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藝.墨畵.草書

한시

박송 입니다. 2011. 10. 10. 14:01

 

 

 

漢詩

 

 

압해정씨들의 우리나라 시조가 되는 丁德盛공께서 중국의 당나라에 계실 때 같이 진사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심아지공의 시 한수를 일가어른이신 丁丙泰翁께서 찾아 보내 주셨기에, 감히 우리말로 풀어서 여기에 옮겨 봅니다. 

 

春色滿皇州 황주에 춘색이 가득함

沈亞之      심아지

何處春暉好 봄 빛 좋은 데가 어디 있을까

偏宜在雍州 오직 마땅히 옹주에만 있으리

花明夾城道 꽃은 성벽 길을 끼고 밝은데

柳暗曲江頭 버들은 강 머리에 구부러져 어둡다

風軟游絲重 바람은 연하여도 흩날리는 거미줄은 무거우며

光融瑞氣浮 빛은 밝으니 서기로운 기운을 떠 올린다

斗鷄怜短草 병아리는 짧은 풀을 불쌍히 여기는데

乳燕傍高樓 새끼 제비는 높은 다락 곁에 있구나

綉縠盈香陌 수놓은 비단은 향기로운 길을 채우고

新泉溢御溝 새로 만든 샘은  궁전 뜰의 물도랑에 넘친다

回看日欲暮 머리 돌려보니 해는 지려 하므로

還騎似川流 돌아오는 말은 물과 같이 빨리 간다


(해설)

이 시의 뜻은 이 마을의 봄 경치가 가장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일까?


뜻밖에 옹주의 장안(옛 중국은 9개의 州로 나뉘었는데, 옹주는 아홉 개의 하나이며 장안은 그 범위 안에 있음)의 지방장관으로 부임하였다.


성벽의 양쪽을 끼고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었으며, 구부러진 강둑에는 이미 버들의 색이 푸르렀다.

가볍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부니 가벼운 거미줄은 무겁게 가라앉는데, 엷은 안개 속에서 밝고 아름다운 길의 빛은 오색찬란하다.

풀은 도리어 작고 짧아 병아리는 (풀의 작고 짧음을)불쌍히 여기며, 작은 제비새끼는 높다란 다락 볕에서 나는 법을 배운다

화려한 가벼운 수레 한대는 또 한대의 수레를 접하여 빨리 지나가며 뒤(아래)에다 끊임없는 향기를 남기며, 새로 넘쳐나는 물은 궁중의 정원을 따라 끊임없이 흐른다.

머리를 돌려 한번 보니 하늘색은 어두운데, 집으로 돌아오는 수레는 무리를 짓고 대열을 만드는데 (그 대열의)아름다움은 마치 큰 강물 가운데서 도도함이 끊임없는 큰물의 흐름과도 같다.

 

 

 

며칠전 일산에 계시는 일가 어른이신 규학옹께서 기문 한편을 보내시면서 국역을 부탁하셨습니다. 몽송은 의성군 휘 영손(令孫) 할아버지의 아호이셨습니다. 의성군 께서는 고려 말인 서기1375년에 경산(현 성주) 목사로 부임하셨으며  당시에 세워진 몽송루의 기문을 이숭인공께서 지으셨는데, 여기 그 원문을 싣고 역문을 붙입니다.

 

夢松樓記(원문)

