 권력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어서 먹고 살기 힘든 왜구들이 침략했다는 주장이 있고, 또는 왜구가 대규모로 침략을 시작한 시기가 일본 남조와 북조의 대결이 극심했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왜구를 군량미와 전비 마련을 위한 정규군 활동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경우 왜구는 자발적인 해적이 아니라 국가나 다이묘들의 비호와 지원 아래 마치 정규군이나 사병처럼 활동한 용병으로도 본다.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2차례에 걸쳐서 정벌한 바 있는 규슈 지역이 한반도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해양 진출이 용이해서 고려와 중국을 노략질한 왜구는 규슈 출신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규슈 지역은 일본 남북조 시대에 남조에 충성하던 지역으로 전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앞장섰을 수 있다. 실제 왜구들은 규슈 지역에 위치한 히라도번의 다이묘 마쓰라 가문, 사쓰마번의 다이묘 시마즈 가문의 비호를 받으며 사병처럼 활동하기도 했다. 그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에서도 악명을 떨쳤으니 바로 원균이 박살났던 칠천량 해전이 시마즈 가문의 시마즈 요시히로가 나섰던 전투이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신이 함대를 지휘한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박살났다. 시마즈 가문은 현재 오키나와에 있던 류큐 왕국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왜구들의 배후였던 시마즈 가문이 지배하던 사쓰마번은 일본 해군의 기원이기도 하다. 규슈 지역의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는데, 조슈번은 일본 육군의 기원이 되었고, 사쓰마번은 일본 해군의 기원이 되었다. 그래서 제국주의 일본에서 건조된 최초의 전함 함명이 '사쓰마'이다.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다고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도 사쓰마번 출신으로 시마즈 가문의 측근이였다. 알고 보면 왜구와 한반도와의 악연은 길고 긴 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도 세력들은 자신들이 남조를 계승한다고 믿었다. 일본 남북조 시대에 결국 북조가 승리했고, 수백 년이 흘러 메이지 천왕도 혈통적으로 북조를 계승했지만 메이지 천왕이 남조 초대 천왕이던 고다이고 천왕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편 이에 맞서야 할 고려에서는 권문세족들이 계속 권력을 독점하면서 폐해가 누적되어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일어났다. 국방이 허술해졌으며 중국도 원 제국이 분해되는 내란을 겪고 있었다. 왜구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당시의 왜구들은 전기왜구(前期倭寇)로 불린다.[5]
2.2. 이성계의 종횡무진 활약
<경인년 이후의 왜구>와 마쓰우라토(松浦黨) 中 ─ 이영 |
왜구의 준동이 절정으로 치닿기 시작한 1370년대 후반부의 왜구가 침공해온 횟수, 공격한 지역, 그리고 쳐들어온 집단의 숫자인데, 가히 동네 옆집에 놀러오듯 틈만 나면 들이닥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1377년은 심각했다. 고려는 그 전해인 1376년 최영이 홍산대첩(鴻山大捷)에서 왜구를 대파했지만 왜구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6] 오히려 이 해는 고려로서도 굉장한 군사적 위기 상황이었다.
경상도 원수 우인열이 보고하길, "왜적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와, 돛대와 돛대가 서로 이어질 지경이며, 이미 군사를 나누어 요해처를 지키게 했으나 적의 형세가 장대하고 방어할 곳이 많아 한 도의 군사로서는 역부족입니다. 조전 원수를 보내주십시오."
