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연구

여태후, 중국의 희대의 악녀인가?

박송 입니다. 2019. 9. 2. 14:38


여태후, 중국의 희대의 악녀인가?    



전한 고조 유방(劉邦)의 아내이자, 황후. 명문 여씨(呂氏)의 후손이다. 시호는 남편인 유방의 시호 고황제(高皇帝)에서 따와 고황후(高皇后).그리고 기록 상, 중국 최초의 황후이자 황태후 였다.

중국의 3대 악녀로 평가받는 여태후

1. 여태후, 그녀의 생애

유방과 여태후(중국 드리마 중)

이름은 여치(呂雉)였다. 부유한 집안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인 여공(呂公)이 할 일 없이, 패현의 한량인 유방을 보고, 그의 몸에 서린 왕기를 간파하여, 애원하다 싶이하여 시집보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녀는 무서울 정도의 야심과 독기가 있었던 여인이었다.

특히 항우의 포로가 되어서, 포박당해 있을 때도 "죽일 테면 죽여라. 너 따위는 내 남편의 상대가 안 된다"라는 태도를 보여, 함께 포로가 된 "유방의 부모와 항우"를 황당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담력이 출중함을 보여주는 예이다. 유방이 한량 시절에 사고를 쳐서 도망다닐 때마다, 대신 형벌을 받고 옥살이를 했고, 유방이 거병해 곳곳에서 전투를 치를때에도 그냥 담담히 자기 할 일을 하며 확실히 집안 내조를 하여, 결국 아버지 여공이 바란대로, 귀인(태후)의 자리에 이르렀다.

2. 여태후가 이성제후왕(한신 등)과 유방의 종친 제후왕들을 제거하다

토사구팽을 당해, 죽임을 당하는 한신(결국, 유방이 아닌 여태후가 죽인다)

토사구팽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유방은 한신, 팽월, 경포" 등 개국공신 출신의, 이성 제후왕들을 모조리 숙청한 후, 거기에 유씨 황족들로 갈아치우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지만, 사실 유방도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대놓고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면 목숨만은 부지해주려 하였다.

팽월도, 한신도 직위를 빼앗기는 선에서 끝나려는 것을 최종적으로 여태후가 나서서 처단했다.

옛 유방의 친구였던 노관은 '유방이 병들었고 여태후는 제후왕들을 숙청하니'라 하면서, 여태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국 유방이 죽자 흉노에 투항해버렸다. 거기에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의 종친인, 유씨들을 죽이고, 자신의 일족인 여씨로 제후왕들을 채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 한고조 유방이, "여태후에 대한 견제"로 태자를 바꾸려 하다

한고조와 여태후의 후대에 그려진 초상화

그런데 이렇게 점점 정치에 개입하는 여후의 행동이 눈 밖에 난 것인지, "유방"은 난데없이 태자인 "유영"을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총애하는 측실 "척부인" 소생인 "유여의"를 자기와 가장 닮았다고 치켜세우며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척부인"도 "여의"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면서, "여태후"와 대립각을 세웠다. 태자인 유영이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은데다가, 전 왕조인 진나라 역시 후계구도를 뒤집으려다, 나라가 망해버린 "호해"의 전례까지 있다보니,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신 "여의"를 조나라 왕에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부인"과 함께 가도록 해서, 질투가 꽤 심한 "여태후"가 자기가 죽은 후 "여의 모자"를 핍박할 것을 막으려고 했다.

4. 유방의 임종앞에서도, 그녀의 권력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

"유방"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여태후"가 고명을 청하며, 재상인 "소하"가 연로하였으니 후임 재상을 누구로 할지 묻는다. "유방"은 "소하"의 후임으로 "조참"을 지목한다.

여후가 "조참" 사후에는 누구를 재상으로 삼을까 물으니, 내정은 "진평"에게 맡기고, 군사는 "주발"에게 맡기라고 말한다. 여후가 다시금 두 사람의 후임을 물으니, 유방은 기가 차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그 뒤는 당신이 알 바 아니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방이 임종한 후, 여태후는 유방의 죽음을 숨기고 황명을 사칭해 공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제2의 조고처럼 행세해 볼까 고민했지만, "번쾌나 진평"같은 공신들이 거의 대부분의 군사를 데리고 바깥에 있는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하여, 공신들을 자극할 생각은 일단 거둔다.

5. 유방의 사랑을 받던 척부인에게 행한 인간 이하의 만행(인간돼지 사건)

유방의 애첩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인간돼지로 부르며, 돼지우리'에 쳐 넣는 잔인한 행동을 한 여태후

여태후는 유방이 죽자, 그가 사랑했던 "척부인"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했다. 그녀의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여후는 우선 "척부인"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는 곤형을 가하고, 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채워서 궁녀를 가두는 감옥인 영항(永巷)에 감금하고, 하루 종일 쌀을 찧는 형벌을 내렸다.

그 다음에 그녀의 아들인 "조왕 여의"를 장안으로 소환한 후 제거하고자 했다.

모친과 달리 인자한 성격이었던, "혜제"는 이런 어머니의 속셈을 간파하고서는, 미리 이복 동생을 마중나가 바로 자신이 기거하던 전각으로 데려와, 침식을 같이 하며 자신의 옆에 끼고 보호했다.

그러나 "혜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태후"는 "혜제"가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척부인의 아들 "조왕 여의"를 독살당했다.

