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 존재만으로 애국심과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구국영웅이다.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높은 위상과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에 세워져 있는 대형 동상의 주인공이다.[14]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살펴보아도 이름을 떨친 호레이쇼 넬슨 같은 명장들은 모두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순신은 정부와 외부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반대로 이순신이 정부와 명나라 육군에게 식량, 무기, 종이, 부채, 조총 등 각종 물자와 진상품을 지원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생계까지 직접 돌보면서 힘겹고 외롭게 전쟁을 수행해야 했으며 심지어 권율 휘하의 육군이 허락도 없이 이순신이 어렵게 마련한 수군이 먹을 식량을 시도 때도 없이 약탈하고 수군 병력을 마음대로 빼내어 육군으로 편입시키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급자족했으며, 휴전기 당시 수군 기지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음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군비를 꾸준히 확장하여 최강의 함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7년간 수군을 이끌고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끝에 군함을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기적을 이뤄냈다.[15]
이순신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전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적의 보급을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꿔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다.[16] 특히 임진왜란 초기 2차 출동 당시 첫 해전이었던 사천 해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왼쪽 어깨를 관통당해 중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하여 피가 발꿈치까지 흐르는 상황임에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지휘했으며, 칼로 살을 찢어 박혀 있는 탄환을 제거한 뒤 부하들과 평소처럼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철수하는 일본군 함대 500척을 추격하여 퇴각로를 차단한 뒤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어 왜선 200척을 깨부수고 100척을 포획하며 일본군 수만 명을 처치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날이 밝아 올 무렵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순신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펼친 인물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크나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임금에게 삼도수군통제가 된 이후 쿠데타 의심과 견제를 받고 원균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파직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으며, 피땀 흘려 키워놓은 군대가 원균의 칠천량 해전으로 완전히 궤멸되고, 어머니와 막내아들을 잇따라 잃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고 절망적이며 고난과 역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난을 평정한 뒤 홀연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춰서 그런지 대한민국에서는 단지 영웅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성웅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유일한 위인이다.
조선 후기 효종, 숙종, 정조도 이순신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17]
일본군의 조선 침략 당시 3주 만에 수도 한양, 2개월 만에 평양을 함락시키는 등 전세가 일본군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차에 수군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승리했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북진 중단, 명나라군 파병 등에 일조하며 참화 속의 조선을 구해내고 침략군인 일본군의 야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군공 이외에도 휘하 장병과 자기 사람들을 원리원칙에 기반해 철두철미하게 관리 및 대우하고 상업에도 종사하여 자급자족을 이루어 군을 자립시켰으며, 왜란 이전에도 이이 등의 고위 관료와 접선을 수 차례 거절하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고, 현감 재임기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등 지휘관이요 목민관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관리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고도 마지막까지 직접 출전해 분투한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 저서로 난중일기, 서간첩, 이충무공전서, 전시 장계(보고서)를 모은 것으로 임진장초, 충민공계초가 있다.
생전부터 그를 사적으로 알고 있던 인근 백성이나 군졸, 일부 장수와 재상들에게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안면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제법 있었으며,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앞서 말했듯이 현대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18] 세종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조선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19]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함께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20] 이순신의 시호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평가는 정치적인 성향이 영향을 끼치기 마련인데 이순신은 그런 부분에서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말 그대로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것인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21] 가령 명량 해전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 가량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22]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 자체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23]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24]과 공정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순신은 장수이자 목민관으로서 그야말로 공명정대했는데, 백성들과 일개 병졸부터 시작해서 승려와 노비까지 하나 하나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이룩한 공을 빠짐없이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여차할 땐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허다했다.[25] 허나 자기 휘하 사람들을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군법을 어기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기에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26]이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이순신은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렸다고 할 수 있겠다. 또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겠다.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수륙 협공을 통하여 일본에게 순식간에 먹혔을 것이고, 이후 명과 일본의 땅따먹기 전면전으로 조선은 말 그대로 가루가 됐을 것이다.
