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중세사
무사단의 형성
형태만 남은 율령체제 위에서 일본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10, 11세기에 장원을 지배하는 영주들이 권익을 더욱 확장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비호를 받는 영주와 이들의 보호를 받는 약한 영주 사이에 차별이 생겨나면서 계열화된 장원적 체계가 자리잡아갔다.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제를 유지하려는 중앙 권력과 장원을 기반으로 삼는 지방 호족 사이에도 긴장이 높아갔다. 정부는 '장원정리령'(莊園整理令)을 내리는 등 기득권 방어에 나섰으나 당시의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영주들은 직접·간접으로 중앙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도 유지만을 목적으로 자신들의 권익을 침해할 정책을 세울 리는 없었다.
느슨하게 출발한 장원의 봉건적 관행은 점차 조직화되어, 권력자나 사사(寺社)로 이루어진 명의상의 최고 권력자인 혼케[本家]와 그 아래 료케[領家], 재지(在地) 관리인인 쇼칸[莊官], 자신의 이름으로 묘덴[名田]을 소유한 묘슈[名主] 등이 저마다 권익을 나누어 갖는 형태로 되었고 나아가 자작과 소작도 각자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업무도 나누어지고 자위력도 필수적이 되었다. 흔히 장원의 영주이기도 했던 사찰과 신사도 독자적 무력을 기르는 일이 예사였다. 사무라이 즉 무사 집단이 발생한 것이다.
무사단의 우두머리인 동량(棟梁)은 주로 지방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왕족이나 귀족들의 후손으로, 미나모토 씨[源氏], 다이라 씨[平氏] 출신들이 대표적이었다. 무사단의 형성은 분쟁의 무력 해결을 가속화했다.
장원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들이 거느리는 무사단의 형성은 지방과 지방 사이의 세력다툼을 필연적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지방세력은 율령 왕조체제를 고수하려는 중앙 세력과 상쟁을 거듭하여 일본은 걷잡을 수 없는 내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가마쿠라 바쿠후
12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두 전란 호겐[保元]과 헤이지[平治]의 난은 복잡한 덴노 계승 문제로 출발했으나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좀더 강한 무력이 정권에 더욱 가까워지는 새로운 전통이었다.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는 맞수였던 미나모토를 제압하고는 왕족과 외척관계를 만들어 중앙의 권력기반을 다지고, 또 한편으로는 주요지역 무사들과 주종관계를 맺고 지토[地頭]로 임명함으로써 귀족정치와 군사정치의 과도적 양면성을 보였다. 동시에 송선(宋船)을 유치하여 토지와는 또다른 경제적 기반인 대송무역의 활성화를 꾀한 사실은, 대외관계에 있어서 경제적 중요성이 본격화되는 중세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일본판 서곡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급반전하여 밀려났던 미나모토가 다이라 타도 거병에 성공한 것이다.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아직 여력이 남아 있던 후지와라 세력까지 일소한 뒤, 가마쿠라[鎌倉]에 바쿠후[幕府]를 세웠다. 군사적 패자(覇者)의 정치적 거점이 마련된 것이다. 덴노를 찬탈하기보다는 명목만 남은 덴노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즉 '쇼군'이라는 칭호를 받고 실권을 택했던 것이다.
바쿠후와 쇼군이라는 12세기말에 태어난 이 군사통치는 일본에 근대적 정권이 들어서는 1868년까지 약 680년간 지속된다.
그 배경과 본질은 요컨대 개신 이래 율령체제라는 합법적이자 중앙집권적인 관료체계의 외곽에서 성장해왔던 실세가 그들의 기반인 토지와 무력의 집중을 조직적으로 규제하기 위한 통치체제를 수립한 데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다른 역사와 비교해볼 때 일본 역사의 가장 두드러진 한 특성이다.
요리토모는 가신들인 고케닌[御家人] 중심으로 체제를 꾸려나갔다. 일정한 소령(所領)을 보장하는 대신 충성을 서약받고, 각 구니에서 검색과 사찰을 담당하는 슈고[守護]나, 또는 그 영지와 장원의 경찰권과 징세권을 맡은 지토[地頭]로 임명함으로써 권력의 기본적인 틀을 짰다.
물론 중앙에는 일반 정무와 송사(訟事), 그리고 무사들을 통괄하는 기구를 쇼군 아래 두었다. 미나모토의 대가 끊겨 처가인 호조[北條] 가문이 집권하는 사이에 덴노 세력의 도전이 있었으나 오히려 무가 세력을 더욱 다지는 결과만 빚었다.