洪武紀元之八年義城丁侯以選治京山旣下車政通歲熟民以樂事乃於治之北起樓焉斬材陶瓦以時而工則役遊手者樓之制高甍桷以紆其望薄丹雘以昭其儉工訖觴諸老先生于其上以落成且圖所以名之也酒半侯起而言曰樓成矣請名之諸先生諸公以樓爲侯所起揭夢松二字以扁之盖亦以古人事業名位望侯云侯顧謂余曰諸先生名樓竟子其記余辭不獲則曰凡樓觀臺榭之說所以寓其樂也樂無形也必寓夫彼而後形焉所謂樂者人自得之而推廣其所樂則民同胞物吾與薰蒸融液無所不至彼徒務遊觀而已者其爲樂不旣狹矣乎是故爲人牧者審其所樂何如耳今侯之登玆樓聯峰疊嶂長川平楚隱暎出沒於煙雲杳靄之間可望而不可致詰者如在几案若夫樵歌于林農謳于野行旅息于蔭以至牛馬之散布禽鳥之遊翔物皆有以樂其樂而侯之所以與物共者亦悠然怡然於一俯仰也雖然侯之得之於此蓋有在簿書丹墨之外者矣他日侯以循吏最入爲公相則諸公所以名樓者尤爲有徵矣余喜侯之政固善而今此擧有與物共樂之義故記不牢辭焉或曰春秋每興作必書不予也子之記何居傳不曰時詘而擧嬴乎余記其在春秋亦從同同而美惡殊者也蒼龍丙辰端午前三日奉常大夫前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李崇仁記


夢松樓記(현토)

洪武紀元之八年에義城丁侯는以選으로治京山하니旣下車에政通歲熟하여民以樂事라乃於治之北에起樓焉이라斬材陶瓦를以時하고而工則役遊手者라樓之制는高甍桷하여以紆其望하고薄丹雘하여以昭其儉이라工訖에觴諸老先生于其上하여以落成하고且圖所以名之也하여酒半에侯起而言曰 樓成矣하니請名之하노이다諸先生諸公은以樓로爲侯所起하여揭夢松二字로以扁之하니盖亦以古人事業名位로望侯云이라侯顧謂余曰 諸先生名樓竟하니子其記하라余辭不獲이라則曰 凡樓觀臺榭之說은所以寓其樂也라樂은無形也하니必寓夫彼而後에야形焉이라所謂樂者는人自得之하니而推廣其所樂하면則民同胞요物은吾與薰蒸融液하여無所不至라彼徒務遊觀而已者는其爲樂不旣狹矣乎아是故로爲人牧者는審其所樂何如耳니今侯之登玆樓하면聯峰疊嶂과長川平楚가隱暎出沒於煙雲杳靄之間하여可望而不可致詰者가如在几案이라若夫樵歌于林하고農謳于野하며行旅가息于蔭하며以至牛馬之散布와禽鳥之遊翔은物皆有以樂其樂이요而侯之所以與物共者가亦悠然怡然於一俯仰也라雖然이나侯之得之於此는蓋有在簿書丹墨之外者矣리니他日侯以循吏最로入爲公相하면則諸公所以名樓者가尤爲有徵矣리라余喜侯之政固善하고而今此擧가有與物共樂之義하여故로記不牢辭焉이라或曰 春秋每興作이면必書不予也라하니子之記何居오傳不曰 時詘而擧嬴乎아余記는其在春秋요亦從同이나同而美惡殊者也라蒼龍丙辰端午前三日에奉常大夫前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인李崇仁이記하노라

(역문)

몽송루 기문

홍무 기원8년(서기1375년)에 의성군 정후(휘 영손. 호 몽송)께서 선택된 등용으로 경산(현 성주)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미 수레에서 내린 뒤(현지로 부임) 정치는 통하고 풍년이 들었으므로 백성들은 일을 즐겁게 하게 되었고, 이에 동헌(治所)의 북쪽에 다락(樓閣)을 만들었다.


재목을 자르고 기와 굽기를 때를 맞추어 하였고 공사는 손이 노는 자들을 부렸다. 다락(누각)의 제도는 기와와 들보를 높이 함으로써 그 관망을 멀리하였고 단확(단청)을 엷게 함으로써 그 검소함을 밝혔다.


