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연구

서태후/이화원

박송 입니다. 2019. 9. 2. 16:26


서태후/이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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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녔으나 권력에 눈이 멀어 당나라를 몰락게 하고 자신도 목을 맨 양귀비. 황제를 유혹하기 위해 치마 뒷단을 살짝 터서 중국 전통의상 치파오의 유래를 만든 조비연. 빼어난 외모로 은나라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뱀과 전갈에게 물려죽게 하는 채분지형 등 최악의 형벌로 인재를 제거한 달기.

이들은 가냘픈 여인이지만 중국 역사상 어떤 남성들보다 선명한 자국을 남긴 여걸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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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에 대하여..
소감
주제선정 동기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란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아시아의 여걸 서태후의 비밀을 파헤친 얘기를 보았다.
중국역사에 대해 그리 박식하지 못한 나로서는 중국역사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그녀가 이름에 얽힌 3가지 위급한 상황을 극복하여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죽 다룬 내용을 시청하면서 좀 더 그녀에 대해 궁금해졌고 그녀가 여성의 신분으로 48년간이나 중국을 통치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이번 과제를 통해 좀 더 그녀에 대해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서태후..그녀는 누구인가?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며, 동치제의 생모인 자희황태후이다.
서태후는 만주 귀족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전란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고대하였다. 그러다가 17살에
수녀(궁녀)로 뽑히어 황궁에 들어갔고 후에는 제7대 함풍황제의
황귀비로 되었고 제8대 동치황제의 생모로 되었고 제9대 광서황제의
이모로 되었던 것이다.
제7대 함풍황제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서태후와 낳은
아들이었다. 함풍황제가 죽은 후 서태후가 낳은 6살난 아들이 황제로
되면서 서태후는 황비에서 황태후로 되었다. 그리하여 28세부터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을 통치한 시간이 거의 48년이나 된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건립한 나라였고, 만주족은 8기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상3기, 하5기로 나누는데 서태후의 가정은 상3기에 속한 귀족 집안이었다. 17살에 황궁에 들어간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년동안 노력하였다. 황궁에 궁녀, 황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황제의 눈에 들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황제의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황태후로 된 후부터 매일 경극을 보았고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산보를 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래소리를 따라 찾아가보니 웬 이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로부터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왕자를 출산했다. 역사에 의하면 함풍황제 생전에 서태후는 그렇게 총애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후가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가 함풍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1860년 영국군이 중국을 침략 했을때 함풍황제는 열하로 도망가 병들어 죽고 말았다.
함풍황제가 죽자 그의 유일한 아들인 서태후가 낳은 동치 황제가 황제로 되면서 황비에서 황태후가 되었는데 서쪽채에 살았기에 서태후, 그리고 황제의 황후도 황태후로 되었는데 동쪽채에 살았다 하여 동태후라 하였다.