이렇듯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 이러한 덕에 40여 년 가까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순신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전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적의 보급을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꿔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다.[16] 특히 임진왜란 초기 2차 출동 당시 첫 해전이었던 사천 해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왼쪽 어깨를 관통당해 중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하여 피가 발꿈치까지 흐르는 상황임에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지휘했으며, 칼로 살을 찢어 박혀 있는 탄환을 제거한 뒤 부하들과 평소처럼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철수하는 일본군 함대 500척을 추격하여 퇴각로를 차단한 뒤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어 왜선 200척을 깨부수고 100척을 포획하며 일본군 수만 명을 처치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날이 밝아 올 무렵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순신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펼친 인물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크나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임금에게 삼도수군통제가 된 이후 쿠데타 의심과 견제를 받고 원균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파직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으며, 피땀 흘려 키워놓은 군대가 원균의 칠천량 해전으로 완전히 궤멸되고, 어머니와 막내아들을 잇따라 잃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고 절망적이며 고난과 역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난을 평정한 뒤 홀연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춰서 그런지 대한민국에서는 단지 영웅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성웅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유일한 위인이다.
조선 후기 효종, 숙종, 정조도 이순신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17]
일본군의 조선 침략 당시 3주 만에 수도 한양, 2개월 만에 평양을 함락시키는 등 전세가 일본군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차에 수군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승리했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북진 중단, 명나라군 파병 등에 일조하며 참화 속의 조선을 구해내고 침략군인 일본군의 야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군공 이외에도 휘하 장병과 자기 사람들을 원리원칙에 기반해 철두철미하게 관리 및 대우하고 상업에도 종사하여 자급자족을 이루어 군을 자립시켰으며, 왜란 이전에도 이이 등의 고위 관료와 접선을 수 차례 거절하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고, 현감 재임기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등 지휘관이요 목민관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관리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고도 마지막까지 직접 출전해 분투한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 저서로 난중일기, 서간첩, 이충무공전서, 전시 장계(보고서)를 모은 것으로 임진장초, 충민공계초가 있다.
생전부터 그를 사적으로 알고 있던 인근 백성이나 군졸, 일부 장수와 재상들에게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안면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제법 있었으며,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앞서 말했듯이 현대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18] 세종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조선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19]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함께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20] 이순신의 시호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평가는 정치적인 성향이 영향을 끼치기 마련인데 이순신은 그런 부분에서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말 그대로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것인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21] 가령 명량 해전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 가량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22]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 자체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23]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24]과 공정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순신은 장수이자 목민관으로서 그야말로 공명정대했는데, 백성들과 일개 병졸부터 시작해서 승려와 노비까지 하나 하나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이룩한 공을 빠짐없이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여차할 땐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허다했다.[25] 허나 자기 휘하 사람들을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군법을 어기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기에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26]이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이순신은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렸다고 할 수 있겠다. 또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겠다.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수륙 협공을 통하여 일본에게 순식간에 먹혔을 것이고, 이후 명과 일본의 땅따먹기 전면전으로 조선은 말 그대로 가루가 됐을 것이다.
