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팔작전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무적의 군대라고 자칭하던 일본군, 임팔에서 최악의 추태를 보이다.
1998년 무렵, 인터넷 통신 매체인 <나우누리>에서는 박상욱 씨가 쓴 ‘구타교실’이라는 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다. ‘M고(高)’라는 한 사립 고등학교를 통하여 한국 사회의 후진적이고 낙후된 모습을 풍자하는 소설이었는데, 본문에 등장하는 M고의 이사장은 입만 열면 “옛날 일본군은 세계를 재패한 무적의 군대였다.”라며 일제를 찬양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M고의 늙은 이사장이 유독 특별한 인물이어서 그런 말을 하고 다녔을까? 그렇지는 않다. 당장 내 아버지만 해도 술이 들어가면 “일본은 미국 말고는 어느 나라와 싸워서도 져 본 일이 없다. 2차 대전 때 미국이 원자탄만 만들지 않았으면 일본이 이겼을 것이다.”라면서 열변을 토했으니까. (그런데 일본이 이겨서 우리한테 좋은 거 있어요?)
사실 이런 식의 일본군에 대한 이미지는 비단 몇몇 인사만이 아닌 50~60세 이상의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이 간직한 것이기도 하다. 절대 다수의 한국인이 존경하는 박정희와 김종필 등의 권력자들만 해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였지 않은가?
그렇다면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은 정말 ‘무적의 군대’였던 것일까? 그 ‘무적의’ 일본군이 고작 원자탄 두 방을 맞고 미국에 무릎을 꿇었다면 너무 허탈해서 맥이 빠지는 일이다.
과장이나 신화가 아닌, 진짜 일본군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임팔 작전을 참고하면 된다. 이 임팔 작전의 개요를 알게 된다면 구 일본군이 ‘무적’이었다는 환상이 철저하게 부서질 것이다.
1943년 3월, 도쿄의 일본군 수뇌부는 인도 북동부의 작은 도시인 임팔을 점령하는 이른바 ‘임팔 작전’을 기획한다. 당시, 인도가 영국의 지배하에 있는 상황에서 임팔을 비롯한 인도의 동부 지역을 일본군이 점령하게 되면, 일본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중국에 영국이 지원을 하는 것을 차단함과 동시에 인도의 영국 지배 체제를 뒤흔들어 인도에 친일 정권을 수립할 가능성도 컸다. 실제로 인도의 반영(反英) 운동가 찬드라 보즈는 일본의 수상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樹)와 만나 일본군이 임팔을 거쳐 인도로 진격해 오면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내응하여 인도에서 영국군을 몰아낸다는 약속까지 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작전의 실행 여부를 두고 일본군 내부에서도 의문을 품거나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 전선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일본군의 보급로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실제로 이 무렵, 일본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의 맹렬한 공세를 맞아 크게 고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저 먼 인도에까지 군대를 보낸다면, 태평양 방면의 전력이 분산되어 크게 약화되고 자연히 전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군인 출신 수상 도조 히데키의 심복인 육군 중장 무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는 이런 임팔 작전의 실행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그는 도조 히데키에게 끈덕지게 졸라대 결국 작전의 재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임팔 작전을 승인해준 도조 히데키 본인은 정작 이 계획이 성공하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다구치 렌야의 사진. 한국의 네티즌들은 그가 임팔 작전을 무모하게 고집하다 일본군의 전력을 붕괴시킨 점을 가리켜 “일본인 출신 독립 운동가이니, 한국 정부에서 독립 유공자 훈장을 수여해야 한다.”라고 조롱했다.)
임팔 작전이 통과되자 가장 신이 난 쪽은 작전의 구상자인 무다구치 렌야였다. 물론 일본군 수뇌부 안에서도 임팔 작전의 성공 여부에 대해 심각한 반론들이 무수히 제기되었다. 미얀마에서 인도까지라면 전선이 더욱 길어지고 그만큼 보급선도 길어질 텐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라는 반론도 나왔지만 이에 대해 무다구치는 다음과 같이 태연하게 반박했다고 한다.