결국에는 동태후가 제1태후, 서태후가 제2태후였고 동태후는 동치황제의 양모였고 서태후는 동치황제의 생모였다. 즉위한 동치황제의 나이는 겨우 여섯살밖에 되지 않았기에 두 태후가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또한 두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서태후는 야심가였으며 정치에 흥취를 가졌고 동태후는 정치에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인자하고 사리 밝은 동태후때문에 서태후는 대신들한테도 환심을 살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때 부터 서태후는 동태후를 미워하게 되고, 6살에 즉위한 동치황제가 17살이 되자 결혼하고 두 태후의 수렴청정을 끝내기로 결정했지만, 동치황제 자신도 생모인 서태후의 성격을 닮아서인지 폭주가이고 성격도 날카로왔다. 그 후 생모인 서태후는 항상 정치만 관심하고 무슨일이나 보고를 받기를 원했고 아들의 주관대로 결정을 못하게 하다보니 충돌이 많았고 동태후는 조용했다. 그러니 동치황제는 차츰 생모인 서태후를 멀리하고 동태후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를 택할때도 동치황제는 양모인 동태후가 좋아하는 여인을 황후로 맞았고, 이런 일들로 서태후는 동태후 때문에 자기와 친아들사이의 관계도 벌어진다고 동태후를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했다.
결국 동태후는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 모순의 충돌이 어디서 일어났는가 하면 어느해 추석날 동태후, 서태후는 궁중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함풍황제의 릉에 제사 지내러 갔다. 제사 지낼때 동태후는 서태후더러 한발자욱 뒤에 서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함풍황제 생전에 동태후는 중궁태후(제1황후)고 서태후는 황비였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한 서태후는 동태후를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황궁에 돌아온 서태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반면에 한가지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함풍황제가 죽기전에 동태후한테 준 밀서였다. 서태후의 됨됨이를 알고 있는 함풍황제는 서태후가 자기아들이 황제로 되었다 하여 동태후를 무시하여 해하려 하면 이 밀서의 내용대로 서태후를 죽여 버리라는 것이었다.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마침 동태후가 감기로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서태후는 한가지 꾀가 생각났다.
동태후의 병이 나은 후 서태후는 동태후를 보러갔다. 동태후는 태후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서태후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언니가 몸져 눕자 너무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중약에 사람 피를 타서 먹으면 곧 나아질 거라고 해서 내피를 중약에 넣어 언니한테 대접했더니 과연 언니의 병이 나아졌다고 했다. 원래부터 마음이 약한 동태후는 이 말에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며 동생이 이토록 나를 생각하는데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하면서 함풍황제가 준 밀서를 꺼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그후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180도로 틀려졌는데 동태후는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한번은 서태후가 몸져 누웠다. 동태후는 서태후를 보러 몇번 다녀왔는데 서태후의 태도는 웬일인지 친절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몸져 누운 서태후가 동태후한데 전병을 보내왔는데 동태후는 그 전병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던 것이다. 동태후가 죽었다는 소식이 궁중에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소식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의심하였다. 무엇때문인지 동태후는 몇 일 앓지도 않고 죽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동치황제가 황후를 택할 때 자기 의도대로 하지 않았다하여 황제와 황후의 접촉을 자주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동치황제의 황후를 핍박했다. 이에 너무나도 실망한 동치황제는 타락하기 시작했는데 밤이면 변복을 하고 몰래 기생집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얼마 후 병(천화)들어 죽고 말았다. 아들이 죽자 서태후는 자기가 계속 수렴청정하기 위하여 남편을 핍박해 죽였다는 죄명으로 동치황제의 황후를 죽인다. 그리고 또 3살밖에 안되는 광서황제를 자리에 올려놓고 수렴청정을 계속한다. (광서황제는 서태후의 여동생과 서태후의 시동생이 낳은 아들이다.)
