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메와 토정 이 지함(土亭 李 之菡) 제 22 장
雪鄕 朴 聖棟
<기원후 1,561 년 3 월 >,
<산적 두목 임 꺽정(山賊 頭目 林 巨正)>은,
감악산(紺岳山)을 빠져나와 황해도(黃海道)로 치달렸다.
<청석골(靑石谷)>로
가기 전에 <황해도 연안부(黃海道 廷安府)>의 <봉취산(鳳聚山)>에서
<재집결(再集結 - 다시 한군데로 모여 뭉침 )>에 들어갔다.
<산적 두목 임 꺽정(山賊 頭目 林 巨正)>이,
졸개(卒介)들을 점호(點呼 -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 인원이 맞는가를 알아봄 ) 해보니
< 500 명(名)>의
졸개(卒介)들 가운데에서 < 450 명(名)>이 살아 남았다.
낙오자(落伍者 - 대오(隊伍)에서 뒤처져 떨어진 사람 )를 포함(包含)시키더라도
<연 천령 병대(延 千齡 兵隊)>는,
<산적 두 명(山賊 2 名)>을 상대로 용감(勇敢)히 싸우다가 전사(戰死)한 것이 된다.
<산적 두목 임 꺽정(山賊 頭目 林 巨正)>은,
하늘(天)을 쳐다보며
<연 천령 병대(延 千齡 兵隊)>에 대한 <묵축(默祝 - 마음속으로 축복을 함)>을 한다.
- 그대들은,
진정한 <관군(官軍)>이었소.
그, 숨막히는 순간(瞬間)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상대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했소이다.
부디, <옛 고향 별(星)나라>에서 편히 쉬시기를 ........ -
<문정 왕후(文定 王后)> 시대의 <해서 지도(海西 地圖)>
그 때,
<산적 소두목(山賊 小頭目)>인 <윤 희정(尹 喜精)>과 <윤 세공(尹 世公)>이
<무쇠솥(鐵鼎)>을 뒤집어쓰고 있는
걸인(乞人 - 거지)같은
<중년 남자(中年 男子)>를 붙잡고 오면서 <산적 두목 임 꺽정(山賊 頭目 林 巨正)>에게
말했다.
- 이, 거지(남에게 빌어먹고 사는 사람 )같은 놈이 자꾸만
두목(頭目)을
만나 뵙겠다면서 스스로를 일컬어서 <흙담의 정자인(土亭人)>이라
한답니다.
어떻 할 깝쇼 ........ ? -
<산적 두목 임 꺽정(山賊 頭目 林 巨正)>이,
허허야고 웃으면서
<산적 소두목(山賊 小頭目)>인 <윤 희정(尹 喜精)>과 <윤 세공(尹 世公)>에게 말했다.
- 아,
너희들은 <천하(天下)의 괴인(怪人)>을 모르고 있었구나.
너희들이 보기에,
행색(行色 - 겉으로 드러나는 차림이나 태도 )은 저래도 그는
<개불쌍놈 - 말이나 행실이 아주 고약하고 더러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은
아니다.
그는,
<옛 시절>에 잘나가던 <삼노 팔리(三奴 八吏 - 노예 출신의 <세 집안>과
아전(衙前 - 구실아치) 출신의 <여덟 집안>.
삼노(三奴)는
삼봉 정 도전(三峰 鄭 道傳 - 고려계),
구당 서 기(龜堂 徐 起, - 이조계),
구봉 송 익필(龜峯 宋 翼弼 - 이조계)의 집안이고,
팔리(八吏)는
동래 정씨(東萊 鄭氏 - 신라계),
반남 박씨(潘南 朴氏 - 백제계),
한산 이씨(韓山 李氏 - 고려계),
흥양 유씨(興陽 柳氏 - 고려계),
진보 이씨(眞城 李氏 - 고려계),
여흥 이씨(麗興 李氏 - 이조 양반계),
여산 송씨(礪山 宋氏 - 중국 송(宋)나라 고려계),
창녕 서씨(昌寧 徐氏 - 이조 서민계)의
집안이다.
모두
처음에는 <노예(奴隸)>와 <아전(衙前)>이었으나
자손(子孫)들의 뛰어난 덕(德)으로
양반(兩班)이 되었다. )>의
하나인 <목은 이 색(牧隱 李 穡)>의 <육대 손( 6 代 孫)>이다.
정중히,
모실 일이지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쌍놈> 다루듯이
다루어서는 안된다. -
<산적 소두목(山賊 小頭目)>,
<윤 희정(尹 喜精)>과 <윤 세공(尹 世公)>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는다.
-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 ? -
<산적 두목 임 꺽정(山賊 頭目 林 巨正)>이 호탕(浩蕩)하게 웃으며 말했다.
- 나도,
내 사랑하는 여인(女人)인 <명월 황 진이(明月 黃 眞伊)>를 통해서
들었을 뿐이다.
<화담 서 경덕(花潭 徐 敬德)>의 제자(弟子)라고 하더군.
<쌍놈>들의
<잡기(雜技 - 잡다한 놀이의 기술이나 재주 )>에도 아주 밝아
<사주쟁이>인데다가
<장사치>로도 <돈>을 꽤나 벌었다 하더군.
그러나,
<토정 비결(土亭 祕訣)>은 그가 쓴 것이 아니라
<경 험(經 驗 - 정체 불명의 사람이다 )>이라는 사람이 썼다는데
<명월 황 진이(明月 黃 眞伊)>도,
<경 험(經 驗)>이라는 사람은 잘 알지를 못한다 하더군........ -
그러자,
<무쇠솥(鐵鼎)>을 뒤집어쓰고 있던 걸인(乞人 - 거지)이 껄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 어찌,
그리도 나에 대해서 들여다 본 것처럼 잘 아십니까 ........ ?