“우리 황군(皇軍)이 가는 지형은 산과 정글로 우거져 있다. 눈에 보이고 널린 게 풀과 나무인데, 무슨 보급이 어렵다는 것이냐? 배고프면 그대로 뜯어서 먹으면 될 게 아닌가? 그리고 우리 일본인들은 옛날부터 고기를 먹지 않고 풀만 먹어도 건강하게 잘 살아왔다. 고기와 빵을 먹어야하는 서양인들과는 다르다.”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 스스로도 못내 불안했던지 보급품을 실어 나를 방안을 내놓았다. 이름 하여 ‘칭기스칸 작전’인데 옛날 몽골의 칭기스칸이 세계 정복을 했을 때, 별도의 치중대를 두지 않고 소나 말 같은 가축 떼를 끌고 가다가 배가 고프면 그대로 잡아먹었던 것처럼 일본군도 임팔로 진격할 때, 물소 떼들에게 보급품을 지우고 가는 것과 동시에 물소들도 식량으로 활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참고로 중국의 당태종 이세민도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가축 떼를 끌고 가는 방법을 썼다.
이리하여 1944년 3월, 마침내 임팔 작전이 실행되었고 미얀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약 10만 명이 임팔 방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팔 작전은 그 출발부터 삐걱대는 조짐을 보였다. 무다구치가 자신만만하게 준비했던 물소 떼들은 정작 험준한 계곡으로 이동하자 대부분이 죽고 말았다. 강과 호수에서 살던 물소들은 건조한 고지대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칭기스칸 작전’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부스러져 버렸다.
또한, 무다구치가 주장한 것과는 전혀 달리, 임팔로 가는 밀림 지대에서 나는 풀들은 사람이 먹지 못하는 종류들뿐이었다. 나중에 굶주림에 못 이겨 아무 풀이나 닥치는 대로 뜯어 먹었다가 심한 배탈이 나 설사를 하다 죽어가는 병사들이 속출했을 정도였다.
더욱이 무다구치는 일본군이 싸워야 할 영국군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 전에 참모들을 상대로 “영국군들은 모두 겁쟁이라 하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놈들은 우리 대일본 황군이 공중에 대고 총 몇 발만 쏘면 벌벌 떨면서 항복해오는 얼간이들에 불과하다.”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수시로 했다고 한다. 이런 인식은 비단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군 장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양 전쟁 초기,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일본군이 손쉽게 점령하면서 영국군을 깔보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임팔 주변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은 일본군 수뇌부들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영국군들은 각지에 튼튼한 보루와 기관총에 탱크와 박격포까지 갖춘 상태였고, 여기에 비행기를 통한 공중 보급과 연합군인 미군의 지원까지 받으며 일본군의 공세에 전혀 압도되지 않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영국군을 얕보고 무작정 반자이!(만세라는 뜻의 일본어)를 외치며 돌격했던 일본군 병사들은 안전한 보루에서 보호받으며, 영국군이 쏘아대는 기관총 세례에 벌집이 되어 번번이 패주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영국군에 소속된 네팔인들로 구성된 구르카(Gurkha) 부대는 산악전과 정글 전투에 탁월한 기량을 보여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때의 정황을 묘사한 기록들에 따르면, 한 구르카 병사가 그들이 가진 검인 구크리(Khukuri)로 철모를 쓴 일본군 병사의 머리를 내리치자 그 병사는 철모와 함께 머리까지 쪼개져 즉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본군과의 정글 전투에 대해 “일본군과 숲속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상어를 잡으러 바다 속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이다.”라고 망설였던 영국군 장군들도, 구르카 용병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는 것을 보고는 이내 일본군과의 정글 전투에 자신감을 가졌다.
전황이 이렇게 악화되어 가는데도 무다구치는 초기의 작전을 개선하거나 아니면 서둘러 철수하여 남은 전력을 온전히 보존하는 일은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후방의 사령부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요정을 차려놓고 게이샤(기생)들을 불러 매일같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터에까지 여자를 데리고 와 놀아나는 일은 일본군 내에서도 흔한 일이었으니 무다구치 만을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아무튼 전방에서 말단 사병들이 영국군의 포화와 싸워가며 죽어가고 있는 동안, 총사령관은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는 모습이 일반 병사와 양식 있는 장교들의 눈에 좋게 보일리 만무했다.