- 고려사절요 1377년 3월
바다를 뒤덮는 왜구로 시작된 이 3월의 공격은 경상남도 전 지역을 유린하며 공포를 안겨 주었으며, 심지어 울산에서 지리산 아래까지 진군하였다. 이 싸움은 북방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후 6년만에 현장 지휘관으로 복귀한 이성계가 이틀치 진격로를 하루에 돌파하며 부하들의 만류도 무시하고 다짜고짜 탱크처럼 밀어 붙여서 왜구들을 멘붕 시키는 무지막지한 공격으로 간신히 격파할 수 있었다.[7]
그러나 이성계의 활약만이 전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경상도가 이렇게 털리는 와중에, 이미 강화도 부근에서는 또다른 왜구와 고려 관군이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양광도에서도 같은 시기 내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난장판을 좀 더 와닿게 표현하자면,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가뜩이나 북쪽에서도 세기말적인 혼란 때문에 홍건적 등의 침략군이 많은 상황에서, 고려 입장에서는 도대체 어디를 막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진퇴양난이 펼쳐진 것이다. 당시 고려가 마주한 전황을 간추려서 말하자면, (규모가 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한 해에 동시에 펼쳐지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도 이성계는 고려 각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자신의 입지를 계속해서 키워 나갔다.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를 단번에 격파한 이성계는 고려 영토의 정반대 방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대활약을 했는데, 임견미(林堅味) 등이 달아나는 와중에도 화공으로 적을 물리쳤다.
무엇보다 최고의 활약은 승천부(昇天府)에 몰려든 왜구들이 대놓고 개경을 공격하려 할 때였다. 고려의 수도가 해적떼에 함락될 지경이었을 때, 심지어 조정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피난할 준비까지 끝낸 상태였다. 이 싸움에서는 최영과 이성계가 활약하여 승리했는데, 특히 이성계는 전황이 불리할 때마다 자신의 정예 기병을 동원하여 왜구를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이 시점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이미 나라를 구했다.
2.3. 파탄이 나버린 고려의 재정
반면에 고려의 내정은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구조적인 문제와 부정부패가 겹치면서 총체적 난국이라 할 만했던 상황. 예를 들어 양백연(楊伯淵) 같은 인물은 오히려 왜구보다 더 악랄해서 백성들은 "차라리 왜적을 만나는 게 낫다."고 할 정도로 극심한 수탈을 행했다. 말하자면 왜구는 강한 도둑이고, 부패한 고려의 관리들은 약한 도둑이였다. 물론 부패한 관리 개인의 탓도 크지만 아래 단락에 후술되어 있듯이 당시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토지 문제는 당시 고려 재정에서 가장 긴급한 현안이였으나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토지의 분배와 세금은 곧 백성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데, 소수의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장악하고, 이들의 토지가 이어져 산천을 경계로 표시하였으니, 왕조는 유지되고 있었으나 왕권은 매우 불안정하여 몇 차례 개혁은 모두 실패하였다. 걸출한 군주로 평가받는 공민왕의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은 훌륭했으나 그가 정치 전면에서 퇴장함으로써 개혁도 실패하였다. 그래서 공민왕의 죽음을 고려 왕조의 실질적인 종말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독점한 관계로 국가는 급료를 제대로 지급할 수 없기 때문에 정상적인 관료제를 운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재산 증식을 도모하지 않는한, 고관들도 경제적 곤란을 피할 길이 없었다. 조준의 지적에 따르면 360석을 받을 재상이 고작 20석밖에 받지 못했다. 고관들이 그런 상황인데 일반 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조준은 "병사와 밭(田)이 함께 망했다"고 했다. 즉 병사들에게 급료를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기아 상태에 직면했으며, 국가는 공적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나라 사정도 말이 아니었다. 1380년 해도도통사를 겸임하게 된 최영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많은데 이 직함까지 역임하긴 힘들 것 같다. 그리고 수군을 꾸리려고 해도 지금 전함이 딱 백여 척에 수병도 불과 3천 명밖에 안 되는데, 제대로 싸우려면 1만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창고가 비었잖아, 우린 글렀다." 라는 식으로 말했다. 이에 대한 우왕의 답변은 가히 가관인데, "돈이 없어서 1만 명을 꾸릴 수 없다. 3천 명의 병사가 한 명이 백 명씩 대적하라." 는 무개념 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국정이 무너지고, 조정이 국고에만 신경 쓰는 상황에서는 왜적과 싸우는 장수들도 힘들 수밖에 없었다. 