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구

한국 5천년사/3대 영웅/강감찬

박송 입니다. 2024. 1. 6. 12:48

 
고려 문하시중
강감찬
姜邯贊
장우성, 정부표준영정 5호, 1974년[ 다른 이미지 펼치기 ]
 
출생
948년 12월 27일[2]
(음력 정종 3년 11월 19일)
사망
1031년 9월 15일[3] (향년 82세)[4]
(음력 덕종 즉위년 8월 20일)
천수군 개국후(天水郡開國侯)[ 펼치기 · 접기 ]

인헌(仁憲)
금천 강씨(진주 강씨)
이름
은천(殷川) → 감찬(邯贊, 邯瓚)
 
낙성대 강감찬 기마상
1. 개요2. 경력3. 생애
3.1. 묘소 관련
4. 평가5. 기타
5.1. 강감찬 축제5.2. 강감찬 설화5.3. 이름
5.3.1. '강한찬' 주장5.3.2. 찬(贊)과 찬(瓚) 이설
6. 대중매체7. 둘러보기

1. 개요

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군이었고, 죽어서는 설화가 되었다.


고려 문관이자 장군. 현종을 보좌하였으며 제3차 여요전쟁에서는 도통사로서 고려군을 총지휘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다.

귀주대첩의 압도적인 전과와 여요전쟁이 고려와 동아시아 전체에 미친 영향을 고려했을 때 한국사 전체에서 고구려 을지문덕, 조선 이순신 등과 같이 명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고려사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 하나이다.

진주 강씨 중 인헌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5]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6]에서 출생한 관계로 인헌공파는 '금천(衿川)[7] 강씨'로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2. 경력[편집]

고려 서북면 행영 군단
상원수(上元帥)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강감찬
원수(元帥)
대장군(大將軍) 강민첨
판관(判官)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
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
기타 지휘관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
시랑(侍郞) 조원
휘하 장병
20만 8300명
1018년, 거란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지휘하며 남침하자 고려는 서북면 행영[8]을 조성하고, 강감찬을 행영의 도통사로 삼았다. 이어 20만 대군을 소환하여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고, 지금의 군단장과 같은 직위를 맡겼다.
여요전쟁 승리 후 직위
공신호
추충협모안국공신
(推忠協謀安國功臣)
현종이 봉한 공신호.
검교직
검교태위(檢校太尉)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린 명예직을 의미한다. 태위 삼공직 중 가장 높다.
직위
서경유수(西京留守)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서경유수는 서경 분사의 장관이다.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중서문하성의 차관이다.
작위
천수현 개국남(天水縣開國男)
천수현은 봉지(封地), 개국은 미칭으로 개국남은 남작.
은퇴 후 직위
공신호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덕종이 봉한 공신호.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특진(特進)
개부의동삼사는 종1품 최고위 품계.
특진은 정2품 품계. 문산계 중에서 두 번째로 높다.
검교직
검교태부(檢校太傅)
태부는 삼사 중 두번째 직위이다.
검교태사(檢校太師)
태사는 삼사 중 가장 높은 직위로 '천자의 스승'이란 의미의 지위였다.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문하시중 중서문하성의 실질적인 장관이다.
시중(侍中)
아마 문하시중을 이르는 듯하다.
작위
천수현 개국자(天水縣開國子)
천수현은 봉지, 개국은 미칭으로 개국자는 자작.
천수군 개국후(天水郡開國侯)
봉지가 천수군으로 승격됐다. 작위도 후작으로 진작되었다.
사후 추증
시호
인헌공(仁憲公)
문종이 추증함.
향직
품계
대승(大丞)
덕종이 추증함. 3품 1등위 향직 품계.
수직
수태사(守太師)
수직은 행수법에 따른 것으로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으면 붙는다. 강감찬은 종1품 개부의동삼사 및 정2품 특진이지만 태사는 정1품이다.
직위
중서령(中書令)
중서령은 중서문하성의 명목상 장관인 명예직이다. 고위급 왕족이나 공신만 임명된다.

3. 생애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었다. 강감찬은 과거 급제 이후에 개명한 이름이다.[9] 속자치통감》에는 강감보(姜邯寶)로 기록되었다.

그의 선조는 고구려 말기의 장군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다.[10]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11] 강궁진(姜弓珍)이었다. 강궁진이 고려 개국 당시에 경주 지역[12]에서 금천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강감찬을 보았다.