이렇듯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 이러한 덕에 40여 년 가까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역임
-
사후 추증된 관작
-
생전(전사 직전)의 관작
-
해석:
-
품계: 정헌대부[39]
-
상기된 80여 자의 기나긴 직위명들을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이 충무공은 생전에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장관급의 명예직에 상당하는 의전 예우를 받은 뒤[41], 해군작전사령관 및 함대사령관을 겸직하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도 미 해군 원수직을 수여받은 셈이 된다. 나아가 사후에는 대한민국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총리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수여받은 것이 된다. 훈장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한 비유이지만[42], 수여된 관직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쉽게 인식하는 현재의 관제로 비교하자면 위와 같은 셈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미 해군 대원수직[43]을 동시에 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군사적 업적을 인정 받아 예우에서 밀리지만 미국에서 명예 원수로 대우하는 셈이고, 죽은 뒤 200년 가까이 되어서 국무총리를 부여받은 격이다.[44]
3.1. 장군?[편집]
생전에 이순신이 계급이 낮을 때 장군이라고 불린 적은 있었겠지만,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던 시절이나 최종 계급을 생각하면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틀린 호칭이다. 상기된 직책들 가운데 가장 품계가 낮은 직책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데, 수군절도사면 절충장군 품계로 장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품계 중 최상의 품계이며, 또한 당상관에 해당되었다. 당연히 조선시대에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리에게, 통제사또나 영감이라고 부르지,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는 일은 없었다.[45] 게다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는 종2품 직으로 가의/가선대부 품계가 필요했는데 이는 엄연히 영감이라고 불리는 문반 품계였으니 장군이라고 부르면 모욕이었다.
시대적으로도 장군이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당시 기준으로 정3품부터는 군대를 전역하고 문관으로서 올라가야 했기에 더이상 장군이 아니라 사또나 영감 그리고 정2품부터는 대감이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수사또, 수사 영감, 통제 사또, 통제사 영감, 통상 대감(정헌대부 시절), 종3품 이하일 땐 전부 나리(나으리) 등으로 부르는 게 올바른 역사적 고증이다. 이순신/평가 문서로.
현대 기준에서는 제독 혹은 원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제로 대한민국 해군이나 관련 관계자들은 현대에 육군 계열의 칭호로 쓰이는 장군 칭호를 기피하고 대신 해군이 사용하는 칭호인 제독을 붙여서 이순신 제독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육군 및 육군에서 파생된 공군의 장성은 장군, 해군 장성은 제독 칭호를 쓰기 때문이다. '해군의 자존심 문제'라는 건 이진삼 의원과 해군 간의 갈등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육군 일색인 국군의 상황으로 인해 대한민국 해군은 '제독' 칭호 고수에 민감한 편이다. 외국에서도 이순신 같은 해군 지휘관은 철저히 제독(Admiral)이라고 붙여 부른다.[46]
그리고 명칭의 역사적 유래와 직무유사성의 측면에서 따져본다면, 충무공의 최종 직책인 삼도수군통제사는 현대의 해군 원수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영국식 영어에서 해군 원수를 지칭하는 '함대 제독'[47]의 기원 자체가 사실상 영국 해군의 삼도수군통제사였기 때문이다. 이 관직은 14세기 잉글랜드 왕국에서 등장한 관직인 '남과 북, 서쪽의 제독'[48]인데, 말 그대로 남북서 잉글랜드의 3개 주력함대의 지휘권을 쥔 직책이었다. 이 긴 명칭을 줄인 것이 바로 Admiral of the Fleet이다. 이후 ADMF는 최고 등급의 해군 장성 계급으로 굳어졌고, 영국 해군이 세계 해군의 표준으로 자리잡자 각국 해군에 전파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한국으로 치면 삼도수군통제사를 줄인 '통제사'가 훗날 한국 해군의 공식적인 원수 명칭으로 정착했다고 보면 된다.
반면 당시 조선군의 육해군 구별이 유별하지 않아서 장군으로 불러도 문제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이순신이 오늘날의 장성급 지휘관에 해당하는 보직을 육군에서 맡았던 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최종 육상 보직은 조산보 만호(혹은 정읍 현감. 정읍에는 해안선이 없다.)이고, 병마 절도사나 관찰사처럼 오늘날의 ‘장군’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즉슨 그의 최종 관직을 일일이 붙여서 호칭하는 게 아닌 이상 국제적인 관례대로 제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다.
