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藝.墨畵.草書

김영자 화백/사군자

박송 입니다. 2011. 10. 15. 10:42

 

 

 

 

 

소연 김영자 화백

 

 
 

 

 작가세계 22

 

 

동양정신을 추상회화로 꽃피운 소연 김영자 화백의 작품세계

 

 

 

                                  글쓴이 : 정태수(한국서예사연구소장)

 

 

 

  추상미술의 창시자인 칸딘스키는 “모든 예술작품은 그 시대의 아들이며, 때로는 우리 감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고 말한 바 있다. 각 시대의 문화는 그 나름의 예술을 만들어 내며, 그것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서화계의 작품형식은 스승의 화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품만 보면 누구의 화풍인지 대충 가늠할 수 있다. 물론 배우는 과정에서 고전이나 스승의 화풍을 추종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한 작가가 작가로 성장한 뒤에도 자신의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작품 속에 시대정신을 담아내려는 작가의 조형의지나 예술정신이 박약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지나간 시대의 예술형식을 무작정 재생시키려는 노력은 고작해야 사산(死産)된 아이를 닮은 작품”일 뿐이라는 칸딘스키의 지적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40년 동안 붓과 먹이 좋아 화가로서의 외길을 걸어온 소연 김영자 선생(이하 화백(畫伯)으로 호칭)은 일반적인 화가처럼 스승의 화풍에 안주하면서 익숙하고 편한 길을 걷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보여주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온 작가이다. 날마다 화실로 출근해서 기도를 한 뒤 하루에도 여러 점의 작품을 그리기 때문에 소연화백의 작업실에는 2000여점의 작품이 쌓여있다. 이 글에서는 소연화백이 걸어온 작가의 길을 입문기로부터 현재까지 크게 3분기로 나누어서 동행해 보고자 한다. 

 

   

 

선산에서 보낸 성장기의 추억

 

 

 

 소연화백은 1938년 경북선산에서 김종식 선생과 이두리 여사의 4남매 가운데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님이 철공소를 경영하던 부유한 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친가와 외가 모두 넉넉한 환경이었다. 넓은 마당에서 뛰어 놀았고, 외삼촌에게 아코디언을 배우기도 하였으며, 사군자 등 여러 종류의 병풍 그림이 있어서 늘 볼 수 있었다고 기억하니 가세를 알 수 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1세 되던 해 아버님이 갑자기 별세하고, 2년 뒤 어머님이 뒤를 이어 세상을 하직하는 바람에 큰오빠의 보살핌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향에서 선산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구의 효성여대 국문과에 진학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두 오빠가 지극한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해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할 때 까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독서에 몰두했다. 도서관직원이 소연화백이 책을 빌리러 오면 문고판 20권씩을 빌려갔기 때문에 아예 도서카드를 꺼내놓고 기다렸다고 한다. 이 때 주로 보았던 책은 문학, 철학서적들이었다. 문학소녀였던 화백은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읽었는데 괴테를 여러 번 읽었고, 니이체나 칸트가 저술한 난해한 철학서적도 탐독했다. 대학시절 다양한 독서경험은 오늘날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로 성장하는데 큰 자양분이 된 것으로 보인다. 

 

 대학을 마치고 28세 되던 해 영문학과 출신으로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최만도씨(31세)를 만나 결혼했다. 부군은 영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46년간 부대를 경영하는 업무를 맡아 근무했다. 오랫동안 외국인들과 같이 생활했기 때문에 서구적인 사고방식으로 남을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었고. 가족들에게도 상호간 인격을 존중하는 실용적인 생활방식으로 가정을 이끌어왔다. 이런 가정환경 덕분에 자식들도 건강하게 자랐다. 화백은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장녀(최지은)는 영어를 잘해 항공승무원을 거쳐 무역회사직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고, 아들(최우혁)은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가족구성원들이 모두 각자의 삶에서 자신의 몫을 하는 것은 칭찬과 격려의 말을 주고받는 가풍 때문이 아닌가 한다. 부군은 날마다 퇴근을 한 뒤 그 날 그린 소연화백의 그림을 보고 “이 그림을 정말 당신이 그렸다니 대단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부인의 그림에 대한 최고의 조언자로서 날마다 격려의 말을 해 주었기 때문에 소연화백은 오늘날 화가로 등단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군자로 시작한 전이모사(轉移模寫)의 입문기