이 시기에 바깥 세계는 몽골 제국의 팽창에 휩쓸리고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대제국이 말머리를 일본으로 돌려 고려의 해군력을 타고 1274년과 1281년 2차례에 걸쳐 규슈로 침공했다. 그러나 모두 폭풍으로 전투다운 전투도 못하고 물러났다(→ 태풍). 신통력으로 가미카제[神風]를 일으켜 침략군을 막아냈다는 신도와 불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반면, 병력과 물자를 총동원했던 가마쿠라 바쿠후는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이 기회에 덴노 세력의 중흥을 꾀하는 기도가 있었으나 새로운 쇼군 아시카가[足利]의 대두로 좌절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가는 남북조[南北朝]로 분열·대립하다가 60년 만에 재통합되지만 왕가, 즉 공가(公家)는 허수아비로 남게 되었다.
무가(武家)의 우세가 확고히 되었다. 몽골 침략과 발맞추어 무사집단이 지방호족화 되고 있는 추세 속에서 가마쿠라 바쿠후의 봉건체제가 원래 모습으로 유지되기는 어려워졌다. 바쿠후는 각지의 봉건영주를, 각 영주는 가신들을 지배함으로써 간접적이며 중층적인 봉건제를 재정립하려 했다. 그러나 바쿠후가 위치한 교토[京都] 주변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멀리 떨어진 지역은 달랐다. 오히려 힘이 우선하는 풍조가 일었다.
센고쿠 시대
이러한 과도기적 상태에서 쇼군가(家) 내부 문제로 분쟁이 일자 전국이 내란상태에 빠져들었다.
오닌[應仁]의 난으로 불리는 수도 교토에서의 어지러운 상쟁은 11년이나 끌었다. 고도(古都)가 잿더미로 화했고 쟁란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정치적 통일력이 사라졌다. 바쿠후를 비롯한 일체의 기존 권위가 떨어지고 도처에서 하극상(下剋上)이 일어나 힘이 곧 정의(正義)가 되었다.
15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약 1세기를 지속하는 이 센고쿠 시대[戰國時代]는 신구 세력이 각지에서 다투어 세력을 넓혀 이른바 센고쿠 다이묘[戰國代名]가 대두했다.
저마다 분국법(分國法)·가법을 제정하고 서양에서 막 전래된 철포를 도입하는 등 부국강병에 힘썼다. 가신단을 성채에 집주시키고 이들을 수발할 상공업자들이 모이게 되어, 교토·나라[奈良]·가마쿠라 등 재래의 정치·종교적인 도시와는 달리 무사와 상공업자가 득실거리는 새로운 형태의 군사·상업 도시인 조카마치[城下町]가 발달해 각 영국(領國)의 중심을 이루었다.
혼란중에도 농촌에서는 이모작과 목화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상공업자들은 일종의 동업조합인 자[座]를 조직해 생산과 판매의 독점을 꾀했다(→ 길드). 물물교환 외에 송전(宋錢)이 유통되었으나, 먼 지역간에는 환(換)이 통용된 사실은 이 시기에 전국 단위의 경제가 형성중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외무역은 경쟁적이었다. 명(明)과의 무역은 15세기초부터의 중국에서 허가받은 감합무역의 형태였으며, 자본은 주로 서부지역 상인들의 자금과, 바쿠후·다이묘·사사(寺社) 소유의 선박이었다.
도검·동·유황을 주고 동전·비단제품을 받아오는 일종의 조공무역의 형태였다.
그러나 제한된 공식무역마저 1550년 이후 끊기게 되자 왜구(倭寇)가 발호하게 되었다. 많은 경우 관(官)이나 거상들이 뒤를 대었다. 중국·조선의 해안을 끈질기게 약탈하던 왜구 때문에 건국초의 명은 해안을 봉쇄하고 주민 소개 조치까지 취했고, 고려의 이성계는 왜구 정벌을 통해 쿠데타에 이르는 실권을 다지기도 했다.
왜구란 조선으로서는 임진왜란에 이를 때까지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용해서 처리해야 할 가장 거추장스럽고도 지속적인 외환이었다.
이 시기에도 대륙으로부터의 문화적 유입은 끊이지 않았다. 신유학은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들어왔고, 임제종(臨濟宗)·조동종(曹洞宗) 등 선(禪)불교가 들어와 난세에 지친 무사들을 사로잡았다.
뿐만 아니라 재래 일본 불교도 혼란한 시류를 타고 누구나 '나무아미타불'만 외면 극락정토 왕생이 가능하다는 정토종(淨土宗) 등을 만들어내어 무사들과 의욕을 잃은 서민들을 달래었다.
몽골 침략 때 활약하던 니치렌[日蓮]은 새로운 법화종(法華宗)인 니치렌종[日蓮宗]을 열었다.
또한 난세 속의 내면적 성찰과 사색의 요구를 채우 듯, 추상적인 안뜰과 차를 마시며 수면을 건너 바라볼 수 있는 전각 건축이 유행했다. 무사·승려·서민이 어울렸던 이 시기의 문화는 일본의 역사적 풍토에서만 자랄 수 있는 무사의 문화와 정신을 배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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