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문학
1)중세 오늘날의 영국 본토를 이루는 브리튼섬의 원주민들인 브리튼인은 오랫동안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놓였으나, 5세기에 튜턴인 ·앵글인 ·색슨인 등의 게르만 민족이 유럽 대륙으로부터 침입하여 앵글로색슨 왕족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현재의 영어와 매우 거 리가 먼 것으로서 앵글로 색슨 어 또는 고대영어(古代英語)라고 불린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작품은 《베어울프 Beowulf》로 일컬어지는 영웅서사시이다. 민간에서 구전(口傳)되어 오다가 8세기 경에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 착하게 된 것 같다. 그 내용은 젊은 시절에 늪 속에 사는 괴물을 퇴치하고 노경(老境)에 이르러서는 다시 악룡(惡龍)을 죽였지 만 그 자신도 숨져간 용감한 왕 베어울프를 주인공으로 한 대서사시이다. 황량한 자연을 배경으로 기개 높은 무용(武勇) 정신과 군신(君臣)의 애정을 묘사 한 이 장시(長詩)는 게르만적 (的) 정신의 전형을 나타낸다. 이 작품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북유럽계(系)의 이교주의(異敎主義)이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사 조(思潮)의 합류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사조가 엇갈리는 가운데 성서(聖書)를 주제로 한 몇 가지 종교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066년 북프랑스의 노르망디공(公)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하게 되자,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가 도입되면서 중세영어에 의한 영국문학이 탄생하게 되었 다. 중세의 영국은 유럽과 문화적으로 일체성(一體性)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교회와 궁정이었다. 수도사 이며 종교시인으로 이름 높은 매닝(1264∼1340)은 어린 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비탄을 다룬 《진주(眞珠)》를 남겼는데, 그것은 매우 감동적인 종 교시이다. 중서부 지방의 방 언으로 쓴 윌리엄 랭런드(1330?∼1400?)의 두운시(頭韻詩) 《농부 피어스의 환상》은 14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전해지는데, 중세문학의 큰 특색을 이루는 우의적(寓意的)인 작품으로서 깊은 신앙을 읊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교회나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도 암시되어 있다. 한편, 궁정문학은 로망스가 그 중심을 이루었다. 로망스 문학의 중심인 프랑스는 중세 3대 로망스 체계의 하나인 《아서왕 전 설》을 영국에 제공하였다. 이것은 이윽고 맬러리(1410?∼70)에 의하여 산문작품으로 집대성되어 《아서왕의 죽음》으로 1485년에 발간되었다. 궁정시 인이며 중세기의 영국 최대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초서(1340?∼1400)는 프랑스의 로망스 《장미 이야기》(13세기)를 번역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이탈리 아 시인 페트라르카와 작가 보 카치오에게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영국 중세문학의 상징적인 존재이지만, 만년에는 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와 같은 결실이 곧 14세기 말에 쓰인 《캔터베리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서 다루어진 인간에 대한 폭넓은 관찰이나 풍부한 유머는 이후 오랫동안 영국 문학의 특징을 이루게 되었 다. 15세기에 들어와 이와 같은 정신풍토에 입각한 여러 시인들이 나타났으며, 이 시기에는 종전에 볼 수 없었던 민중의 문학 으로서 발라드를 쓰게 되었 다. 2)르네상스기 16세기는 튜더 왕조가 다스린 기간으로, 중세적인 봉건제에서 벗어나 근세적인 중앙집권제를 지향하는 정책이 추진된 시대 이다. 또한 이 시기는 사조사적 (思潮史的)으로 르네상스기에 해당하여 휴머니즘이 창도(唱道)되었다. 