공사가 완료되자 여러 노선생들이 다락 위에서 술잔을 나눔으로써 낙성을 하였고, (그것은)또한 (다락의)이름을 짓고자 도모한 소이(所以)였다. 술이 반 순배 돌자 후(성주목이신 휘 영손)께서 일어나 말씀하시기를 “다락을 만드는 공사가 완료 되었으니 청컨대 (다락의)이름을 지어 주시지요” (그러자)여러 선생과  공들이 다락을 정후(丁侯)가 만들었다 여겨 ‘몽송(夢松)’이라는 두 글자를 걸어 편액 하였음은 아마도 또한 옛 사람들의 사업과 명위(名位 : 이름과 지위)로써 정후에게 바램인 것이리라.


정후는 돌아보면서 나에게 말씀하기를 “여러 선생들이 다락의 이름 짓기가 끝났으니 자네는 그 사실을 기록해 주시게” (하시기에)나는 끝내 사양을 못하여 말하기를 “무릇 망루와 정자를 만듦은 그 즐거움을 부치고자 하는 소이입니다. 즐거움이란 형상이 없어 반드시 저(彼)에 붙여진 뒤에라야 형상을 갖는 것이지요. 이른바 즐거움이란 사람이 스스로 얻어 그 즐거운 바를 미루어 확장시킨다면 즉 백성들은 동포(同胞)가 되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혼연히 하나가 되어 이르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저 한갓 놀러 다니면서 보기만을 힘쓴다면 그것이 즐거움 되기란 이미 (의미가)좁지 않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지방관(人牧)이 된 사람들은 그들(백성)이 즐기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 정후께서 이 다락에 오르시면 연이은 봉오리의 겹겹의 산들과 긴 개울의 평평하게 줄지은 모습이 노을과 구름과 아득한 노을의 사이에서 숨었다 나타나고 나타났다 사라짐을 가히 볼 수는 있지만 나무라지는 못하는 것이 마치 책상(几案)에 (앉아)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나무꾼은 숲에서 노래하고 농부는 들판에서 노래하며 길 가는 나그네는 그늘에서 쉬고, 소와 말들의 흩어져 있음과 새들이 놀면서 나는 것에 이르러서는 만물이 모두  그 즐거움을 즐김에 있다면, 정후의 만물과 더불어 즐기는 소이 또한 한번의 기거동작에서 유연(悠然:한가한 모양)하고 이연(怡然:즐거워 함)할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정후께서 여기에(이러한 경지에)이르게 됨에는 아마도 공문서를 처리하는(공적인 일) 밖에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날 정후께서 지방관으로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어 조정에 들어가 높은 벼슬아치가 되신다면 즉 여러 분들이 다락의 이름을 (정후의 아호로)지은 소이가 더욱 징험함이 될 것입니다. 나는 정후의 정치가 진실로 선함을 기뻐하면서, 이제 이 일이 만물과 더불어 같이 즐겨하는 뜻이 있으므로 (다락의)기문 지음을 굳이 사양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말한다. “춘추(春秋)에는 언제나 흥(興)이 일어난다 하여 반드시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당신의 기문은 어디에서 근거한 것이오?”(라 하기에 내 말하기를) “전(傳:춘추의 주석서)에 말하지 않던가? ‘시절이 곤궁한데도 여유를 부린다’고. 나의 기문은 그 뜻은 춘추에 있어 또한 (춘추가 추구함과)같음을 따른 것이며, 같으면서도 기리고 미워함(美惡)은 다른 것이네”


병진 단오 3일전 봉상대부 전전리 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겸춘추관편수관 이숭인이 기록함


#춘추(春秋)

춘추(春秋)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의 은공(隱公) 원년(元年, BC 722년)에서 애공(哀公) 14년(BC 481년)까지 12대(代) 242년 동안의 역사(歷史)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5세기 초에 공자(孔子, BC 552~BC 479)가 노(魯)에 전해지던 사관(史官)의 기록을 직접 편수(編修)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학(儒學)에서 오경(五經)의 하나로 여겨지며, 동주시대의 전반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라고 부르는 것도 이 책의 명칭에서 비롯되었다.