 

 

 


 결혼 후 소연화백은 평상시 집에서 문학전집과 사상전집에 빠져 독서에 심취했다. 30대 후반 나이가 되었을 때  장녀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엄마도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다는 자각이 들었다고 한다. 주부가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하고 조사해보니 당시에는 수영, 꽃꽂이 등이 전부였다. 마침 대구백화점에 들렀더니 사군자 전시가 있어서 구경한 뒤 다음날 입문했다. 그래서 작가의 길은 그 해(1976)부터 시작된 셈이다.

 

 야정 서근섭 선생의 문하에 입문한 뒤 처음에는 서예공부를 했다.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림보다 서예를 먼저 공부해야 필력을 기를 수 있다는 가르침에 따라 오체를 두루 익혔다. 글씨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사군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사군자를 공부하면서 그리는 일상이 행복해 날마다 집안 곳곳에 자신의 그림을 걸어놓고 감상했다. 그 가운데 매화를 좋아해 가장 많이 그렸다. 매화를 어느 정도 그리게 되자 다른 것들도 그려나갔다. 날마다 각각의 소재가 갖는 특징을 표현하는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는 사이 20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쉼없이 서실출입을 하였다. 공휴일에도 서실문이 열리는 날에는 어김없이 서실에 나가 사군자를 쳤다. 

 

 그 시기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먹을 간 뒤 박카스 병 두 병에 먹물을 가득 담아 먹물이 다할 때까지 사군자를 그리고 귀가했다. 그 날 그린 그림 가운데 잘 된 것을 집에 가지고 와서 거실에 걸어두면 부군은 당신 그림이 맞느냐고 격려한 덕분에 붓을 꺽지 않고 열심히 매진할 수 있었다.

 

 1991년 12월 삼덕성당의 신부님이 그림연습을 그만하고 성당건립을 위해 기금마련을 위한 전시를 해 달라는 권유에 따라 15년 동안 공부한 작품들을 모아 첫 전시를 열게 되었다. 예지화랑에서 열린 자선전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모든 수익금을 성당에 기부했다. 첫 전시를 열었던 이 시기의 작품은 야정선생의 화풍을 이어받고 있다. 야정선생은 지도자의 손을 닮지 말고 정신을 배우라고 하였지만, 화백은 오로지 스승의 손을 따라서 비슷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이와 같이 90년대 이전시기의 작품을 보면 작가의 화풍이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즉 스승의 화풍을 닮고자 하던 전이모사(轉移模寫)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 2, 3, 4)  

 

 

 

 그림1 <매화>, 68x68cm, 1991

 

  

그림2 <비파>, 38x38cm, 1996 

 

   

 그림3 <대나무>, 70x51cm, 1994

 

  

 

 그림4 <한생>, 139x70cm, 2001

  

 

 문인화 영역에서 벗어나고자 한 모색기

 

 

   