그것은 이교적(異敎的)인 그리스 로마시대를 지향하 며 인간적 가치의 고양(高揚) 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었으나, 그리스도교와 모순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휴머니스트의 목표를 ‘크리스찬 휴머니즘’의 확립에 두었다. 1516년에 《 유토피아》를 쓴 토머스 모어(1478∼1535)는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16세기 후반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세로서 문운(文運)이 융성한 시기인데, 이처럼 문예의 꽃이 일제히 피어날 수 있었던 이 유 중의 하나는 중세영어에서 벗어나 완전한 근세영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 언어가 지닌 젊은 유연성에 힘입은 바 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시대의 문 예에서 주류를 차지한 것은 운 문(韻文)이다. 에드먼드 스펜서(1552?∼99)는 대표작 《페어리 퀸》에서 엘리자베스 왕조시대의 시인답게 플라톤적인 연애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 그리고 청교주의(淸敎主義)까지 종합하고서도 마치 그 상호모순을 개의치 않는 듯하였으며, 자신의 작 품에 관능적인 회화미(繪畵美) 와 해음적(諧音的)인 음악미를 표현해 놓았다. 그러나 이 시대의 문예를 대표하는 것은 운문극(韻文劇)이었다. 종교극에서 출발하였던 영국의 연극은 세속화의 길을 천천히 더듬으면서 16세기 중반까 지 다다랐다. 사회적으로나 사상적으로도 진폭(振幅)이 매우 컸던 엘리자베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국민의 연극적인 정열이 마 침내 분출되면서 급속한 발 전을 이룩하였다. 1580년대에는 대학 교육을 받은 지적(知的)인 극작가들이 나타나 선구적인 역할을 다하였다. 그 중의 한 사 람인 존 릴리(1554?∼1606) 는 궁정희극을 집필하여 하나의 장르를 확립하였지만, 가장 천재적인 활동을 한 사람은 시인 말로(1564∼93)였다. 그는 르네상스 정신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아, 물심 양면으로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을 즐겨 묘사하였는데, 비극 《포 스터스 박사》(1592∼93)에서 처럼 인간의 욕망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것을 넘어선 자가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지옥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말로는 29세의 나이로 의문(疑問)의 죽 음을 당했지만, 그 뒤를 이은 같은 연배의 셰익스피어(1564∼1616)에 의해서 엘리자베스 왕조시대의 연극은 마침내 완성되었 다. 인간심리에 대한 깊은 통 찰과 극적인 긴장, 거의 이상적이라 할 만큼 완숙된 시적 표현 등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경지에 다다랐으며, 그의 걸작 은 연극형식의 정점에 도달한 것 같았다. 3)청교도시대 17세기에 들어서자 곧 스튜어트 왕조시대가 시작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이 시기에 썼으며, 그의 후배들 가운데에서도 뛰어난 극작가가 나타났지만, 이전의 희곡에서 볼 수 있던 당당한 정열은 차츰 자취를 감추고 그 주제는 심각해져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게 되었다. 한 마디 로 말해서 그것은 데카당스의 조짐이었다. 이윽고 연극을 죄악으로 여기는 청교도 세력이 정계를 주름잡게 되자 1642년에는 모든 극장이 폐쇄되고, 49년 청교도들은 찰스 1세를 교수형 에 처했다. 17세기 전반기의 영국문학에서 주목되는 것은 형이상시(形而上詩)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기발한 표현으 로 노래한 시이며, 재미있는 착상과 더불어 구어적(口語的)인 리듬이 신선한 매력이 되었다. 형이상 시인의 대표자로서는 존 던(1573∼1631)을 들 수 있으 며, 이와 같은 시작품이 쓰인 밑바닥에는 과학에 입각한 새로운 사상의 대두와 낡은 사상과의 대립관계를 충분히 조정할 수 없었던 당시 사상계의 혼미(昏迷)가 깔려 있다. 정치가이고 시인이며 탐험가이기도 하였던 월터 롤리(1552?∼1618)는 말하자면 그 희생자인 셈인데,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과 학적 방법과 실험을 존중하 는 경험적 귀납법을 주장하면서 1620년에 《신기관(新機關)》을 발표하였다. 크롬웰이 영도하는 청교도의 공화정부는 불과 12년 만에 붕괴되고, 60년에는 프랑스에 망명했던 찰스 2세가 즉위함으로써 왕 정복고가 되었는데, 청교주 의에 대한 반동(反動)도 작용하는 가운데 프랑스 문화가 왕성하게 도입됨으로써 이전과는 판이한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문단에 군림한 사람은 존 드라이든(1631∼1700)이었다. 