왜적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정지가 순천(順天)ㆍ조양(兆陽) 등지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결국 패배하자, 최영은 경복흥(慶復興), 우인열, 황상(黃裳) , 이인임(李仁任) 등을 만나 "정지 한 사람이 아무리 용맹해도 주변에서 도와주질 않는데 어쩌겠냐? 왜적이 이 지경인데 재상들이란 작자들은 뭐하는 짓이냐?" 고 일갈하기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원 제국 간섭으로 국력이 쇠한 데다, 수도까지 함락됐던 홍건적의 침입, 뿌리 깊은 권문세족의 권력 독점과 나라 전체의 토지 및 토지를 미끼로 한 인력 겸병의 후폭풍이 더해지면서 제대로 망국 테크를 밟고 있었으니, 당시 장수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왜구 소탕에 난국을 겪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피해 상황. |
왜구는 수만에 달했던 홍건적, 원의 잔당에 못지 않게 고려의 행정을 위협하는 군대였다. 물론 절대적인 군세로만 보면 원(몽골)이나 홍건적이 더욱 강성했지만, 왜구들은 양민 학살이나 약탈에 대한 집착이 더 심했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가 컸던 면이 있다. 특히 왜구들은 식량은 물론이고, 백성들을 잡아가는 것도 목표로 했다. 왜구들은 주로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잡아 목에 밧줄을 얽어서 끌고 갔다. 노예로 삼아 매매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지옥 같은 시간이 이어지는 도중, 드디어 반격의 전기가 마련되기 시작한다.
3. 진포해전
그러나 정박해 있던 500여 척의 대함대를 격침시켰음에도 약탈을 위해 육지로 상륙한 왜구가 남아 있었다. 오히려 퇴로가 차단된 왜구들은 육지에 있던 왜구들과 합세해 내륙 깊숙이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살인, 약탈을 일삼았다. 진포해전 승리의 달콤함도 잠시, 고려 백성들의 악몽이 다시금 시작되고 있었다. 왜구는 옥주(沃州)[9]와 영동, 금산, 선산, 상주로, 상주에서 성주를 거쳐 함양까지 지속적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4. 사근내역 전투
이렇게 한반도 깊숙이 들어선 왜구들은 이미 상륙해 있던 여타 왜구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그 규모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상황으로 보면 여기저기서 고려를 약탈하고 있던 병력들이 합세하여 상당한 규모였다. 이 병력은 충청북도의 이산(利山)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어모(禦侮)를 거쳐 경상북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대 최대의 진군로에 있던 여타 고을들은 모조리 학살당했다. 중모(中牟)ㆍ화령(化寧)ㆍ공성(功城)ㆍ청리(靑利) 등을 불바다로 만든 왜구는 경상북도의 상주에 이르렀다.
당시 상주는 경상도 지역의 중심지로서, 상주목 지역에는 상주목, 안동부, 경산부 등 3개의 주현과 53개의 속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비교적 규모가 있던 상주 역시 왜구의 잔혹한 칼날에 처참하게 유린되었는데, 상주에 들어선 왜구들은 장장 6일간 머물며 상주를 잔혹하게 도륙하고 불태웠으며,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면서 완전히 제 세상처럼 활보하였다.
이때, 전라도 원수 지용기(池湧奇)의 휘하에 있던 배검(裵儉)이라는 인물은 이 기세등등한 왜구를 직접 정탐하겠다는 요청을 했고, 고려군의 원수들은 이를 승낙하여 배검은 왜구가 분탕질을 치고 있는 상주로 찾아가는 짓을 했다. 배검을 본 왜구들은 즉시 그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배검은 "천하에 사신을 죽이는 일이 어디에 있느냐!"며 되려 성화를 내었고 "우리 군의 장수들이 네놈들을 날려버리려고 하고 있다. 근데 우리가 너희들 죽인다고 뭐가 남냐?"는 발언을 했다. 여기에 대해 왜구들은 "너희가 우릴 살려주려고 하면 왜 진포에서 우리를 공격했냐." 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12] 여하간 배검은 왜구들에게 술 한잔 받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왜구들은 가히 천인공노할 일을 벌이고 있었다. 겨우 나이가 3살, 4살인 어린 여자아이를 하나 잡아오더니, 씻긴 이후에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씻고 생쌀을 넣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기괴한 만행을 부린 것이다. 아무리 전장이라지만 왜구가 도덕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 무너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참 그 짓을 한 왜구들은 일이 끝나자 아이의 시체를 불태우고는, 점괘가 불리하게 나오자 "여기에 있으면 패하겠다." 싶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13]
이때 남하한 왜구들은 선주(善州)[14]와 현재의 성주군(星州)인 경산부(京山府)를 침공했다. 이렇게 경상북도 역시 철저하게 유린한 왜구는 이제 경상남도까지 이동하여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인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였다.