후에 광서황제가 19살이되자 서태후와 정치상 충돌이 있었고 서태후는 보수파의 대표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광서황제는 유심파인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 사람들의 지지하에 유심파에 의해 군정 실권을 잡으려 하였고 개혁을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1898년에 "유심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무술변법이라고 하였다. 허나 103일만에 변법은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담사동 등 개혁파는 살해되었고 강유희, 양계초 등은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광서황제는 요즘의 가택연금으로 생활했다. 광서황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광서황제는 10년간 같혀 있었으며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전에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
서태후는 극히 부와 타락한 생활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한 식탁은 먹는 것이고 한 테이블은 상상만 하는 것이었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짝은 빵)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그 당시 이 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입는 사치꾼이었고, 또한 아주 거짓투성이었는데 자기의 존엄을 위하여 줄곧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서태후의 말에 의하면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 했는데 광서황제의 아버지는 광서황제를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난다고 했다. (정상적 사람이 하루에 머리카락 50개 빠지는 건 정상) 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태후는 아주 잔혹했는데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 한다. 서태후 자신은 매일 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는데 매일 저녁 두 애기 엄마는 목욕을 한 후 몸에 붉은 천을 감는데 젖만 내놓고 다 감싸고 서태후가 침대에 눕고 젖먹이는 애기엄마는 무릎을 꿇고 젖을 먹도록 했다. 중국의 여인들이 남자한데 쎈양하는 풍습이 아마도 서태후한데서 전해졌다고 본다.
서태후의 생애에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뜻인 즉 서태후가 비록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문의 중간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으며 황제의 결혼식 날 황후의 가마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멸망과 보석광 서태후
청나라의 멸망은 외세의 침입과 내부의 부정부패로 그 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청나라 마지막 황태후인 서태후 쯔시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보석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초상화를 보면 화려함이 극에 달함을 느낄 수 있다.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으며,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어깨 망토를 입었다. 손목에는 비취팔찌가 끼워져 있고,
손가락에는 비취 반지,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고 있다.
비취의 아름다운 녹색과 견고성은 중국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비취의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은 신비로워서
만지거나 쥐고 다니면 생각이 집중돼 명상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새끼 손가락 크기를 아무런 무늬가 없든지 정교하게 조각을 하든지 해서 오래 간직하면 매끄러운 광택이 더해졌다. 서태후도 작은 오이만한 것을 조각하여 항시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비취의 전문가여서 만져만 보아도 감촉으로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해 냈다고 한다.
그녀의 식탁도 비취로 만든 접시, 컵, 젓가락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까지 하게 하였다. 이런 부귀영화는 거의 반세기 동안 날이갈수록 계속되어 부패가 심화되고 마침내 빈곤과 분열을 야기시켰다.