그는 정치적 격동시대에 살면서 당대의 권력자에게 영합한 절제 잃은 행동을 부인할 수 없겠으나, 고전은 물론이요 당시의 프랑스 문학에 정통하여 그 자신은 고전주의의 입장을 취하면서 시와 희곡과 평론 등 각 분야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왕정복고기의 문예활동에서 하나의 특색을 이루는 것은 풍속희극의 유행이었다. 상류계급의 응접실을 무대로, 유한층(有閑層)의 연애를 주제로 한 경쾌 하고 담백 ·솔직한 대화를 도입한 도시적(都市的)인 희극으로서 관객 또한 등장인물과 같은 상류층이었다. 이처럼 지난 시대 와는 달리 연극의 주류는 상류 계급을 지향하고 있었다. 또한, 이와 같은 희극들이 산문극이었다는 사실로 과격성을 배격하고 상식을 존중하는 시대풍조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드라이든 의 영향으로 문단에 등장한 윌리엄 콩그리브(1670∼1729)가 이와 같은 극작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였다. 그러나 왕정복고기를 프랑스풍(風)의 기지(機智) 넘치는 희극이나 풍자문학만이 성행한 시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 다. 즉, 이 시대를 통해서 청교 주의적인 종교문학 또한 뛰어난 활동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것을 대표할 만한 작품은 비국교파(非國敎派) 목사 존 번니언 (1628∼88)이 지은 《천로역정 (天路歷程)》(2부, 1618, 84)과 크롬웰의 라틴어 비서를 지낸 존 밀턴(1608∼74)의 여러 시작품들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원죄 (原罪)와 인간의 타락을 주제 로 한 서사시 《실낙원(失樂園)》(1667)은 인간에 대한 신(神)의 의지가 올바른 것이었음을 증명하려고 쓴 작품으로 그 웅대 한 구상은 영국문학사를 장식 한 걸작으로 꼽힌다. 4)고전주의와 소설의 융성 18세기 초의 20년간을 오거스터스 시대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문운(文運)이 번성하였던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비유 한 것으로서, 이 시기에는 이 성과 양식에 따라서 하나의 규준이 존중되는 고전주의가 영국의 문학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 1744)였으며, 문학자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작가는 조나단 스위프트(1667∼1745)였다. 그는 고전주의를 옹호하는 논설(論說)을 펴기도 했으나, 그 진가 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은 인간의 약점을 여지없이 폭로한 풍자소설이었다. 그것은 곧 직절(直截) ·간결한 영국 고전 산문체 (散文體) 《걸리버 여행기》 (1726)이다. 18세기의 영국문학에서 특색을 이루는 것은 소설의 성행이었다. 영국소설의 발단을 어느 시점으로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의견이 구구하지 만, 1719년에 발표된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는 철저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사실(事實)을 존중하는 시민계 급의 모랄을 훌륭하게 표현하 였다는 점에서 영국 소설사의 첫머리에 위치하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시민계급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독서의 습관이 뿌리를 내려, 소설은 마침내 문예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간체(書簡體) 형식으로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묘사한 새뮤얼 리처드슨 (1689∼1761)은 프랑스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나, 그 센티멘탈리즘에 반발하면서 가식(假飾) 없이 인생을 희극적으로 묘사해 나간 헨리 필딩(1707∼54)과 같은 작가도 있었다. 또한 고전주의가 풍미하는 시대에 감정생활을 중시하고 소설을 순수한 예술적 산물로 보았던 로렌스 스턴(1713∼68)은 일종 의 기서(奇書)로 일컬어진 《 트리스트럼 샌디의 생애와 의견》(1760∼67)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을 극히 현대적인 작풍(作風)의 소설작품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도 있다. 18세기는 과거 의 영국문학을 되돌아보면서 그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시대로서, 문예비평 활동이 왕성해지고 평론을 게재하는 잡지도 많이 발간되었다. 