고려말 왜구 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 전투와 황산 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 |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며 제 맘대로 활보하고 있는 왜구를 계속해서 두고만 볼 순 없었다. 사근내역 전투 당시 고려군은 9명의 원수가 결집했는데, 배극렴은 주로 경남 지역에서 왜구를 막고 있었고 김용휘, 정지, 오언, 도흥은 몇 달 전인 1380년 5월부터 전라도 광주, 화순 등에서 움직이며 왜구를 상대하고 있었다. 또한 지용기는 몇 달 전에 전라도의 정읍, 명량에서 왜구를 물리친 참이었다. 배언은 명나라에 갔다가 6월 경에 귀국한 후 급히 투입되었다. 즉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던 고려군의 주요 사령관들이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힘을 합쳤던 것이다.
당시 사근내역에 모인 이 고려군의 숫자는 어느 정도나 되었을까? 대체로 원수 1명 당 최소 1,000여 명 정도를 지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15], 그렇게 된다면 사근내역 전투에 참여한 고려군은 9,000명에서 1만을 넘는 상당한 대군이 된다. 왜구가 좀 더 잠잠해진 후에 고려가 전력을 기울여 탈탈 털어내서 시도한 제2차 요동정벌 당시 총병력이 5만이고 그중에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이 3만 남짓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대군이다. 물론 그 이전까지 이들은 자신의 담당 지역에서 왜구와 치열하게 교전 중이었기 때문에 전 병력을 데려오진 않았을 수 있다. 어찌되었건 9명의 원수라는 이름값을 고려하면 적어도 5,000명 정도는 모였을 개연성이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사근내역에 주둔한 왜구와 고려군은 격전을 벌였는데 그 결과 고려군은 박수경과 배언, 두 명의 원수가 참살당하고, 500여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도륙되는 엄청난 참패를 겪었다. 5,000여명 중에서 단순히 십분지 일의 병력이 없어졌다고만 해도 적지 않은 타격인데, 근대 이전의 전투에서 보통 대패했다고 하여 살상율이 아주 높지는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한 참패였을 것이다.[16]
여기에 모인 정지 등의 원수들이 원균 같은 졸장도 아니고, 치열하게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노련한 장수들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의 왜구가 가진 기세는 어마어마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자신들을 가로막는 관군도 사라지자 왜구는 마음 놓고 함양을 초토화했다. 옥주에서부터 함양에 이르기까지 그 근방을 불태워버린 왜구에 대하여 당시의 사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왜적이 진포에서 패한 뒤로 군ㆍ현을 쳐서 함락시켰으며, 살육과 약탈을 멋대로 하여 왜적의 기세는 더욱 치성해졌다.
3도(道) 연해의 땅은 쓸쓸하게 텅 비어 버렸다. 왜란이 있던 이후로, 여지껏 이와 같이 참혹한 일은 또 없었다.
- 고려사절요 1380년
5. 황산대첩
5.1. 이성계, 드디어 출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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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李成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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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위해 선별된 군대가 출진할 무렵, 흰 무지개가 마치 해를 뚫는 듯한 모양새가 나오자 일관이 "싸움을 이길 징조다."면서 군대의 사기를 올렸다.
그런데 이렇게 군대의 사기를 올리려던 것도 잠시, 이성계가 도착하기도 전에 고려군은 사근내역 전투에서 참담한 피해를 입고 만다. 이성계의 군대가 이동하는 중에도 여기저기서 도륙된 시체들이 널려 있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참담한 모습을 본 이성계는 경험 많은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측은하고도 분한 마음에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체로 늘어진다.
