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행사 소식

박형준 교수님 詩

박송 입니다. 2011. 9. 20. 03:28

  2교시

 

 

 

 

 

 

 박형준 교수님 종강 풍경입니다

 

유난히 강의 자료가 많아서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방학 동안 여물을 씹듯 되새김질 해야 할 듯한 풍부한 강의자료였습니다.

 

복사 하시느라고 내내 수고 하신 드보라선배님께도 지면으로 감사드립니다^^

 

시를 뽑아 내듯 즐겁게 복사를 하시는 듯 했습니다.

 

                                                                         

 싸리꽃/박형준

 

싸리꽃을 주고 싶어
향기가 진해서
내 죽고 나면
너 발자국 밑을 쫓아다니면서라도
주고 싶어
수리조합 둑방의 풀이 유난히 푸르다
사람들이 오누이를 에워싸고 있고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소녀의 모습이
수리조합 물살에 떠 있는 저녁빛에 떠내려간다
물에서 건져낸 오빠의 얼굴이
풀물 들어서, 소녀는 얼굴이 발그레하다
동그랗게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과
입맞춤과
지는 해와
물풀 들어서
수리조합 둑방
방아깨비 발에 하늘이 들려 올라간다
태풍 지나간 후에 더 진해진
싸리꽃 냄새

 

 

가구의 힘 /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구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무덤 사이에서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였다.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추수 끝난 들녘의 목울음이
하늘에서 먼 기러기의 항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서리에 얼어붙은 이삭들 그늘 밑에서
별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가
상처에 찔리며 부드러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을 줍곤 했었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들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청춘의 불빛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건지러
자주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우물의 얼음 속으로 내려갈수록 피는 뜨거워졌다.
땅 속 깊은 어둠 속에서 뿌리들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얼음 속의 피는
신성함의 꽃다발을 엮을 정신의 꽃씨들로 실핏줄과 같이 흘렀다
지금 나는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 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들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껴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상 차려놓은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찬 서리가 내릴수록 그 속에서 잎사귀들이 더 푸르듯이,
내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나를 감싸던 신성함이
밭 가운데 숨 쉬고 있다.
어린아이들 부산을 떨며 물가와 같은 기슭에서 놀고
농부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새참을 먹으며
죽은 조상들과 후손의 이야기를 나누던 저 무덤,
그들과 같이 노래하고 탄식하던 그 자취를 따라
내 생이 제 스스로를 삼키는 이 심연속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겨울이 되면 ,저 밭가의 무덤 사이에 누워
봉분사이로 얼마나 밝은 잠이 흘러 가는지
아늑한 그 추위들을 엮어 정신의 꽃다발을
무한한 꽃다발에 바치리라
나는 심연들을 환하게 밝히는 한순간의 정적 속에서
수많은 영혼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내려다 보던 지하수의 푸른 빛을,
추위 속에 딴딴해진 그 꽃을 캐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월간 문학사상. 2009.2월호

-2009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