비평 가로서 정상에 있던 새뮤얼 존슨(1709∼84)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공정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현상이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고딕 소설로 일컬어지는 괴기작품(怪奇作品)의 유행도 그 중의 하 나였다. 그러나 낭만주의를 부흥시키려는 주요 무대는 시단(詩壇)이었다. 18세기 말 낭만주의의 발홍(勃興)은 유럽 전체를 휩 쓴 현상으로서 프랑스 혁명 과 같은 정치적 변혁과도 관련이 있었다. 워즈워스(1770∼1850)와 콜리지(1772∼1834)의 공저(共著) 《서정가요집(抒情歌謠集)》이 나온 1798년은 영국 의 낭만주의 문학에 있어 기념할 만한 해가 된다. “시는 일상생활의 주제를 일상적인 언어로 읊은 것이다”라고 내세운 이 책 의 서문은 바로 낭만파 시인의 ‘선언문’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5)낭만주의 전반 19세기 초엽의 시단에는 바이런(1788∼1824), P.B.셸리(1792∼1822), J.키츠(1795∼1821) 등이 나타났으며, 보수적인 사회에 반항하면서 혁신적인 자세 를 취한 이들 낭만파 시인의 기수(旗手)는 셸리였다. 이들은 사랑과 아름다움을 주제로 많은 시를 읊었는데, 청교도적인 시민 계급에 반역하는 인간상을 그 린 바이런의 작품은 낭만주의의 한 기조(基調)를 나타낸 것이었다. 또한 낭만주의는 옛 것과 먼 것에 대한 동경이 특색을 이 루어 중세의 풍조를 부활시킨 작품이 많았는데, 월터 스콧(1771∼1832)의 작품은 그와 같은 경향을 대표하며, 문예비평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윌리엄 해 즐릿(1778∼1830)이나 찰스 램(1775∼1834) 같은 뛰어난 비평가를 등장시켰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가장 큰 존경을 받은 인물은 셰익스피어였으며, 오늘 날에도 그가 불후(不朽)의 존 재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는 이면에는 19세기 낭만파 비평가들의 활약이 있다. 6)빅토리아왕조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후 1901년까지 여왕 통치가 계속되었다. 빅토리아 여왕 치세(治世)에 산업혁명이 성공하여 영국이 강대한 공업국으로 변 모하고 일곱 개의 바다를 지배하는 대제국이 되었다. 중산계급이 부(富)를 축적하고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공리주의적인 윤리 를 으뜸으로 받아들였으며, 일반사회에는 낙관주의적인 풍조가 팽배하였다. 이와 같이 형이하적(形而下的)으로는 유례없는 번영을 누리면서도 정신적으로는 공허하고 위선이 횡행하는 우려가 일고 있 었다. 문학은 마땅히 그 시대 의 반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소설이 오락 정도로 인식되던 시대에 디킨스(1812∼70)는 흥미진진한 읽을거리를 쓰면서 도 사실은 처참한 상황에 처 한 하층계급의 애환을 묘사하였다. 새커리(1811∼63)는 상류층이나 중산층의 위선과 속물근성을 제재(題材)로 그들의 허영 을 풍자하는 지적인 소설을 썼 다. 또한 19세기에 접어들자 수많은 여류작가가 등장하는데, 제인 오스틴(1775∼1817)과 브론테 자매의 경우, 그 작품은 결코 남성 작가들에게 뒤지지 않 았으며, 특히 조지 엘리엇(1819∼80)은 19세기 후반을 대표할 만한 지적인 작가로 평가된다.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테니슨(1809∼92)을 들 수 있으며, 낙천적인 가운데에도 고정화된 모랄을 초월하 고자 난해한 시를 쓴 브라우 닝(1812∼89)의 존재가 돋보일 뿐만 이니라 종교시인 홉킨스(1844∼89)의 정신세계는 현대에 깊숙이 연계되었다. 또한, 시인 A.아널드(1822∼88)는 비평 가로서 오히려 더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현세(現世)를 구가하는 영국인의 지적인 편협성을 비판하면서 낭만주의에 반대하 는 입장을 취하고, 질서의 관념 을 도입하여 비평의 궁극목표는 교양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빅토리아의 시대사조는 아직도 완강하였지만, 문학의 세계에는 갖가지 반동이 나타나고 있었 다. 세속에 반항하면서 퇴폐의 길을 택한 오스카 와일드(1854∼1900)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드디어 영국에도 세기말이 닥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영국에는 근대극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연극은 18세기 이래 희곡의 빈곤에 빠져 연극계는 흥행사와 배우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 다. 