홍산대첩
鴻山大捷홍산 전투고려 후기 |
사건/전쟁 |
역사/고려시대사 |
요약 홍산대첩은 1376년(우왕 2) 7월 최영(崔塋)이 홍산(鴻山,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친 전투이다. 당시 왜구는 금강(錦江)을 따라 부여(扶餘), 공주(公州), 논산(論山) 일대 등 내륙 지역까지 약탈하고 있었는데, 이 전투로 그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 싸움은 고려가 왜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전투로 손꼽힌다. 이 승리로 최영은 왜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배경 및 발단
고려 말의 왜구(倭寇) 침범은 1350년(충정왕 2)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공민왕(恭愍王) 대를 거쳐 우왕(禑王) 때에 가장 극심하였다. 우왕 즉위 이후 왜구는 수도 개경(開京)을 노리다가 저지당하고서는 양광도(楊廣道) 연안을 공격하였다. 1376년(우왕 2)에는 금강(錦江)을 따라 올라오며 부여(扶餘), 공주(公州) 지역을 약탈하였다. 그해 7월에는 목사(牧使) 김사혁(金斯革)이 이들을 저지하다가 패배하여 공주가 함락되었다. 왜구는 다시 연산(連山,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읍)의 개태사(開泰寺)로 쳐들어왔으며, 이를 맞아 싸우던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崔永)은 출정을 자청하였다. 당시 우왕과 조정의 대신들은 그가 이미 61세로 나이가 많다는 점을 들어 출전을 만류하였으나, 최영은 굳이 출정하기를 요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경과 및 결과
당시 왜구는 장차 돌아가려는 것처럼 내보이면서도 여전히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고려 측에서 맞서는 상대가 없었기에 홍산에 머물던 왜구들의 기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때 최영은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전장에 나섰다.
양측 군사가 교전한 곳은 3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길 하나만 통할 수 있는 험하고 좁은 지형이었다. 최영이 이끈 고려군이 당도하기에 앞서 왜구가 먼저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겁을 내어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최영이 선두에 나서 돌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숲속에 숨어있던 적이 쏜 화살이 최영의 입술에 맞아 피가 흘렀는데도 최영은 당황하지 않고 적을 쏘아 맞춘 이후에야 화살을 뽑았다고 한다. 최영을 중심으로 한 고려군은 더욱 치열하게 싸워 적을 거의 섬멸하였다.
이어서 8월에 최영이 개경으로 개선하자 조정은 황제의 사신을 맞이하는 예와 같이 성대하게 이들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우왕은 최영을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으로 봉하고 나머지 군사들도 포상하였다.
의의 및 평가
홍산 전투의 구체적인 전황이나 양측 병력의 규모는 알 수 없다. 최영은 개선한 후 우왕이 적의 수효를 묻자, 많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다만 그에 앞서 금강 유역의 여러 고을을 침입한 왜구의 수는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산 전투 이후 왜구들은 늘 “우리가 두려워하는 자는 백발(白髮)의 최만호(崔萬戶)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최영을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를 통해 왜구의 세력은 일시적이나마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현재 홍산의 전투 장소로 비정되는 장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에 있는 태봉산성(胎峰山城)이며, 산성 내부에 조성되어 있는 태봉산 체육공원에 홍산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한편 최근에는 홍산 전투의 전장이 태봉산이 아니라 비홍산(飛鴻山)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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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고려사(高麗史)』
-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 김상기, 『(한국전사) 고려시대사』(동국문화사, 1961)
- ・ 이영, 『잊혀진 전쟁 왜구: 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에피스테메, 2007)
- ・ 손홍열, 「고려말기의 왜구」(『사학지』 9, 단국사학회, 1975)
- ・ 이영, 「홍산·진포·황산 대첩의 역사지리학적 고찰」(『일본역사연구』 15, 일본사학회, 2002)
- ・ 임형수, 「1376년 홍산 전투의 의의와 전장에 대한 재고찰」(『군사』 9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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