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과 술잔 사이
정용화
내가 술을 마실 때에는 바다가 걸어나온다.
눈을 부릅뜨고 어둠을 물고 있는 물고기들이 헤엄친다.
누가 풀어놓은 매듭일까
봄과 여름 그 양 끝에 길게 매놓은 수평선 아래
부리가 짦은 새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한 잔과 두 잔 사이
모음을 자음으로 바꾸기 위해 새들이 날아간다
여유로 남아있는 마침표 하나, 태양은 하루 끝에서 아직 젊다
가장 뜨거운 순간에 투명하게 식어버린
술잔 속에는 영원한 속도로 정지해 버린 시간,
내 눈동자에는 노을,
그 붉은 울음을 달래기 위해 어둠이 오고 있다
두 잔과 세 잔 사이
파도는 잘 삭혀진 슬픔을 필사하느라 연신 펄럭이고 있다
갯벌은 수차례 스치고 부딪치며 사라져 간 이름들을 기억하고
이제는 다 타버려 움푹 패인 당신의 발자국을 바라보는 일은
빛으로 익숙해진 눈으로 누군가의 어둠을 이해하는 일이다
두 병과 세 병 사이
수평선의 길이는 침묵과 비례한다
뒷꿈치에 막 올이 나가기 시작하는 스타킹처럼 어둠은 빠르게 온다
비틀거리다 부딪친 낡은 모서리가 아프다기보다는 서러울 때
제시한 증명이 하나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듯
깜빡거리는 불빛이 현실과 멀어질 때 비로소 허공이 가득 찬다
가지고 있던 노래가 다 새어나간 조개처럼
계간 『시선』 2009년 여름호 발표
정용화 시인
충북 충주에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창과 전문가 과정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석사과정 재학중. 2001년 월간 《시문학》을 통해 등단. 200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흔들리는 것은 바람보다 약하다』가 있음. 현재 안양 여성문학회 회원. 좋은시문학회 회원. 민족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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