1900년의 외세 득세와 1910년의 반외세 혁명가들에 의해 청나라의 왕조시대-비취의 마지막 황실시대는 멸망하고 말았다. 관료와 하인들이 이 엄청난 비취들을 훔쳐내어 팔아 먹은 일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것은 보석이 인간의 마음을 탐욕으로 이끌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해할 수 있다는 좋은 증거이다. 보석의 아름다움에서 우주에 대한 겸허함을 배우지 못하고 그 아름다움에 대한 탐욕만을 일삼는다면 결코 자신도 보호할 수 없고 자기가 거하고 있는 주위의 물도 흐리게 된다.
서태후의 여름별장, 이화원(The summer palace:이허위엔)
199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된 중국에서 최대 규모를 지니면서 완전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황족 정원이다.
특히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 더 유명하며 북경 서쪽 외곽인 해정구에 위치, 북경 시내 에서는 15㎞ 떨어져 있다.
이화원의 전신은 북경 청의원으로, 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웠을 떠 함께 파괴되었다가 광서 14년(1888)에 서태후는 해군 군비를 이용해서 다시 재건했으며 이 때 이름을 현재의 "이화원"으로 바꿨다.
이화원은 무엇보다도 규모가 실로 엄청나며 총면적이 294㎡이다.
본래 평지였던 곳을 파내 만든 곤명호(昆明湖)와 호수에서 파낸 흙으로 쌓은 만수산으로 수성되어 있으며, 그 중 수면이 전체의 3/4을 차지한다.
서태후가 이화원에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둔 목적은 피서와 요양었으며, 1903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서태후는 이 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일이 많이 생기자 정원 앞 부분에 궁전과 활거주지구를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화원은 궁전과 정원 두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황족 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화원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곤명호는 인공호수이지만, 인공호수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보트와 곤명호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특히 곤명호 동쪽 기슭에 잇는 17 공교의 난간에 새겨져 있는 544마리의 사자도 볼만
하다. 또한 곤명호를안고 있는 만수산은 역시 곤명호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이화원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서 역시 인기가
좋다.
동궁문의 지붕아래 9마리의 룡과 "의화원"이라는 세글자를 새긴 간판이 걸려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광서황제가 쓴 글이라고 한다. 이 간판의 글에 관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자희태후가 해군군비에서 일부를 내와 파괴된 의화원을 재건설하려고 공정을 책임진 대신을 불러 간판을 하나 만들라고 하였다. 대신은 생각하다 끝에 광서황제한테 찾아가 간판의 글자를 써주기를 바랬다. 황제도 기분좋아 두말없이 종이에다 "의화원"이라는 세글자를 썼다. 대신이 보니 글자가 아주 보기가 싫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 그대로 간판에다 새겼다.
이튿날 자희태후가 의화원으로 순시를 와서 동궁문에 걸린 간판을 보고 크게 화를 냈다. 그리하여 공정을 책임진 그 대신을 불러 누가 쓴 글인가를 물었다. 광서황제가 쓴 글이라 하자 자희태후는 "이렇게 못난 글자를 어찌 걸수 있으랴, 인차 다시 만들어라!"는 명령을 내렸다.
광서황제가 이 일을 안후 놀라 급히 공정을 책임진 대신을 불러 글자를 다시 연습한 다음 다시 쓰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대신의 추천으로 글자를 아주 잘 쓰는 한 목공을 불러 글자쓰는 법을 배우려 하였다. 광서황제는 그 목공을 스승처럼 모셨으며 또한 부지런히 연습하여 얼마 안지나 글체가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다. 하루, 광서황제는 문무대신들을 불서놓고 종이에서 유력하게 "의화원"이란 세글자를 쓴후 자희태후에게 보냈다. 자희태후도 본후 흡족해하면서 황제의 신분을 상징하는 9마리의 룡을 동시에 새겨넣으라고 하였다. 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수 있는 간판이 생긴것이다.
돌로 만들어진 배, 청안방
석방이라고도 한다. 1755년에 건조, 몸체는 거석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총길이 36m, 상하2층 선실이 있다.
"물(백성)은 배(왕조)를 띄울 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뜻을 취하여 청왕조는 반석과 같이 튼튼하여 물이 전복시킬 수 없음을 비유하였다.