자신을 둘러싼 여론이 악화되자 무다구치는 나름대로 개선책을 내놓았는데, 그것도 가관이었다. 기지 안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신불(神佛: 일본의 전통 신들과 부처가 합쳐진 것)에 승리의 기원을 올리는 축문을 읆어 대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무다구치의 축문을 들은 일본군 장병들은 “사령관이 귀신이 들렸나? 아니면 머리가 돌아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전쟁터에서 기도를 한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7월로 접어들면서 임팔을 중심으로 한 인도 동부 전선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다름 아닌 우기가 시작되면서 연일 비가 쏟아졌고, 그와 동시에 습기가 높아짐에 따라 각종 전염병들이 창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해 굶주린 상태의 일본군 병사들에게 전염병은 ‘그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였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병사들이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나갔다. 약간의 기력이라도 남은 병사들은 정글로 들어가 뱀이나 개구리, 심지어 벌레와 풀까지 먹으며 버티려 했지만 그런 것들로 배고픔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더구나 그것들은 소화되기 어려운 것들이어서 먹은 병사들은 굶주림보다 더한 배탈과 설사, 장염으로 인한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었다. 물론 무다구치는 병사들이 전염병과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동안, 안전한 후방의 사령부에서 최고급 식사를 즐겼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을 보다 못한 장교들은 “차라리 영국군을 공격해 그들이 가진 식량이라도 빼앗아 먹자!”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생각했고, 그대로 실행하기도 했지만 영국군이 순순히 식량을 내줄리 만무했다. 영국군 진지에 돌격한 일본군 병사들은 영국군이 맹렬하게 퍼붓는 대포와 기관총 사격에 피떡이 되어 무참히 살육을 당했다.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전투에 무의미한 개죽음만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무다구치를 제외한 온 일본군 장성과 병사들에게 퍼져 나갔다. 급기야 육군 31사단을 이끌던 사토 중장은 총사령관인 무다구치의 승인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철수하는 사태까지 강행했다. 임팔 작전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거기에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한 영국군과 미군 연합군은 일본군에 대한 역공세를 취하고 나왔다.
사태가 이쯤까지 치닫자, 무다구치도 더 이상의 전투 수행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사토처럼 철수하기로 했는데, 그러나 명색이 총사령관인 처지에서 차마 ‘철수’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가 쑥스러웠는지, 북쪽 전선을 둘러보고 온다는 핑계를 대고 재빨리 퇴각해 버렸다.
총사령관 본인이 포기한 전투이니, 다른 장병들로서야 더 이상 수행할 의지도 사라졌다. 먼저 퇴각한 사토 중장의 부대를 제외한 다른 부대들은 무질서하게 패주를 거듭하면서 질병과 배고픔에 지쳐 죽어간 동료들의 시체를 그대로 정글과 산악 지대에 방치하며 돌아왔다. 임팔에서 미얀마로 통하는 도로 곳곳마다 하얗게 변한 일본군 병사들의 유골이 가득 널려 있었다고 해서, 이 도로는 ‘백골(白骨) 가도’라는 섬뜩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나마 도망갈 수 있었던 병사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적지 않은 부대 병력들이 철수하지도 못한 채, 영국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고 죽어갔다.
임팔 작전은 이렇게 해서 끝났지만, 그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애초 작전에 동원된 10만 명의 인원들 중, 영국군과의 전투로 죽은 사상자는 3만에 달했고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굶어죽거나 전염병에 시달리다 죽거나 그밖에도 미처 도망치는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행방불명된 병사들도 2만 5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전체 인원의 절반 이상이 임팔 작전에서 죽어간 셈이다.
그러나 임팔 작전이 이렇게 파멸적인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부는 아주 조용했다. 무모한 전투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유족들이 정부 청사 앞으로 몰려가 반전 시위를 벌이거나, 전쟁을 고집한 책임자들을 처벌하라는 요구를 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정글과 물 속에 널린 우리 병사들의 시체,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구나. 나도 그렇게 님(천황)을 위하여 죽고 싶구나.”라는 노래까지 만들어져 임팔에서 개죽음을 당한 병사들을 찬양하며 오히려 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고 선동을 하는 정신병적인 분위기까지 연출될 정도였다.
위정자들의 무지와 무능으로 인해 수만 명의 국민이 애꿎은 죽임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나서서 항의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는 사회, 공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마구 유린해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세상,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알면 본받아야 할 이상향으로 삼자고 할 만 하다. 제국주의 일본은 이렇듯 멸망해야 마땅한 막장 국가였던 것이다.