  20년 동안 야정선생의 문하에서 쉽게 배우기만 하던 학습환경에 변화가 왔다. 92년 계명대학교에 서예과가 생기면서 야정선생이 교수로 부임한 뒤 이제 소연화백은 작은 화실에서  자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화실근처 꽃가게에서 장미를 사서 화병에 꽂아두었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시들어 버렸다. 뿌리가 없이 줄기만 있었기 때문이다. 시들어 버린 꽃을 보면서 문득 자각이 들었다. 스승이 먹여주는 것만 먹으면 저 꽃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니 이제부터 힘들더라도 자생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처음엔 힘들고 어려웠지만 시시각각 변화하는 화실근처 꽃의 자태를 바라보면서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화첩을 구해 임화를 하기도 하고, 그림을 변형시켜 마음가는대로 그리다보니 그림은 서서히 바뀌어 갔다. 그림은 자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畵肇自然]! 어느 날 화첩 임화에서 벗어나 자연을 보고 그리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자라는 나무를 바라보면, 봄날 어린잎이 나오기 시작하고, 여름이면 무성해지며, 가을이면 단풍이 들고, 겨울이면 시들어 간다. 즉 채워졌다 성글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화실 앞에서 자라는 식물의 원리를 눈으로 보면서 여름엔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겨울엔 화면을 완전히 비워보기도 했다. 여름엔 나무에 그늘이 생기고, 겨울엔 그늘이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재현해 보았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화백의 마음에 자연을 담은 뒤 마음속 느낌들을 화면에 옮기기 시작하면서 화풍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보통 화가들은 사과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빨갛게 그리지만, 인상파 화가인 고흐는 자신이 그릴 대상을 본 뒤, 대상에서 받은 인상 그대로의 색으로 사과를 그렸다. 그래서 고흐의 사과는 노란색도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회화에서는 얼굴을 그리면서 한 곳에 초점을 두고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피카소는 앞쪽, 옆쪽 등 다시점에서 본 것을 한 화면에 넣어서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었고, 동양의 산수화도 삼원법이란 독특한 화법으로 다양한 방향에서 본 시점을 한 화면에 그려 넣지 않았던가. 이 시기 소연화백의 화풍변화는 이러한 이치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려보고 실험한 시기였다.

 

 이와 같이 90년대 이후 소연화백의 작품양식은 전통문인화에서 한걸음 나아가 변화를 모색하였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이미지를 자신의 조형의지에 따라 변형하거나 생략하여 전통적인 수묵(水墨)위주의 문인화작업의 방법과 형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서구의 현대회화 양식과 동양의 선(禪)적 이념을 화면에 접목하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외적(外的) 형상을 작가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하여 선(線)이나 다양한 색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제 소연화백의 그림은 기운생동, 일회성, 여백 등을 강조하는 전통문인화론에서 일탈되기 시작했고, 사실 그대로를 그리면서 재현(再現)성을 중시하는 고전적 서양화법에서도 벗어나기 시작한다. 소연화백은 자연을 통해 얻은 영감을 자신의 화법으로 그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에 열린 전시에서 보여준 반추상의 작품들은 이 시기 소연화백의 화법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그림 5, 6, 7, 8) 

 

  

 

그림5 <꽃>, 49x57cm, 2003

 

  

그림6 <相>, 80x80cm, 2006

  

 

그림 7 <환희>, 40x40cm, 2008

 

 

 

 

그림 8 <秋情>, 60x60cm, 2007

 

 

  

 오리엔탈리즘이 담긴 추상회화로 발현된 성숙기

 

 


 일반적으로 그림을 처음 배우는 단계에서는 화법이나 기교를 중시하고, 중간 단계에서는 양식상의 변화를 추구하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작가의 의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명나라 사람 장태계(張泰階)는 중국의 그림이 시대사조에 따라 당나라 사람은 기교를 숭상하고, 원나라 사람은 의도를 숭상한다고 말했다. 시대유행에 따라 화가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대양식이 있기 마련이다. 국내 미술계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팝아트와 비디오아트가 유행했고, 기존의 예술과는 매우 다르게 개성이 넘치고 자율적이며 다양한 화풍이 혼재된 상황이다. 소연화백이 2000년 이후 발표한 작품에서는 이전의 사군자나 문인화류에서 벗어난 개성적인 화풍이 뚜렷이 감지된다. 화면에는 비움과 채움의 미학이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유채식과 무채색의 절제된 사용으로 강한 대비를 보인다. 화백의 그림에는 모노톤 일색이던 사군자 그림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감성적인 색상들이 등장하고,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은 점과 선의 형태로 축약된다. 그의 그림은 이제 자연속의 무엇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주관적인 심상을 붓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젠 화백자신의 마음을 그리게 된 것이다. 