서태후는 이 곳 여름 별궁에 기거하면서 군함 의 건조비를 유용하여 움직이지 않는 돌배를 만들었다. 청나라 말기 잇따른 외우내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궁전 양식의 대리석석방에서 파티와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자희태후가 생활하던 낙수당
동쪽은 옷을 바꿔입는 갱의실이고 서쪽은 자희태후의 침실이다. 여기는 또한 중국에서 처음으로 전등을 쓴 곳이라고 한다. 1903년 당시 북경은 8국연합군에게 점령당하였었는 데 한 독일상인이 중국에 전등을 팔아 횡재하려 하였지만 자희태후가 반대하여 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독일상인은 전등을 중국에 팔려면 자희태후부터 전등을 쓰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당시 자희태후신변의 사람을 매통하여 자희가 없는 틈을 타서 낙수당에 전등을 안장하였다. 저녁무렵 자희태후가 방으로 들어오자 방에 걸린 "가지"를 보고 왜 집에 이렇게 많은 "가지"가 걸렸는가고 물었다. 시종이 문뒤에 있는 스위치를 넣자 집안이 갑자기 오색찬란하게 반짝이었다. 이 "가지"가 바로 전등인것을 알게되자 자희태후는 더이상 전등이 중국에서 판매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자희태후가 생일을 경축할때 대신들의 축하와 예물을 받던 곳 배운전
앞에 배운문, 이궁문이 있고 양쪽에 옥화,방휘,운금등 사배전이 있다. 배운전은 의화원건축가운데서 가장 장엄한 건축이다. 현재 진열한 물품은 대부분 자희태후가 70세생일을 경축시 각지에서 보내온 예물들이다.
백인유신기획한 곳, 인수전
원명은 근정전이었는데 광서황제시기 인수전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뜻인즉 "시인정자장수" 즉 "인자한
정치를 하는 황제는 장수한다"는 뜻이다.
인수전은 청조말기 자희태후와 광서황제가 정치사무를
보는 주요장소이며 중국 유명한 "백인유신"변법을
기획한 곳이다.
1898년 광서황제는 여기서 개량파대표 강유희를 만나 총리로 임명하여 변번의 서막을 열었던것이다. 하지만 이 변법은 봉건보수파세력의 반대로 103일밖에 견지하지 못하여
"백인유신"이라 한다.
돌숲, 꽃, 호수...자연이 빚은 보물창고, 곤명호
검회색 돌기둥이 가로수처럼 널렸다.
중국 운남성의 성도인 곤명에서 동남쪽으로 126㎞. 잠결에
내다본 창밖 정경은 무릉도원이다. 들과 산을 온통 뾰족
돌기둥이 뒤덮었다. 곤명의 '제1 명승지'인 석림. 돌바위
행렬은 3 4㎞ 이어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350㎦ 구간에
기이한 풍경을 연출한다. 국내 서해안에서나 볼 수 있는
카르스트 지형이 해발 1,900㎞ 고원지대에 펼쳐진다.
석림 중 일부는 대석림,소석림으로 이름 붙여져 중국 4대 절경
의 하나가 됐다.
돌기둥과 돌벽은 잔잔한 5m 짜리부터 40 50m의 웅장한 것
까지 각양각색이다. 장군석,시인석 등 다양한 형상을 담았다. 석림의 대표적인 기암괴석인 '아스마석'은 애인과 이별한 '이족' 처녀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열대우림처럼 빽빽한 대석림은 영화
'서유기'의 촬영무대였다. 망봉정에서 조망하는 돌밭은 베트남 하롱베이의 돌섬처럼 마음을 사로잡는다.
석림 초입에는 곤명의 대표적인 소수민족인 이족 처녀들이 안내를 맡는다. 이족 여인들은 머리에 부리달린 모자를 썼다. 부리가 2개면 처녀,1개면 결혼을 앞둔 신부,부리가 없으면 아줌마다. 부리를 함부로 건드렸다면 큰 코 다칠 일. 이들에게 부리를 건드리는 행위는 '청혼'을 의미한다.
석림의 감동은 구향동굴의 웅대함으로 이어진다. 곤명에서 석림으로 향하는 길목. 의량현으로 비포장도로를 1시간 달리면 구향동굴이 몰래 숨어 있다. 7년 전 땅꾼 할아버지가 발견한 구향동굴은 '헤비급' 규모다. 동굴안에 시냇물이 흐르고 거대한 폭포까지 형성됐다. 동굴을 가로지르는 데만 2㎞. 구향동굴 인근에만 7,8개의 대규모 동굴이 미개발 상태로 숨죽이고 있다. 동굴 구경은 일단 나룻배를 타고 협곡을 관람하는 데서 시작된다. 동굴 입구까지 냇물을 따라 스산한 절경을 즐기면 본격적인 동굴탐사 스타트. 운동장 만한 동굴터에 세계 최대 규모의 계단식 밭까지 2시간 코스 내내 눈이 현란하다. 구향동굴은 아직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여행지. 탐사의 마지막은 리프트를 타고 동굴 전체를 조망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중국 동남부에 자리잡은 곤명은 이곳 명승지를 어우르는 시발점이다. '꽃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해발 1,895m에 자리잡아 늘 봄기온을 유지하며 사계절 끊이지 않고 꽃이 핀다. 99년에는 국제꽃박람회가 열렸다. 따뜻한 봄의 도시를 떠나기 싫어하는 곤명주민에게 '집안에 갇힌 바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50도 짜리 독한 고량주를 마셔도 술이 금방 깰 정도로 공기가 맑고 깨끗하다. 마라톤 스타 황영조는 고산지대 곤명에서 폐활량을 늘렸다. 중국 월드컵 대표팀도 지난달 한국과의 경기 전 곤명에서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었다.