다만 현대에는 장군이란 단어가 실제 장성급 장교를 지칭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무(武)의 최고봉격인 인물에게 흔히 사용되는 호칭이다.[49] 또한 당장 충무공을 이순신 '장군' 대신 이순신 '제독'이라 호칭하는 경우를 상상해본다면 일반 언중들이 받아들이기에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시대적으로도 장군이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당시 기준으로 정3품부터는 군대를 전역하고 문관으로서 올라가야 했기에 더이상 장군이 아니라 사또나 영감 그리고 정2품부터는 대감이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수사또, 수사 영감, 통제 사또, 통제사 영감, 통상 대감(정헌대부 시절), 종3품 이하일 땐 전부 나리(나으리) 등으로 부르는 게 올바른 역사적 고증이다. 이순신/평가 문서로.
현대 기준에서는 제독 혹은 원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제로 대한민국 해군이나 관련 관계자들은 현대에 육군 계열의 칭호로 쓰이는 장군 칭호를 기피하고 대신 해군이 사용하는 칭호인 제독을 붙여서 이순신 제독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육군 및 육군에서 파생된 공군의 장성은 장군, 해군 장성은 제독 칭호를 쓰기 때문이다. '해군의 자존심 문제'라는 건 이진삼 의원과 해군 간의 갈등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육군 일색인 국군의 상황으로 인해 대한민국 해군은 '제독' 칭호 고수에 민감한 편이다. 외국에서도 이순신 같은 해군 지휘관은 철저히 제독(Admiral)이라고 붙여 부른다.[46]
그리고 명칭의 역사적 유래와 직무유사성의 측면에서 따져본다면, 충무공의 최종 직책인 삼도수군통제사는 현대의 해군 원수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영국식 영어에서 해군 원수를 지칭하는 '함대 제독'[47]의 기원 자체가 사실상 영국 해군의 삼도수군통제사였기 때문이다. 이 관직은 14세기 잉글랜드 왕국에서 등장한 관직인 '남과 북, 서쪽의 제독'[48]인데, 말 그대로 남북서 잉글랜드의 3개 주력함대의 지휘권을 쥔 직책이었다. 이 긴 명칭을 줄인 것이 바로 Admiral of the Fleet이다. 이후 ADMF는 최고 등급의 해군 장성 계급으로 굳어졌고, 영국 해군이 세계 해군의 표준으로 자리잡자 각국 해군에 전파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한국으로 치면 삼도수군통제사를 줄인 '통제사'가 훗날 한국 해군의 공식적인 원수 명칭으로 정착했다고 보면 된다.
반면 당시 조선군의 육해군 구별이 유별하지 않아서 장군으로 불러도 문제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이순신이 오늘날의 장성급 지휘관에 해당하는 보직을 육군에서 맡았던 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최종 육상 보직은 조산보 만호(혹은 정읍 현감. 정읍에는 해안선이 없다.)이고, 병마 절도사나 관찰사처럼 오늘날의 ‘장군’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즉슨 그의 최종 관직을 일일이 붙여서 호칭하는 게 아닌 이상 국제적인 관례대로 제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다.
다만 현대에는 장군이란 단어가 실제 장성급 장교를 지칭하는 것 뿐만 아니라 무(武)의 최고봉격인 인물에게 흔히 사용되는 호칭이다.[49] 또한 당장 충무공을 이순신 '장군' 대신 이순신 '제독'이라 호칭하는 경우를 상상해본다면 일반 언중들이 받아들이기에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생애
연표
5.2.1. 임진왜란 이전[편집]
-
-
이즈음에 방진의 딸인 방수진과 결혼. 그 전년도였을 수도 있다.
-
-
-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落馬)해서 탈락하다.
-
-
1576년(32세) 선조 9년
-
2월: 식년시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51]
-
-
1579년(35세) 선조 12년
-
2월: 종8품 한성훈련원 봉사로 재직. 서익의 부당 인사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함.
-
-
1580년(36세) 선조 13년
-
둘째 형 이요신이 죽다.
-
7월: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52]로 임명되다. 관사 오동나무 사건으로 상관인 성박과 그 후임 이용에게 밉보이다.