임팔 작전을 적극적으로 주동했던 무다구치는 그 후로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수상인 도조 히데키의 심복이던 그는 자신의 인맥을 무기로 살아남았다. 그가 받은 처분은 육군 군사학교의 교장에 임명된다는 조치였다. 군사 재판이나 강등이나 지휘권 박탈도 근신도 아닌 전직에서 그친 것이다. 일을 맡아 실패했을 경우, 스스로 배를 갈라 책임을 진다는 사무라이 정신은 공염불에 불과했던 것일까?
2차 대전이 일본군의 패배로 끝난 이후에 무다구치 렌야는 다른 동료들처럼 연합군에 의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를 감싸주던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다른 장성들은 대부분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그는 살아남았는데 영국 측 판사가 그에게 내린 판결은 참으로 황당하고도 우스꽝스러웠다. 다름 아닌 임팔 작전에서 그가 벌인 무책임한 작전이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승리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그를 전쟁 범죄자로 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수치심을 아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워했을 법도 하건만, 그에게서는 전혀 그런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무다구치 렌야는 자신이 쌓은 부로 인해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으며, 임팔 작전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그건 내 부하들이 전부 멍청해서 그렇게 실패한 것이고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라는 주장을 계속해 양식 있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1966년 8월 2일, 그는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장례식장에 찾아온 사람들은 그의 아들이 뿌린 전단지를 받아들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임팔 작전은 전혀 자신의 잘못이 아니며, 모든 책임은 당시 참여했던 부하들이 져야 한다는 글귀였던 것이다.
사실, 임팔 작전의 책임을 모두 무다구치에게만 묻는 것은 어쩌면 부당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다구치가 그것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해도, 최종 결정권자인 도조 히데키나 주위의 참모진들이 끝까지 거부했다면 승인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최강과 동아시아 재패라는 망상에 빠져 있던 일본 군부는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무다구치가 펴놓은 피비린내나는 군국주의적 몽상을 선택하고 말았다.
이는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1905년, 기적과도 같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자신의 힘만으로 세계 최강대국 러시아를 이겼다는 착각에 빠졌고(러시아는 시대착오적인 전제 군주 국가였고, 발틱 함대는 낡은 구식 폐기물에 불과했으며, 무엇보다 일본의 전쟁 자금은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영국과 미국이 제공했다.), 이것은 전쟁을 담당한 일본 군부의 발언권을 크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1차 대전 이후 일본 사회는 군부가 정계와 재계를 제압하고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군국주의적 체재로 변질되었다. 일본군의 수뇌부들은 자신들만이 일본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광신적인 이념을 가졌고,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제거를 일삼았다. 심지어 천황을 대신한 최고 실권자인 수상조차 예외가 없었다.
일본 군부는 두 차례의 쿠데타를 일으켜 전쟁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수상 이누카이와 문부 대신들을 살해했고, 급기야 군인 출신인 도조 히데키가 수상이 되었을 정도로 사이코 같은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본을 번영과 발전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이 일본을 이끌고 간 길의 끝에는 원폭과 패망이라는 지옥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기 성찰과 반성이 전혀 없이 무작정 돌진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한 광신도 같은 일본 군부를 영웅시하며, 그들의 미친 짓거리마저 본받자고 주장하는 한국의 유명 인사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한심함을 넘어 절망마저 느낀다.
더욱 불행한 사실은 보급을 경시하고 단기 결전에만 치중했던 일본군의 전략 사상이 일본군 및 그들의 괴뢰 국가인 만주군에서 복무했던 한국군에게로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뒤에 가서 설명할 ‘국민방위군 사건’도 그런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오늘 아침 날씨가 제법 싸늘한 금요일 아침이다 내일은 산우회 일정이 잡혀 있는 날이기도 하고 저녁쯤엔 울산에 있는 아들이 여친과 함께 애비 생일(17일)이라고 상경 한다는 날이기도 하다. 특히 규수 회장의 열정에 덩달아 들떠 있는 나에겐 폭풍전야의 고요 같은 심사로 더욱 무료 하기까지 하다.
그래 한가로이 책장페이지나 뒤쳐기며 마침들려오는 .말레이항공기 실종뉴스에 말라까 해협까지 갔다는 얘기가 나왔다. 나는 문득 태평양 전쟁때 말라까 해협이 얼마나 치열한 전투 였다는 것과 인팔 전투가 지구상 가장 참혹한 전투 였다는 그런 기억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내가 어린시절 아마 중고교 시절 라디오 다큐드라마로서 나래이터가 낭독식으로 이어지는 드라마를 익히듣고 여러권으로 이어진 태평양전쟁사를 독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기억에 인팔작전을 검색창에 입력하고 그지역이 어디쯤 일까 알아 보기로 했다.