곤명에는 26개의 소수민족이 뒤섞여 공존한다. 이족 여인들이 부리 달린 모자를 쓰고 애타게 청혼을 기다리는 것과 달리 운남 서쪽에 거주하는 묘소이족 여인들은 거칠다. 여자들이 남자를 받아들이고 내쫓을 권한이 있다. 한때 대만 관광객들은 묘소이족 여인들에게 즉석 연애용 타깃이 되기도 했다. 흰옷을 입고 흰집에 거주하는 백족은 뱀뼈를 이용한 건축물을 짓고 살았다. 라우족,와족은 원시민족들. 라우족은 호랑이를 사냥하고,대문에 물소 해골을 달아놓는 와족은 테크노댄스를 추듯 헤드 웨이빙을 풍습으로 즐긴다. 곤명에서 남쪽으로 6㎞ 떨어진 운남민족촌은 중국 최대의 민족촌. 20여개 소수민족들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곤명의 땅이 철분 때문에 붉은 것과 달리 중국에서 6번 째로 큰 호수인 곤명호는 푸른빛을 띤다. 바다같다. 이 지역의 경관은 곤명호 때문에 더욱 눈부시다.
돌바위 동굴 호수 소수민족이 어우러진 곤명은 중국의 자연과 민족을 한꺼번에 담 고 있는 '보물창고'다. 그곳에는 신비를 갈망하는 발길을 유혹하는 묘한 매력이 녹아 있다
Behind Story....
1841년 추운 겨울 밤..여관비 낼 돈이 없어 거리에 내몰린 가난한 모녀가 있었으니 바로 서태후이다.
만주 가난한 귀족의 딸로 태어나 잦은 전란으로 인해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하던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유엔치"는 어느날 우체부로부터 금화 20냥을 전해받게 된다. 그러나 그 금화는 그녀의 어머니이름과 비슷한 어떤 사람에게 전해져야 할 돈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잘못 배달된 금화 20냥으로 추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그녀의 나이 17세때 그녀에겐 기병부대 대장이었던 영록이란 약혼자가 있었다. 그러나 약혼자가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빼어난 외모로 인해 함풍황제의 궁녀로 선발된다.
이때부터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된다.
노래를 잘 부르던 그녀는 신들에게 돈을 주어 황제를 자기가 있는 곳으로 유인하여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비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그녀의 약혼자 영록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자금성 근위대장으로 오게 된 것이다.
영록은 그녀를 보자 황제에게 말씀드려 자기에게로 돌아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야심은 상당했던 것이다.
황제는 영록의 공이 크니 황실에 있다는 그의 약혼자를 돌려주겠다고 말하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녀의 이름과 모든 것을 잊었다고 고한다. 그리고 그녀의 왕궁친구로 남아 죽는 그날까지 그녀를 지켜주게 된다.
그녀는 고마움의 표시로 영록과 그의 아내 사이에 태어난 아들에게 '부의'란 이름을 지어보내고 이가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황제"이다.
1881년 그녀가 수렴청정한지 20년되던날 오래된 죄수들을 심사하여 사면하기로 한다.
한 죄수에게 죄를 묻자 대답하기를 "전 그저 이름을 잘못 알았던 죄밖에 없습니다."라고 한다. 그렇다. 바로 40년전 서태후의 어머니에게 이름을 오인하여 금화20냥을 전해준 그 우체부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돈을 횡령한 것이라 오인받아 40년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에 깜짝 놀란 서태후는 자신이 바로 그 금화를 전해받은 아이라고 밝힌다.
그 금화로 따뜻한 신발을 사신을 수 있었다며 자신의 황금신발을 벗어주게 된다.
그 신발은 몇십년 후 한 경매장에서 14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팔렸다고 한다.
소감
이번 과제를 하면서 서태후란 여장부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반세기를 호령한 서태후..
그녀의 어머니이름 덕분에 어린 시절 굶어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녀의 노래 솜씨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 잡았으며, 그녀의 약혼자의 배려로 황태후 자리까지 올라 자신의 이름이 적힌 밀서를 자안황후의 마음을 녹여 없앰으로써 48년간이나 수렴청정할 수 있었다.
이런 그녀의 인생을 살펴보았을때 사람에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강한 운명이란게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녀 스스로 개척하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그런 그녀의 강하고 질긴 운명이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을수 있었던게 아닐까...
그 오랜 옛날 중국 역사에 그런 여걸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여자로서 자부심을 일깨워 주었다.
물론, 그녀의 야심은 대단하여 폭정을 이끌었고 사치 또한 심하였지만 그녀의 그런 성격이 중국 역사와 문화를 만들지 않았는가?
이상 아시아의 여걸 서태후에 대해 이모저모 살펴보았다.
두서없고 서툴지만 나름대로 의미있고 흥미로운 계기가 되었다.