-
-
1582년(38세) 선조 15년
-
1월: 군기경차관[53]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근무 태만이라 거짓 보고를 올려 발포 수군 만호 직에서 파직되다.
-
5월: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다.
-
-
1583년(39세) 선조 16년
-
7월: 함경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다.
-
11월 15일: 부친 이정이 74세의 나이로 별세하다.
-
-
1584년(40세) 선조 17년
-
1월: 부친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잠시 벼슬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다.
-
-
1586년(42세) 선조 19년
-
1월: 복직하여 사복시 주부(종6품)가 되다.
-
2월: 종4품(중령)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종4품 이상의 장군직)로 임명되다.
-
-
1587년(43세) 선조 20년
-
1월: 맏형이었던 이희신이 사망하다.
-
8월: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도 겸직하다.
-
-
1588년(44세) 선조 21년
-
1월: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어 백의종군 해제.
-
6월: 아산으로 내려가다.
-
-
1589년(45세) 선조 22년
-
11월: 선전관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다.
-
1590년(46세) 선조 23년
-
1591년(47세) 선조 24년
임진왜란
-
1592년(48세) 선조 25년
-
1597년(53세) 선조 30년
-
2월 10일: 부산포로 출정해 무력 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다.
-
2월 25일: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다.
-
3월 4일: 감옥에 갇히다.
-
4월 11일: 어머니가 사망하다.
-
7월 23일: 이조판서 이항복, 경림군 김명원의 건의로 이순신이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하다.
-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라는 지시를 전하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리며 수군의 폐지를 반대하다.
-
8월 28일: 어란진에서 왜선 8척과 조우, 교전 끝에 승리를 거두다.
-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다.
-
9월 2일: 배설이 도주하다.
-
10월 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기다.
-
1598년(54세) 선조 31년
-
2월 17일: 고금도로 이진하여, 새로운 통제영으로 삼다.
-
사후
가족
아버지 이정(1511~1583), 어머니 변씨 부인(1515~1597) 슬하 3남으로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외동딸 방수진을 아내로 들였고 병마사 오수억(吳壽億)의 서녀인 첩 해주 오씨가 있었다.
방수진과의 사이에 장남 이회, 차남 이예[66], 3남 이면[67]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장녀는 홍가신의 아들 홍비와 혼인했다. 해주 오씨와의 사이에서 서자 이훈(李薰)을 두었고, 오씨 소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첩 소생인지 알 수 없는 서자 이신(李藎)과 서녀 2명이 있었다.
오씨외에 이순신에게 '부안댁'이라는 첩이 있었고 이신과 두 서녀가 그녀 소생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전적으로 난중일기의 번역자들의 창조번역이다.
방수진과의 사이에 장남 이회, 차남 이예[66], 3남 이면[67]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장녀는 홍가신의 아들 홍비와 혼인했다. 해주 오씨와의 사이에서 서자 이훈(李薰)을 두었고, 오씨 소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첩 소생인지 알 수 없는 서자 이신(李藎)과 서녀 2명이 있었다.
오씨외에 이순신에게 '부안댁'이라는 첩이 있었고 이신과 두 서녀가 그녀 소생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전적으로 난중일기의 번역자들의 창조번역이다.
1594년 8월 2일. 꿈을 꾸었는데, 부안 사람(扶安人)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계산했더니, 태어날 달이 아니었다. 꿈이었지만 쫓아 보냈다.
1594년 11월 13일. 저녁에 윤련이 왔다. 그의 누이 편지를 갖고 왔다. 헛된 말이 많았다. 우스운 일이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는 곧 남은 어린 세 자식이 끝내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구나.
1597년 10월 25일. 몸이 몹시 불편했다. 윤련(尹連)이 부안에서 왔다.