일본 전범자들이 제국의 야망 까지는 그렇다 하지만 그 전쟁의 끄트머리의 참상은 너무나 야만적이고 비열하고 우매한 짓거리였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정말 정이 가지 않는 놈들이다. 군사전술작전 에 있어서 작전이란 이름을 붙일려면 그 작전에 참여한 사람의 생환이 그 작전의 성공 여부 보다도 중요시 한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한다.
아래에 검색된 내용 일부를 소개 하기로 한다.읽기에 지루하신분은 지체 하지말고 포기 하시길 . . .
시노하라 가즈오(78)1927년에 태어났다. 그만큼 전쟁에 익숙한 세대였다. |
각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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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최악의 군사 작전 '임팔 전투' (1) 역사 / 취미 2014/09/21 06:41
http://blog.naver.com/kws02290/22012807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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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Imphal.
1944년 3월 8일 ~ 1944년 7월 3일
교전국가
영국 일본 제국
영국령 인도 제국 자유 인도
제 2차 세계대전 중 버마 ( 현 미안마 ) 와 인도 국경 지대에서 1944년 3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벌어진 전투.
한국에서는 임팔 작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으나 위키백과에선 임팔 전투로 표기되어 있기에 해당 항목을 임팔 전투로 작성하겠습니다.
( 2014년 구글 검색 임팔 작전 37,300건, 임팔 전투 32,200건
흔히 이 전투를 아르덴 대공세와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첫번째로 밑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높으신 분의 의견에 의해 밀어붙여졌다는 점, 두번째로 보급을 적에게서 탈취 후 채우려고 했다는 점, 세번째로 이 작전으로 인하여 패망이 더욱 가속화 되었다는 점으로 인하여 그렇게 불리어 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둘의 차이점은 명확합니다.
독일의 경우에는 있는 물자 없는 물자 다 끌어 모아서 아르덴에서 도박 행위를 취한 것이라면, 일본군은 버마 - 벵강 전선에서 호각을 이룰 정도로 나름 규모 있던 일본군을 말아먹은 것입니다. ( 는 동방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
위의 임팔은 인도 북동부 아삼 지방에 위치한 곳으로 연합군이 중국으로 보내는 보급로의 시작이기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였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은 이 곳을 공략하면 중국의 국민당군을 압박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죠.
또한 추가적으로 인도까지 진격하여 영국군을 인도에서 쫒아내는 데 성공하게 되면 인도는 독립과 동시에 추축군에 합류한게 된다고 생각하게됩니다.
따라서 1942년 8월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시점부터 이미 아삼지역 공략에 대한 의견이 나왔으나, 방위체계가 부실한 데다 현지 사령관들의 반대로 인하여 일단 공략 작전은 중지하게 되었습니다. ( 작전 구상 자체를 중지한 것이 아니라 작전 연구는 계속 실행하였습니다. )
일본군은 버마 지역의 방위를 굳히기로 하고 준비를 하는 동안 연합군의 군대가 버마 북부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공수부대가 버마 서북부에서 게릴라 작전을 시작하였고, 연합군 정찰 부대가 나타났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이것을 대대적인 공세의 시작이라 여기고, 재편성을 시작하였습니다.
버마 방면 사령관에는 가와베 마사카즈 중장이 그 휘하에 제 15군과 제 55사단, 그리고 직할 부대를 배치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15군 사령관에 무타구치 렌야가 임명되었습니다.
무타구치 렌야
牟田口廉也 1888.10.07~1966.08.02
사실 무타구치 렌야는 월권으로 통칭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인물입니다. ( 밤 중에 휘하 병사 하나가 똥 싸느라 화장실에 들어가서 인원수가 맞지 않다 중국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중국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인물이다. 후에 이 일로 중일 전쟁이 발발한다.)
그는 1940년에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18사단 사단장으로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하였습니다. 여기서 무다구치는 수류탄 파편에 맞아 다치고 18사단은 싱가포르 함락 뒤 필리핀의 바탄 반도로 갔다가 1942년 버마 전선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에 대본영은 인도 진공을 계획하였는데, 여기에 반대한 사람은 다름 아닌 무타구치 렌야였습니다. ( 자기가 반대한 작전에 사령관?) 이유는 밀림과 산악에선 작전 수행이 어렵다는 것이였습니다.