그렇소이다.
<명월 황 진이 사형(明月 黃 眞伊 師兄)>의 말씀과 같소이다.
안그래도,
<사형(師兄 - 한 스승의 제자로서, 자기보다 먼저 그 스승의 제자가 된 사람 )>을
뵙지 못한지가 하도 오래되어
오늘, 이렇게 지나는 길에 귀공(貴公)을 뵙게 되는구려.
귀공(貴公)과 함께라면,
<사형(師兄)>을 만나 뵙는 것도 반갑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오만.
보아하니,
정세(情勢 - 일이 되어 가는 형편 )가 그리 한가롭지 않은 듯 하온데. -
<산적 두목 임 꺽정(山賊 頭目 林 巨正)>이,
흔쾌(欣快 - 기쁘고 유쾌하다 )하게 웃음지으며 말한다.
- 아, 아니오.
다만,
지금은 급히 <평산부(平山府)>를 공략(攻略)할 시점(時點)이라
<황 선생(黃 先生 - 황 진이 )>을 뵙기가 어렵소만
나와 함께,
동행(同行)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아름다움이 아니겠소 ........ ? -
<토정 이 지함(土亭 李 之菡)>이,
한참을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承諾)을 한다.
- 그렇게 하시지요.
내 나이 <서른 여덟( 38 歲)>에 천하(天下)의 강도(强盜)를 만나고도
목숨을 보지(保持- 보전하여 잘 지님 )할 수 있었다는게
꿈만 같소이다.
만약(萬若)이지만,
<명월 황 진이 사형(明月 黃 眞伊 師兄)>과의 인연(因緣)이 없었더리면
아마도,
내 <목숨>은 부지(扶持 - 상당히 어렵게 보존하거나 유지하여 나감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오.
<인연(因緣 -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의,
소중함을 새삼 깨우쳤으니
귀공(貴公)의 뜻에 따르겠소이다. -
<산적 두목 임 꺽정(山賊 頭目 林 巨正)>은,
<토정 이 지함(土亭 李 之菡)>을
대동(帶同 - 함께 데리고 감 )하고 <전투기(戰鬪騎 - 전투용의 군마(軍馬) )>에
박차(拍車 - 말을 탈 때에 신는 구두의 뒤축에 달려 있는 물건.
톱니바퀴 모양으로 쇠로 만들어 말의 배를 차서 빨리 달리게 한다 )를 가했다.
<황해도 평산 부(黃海道 平山府)>,
매우 큰 부도(府都 - 부사가 거주하는 도시 )이다.
<기원후 1,401 년(年), 7 월(月) 20 일(日) 음력(陰曆) >,
<세종 대왕(世宗 大王) 14 년(年)>에 <시간당 300 미리(mm) )>의 <큰 비(大雨)>가 내려
<산(山)>을 무너뜨리며
< 90 명(名)>의 백성(百姓)들을 세상(世上) 떠나게 만들었던 곳이다.
<산적 두목 임 꺽정(山賊 頭目 林 巨正)>이,
졸개(卒介)들을
거느리고 <황해도 평산 부(黃海道 平山府)>에 다달아 보니 백성(百姓)들은 모두 어디로
이사(移舍)를 갔는지 <읍내(邑內)>가 썰렁했다.
<산적 두목 임 꺽정(山賊 頭目 林 巨正)>은,
<평산 부(平山府)>의 <관아(官衙)>에다 졸개(卒介)들을 전면 배치(前面 配置)시켰다.
그리고,
큰 소리로 <관아(官衙)>를 향해 외쳤다.
- <평산 부사 장 효범(平山 府使 蔣 孝範)>은 들어라.
나,
<날으는 큰 제비(大燕)>가 왔으니 어서 나와 마중하라 ........
빨리 나와,
항복(降伏)하면 용서(容恕)를 구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꾸물대다간 <목숨>조차 보존키 어려우리라. -
그러자,
<동헌(東軒 - 관아에서 고을 원(員)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 )>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흘러 나왔다.
- 대체,
어떤 <미친 놈>이 관데 <양반(兩班)>의 성명(姓名)을 함부로 부르면서
소란(騷亂 - 시끄럽고 어수선함 )을 떠느냐 ........ ? -
<토정 이 지함(土亭 李 之菡)>은,
이제 난리(亂離)가 나도 단단히 나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평산 아문(平山 衙門)>이
열리는 것을 지켜 보았다.
우리나라의 충남(忠南) <아산 시(牙山 市)>에 있는 <유형 문화재 16 호 >의
<온양 아문(溫陽 衙門)>이다.
온양 온천(溫陽 溫泉)이 좋아서 <임금>의 행차(行次)가 잦았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제주도(濟洲道)>에 있는 <국가지정 사적 제 380 호 >의
<제주 목 관아(濟州 牧 官衙)>의 동헌(東軒)이다.
동헌(東軒)의 간판이 <연희 각(延曦 閣)>이다.
제주 목사(牧使)가 직무를 하던 곳으로
이름을
<연희 각(延曦 閣)>이라고 한 것은
지방에 파견된 관리가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한 것이라 여긴다.
동헌(東軒)의 <연희 각(延曦 閣)> 집무 시간이다.
<귤림당(橘林堂 )>의 휴식처이다.
목사(牧使)가
한가한 시간에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詩)를 지으며
술을 마시고 밖에 있는 귤나무들을 바라보며 쉬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