난중일기 원문에는 그냥 부안사람이라는 뜻의 부안인(扶安人)이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난중일기를 번역한 홍기문, 이은상 등은 아무런 문헌근거도 없이 부안댁이라는 첩이 있다는 사족을 붙였고 윤련이 누이 편지를 갖고 왔다, 윤련이 부안에서 왔다는 기술을 근거로 윤련이 이순신 첩 부안 윤씨의 오라비라 주장했다. 근거는 전혀 없다. 부안인, 윤씨는 덕수 이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 난중일기 원문에는 그저 부안사람과 윤련의 누이로 적혀 있다. 아무 근거 없이 부안 사람, 혹은 윤련의 누이를 '이순신의 첩'이라는 쓸데없는 사족을 달아 번역하는 것은 과잉 번역이다.
이순신의 서녀 중 1명은 윤효전(1563~1619)의 첩이 되었는데, 윤효전은 바로 현종~숙종 연간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윤휴의 아버지다. 다만 윤휴는 이순신 서녀의 소생이 아니라 윤효전의 적자고, 윤효전과 이순신의 서녀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윤영(1611~1691)으로 그가 윤휴의 이복 형이다.
부모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음서로 벼슬에 올라[68] 최종 직위는 종5품 창신 교위에 이르렀으나 실무를 맡은 게 아니었고 일종의 임시직이나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69] 1583년 11월 15일 타계했는데, 고향의 소식이 늦어 이순신은 부친의 부고를 50일이나 지난 후에야 접하고 뒤늦게 달려가 3년상을 치렀다. 사후 1604년에 아들 이순신의 막대한 훈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고 덕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전라 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씨를 여수의 고움내(현대의 여수시 웅천 지역)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는데, 현대에도 여수에는 '이순신 자당기거지'[70]라고 해서 변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어머니도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 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고 격려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했다.[71] 1597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변씨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관을 싣고 오다가 병사했는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도 모자라, 임지로 떠나는 길이라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바로 떠나야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의 이순신이 느낀 애통함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전라 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씨를 여수의 고움내(현대의 여수시 웅천 지역)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는데, 현대에도 여수에는 '이순신 자당기거지'[70]라고 해서 변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어머니도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 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고 격려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했다.[71] 1597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변씨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관을 싣고 오다가 병사했는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도 모자라, 임지로 떠나는 길이라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바로 떠나야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의 이순신이 느낀 애통함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나가는 중에 아들 울이 종을 보내 "아직 배 소식이 없다."했다. (중략)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두들기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하다. 즉시 갯바위로 달려나가니 이미 배가 와 있었다. 이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없다."
정유년 4월 13일(1597년 5월 28일) 《난중일기》
竭忠於國而罪已至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했으나 죄가 이미 미쳤고
欲孝於親而親亦亡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했으나 부모마저 돌아가셨네.
天地安如吾之事乎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으랴?
不如 早死也
속히 죽느니만 못하다.
정유년 4월 19일(1597년 6월 3일) 《난중일기》
글을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날 지경. 더 기가 막힌 것은 모친의 본관이 초계인데, 이 지역은 다름아닌 이순신의 귀양지다. 어머니의 죽음에는 선조도 일정부분 기여한 공이 있다. 아들이 의금부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놀란 어머니가 연로한 나이에다 건강도 나쁜 몸인데도 아들을 보기 위해 아산까지 직접 오기로 했고 결국 아산에 오기 전 건강이 악화되어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형제, 자녀
류성룡은 저서인 《징비록》의 평가에서, 모두가 이순신 장군을 영웅적이고 위엄 있는 인물이고 장수로 생각하지만, 장수로서 위엄 있는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글을 읽는 단아한 선비 같다
'한국사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산 대첩 (0) | 2024.03.22 |
---|---|
임란 칠천량 해전/원균 패배 (0) | 2024.02.15 |
한국 5천년사/3대 영웅/강감찬 (0) | 2024.01.06 |
한국 5천년사/3대 영웅/을지문덕 (0) | 2024.01.06 |
이순신 장군/넬슨제독/나폴레옹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침략을 물리치고 전장에서 전사한 모습은 유사하다. (0) | 2023.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