여러 설화에서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강감찬을 낳았다고 한다.[13] 또한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14]가 있는 걸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15]의 4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의 이름이 낙성대이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하며, 983년(성종 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이 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한 편이었다.[16] 그런데 983년 이후 1009년(목종 말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17]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출세길이 트였는데, 1010년(현종 1년)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공하는 제2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세가 중과부적이니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 中.
주전론을 외치던 문관과 무관들, 심지어 항전을 주장해 온 강감찬의 기록도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진다. 도망갔던 신하들이 모두 처벌되었는데 강감찬은 따로 처벌받은 기록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임무를 띄고 파견을 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서 1011년(현종 2년)에 국자좨주가 되었다가 곧바로 한림학사승지와 좌상기상시를 겸하였다. 그리고 1012년(현종 3년)에는 동북면행영병마사로 파견되어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는데 이 때 감찰어사 이인택이 탄핵을 했으나 되리어 이인택이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만큼 현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014년(현종 5년)에는 중추사가 되어서 사직단 수축을 주장하였고, 1016년(현종 7년)에는 이부상서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 강감찬은 1018년(현종 9년) 5월에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하게 되었는데 그가 중앙 고관직을 받음과 동시에 서경유수를 겸했던 것을 보면 거란의 대규모 침입에 대해 확실하게 대비하기 위한 인물로 낙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0월 서북면행영도통사가 되어 사실상 군사의 전권을 받게 된다. 그해 12월 거란의 소배압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는 제3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상원수가 되어서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거란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이때 고려군 사령부의 무관들은 성공적인 기선 제압, 거란군의 전격전을 대비한 청야전술 유격 전술, 귀주 대첩에서 보여준 망치와 모루 전술까지 철저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완벽하게 실행함으로써 재침입을 해 온 거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귀주대첩 기록화(좌), 강감찬에게 금꽃을 꽂아주는 현종(우).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1019년(현종 10년) 4월 강감찬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물러나지 못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11월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12월에 공신호를 받게 된다. 그러다 1020년(현종 11년) 6월에 치사하게 된다. 그렇게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인 1021년(현종 12년) 수도 개경의 흥국사에 석탑을 세웠는데 아래와 같은 글귀를 새겼다.[18]
보살계제자 평장사 강감찬은 삼가 받들어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며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항상 평안토록 하기 위해 공손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한다. 천희(天禧) 5년 5월.

이후에는 조정에서 물러나 기록이 없다가 1030년(현종 21년) 개경 주변에 나성을 쌓는 논의가 나올 때 강감찬이 일전에 논의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곧바로 문하시중으로 승진하였다고 나온다. 아무래도 이 때 문하시중이 된 것은 치사 이후 조정 문헌에는 기록이 없다는 점과 당시 80이 훌쩍 넘은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실제 문하시중 직책을 수행했다기보다는 강감찬에게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031년(현종 22년) 8월에 사망하게 된다. 이 때 그의 나이 84세였으며 현종이 죽은지 3개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저서로는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3.1. 묘소 관련

강감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위치는 의외의 장소에 있는데, 다름아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로 묘가 발견된 해가 1963년이어서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금천 강씨에서는 조선 인조 때의 민회빈 강씨와 관련된 강빈 옥사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강빈의 아버지인 우의정 강석기는 강감찬의 17대 손으로 강빈 역시 강감찬의 후손이었는데 그녀는 비정한 시아버지인 인조로 인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고, 그 형제들도 모조리 장살되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말로 다하지 못할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 강석기의 친척들은 멸문지화를 모면하기 위해 성씨를 바꾸거나 조상의 묘에 성묘도 안 하는 과정에서 강감찬의 묘까지 실전되고 말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중의 주장일 뿐 근거는 전혀 없으며 금천 강씨 문중에서도 실제로 이 묘가 강감찬의 묘가 맞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강빈의 옥사는 어디까지나 강빈과 그녀의 주변인들이 참화를 입은 것이지 진주 강씨 인헌공파 전체와 그들과 혼맥 및 학맥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성씨를 바꾸었다는 부분은 조선 초기에 일어난 왕씨 몰살을 레퍼런스 삼아 과장한 티가 너무 많이 난다. 무엇보다 순종 치세때의 《승정원일기》에는 강감찬의 묘를 보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기록이 멀쩡히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