여태후는 척부인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그녀에게 친아들의 죽은시체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여의의 사망"으로 모든 희망이 사라진, "척부인" 또한 산 채로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고, 독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든 다음, 귀에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어서 돼지우리(뒷간을 겸하는)에 던져놓고 이를 가리켜 "사람돼지"란 뜻인 '인체(人彘)'라고 불렸다. (야사에는 유방과 몸을 섞었다고 하여 음부를 짓이겼다고도 하고, 남자 죄수들에게 던져주어 능욕당하게 했다고도 한다. 또 아들인 조왕의 시체를 가져와 보여주며 농락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태후"는 그 광경을 자기 아들인 "혜제"에게도 보여주었다. 충격을 받은 "혜제"는 눈을 뜬 뒤 "사람이 되어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인 저 또한 무슨 염치로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라고 말한 후 정치에서 손을 뗀 채 술독에 빠져버렸고,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폐인과 다름없이 지내다가 23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만다.

여태후에 의해서, 산체로 손과 발이 잘리고, 눈알이 뽑히는 척부인

6. 마음대로 황제를 바꾸고 죽이는 여태후

척부인은 '독약과 유황'으로 귀를 멀게하고, 벙어리가 되게 한다

아들 혜제가 죽은 이후, 혜제의 양자인 "소제 유공"이 즉위하지만, 나이가 어렸기에 "여태후"는 섭정으로서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 하게 된다. 진평의 묵인 혹은 침묵아래, 군권을 큰오빠 여택의 두 아들 "여태·여산"과 작은오빠 여석지의 아들 "여록" 등 친족들에게 맡겼고, 이것은 여태후가 천하를 다스리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측근인 "심이기"를 좌승상 임에도, 낭중령까지 겸임하게 하여, 친위병을 전부 통제 하게 해 놓고는, 황명의 출납을 여태후가 독점하면서 궁궐의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씨종친왕들을 제거한다. 연나라 왕의 자리는, 큰오빠 여택의 손자인 "여통"에게 주기위해, 전 연나라 왕인 유방의 서자 "유건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등, 유씨종친 제후왕들을 대거 살해했다. 이러던 중 "소제 유공"이 자신의 친모가 "여태후"에게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이만 들면 "여태후"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이, 여태후의 귀에 들어갔고, "소제"가 나중에 보복할 것을 우려하여 "소제 유공"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구실로 폐위시키고, 대신에 "유홍"을 즉위시켰다.

7. 엄청난 권세를 휘둘르던 여태후의 갑작스런 죽음

무섭지만 추진력 있는 여장부였는데, 죽기전에 갑자기 나타난 '투명한 푸른 개'가 "여태후"의 겨드랑이를 툭 치고 간 후로 병을 앓더니 죽었다.

"척부인의 아들 조왕 여의"의 귀신이 재앙을 내리는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이 기록은 야사가 아닌,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나오는 실제 기록이다.

제후들의 땅을 찢어서, 자신의 혈족인 여씨들에게 주고, 황제 교체 과정에서의 잇달은 전횡 등을 저질렀던 여태후였기에, 유방의 공신들(진평 등)은 속으로는 "여태후"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고, 본인 또한 이걸 알았던 그녀는 자기가 없어지면, 다른 유씨종친이나 기타세력이 여씨에게 달려들테니, 병권을 반드시 사수하라는 유지를 남겼지만, "여태후의 친족"들은 이런 유지를 이어가면서 권력을 보전할 능력이 없었다. 여태후가 죽자, 병사들의 충성심을 알기 위해서 "여씨를 계속 따를 자는 오른쪽 어깨 갑옷을 벗고, 유씨를 따를 자는 왼쪽 어깨 갑옷을 벗어라." 라고 명령하자 군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왼쪽 어깨 갑옷을 벗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서태후, 가남풍 (혹은 측천무후와 함께) 중국 3대 악녀로 평한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는 아예 여태후의 시호를 박탈하고, 한문제의 어머니, "박태후"에게 원래 여태후의 시호였던 '고황후'를 올렸다.

8. 그녀에 대한 재평가

그러나 여태후의 치세는, 중국 백성들에게는 몇백년만에 처음 누리던 평화로운 시대이긴 했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은 이것이 여태후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유방과 그 공신들의 덕이라는 것이 이제까지의 평가였다. 결국 잔혹한 형벌과 보복정치로 상징되는 여태후는 독한 악녀일 뿐 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러나 요사히는 여태후에 대한 재평가를 하는 움직임도 있다

먼저는, a)전쟁에 시달리던 전국시대 ~ 초한전의 난세가 종료되었고 황실의 잔인한 숙청은 백성들에게는 피해를 주지않았고, b)한나라 초기는 진나라의 억압 통치에 대한 반발로, "되는대로 놔두는 정치 즉, 무위지치"를 추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직무를 방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들을 피로하게 하는 정책을 세우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c) 사마천은 "여태후 시절에는 형벌을 시행하는 일이 드물었고, 죄인도 드물어서 치안이 좋았으며, 백성들이 농사일에만 힘쓰니, 입고 먹는 것이 갈수록 넉넉해지는 태평성대"라고 여태후의 공로를 칭송하기도 했다.

사마천의 결론은 '황실은 비록 피비린내 나는 암투에 휩싸였지만, "여태후"의 백성들에 대한 통치는 훌륭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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