그러나 19세기 말엽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예술극장 운동에 자극되어 상업극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이 것을 주도한 것은 버나드 쇼 (1856∼1950)였다.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적인 연극운동(아일랜드 문예부흥)이 불길처럼 일기 시작한 것도 거의 비슷한 무렵 이었다.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서 에드워드 왕조시대(1901∼10)에 걸쳐 토마스 하디(1840~1928), 헨리 제임스(1843∼1916), 콘래드(1857∼1924), 골즈워디 (1867∼1933) 등의 소설가들 이 활약하였는데, 시대는 이미 20세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7)20세기 19세기의 영국을 청산케 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낙천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었다. 시 인 T.S.엘리엇(1888∼1965) 은 전후세계(戰後世界)의 정신적 황폐를 시로서 표현하였으며, 낭만주의의 단꿈에 취했던 예이츠(1865∼1939)는 현대의 가 장 뛰어난 상징파 시인으로 변 신(變身)하였다. 한편, 소설에서는 행동의 이면에 잠재하는 심리를 추구하면서, 이른바 ‘의식(意識)의 흐름’을 극한으로까지 몰고 간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율리 시스》(1922)가 발표되었으며, 인간에게 내재하는 본능에 초점을 맞추어 성(性)을 생명의 근원으로 파악하려는 D.H.로렌스 (1885∼1930)의 작품들이 발표 되었는데, 《채털리 부인의 사랑》(1928)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전후의 혼란한 세태를 시니컬하게 묘사하면서 신비주의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한 올더스 헉슬리(34∼98) 외에도 약간 통속적인 서머싯 몸(1874∼1965)의 주요작품들이 제1차 세계대 전 이후에 발표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곧 나치즘이 대두하면서 유럽은 다시금 불안한 상황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지식인들 사이에는 좌 경(左傾)하는 자들도 나타났 다. 이윽고 좌우파의 대립에서 비롯된 스페인 내란(1936∼39)이 일어나자 영국의 젊은 문인들 사이에서는 인민전선파에 가담 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 와 같은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 시인 오든(1907∼73)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내란의 실상을 직시한 이들은 점차 사회주의 및 공 산주의의 입장을 청산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전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이 전쟁이 영국문학에 끼친 영향은 컸으 나, 그것을 정확히 평가하기 위 해서는 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현대의 작가들이 정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는 점과 종교적 입장을 취하는 작가라 할지라도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당당히 맞서는 필연적인 자세라는 점이다. 가톨릭 작가 G.그린(1904∼)은 이 와 같은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 이다. 1950년대에는 이른바 ‘성난 젊은이들’로 불리는 청년작가의 집단이 출현하여 기성질서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면서 강력한 반항을 하였는데, 존 오즈번 (1929∼)의 희곡이 커다란 주목을 끌었다. 20세기 문학비평의 전개에 있어 대학교수의 공헌은 지대하며, 잡지 《스크루티니 Scrutiny》를 중심으로 케임 브리지학파를 주도한 F.R.리비스(1895∼1978)는 영향력이 가장 큰 비평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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