이랬던 무타구치 렌야가 생각을 바꾼 것은 버마 방위를 담당하는 제 15군의 사령관이 되었을 때 (1943년 3월) 영국군이 인도를 월경해 버마를 공격하였을 때입니다. 이 때 생각을 바꿔 인도 진공을 계획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는 희대의 장염으로 인해서 제 15군을 말아먹게 됩니다..
아무리 막장인 일본군이라 하더라도 무다구치 렌야 수준으로 눈 뜬 장님만 있는건 아니였습니다.
15군 참모장으로 임명된 오바타 노부요시 소장은 1만 5천톤에 달하는 물자를 어떻게 보급 할 것인가란 문제를 현지 조사를 통하여 진격로에 면밀하게 검토 한 뒤에 " 자동차도 모자란 판국에 비만 오면 못 쓰게 되는 도로, 다리도 없는 친드윗 강, 험준한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보급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불가능하다.: 라고 상신하였습니다.
이 말을 한 뒤 무타구치는 약한 소리라며 무시하고 오바타 소장을 부임 한 달 만에 해임시켜 버립니다 ( 옳은 소리 해도 그러네 )
이에 33 사단장 야나기타 겐죠 중장과 31 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까지 들고 일어났으나, 무시당하고 오바타 소장의 면직으로 반대여론은 사그라들었습니다.
이 작전을 검토하기 위해서 랭군에 모여든 상급 부대 참모들도 신나게 까대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전은 도조 히데키의 입맛에 딱 맞는 계획이었습니다. 이에 대본영은 8월에 준비 명령을 내렸고, 계속 반대하던 이나다 참모장은 10월에 갑자기 해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본영은 이 작전의 결행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고, 제 15군에게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는 훈령을 내린 뒤 회의만 거듭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9월 중순, 현지에서는 준비 명령에 따라 사단별 담당 구역을 서정하고 구체적인 작전 게획을 세웠습니다.
동부 전면에는 제 18사단을 배치하여 연합군의 진출을 막도록 하였으며
제 33사단, 제 15사단 등 3개 사단으로 임팔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 일본군의 특유의 보급 문제로 인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15군은 병참부대 증강안도 함께 대본영에 제출했었습니다.
처음 계획안에는 트럭을 보유한 자동차 중대 160개 말들을 이용하는 치중병 중대 60개 그리고 5개의 공병 연대였으나 버마 방면군을 통과하면서 90개, 30개, 3개로 줄었고 다시 남방군을 거치면서 26개, 14개, 2개로 더더욱 줄더니, 대본영에 제출될 때는 18개, 12개 0개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 임팔만 먹으면 다 해결되기 때문! "
제 15사단 주력은 선박이 부족하여 중국 난징에 남아있던 병력 수송이 늦어졌으나, 병력은 육로를 개척하며 버마로 향하는 가운데 야마우치 사단장과 참모장만 버마에 도착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사단은 전투 경험이 없는 부대였으나 이 작전의 주력부대가 되어야만 했기때문이죠 ( 전멸하라는건가 )
- 버마 공로를 상징하는 24 커브-
물론 연합군은 놀고 있지 않았습니다. 서부의 정면에는 길포드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보병 3개 사단과 기갑 1개 사단 그리고 윙게이트 공수부대 6개 여단이 배치되었으며, 북부에는 시틸웰 장군의 미, 중군 2개 사단 반, 동부에는 위립황 장군의 중국군 14개 사단이 배치되어 3방면으로 포위 태세를 가추는가 하면 유력한 공군 부대도 공격 준비를 마치고 있었습니다.
특히 중경으로 보낼 군수물자 수송로인 레도 공로와 버마 공로를 건설하고자 알래스카 공로 2500km를 8개월 만에 완성한 알로 스미스 공병대가 파견되었습니다. 이 레도 공로는 인도의 레도에서 중국의 운남성 곤명에 이르는 1079의 군용도로로, 버마 공로는 미얀마 라시오에서 곤명까지 이어지는 1154km의 군용 도로로 인도 동북 유전지대에서 생산된 연료를 운반하기 위한 것이며, 버마 공로도 역시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목적이였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임팔 전투의 후콩 전투와 이후 상황을 포스팅 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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