 

                 중국 이화원 서태후 별장                 

봉황 임정호 | 조회 8324 |추천 0 | 2012.11.22. 20:11    

 


실존 인물인 "서태후" 얘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세시가 무엇일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인지 나는 모르지만 "서태후"하면 우리의 "장희빈"을 떠올리거나 또는 여장부,색기 가득한 여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선입견이 무섭다 정말~

최근엔 "대조영"에서 나오기도 하는 미인? 아쉽게도 서태후가 아직까지는 비중이 매우 작다.

이 소설을 읽어 가면서 점점 내가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고 점점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서양작가인 펄벅씨가 다채롭게 펼쳐낸 이 여자가 어떤 모습일지는~^^

단숨에 읽자니 조금 부담갈수도 있는 분량이다.

영국의 대처수상처럼 중국을 휘어잡았던 철권통치의 상징인 여자가 서태후이다.

독한x하면 떠오르는 그런 사람말이다.흔히 볼수 없는 그런 악녀..

권력투쟁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냉정하고 때론 잔인한 여인이었다.그러나 여자이다.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하고 사랑의 아픔도 느끼는 사람이었다.요새 드라마에 나올법한 얽히고 얽힌 스토리는 다 가지고 있는 서태후.사랑이냐 권력이냐.~꼭 가지고 싶은것 둘을 가질수 없는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가보다.

두마리 토끼는 잡기 어렵다. 수많은 영웅들이 쫒다 인생이 험하게 내팽개쳐졌다.실제 서태후 얼굴을 보니까 애처롭기까지 했다.여자는 늙어갈수록 구미호가 된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그녀의 인생은 판타지 였다.당시 역사적 배경과 사실을 통해 그녀의 강단을 보여주고 있다.

펄벅여사가서태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우리왕조의 황후에게 관심을 돌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태후 보다 화려하고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나올텐데말이다.

펄벅은 수많은 장치들을 두고 펄벅을 시험하고 있다.그 하나하나를 극복해나가고 해결하는 모습을 통해 서태후라는 여자를 아주 잘 꾸며놓았다.아주 예쁘게 때론 아름답고 멋진 모습으로~

제목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저는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었다.

-젖 냄새를 풍기며 비단 이불속에서 잠이 든 아들을 보자 마음이 애잔해져 좀처럼 떠날수 없었다.그녀는 아기 옆에 앉은 유모와 시녀를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잠시도 태자 곁을 떠나서는 안 되느니라."

"명심해라.내가 돌아왔을대 만약 상처를 입었거나,울고있거나 붉은 반점이 있으면 매를 맞을 것이다.또한 태자에게 무슨일이 생긴다면 그 대가로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야." p143

풋풋한 그런,,,뭐랄까 안쓰럽게 흐느끼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연인...서태후"

서태후도 엄마이고 여자다

사랑을 하고 싶었고 사랑하는 남자를 자식을 버리고 권력을 탐해야 하는 그런 상황을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서태후가 사랑했던 여름별궁 이화원
서태후가 동치·광서 양 황제시절 48년이나 철권을 휘두르며 실제 황제의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시기 이화원은... 중국책에서는 젊은 시절 서태후 얼굴이 선녀같이 아름다웠고, 목소리가 꾀꼬리같다고 했는데, 중국 선녀들은 원래 말상인가? 어쨌건...

연인 서태후
실제 서태후 얼굴을 보니까 애처롭기까지 했다.

여자는 늙어갈수록 구미호가 된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그녀의 인생은 판타지 였다.

당시 역사적 배경과 사실을 통해 그녀의 강단을 보여주고 있다.

펄벅여사가 서태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우리왕조의 황후에게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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