공자(孔子)가 편수(編修)하기 이전에 이미 노(魯)에는 춘추(春秋)라고 불리는 사관(史官)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맹자(孟子)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열국(列國)들이 각각 사관(史官)을 두어 사적(事跡)을 정리했는데, 진(晉)에는 ‘승(乘)’, 초(楚)에는 ‘도올(檮杌)’, 노(魯)에는 ‘춘추(春秋)’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노(魯)에 전해지던 기록을 공자(孔子)가 스스로의 역사의식과 가치관에 따라 새롭게 편수(編修)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오늘날의 《춘추(春秋)》이다.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의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편(篇)에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으니 그럼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는가. 이에 공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 … 공자는 지난날 소송안건을 심리하였을 때에도 글의 표현[文辭]을,다른사람과 의논해야 할 때에는 결코 자기 혼자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를 지을 때에는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였기 때문에 자하(子夏)와 같은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춘추의 뜻을 전수받은 뒤, 공자는 말하였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다.”


춘추(春秋)는 1800여 조(條)의 내용이 1만 6500여 자(字)로 이루어져 있어 간결한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공자는 사실을 간략히 기록했을 뿐 비평이나 설명은 철저히 삼갔는데, 직분(職分)을 바로잡는 정명(正名)과 엄격히 선악(善惡)을 판별하는 포폄(褒貶)의 원칙에 따라 용어를 철저히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었을 때도 대상이나 명분에 따라 ‘시(弑)’와 ‘살(殺)’을 구분하였으며, 다른 나라를 쳐들어갔을 때도 ‘침(侵)’, ‘벌(伐)’, ‘입(入)’, ‘취(取)’ 등의 표현을 구분해 사용했다. 이처럼 공자(孔子)는 《춘추(春秋)》에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밝혀 그것으로써 천하의 질서를 바로세우려 하였다. 이로부터 명분(名分)에 따라 준엄하게 기록하는 것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춘추는 노(魯)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고, 주(周)를 종주(宗主)로 하고 은(殷)의 제도를 참작하여 하(夏), 상(商), 주(周) 3대의 법률을 계승하고 있다. 그 문사(文辭)는 간략하지만 제시하고자 하는 뜻은 넓다. 그래서 오(吳)와 초(楚)의 군주가 왕을 자칭하였지만 춘추에서는 그것을 낮추어 본래의 작위(爵位)인 자작(子爵)으로 칭하였다. 천토(踐土)의 회맹(會盟)은 실제로는 제후(諸侯)가 주(周)의 천자(天子)를 부른 것이지만 춘추에서는 그 사실을 피해서, ‘천자가 하양(河陽)으로 수렵을 나갔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사안들을 들어서 당세(當世)의 법통을 바로잡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제후들에 대한 폄손(貶損)의 뜻은 후에 군주가 될 사람들이 이를 참고하여 실행하게 하는 데 있다. 춘추의 대의가 행해지게 되면 곧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맹자(孟子)는 “옳지 못한 설(說)과 포악한 행동이 행해지고,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고,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죽이는 자가 있어 공자가 이런 세태를 두려워해 춘추를 지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춘추는 명분(名分)에 따라 용어들을 엄격히 구별하여 서술하였고, 내용이 매우 간단하게 기록되어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이해를 돕고자 그 의미를 해석하고 풀이하는 주석서(註釋書)인 ‘전(傳)’을 지어 춘추학(春秋學)’이 생겼다. 반고(班固, 32~92)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춘추에 대한 전(傳)이 모두 23가(家) 948편(篇)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공양고(公羊高)가 지은 공양전(公羊傳)》, 곡량숙(穀梁俶, 穀梁赤이라고도 함)의 곡량전(穀梁傳), 좌구명(左丘明)의 좌씨전(左氏傳)을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한다.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은 경문(經文) 해석 중심이고, 좌씨전(左氏傳)은 춘추에 기록된 사실(史實)에 대한 역사적 실증적 해석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고향(故鄕). 자신과 인연있는 땅을 이르는 말이다. 인연이란 자신의 선조가 살았거나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통칭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고향은 반드시 하나 일 필요는 없으며, 나 또한 몇개의 고향을 가진다.