 

 2010년 이후 최근에는 다시 동양적 분위기를 살리면서 수묵이 주는 깊은 울림에 칼라를 부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동양에서 서양으로, 다시 동양의 오리엔탈리즘이 담긴 추상회화로 소연화백의 조형세계는 순환되고 있는듯하다. (그림 9, 10, 11) 

 

 

  

그림9 <in mind>, 70x50cm, 2009

 

 

 

그림10 <duality>, 117x95cm, 2009

 

 

 

 

  그림11 <축제>, 45x60cm, 2011

 

 

 이미 18번의 개인전을 통해 900여 점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소연화백의 조형세계는 많은 변화를 보여 왔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발표하는 작품은 점(點)과 선(線) 위주의 추상회화에 배경은 무채색과 유채색이 섞인 강렬한 작품으로, 국내전시의 경우에도 배경을 칠한 반추상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렇게 국내외의 감상자와 대중들의 기호까지 읽어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최근 소연화백의 이러한 작품양식은 미국초대전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2009년 여름 미국 샌디에이고 다운타운 내 CJ갤러리에서 열린 ‘소연 김영자 개인전’에서 “동양적이면서도 강한 힘과 에너지, 그리고 자유분방함이 넘친다”(2009. 7. 15. 중앙일보) 는 호평과 함께 미국 현대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지 신문에서는 “무채색의 동양화에 서양화의 화려한 색상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개성 있는 화풍과 대단한 힘을 느낄 수 있는 수묵기법들이 접목된 김 화백의 작품세계는 이미 작품전시를 시작하기도 전에 예악구매가 이어졌고 전시 이틀만에 대부분의 작품이 판매되는 등 상상외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하는가 하면, “힘차고 율동적인 먹선이 인상적”(2009. 7. 16. 한국일보)이라는 등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현대미술을 이끌고 있는 평론가와 큐레이터들이 소연화백의 그림을 보고 호평을 하는가하면, 어느 미대교수는 강의를 통해 화풍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현지 시장(市長)과 샌디에이고 다운타운미술관에서 작품을 소장하는 등 40년 동안 그림과 벗해 온 수고로움이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성과는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고, 수십 년 동안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어 문인화의 현대적 특성을 살리기 위해 고민하면서 작업을 해 왔기 때문에 미국인의 시각을 사로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미술계의 이런 반응은 소연화백의 그림을 단순하게 동양적인 신비로움만으로 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점과 선으로 표현된 독특한 회화양식으로 개성미를 보여준 소연화백의 작품성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흑백의 대조적인 색감이 주는 선명함, 모필을 통해 표현되는 심상이미지는 조형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요소들이 그들이 요구한 현대미술가로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미국초대전에서 저명한 평론가와 큐레이트들 앞에서 7미터 대작 시연 

 

 

 

              미국현대미술계의 대표적인 교수들(브랜드기어 외)과 함께

 

 

 

 

샌디에이고 현지 시장이 방문해 작품을 구매하고 기념촬영

 

 

 

 

 

 

 이제 소연화백은 화가의 눈과 시인의 마음으로 걸러낸 대상을 점과 선으로 축약해 무채색으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아무것도 없는 흰 백지 위에 먹으로만 화백 자신의 영감을 담아내고자 한다. 화단 일각에서 우리 그림의 세계화를 주장하는 몇몇 작가들은 자신의 정체성도 없이 뉴욕에서 유행하니까 흉내내기를 한다. 이에 반해 소연화백은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담아낼 수 있는 먹과 붓으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화폭에 옮기고자 할 뿐이다. 먹과 붓은 화백의 화업에 있어 영원한 동반자라고 한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게 될 지 화백 자신도 모른다. 아마 지금까지 그랬듯이 기도와 묵상을 통해 마음을 담아낸 심상(心象)을 그려나갈 것으로 보인다.

 

 소연화백에게는 든든한 후원자 두 분이 있다. 그 두 분은 바로 부군과 날마다 기도를 바치는 천주님이라고 한다. 소연화백은 후원자를 믿고 오늘도 “10년 뒤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자”라는 좌우명을 가슴에 새기면서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붓을 든다. 10년 뒤 뉴욕에서 소연화백의 작품세계에 세계인이 공명하길 기원한다.

 


정태수(월간 서예문화 주간, 다음카페 서예세상 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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