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연구

왕개보(王介甫)/王安石

박송 입니다. 2019. 9. 2. 09:28


왕안석

왕개보(王介甫), 王安石        

       

요약 테이블
출생1021년

사망


1086년

송나라의 재상이자 문필가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1069년부터 1076년 무렵까지 균수법, 시역법, 면행법, 청묘법, 면역법, 보갑법, 보마법 등의 신법 개혁을 단행했다.
한자의 연원과 제자 원리 등을 연구한 《자설(字說)》, 문집인 《왕임천문집(王臨川文集)》, 《임천집습유(臨川集拾遺)》


개혁에 일생을 바치다

왕안석은 송나라 시대의 개혁정치가이자 문인으로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황제의 전적인 신뢰를 받았고, 자신의 문장처럼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으로 신법(新法)이라는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왕안석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무주(撫州) 임천현(臨川縣)에서 태어났고,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 번 본 것은 좀처럼 잊지 않았고,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기를 즐겨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지방관이던 부친 왕익(王益)을 따라 여러 지방에서 생활했다.

그는 1042년에 4등으로 진사과에 급제하여 회남(淮南)의 판관으로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3년 후 임기를 마친 그는 잠시 개봉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1047년 명주(明州) 은현(鄞縣)의 지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제방을 쌓고, 연못을 만들어 민생을 보살피고, 백성들에게 곡물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정책을 폈다. 이후 그는 약 20년을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를 오가며 하급 관리 생활을 했다.

당시 송나라는 건국 이후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내부적으로는 많은 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송 태조 조광윤이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관료기구를 세분화했기 때문에 관료의 수가 급증했고, 비대해진 행정기구는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해 기능이 효율적이지 않았다. 또한 관호(官戶)가 증가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이에 줄어든 국가의 재정 수입은 다시 일반 백성들의 세금 착취로 이어져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한편 송 왕조는 5대 10국 시대처럼 혼란한 상황이 도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수의 금위군을 양성했다. 이 금위군의 유지비가 재정 지출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막대했고, 북쪽의 요(遼)와 서쪽의 서하(西夏) 같은 나라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국고는 고갈되기 직전이었다.

결국 제4대 황제 인종 때 사회적 문제들이 표면으로 불거졌고, 인종은 1043년 ‘경력신정(慶曆新政)’이라는 개혁 정치를 실시했다. 하지만 인종의 ‘경력신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왕안석은 오랜 지방관 생활을 통해 사회적 병폐의 원인을 소수의 사대부와 지주들의 토지겸병에서 찾았다. 그리고 1058년 인종에게 개혁안인 〈만언서(萬言書)〉를 올렸다. 하지만 인종은 이전의 실패로 개혁에 대한 의지가 없었으며, 조정에도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대신들이 없었다. 1063년 왕안석은 모친상을 핑계로 관직을 떠나 강령(江寧)의 집으로 돌아갔다.

1067년 신종이 제6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즉위할 당시에도 송나라의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는 이전부터 이어진 정치 문제가 심화되고 민란이 빈번히 발생했으며, 외부적으로는 요와 서하의 계속되는 침입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고 있었다. 여기에 국가의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 나라의 구조마저 흔들리는 위기가 도래했다.

송 신종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신종은 정치 개혁에 강한 의지를 가졌던 인물로, 태자 시절 왕안석의 〈상인종황제언사서(上仁宗皇帝言事書)〉를 읽고 그를 주시했다. 신종은 즉위하자마자 왕안석을 지강녕에 임명했고, 몇 달 후 그를 중앙으로 불러 한림학사 겸 시강으로 삼았다. 왕안석의 개혁 의도와 변법 제안은 신종의 개혁의지와 일치했다. 1069년에 참지정사가 된 왕안석은 신종에게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라는 입법기관을 설립하고, 이곳에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여 신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한기(韓琦), 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의 인물들을 축출하고, 구법(舊法)을 철폐하고, 신법(新法)을 채택하여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왕안석의 신법은 상인의 횡포를 막고, 농업 기술을 발전시켜 생산량을 늘려 세수를 늘렸으며, 관료 체제와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왕안석은 신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청묘법(靑苗法, 농민에게 저리의 이자로 대출하는 제도), 모역법(募役法, 농민에게 부역 대신 세금을 내게 하여 이 돈으로 정부가 실업자를 고용하는 제도), 균수법(均輸法, 지방의 산물을 조세로 징수하여 다른 지방에 판매하여 재정을 확충하는 제도), 시역법(市易法, 정부가 중소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물자를 매입해 주거나 저리로 대부해 주던 제도), 보갑법(保甲法, 향촌 조직으로 민병대를 조직하여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는 제도), 보마법(保馬法, 기병대를 육성하기 위한 정책) 등의 신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왕안석의 변법은 국가의 재정을 늘리고 왕조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으나, 명문세가와 대지주의 특권에 저촉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들은 신법의 내용과 효과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왕안석 개인에 대한 사상적, 도덕적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왕안석은 개혁의지를 지닌 인재들을 선발하여 보수 세력과 대항하고자 했다. 하지만 송나라의 관료 제도는 아직 완전히 개혁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 등용된 인재들은 오히려 보수 세력과 결탁하여 왕안석을 공격했다. 하지만 신종의 개혁의지는 흔들리지 않았고, 1070년 왕안석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개혁의 힘을 실어 주었다.