 

영천을 거쳐 군위 의성 안동으로 연결 되면서 국토를 횡단하는 도로가 국도28번이다. 신녕은 28번 국도가 통과하며, 농협 앞 삼거리에서 신녕의 치산과 군위의 백학 부계 효령 군위읍으로 연결되는 지방도로가 지나며, 28번 국도의 신녕초등학교로 분기되는 지점에서 신녕면 연정과 화산면 효정리를 거쳐 화남면 삼창리에서 국도 제35번과 연결되는 지방도. 28번 국도상의 완전삼거리에서 하양으로 연결되는 지방도와 영천에서 서울(청량리)로 연결되는 중앙선이 신녕과 연결되는 주요 길이다.

 

그러고보면 신녕은 교통의 요충지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땅에서 일어난 전란(戰亂)치고 신녕을 거치지 않음이 없었나보다. 신녕에서 28~35번 국도를 연결하는 지방도의 중간 쯤에 나의 또 하나의 고향인 효정리가 위치한다. 효정리(孝亭里)는 행정동명으로 본래는 아천(莪川)을 사이로 두고 남쪽을 괴정(槐亭)이라하고 북쪽을 효리(孝里)라 한다.

 

신녕의 북쪽에 앉아 있는 화산(華山)이 동서로 흐르는데 그 화산의 산맥 아래 남쪽으로 제법 깊고 너른 골짜기가 나온다. 이곳은 조선 초기 개국공신이셨던 정몽길(丁夢吉) 정몽상(丁夢祥) 형제분이 아천을 사이로 두고 마을을 이루었고, 자손들이 대대로 터전을 삼아 살아오고 있는 마을이다.

 

괴정이란 우리의 전통나무인 회나무(회화나무)가 많아 숲을 이루어 마치 정자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효리란 정유재란 때 시어머니를 대신하여 목숨을 바침으로써 중앙 정부로부터 열부(烈婦)와 효부(孝婦)의 정려를 받은 오천정씨가 사셨던 마을을 의미한다. 지금도 효리의 마을 앞에는 효열부를 기리는 비석과 비각이 서 있어 옛 이야기를 전한다.

 

과정리의 동구에는 조선말기의 선비였던 정갑조(丁甲祖)의 덕을 기려 후학들이 세운 정자 활천정(活川亭)이 고즈녁히 서 있고 건너에는 정몽길(丁夢吉)의 유허비와 정자 돈남정(遯南亭)이 날아갈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 낸다.

 

이 마을도 더 세분화 하면 강변마을인 갱마와 소곽산 괴정 효리 샘골로 나뉜다. 지금까지 이 동네에 모여 사는 우리 일족들은 60~70여호를 헤아리지만 그러나 젊은이들은 모두 떠나고 연세많은 노인들이 주류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노인들은 줄어 마을이 옛날과는 다르다.

 

나는 지난 97년부터 한 겨울 동안 돈남정에서 한문을 강의하면서 일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돌아보면 꿈과 같은 시간이었기에 아직도 그 때가 그리워진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고향인 괴정에서 부고가 날아들면 또 누군가 하면서 깜짝깜짝 놀란다. 그래서 일가는 백대의 가까움(一家百代之親)이라 하는가 보다. 이제 거리도 가까우니 바쁜 일들이 정리되면 한번 괴정을 찾아야 겠다.

영천시 화산면 효정1리를 괴정(槐亭)이라 부른다. 즉 홰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어 정자와 같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간 문중의 부로(父老)들과 선조들로부터 전해진 얘기와 선대의 기록들인 족보 등에는 영천의 화산 괴정마을로 처음 들어오신 어른이 나의 18대조 되시는 몽길(夢吉) 할아버지이며 그분께서 이 마을에 정주하시면서 홰나무를 많이 심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전해 진다.

 

구전되어 온 말들과 기록에는 조선초기 세조의 왕위찬탈 이후로 알려져 왔으니 최소15세가중후엽이니 시간적으로는 520~530년간 쯤으로 헤아려진다. 그러나 그 어른의 행적이 국가기록에 나와 있지 않음으로써 후손들의 한이 된지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국보로 정해진 개국공신록권(국보 제250호)에 의하면 1392년 조선왕조가 역성혁명을 통해 개창 될 때 직간접적인 도움을 준 이들을 대상으로 논공행상이 이루어진다. 이 기록에 의하면 절제사였던 정영손(丁令孫)과 그의 아들인 목사 정자위(丁子偉. 그러나 공신록권에는 위자가 危로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선조이신 전경(前卿) 정몽길(丁夢吉)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추론이 가능한 것은, 첫째 시간적으로 보면 시간적으로 약60년 정도가 차이가 나는데, 이는 여러차례 겪은 전란 등으로 인하여 선대의 기록을 멸실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지 싶다.

 

둘째 늘 문제로 거론 되던 등과(登科)의 의문이다. 문중 내에서도 조선시대의 어떤 기록에도 이 할아버지의 등과기록(과방록)이 없으므로 허위 사실을 후손들이 조작하였다는 것인데, 혁명 당시 옛 경(卿: 고려와 조선시대의 품계를 보면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을 경이라 부름)의 벼슬이었던 것으로 기록 되어 있으니 당연히 과거는 고려조에 이루어진 것이다. 즉 고려조의 과거기록을 조선조에서 찾았으니없는것이 당연하다.

 

세째 삼도의 관찰사(종2품의 지방장관)를 지냈다는 것 또한 조선조가 아닌 고려조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 공신록이 만들어진 시기는 조선개국4년인 1395년이다. 그러므로 전경(前卿)이라 직함을 기록한 것은 고려조에 2품 품계의 관찰사를 지냈다는 말이 된다.

 

종합해보면 시기의 착오는 있었으되 잘 못 되거나 없는 일을 허구로 꾸며서 만든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 말은 나의 말이 아니라 국가의 기록인 국보로 지정된 고문헌을 기반으로 재구성 해 본 결과이니, 허구보다는 신빙에 근접하리라 감히 말씀드리면서, 이것으로 짧은 나의 의견을 개진하는 바이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움은 그 이외의 기록들이 없어서 정확하게 어느 해에 이곳으로 왜 오셨는지 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명칭 : 개국공신록권(開國功臣錄券)

종목 : 국보제25호

 

공신록권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로, 개국공신록권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한 신하들에게 내린 것이다. 개국원종공신 제도는 조선시대에 개국공신을 늘리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새로운 포상제도로, 1392년부터 1397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1,400여 명에게 봉해졌다.


이 녹권은 조선 태조 4년(1395)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운 이원길에게 발급된 원종공신록권이다. 크기는 가로 372㎝, 세로 30.4㎝이며, 종이질은 닥나무종이이고, 총 행수는 243행, 일행의 자수는 대체로 9자에서 12자로 배분되어 있다.


서두에 ‘공신도감(功臣都監)’이란 글에서 시작되는 이 문서는 말미에 공신도감의 임원, 직명이 적힌 23행의 목판이고, 그외 부분은 모두 목활자로 인쇄되어 있다. 모두 공신도감에서 발급한 것으로, 이 문서에 나오는 인명은 총 695명이 된다.


이 문서는 조선 전기 개국공신에 대한 대우 및 국가성립에 영향을 미친 인물에 대한 연구, 공신록의 양식과 관련하여 중요한 가치를 지닌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본 문권(文券)은 조선조(朝鮮朝) 태조(太祖) 4년 홍무이십팔년(洪武二十八年) 윤구월(閏九月) 이원길(李原吉)에게 발급(發給)된 개국원종공신록권(開國原從功臣錄券)이다.