사대부의 생활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074년 심한 기근이 들자 조정의 보수 세력들이 다시 변법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번에는 황실의 황후들마저 변법에 반대했다. 신종은 어쩔 수 없이 왕안석을 지강녕으로 강등시켰다. 1075년 왕안석은 신종의 요청으로 재상으로 복귀했지만, 1076년 다시 사임하고 은둔했다. 1085년 신종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뒤를 이어 철종이 즉위했고, 어린 왕을 대신해 할머니인 선인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신법에 반대했던 그녀는 신법을 하나씩 폐지해 나갔고, 결국 왕안석은 이듬해 자신의 신법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왕안석은 평생 변법을 위해 헌신한 개혁정치가였지만,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그는 관직 생활을 그만두면서 세상사를 잊은 듯 은거했지만 포부까지 감추지는 않았다. 만년에 쓰인 시들은 한가로운 어조를 띠고 있지만 비장한 개혁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사(詞)를 짓는 솜씨도 탁월하여 이전의 완곡하고 섬세한 작풍을 없애고, 소식(蘇軾)으로 대표되는 호방한 작풍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한편 그는 권위 있는 고문가(古文家)이기도 했는데, 필력이 자유분방하고 식견이 매우 탁월했다.

왕안석은 의지가 확고부동하여 한 번 옳다고 여긴 것이 있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성미였다고 한다. 어떤 이는 왕안석의 신법이 실패한 요인을 여기에서 찾는다. 그가 지나치게 자신만만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왕안석의 외골수에 가까운 추진력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한다.

왕안석에게는 왕원택(元澤)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방씨 성을 가진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했고, 선남선녀였던 아들 내외는 하늘의 질투를 살 정도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아들 왕원택이 병에 걸려 증세가 심각해지자 며느리 방씨의 외롭고 긴 독수공방이 시작되었다. 이에 젊고 아름다운 며느리가 홀로 지내는 것이 가여웠던 왕안석은 방씨를 재가시킬 것을 결심하고 아들을 설득했다. 왕원택은 아내의 행복을 위해 그녀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노래한 〈안아미(眼兒媚)〉라는 시를 지어 주고 재가를 허락했다. 방씨가 재가한 후 왕원택은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세간의 이목을 무시하고, 병석에 누운 아들을 설득하여 기어이 며느리를 재혼시킨 그의 결단과 추진력이 놀라울 뿐이다.




왕개보(王介甫), 王安石



요약 테이블
출생1021년
사망1086년

송나라의 재상이자 문필가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1069년부터 1076년 무렵까지 균수법, 시역법, 면행법, 청묘법, 면역법, 보갑법, 보마법 등의 신법 개혁을 단행했다.
한자의 연원과 제자 원리 등을 연구한 《자설(字說)》, 문집인 《왕임천문집(王臨川文集)》, 《임천집습유(臨川集拾遺)》 등을 남겼다.

개혁에 일생을 바치다

왕안석은 송나라 시대의 개혁정치가이자 문인으로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황제의 전적인 신뢰를 받았고, 자신의 문장처럼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으로 신법(新法)이라는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왕안석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는 무주(撫州) 임천현(臨川縣)에서 태어났고,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 번 본 것은 좀처럼 잊지 않았고,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기를 즐겨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지방관이던 부친 왕익(王益)을 따라 여러 지방에서 생활했다.

그는 1042년에 4등으로 진사과에 급제하여 회남(淮南)의 판관으로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3년 후 임기를 마친 그는 잠시 개봉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1047년 명주(明州) 은현(鄞縣)의 지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제방을 쌓고, 연못을 만들어 민생을 보살피고, 백성들에게 곡물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정책을 폈다. 이후 그는 약 20년을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를 오가며 하급 관리 생활을 했다.

당시 송나라는 건국 이후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내부적으로는 많은 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송 태조 조광윤이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관료기구를 세분화했기 때문에 관료의 수가 급증했고, 비대해진 행정기구는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해 기능이 효율적이지 않았다. 또한 관호(官戶)가 증가함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이에 줄어든 국가의 재정 수입은 다시 일반 백성들의 세금 착취로 이어져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한편 송 왕조는 5대 10국 시대처럼 혼란한 상황이 도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수의 금위군을 양성했다. 이 금위군의 유지비가 재정 지출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막대했고, 북쪽의 요(遼)와 서쪽의 서하(西夏) 같은 나라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국고는 고갈되기 직전이었다.

결국 제4대 황제 인종 때 사회적 문제들이 표면으로 불거졌고, 인종은 1043년 ‘경력신정(慶曆新政)’이라는 개혁 정치를 실시했다. 하지만 인종의 ‘경력신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왕안석은 오랜 지방관 생활을 통해 사회적 병폐의 원인을 소수의 사대부와 지주들의 토지겸병에서 찾았다. 그리고 1058년 인종에게 개혁안인 〈만언서(萬言書)〉를 올렸다. 하지만 인종은 이전의 실패로 개혁에 대한 의지가 없었으며, 조정에도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대신들이 없었다. 1063년 왕안석은 모친상을 핑계로 관직을 떠나 강령(江寧)의 집으로 돌아갔다.