본 문서(文書)는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發給)한 것으로 본문서(本文書)에 나오는 인명(人名)은 총(總) 695명이 된다. 규격(規格)은 가로 30.4㎝에 세로가 372㎝가 된다. 총 행수(行數) 243행이며 일행(一行)의 자수(字數)는 대체(大體)로 9자(字)에서 12자(字)로 배분(配分)되어 있다.


서두(序頭)에 「공신도감(功臣都監)」이란 글에서 시작되는 본 문서(文書)는 문서(文書) 말미(末尾) 공신도감(功臣都監) 임원(任員)의 직명(職名)이 기재(記載)된 23행(行)은 목판(木板)이고 그외 부분(部分)은 모두 목활자(木活字)로 인쇄(印刷)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선(界線)이 있으며 계선(界線) 상하(上下)의 길이는 25.3㎝가 된다.


문서(文書)에는 「예조지인(禮曹之印)」이란 인장(印章)이 문서중(文書中)에 22개소(個所) 날인(捺印)되어 있다. 임원(任員) 18명중 4명만이 수결(手決)이 없고 다른 임원(任員)은 직함(職銜)과 성명(姓名) 다음에 서명(署名) 수결(手決)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압해정씨들의 우리나라 시조가 되는 丁德盛공께서 중국의 당나라에 계실 때 같이 진사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심아지공의 시 한수를 일가어른이신 丁丙泰翁께서 찾아 보내 주셨기에, 감히 우리말로 풀어서 여기에 옮겨 봅니다. 

 

春色滿皇州 황주에 춘색이 가득함

沈亞之      심아지

何處春暉好 봄 빛 좋은 데가 어디 있을까

偏宜在雍州 오직 마땅히 옹주에만 있으리

花明夾城道 꽃은 성벽 길을 끼고 밝은데

柳暗曲江頭 버들은 강 머리에 구부러져 어둡다

風軟游絲重 바람은 연하여도 흩날리는 거미줄은 무거우며

光融瑞氣浮 빛은 밝으니 서기로운 기운을 떠 올린다

斗鷄怜短草 병아리는 짧은 풀을 불쌍히 여기는데

乳燕傍高樓 새끼 제비는 높은 다락 곁에 있구나

綉縠盈香陌 수놓은 비단은 향기로운 길을 채우고

新泉溢御溝 새로 만든 샘은  궁전 뜰의 물도랑에 넘친다

回看日欲暮 머리 돌려보니 해는 지려 하므로

還騎似川流 돌아오는 말은 물과 같이 빨리 간다


(해설)

이 시의 뜻은 이 마을의 봄 경치가 가장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일까?


뜻밖에 옹주의 장안(옛 중국은 9개의 州로 나뉘었는데, 옹주는 아홉 개의 하나이며 장안은 그 범위 안에 있음)의 지방장관으로 부임하였다.


성벽의 양쪽을 끼고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었으며, 구부러진 강둑에는 이미 버들의 색이 푸르렀다.

가볍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부니 가벼운 거미줄은 무겁게 가라앉는데, 엷은 안개 속에서 밝고 아름다운 길의 빛은 오색찬란하다.

풀은 도리어 작고 짧아 병아리는 (풀의 작고 짧음을)불쌍히 여기며, 작은 제비새끼는 높다란 다락 볕에서 나는 법을 배운다

화려한 가벼운 수레 한대는 또 한대의 수레를 접하여 빨리 지나가며 뒤(아래)에다 끊임없는 향기를 남기며, 새로 넘쳐나는 물은 궁중의 정원을 따라 끊임없이 흐른다.

머리를 돌려 한번 보니 하늘색은 어두운데, 집으로 돌아오는 수레는 무리를 짓고 대열을 만드는데 (그 대열의)아름다움은 마치 큰 강물 가운데서 도도함이 끊임없는 큰물의 흐름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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