1067년 신종이 제6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즉위할 당시에도 송나라의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는 이전부터 이어진 정치 문제가 심화되고 민란이 빈번히 발생했으며, 외부적으로는 요와 서하의 계속되는 침입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고 있었다. 여기에 국가의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 나라의 구조마저 흔들리는 위기가 도래했다.

송 신종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신종은 정치 개혁에 강한 의지를 가졌던 인물로, 태자 시절 왕안석의 〈상인종황제언사서(上仁宗皇帝言事書)〉를 읽고 그를 주시했다. 신종은 즉위하자마자 왕안석을 지강녕에 임명했고, 몇 달 후 그를 중앙으로 불러 한림학사 겸 시강으로 삼았다. 왕안석의 개혁 의도와 변법 제안은 신종의 개혁의지와 일치했다. 1069년에 참지정사가 된 왕안석은 신종에게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라는 입법기관을 설립하고, 이곳에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여 신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한기(韓琦), 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의 인물들을 축출하고, 구법(舊法)을 철폐하고, 신법(新法)을 채택하여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왕안석의 신법은 상인의 횡포를 막고, 농업 기술을 발전시켜 생산량을 늘려 세수를 늘렸으며, 관료 체제와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왕안석은 신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청묘법(靑苗法, 농민에게 저리의 이자로 대출하는 제도), 모역법(募役法, 농민에게 부역 대신 세금을 내게 하여 이 돈으로 정부가 실업자를 고용하는 제도), 균수법(均輸法, 지방의 산물을 조세로 징수하여 다른 지방에 판매하여 재정을 확충하는 제도), 시역법(市易法, 정부가 중소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물자를 매입해 주거나 저리로 대부해 주던 제도), 보갑법(保甲法, 향촌 조직으로 민병대를 조직하여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는 제도), 보마법(保馬法, 기병대를 육성하기 위한 정책) 등의 신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왕안석의 변법은 국가의 재정을 늘리고 왕조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으나, 명문세가와 대지주의 특권에 저촉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들은 신법의 내용과 효과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왕안석 개인에 대한 사상적, 도덕적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왕안석은 개혁의지를 지닌 인재들을 선발하여 보수 세력과 대항하고자 했다. 하지만 송나라의 관료 제도는 아직 완전히 개혁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 등용된 인재들은 오히려 보수 세력과 결탁하여 왕안석을 공격했다. 하지만 신종의 개혁의지는 흔들리지 않았고, 1070년 왕안석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개혁의 힘을 실어 주었다.

사대부의 생활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074년 심한 기근이 들자 조정의 보수 세력들이 다시 변법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번에는 황실의 황후들마저 변법에 반대했다. 신종은 어쩔 수 없이 왕안석을 지강녕으로 강등시켰다. 1075년 왕안석은 신종의 요청으로 재상으로 복귀했지만, 1076년 다시 사임하고 은둔했다. 1085년 신종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뒤를 이어 철종이 즉위했고, 어린 왕을 대신해 할머니인 선인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신법에 반대했던 그녀는 신법을 하나씩 폐지해 나갔고, 결국 왕안석은 이듬해 자신의 신법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왕안석은 평생 변법을 위해 헌신한 개혁정치가였지만,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그는 관직 생활을 그만두면서 세상사를 잊은 듯 은거했지만 포부까지 감추지는 않았다. 만년에 쓰인 시들은 한가로운 어조를 띠고 있지만 비장한 개혁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사(詞)를 짓는 솜씨도 탁월하여 이전의 완곡하고 섬세한 작풍을 없애고, 소식(蘇軾)으로 대표되는 호방한 작풍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한편 그는 권위 있는 고문가(古文家)이기도 했는데, 필력이 자유분방하고 식견이 매우 탁월했다.

왕안석은 의지가 확고부동하여 한 번 옳다고 여긴 것이 있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성미였다고 한다. 어떤 이는 왕안석의 신법이 실패한 요인을 여기에서 찾는다. 그가 지나치게 자신만만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왕안석의 외골수에 가까운 추진력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한다.

왕안석에게는 왕원택(元澤)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방씨 성을 가진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했고, 선남선녀였던 아들 내외는 하늘의 질투를 살 정도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아들 왕원택이 병에 걸려 증세가 심각해지자 며느리 방씨의 외롭고 긴 독수공방이 시작되었다. 이에 젊고 아름다운 며느리가 홀로 지내는 것이 가여웠던 왕안석은 방씨를 재가시킬 것을 결심하고 아들을 설득했다. 왕원택은 아내의 행복을 위해 그녀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노래한 〈안아미(眼兒媚)〉라는 시를 지어 주고 재가를 허락했다. 방씨가 재가한 후 왕원택은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세간의 이목을 무시하고, 병석에 누운 아들을 설득하여 기어이 며느리를 재혼시킨 그의 결단과 추진력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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