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행사 소식

송기원/시인,소설가

박송 입니다. 2010. 10. 28. 02:51

 

 

건달패 노름꾼인 아버지와 장돌뱅이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굶주림에 대한 공포감,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끝나는 부부싸움, 어머니의 심한 폭력 속에서 잡초처럼 자란다. 그 후 도청 소재지의 고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1년도 채 못 되어 자신이 비천한 장돌뱅이 출신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퇴를 하고 장터로 되돌아온다.

세상에 대한 무기로서 나는, 그 무렵 알기 시작한 문학을 빼놓을 수가 없다. 똘마니 시절, 나 같은 얼치기는 흔히 사건을 처리하기보다는 사건을 키우기 마련이어서, 어느 날 건달패를 따라 노름빚을 받으러 갔다가 싸움이 벌어졌는데 자칫 겁을 준다는 것이 그만 상대방의 머리통을 깨 버렸고, 나는 결국 사건이 무마될 때까지 장터를 떠나야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도청 소재지로 갔고, 거기에 있는 친척집에서 몇 달을 숨어 지냈다.
바로 거기서 나는 문학을 만난 것이었다. 친척집의 서가에는 세계 문학 전집을 위시하여 한국 문학 전집 따위가 장식용 비슷하게 꽂혀 있었는데, 지방관청의 주사 급이던 친척은 술이라도 얼큰한 날이면 나를 붙들고 서가를 자랑하며 자신의 문학 취미에 대해서  하였다. 나로서는 문학이 처음이었다. 문학마저도 ㉠장돌뱅이 부류는 낄 수 없는 보다 정신적이고 고귀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나는 한두 권 소설을 읽어 나가는 동안에 벼락이라도 맞듯 충격을 받았다.
‘이건 바로 내 이야기 아닌가!’
어떤 소설은 나보다도 형편없는 개차반 인생이 바로 그 개차반 인생을 그것도 무슨 자랑이라고 중언부언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바로 그 개차반 인생이 그런 이야기로 작가가 되고, 그리하여 당당하게 세상에 끼어들었다는 점이었다. 문학이 그런 식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다. 당시 내가 이해한 문학은 내가 세상에 끼어들 수 있는 일종의 문 같은 것이었다.
친척의 서가에서 앤솔러지를 발견하고, 그리하여 차츰 시를 알기 시작했을 때, 나는 소설보다는 시를 쓰기로 작정을 하였다. 아무리 영악한 체하지만 역시 어렸던 나로서는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세상에 까 보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치부는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무엇인가 있는 듯 없는 듯 잘도 꼬리를 감추는 시 쪽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내가 똘마니 시절에 배운 세상을 속이는 방법과 ㉡시가 지닌 상징이나 은유 따위의 애매모호한 기교는 신기하게도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다시 복학을 하자 나는 자신의 기대 이상으로 문학을 잘하였다. 시 쪽을 택한 나의 궁리도 잘 맞아떨어져서 나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놓지 않고서도 거뜬히 세상에 끼어들 수 있었다. 몇 군데인가 백일장을 휩쓸자 당연히 내 이름은 도청 소재지의 남녀 고등학교 문예반에 알려졌고, 모르는 여학생들로부터 심심하지 않게 편지도 받았다.
아아, 처음으로 여학생의 편지를 받았을 때의 감격이라니! 나에 대한 동경으로 거의 글씨마저 떨리는 듯한 그 편지는, 처음에 나에게 일종의 면죄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랬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심지어 감추어진 치부까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듯이 착각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감격의 순간이 지나자 나는 곧이어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착각하지 마라. 너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그렇듯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고작 철없는 여학생 한 명이 너에게 속아 넘어간 것뿐 아닌가. 그것도 정작 네가 아닌 너의 문학에.
편지가 아니라 실제로 여학생을 대하고 그리하여 나에 대한 호감을 확인했을 때도 나는 마찬가지였다. 도청 소재지에는 ㉢남녀 고등학교 문예반에서 한두 명씩 뽑혀 나와 만들어진 문학동인회가 있었고, 마침내 나도 거기에 가입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서로 작품을 돌려 읽고 평을 하는 식의 모임이었는데, 신입 회원으로 첫 인사를 하던 때의 기억을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아무리 무기를 지니고 단단히 무장을 했다고 해도 역시 어린 나이였다. 나에 대한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들을 대하는 순간 나는 또다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저 아이들은 혹시 내 치부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온몸이 후들후들 떨려 왔고, 그것을 숨기기 위하여 나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당시의 나에게, 적어도 그들만큼은 세상을 속이는 나와는 달리 올바르게 문학을 하는 셈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자란 아이들이었다. 바로 그들에게 내 치부를 들킨 것이었다. 그런 나를 누군가가 구해 주었다.
“댁의 명성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만 목에 힘 빼세요.”
얼굴이 달걀처럼 갸름한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의 말에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입을 벌려 웃었다. 그 순간 나는 정말로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어떤 허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 올라왔다. 엉뚱하게도, 나는 세상을 속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고 마치 그들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여전히 웃고 있는 그들을 보며 나는 이런 식일 바에는 차라리 자신의 치부를 들키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한바탕의 웃음과 함께 인사가 끝났을 때, 얼굴이 갸름한 여학생이 다시 나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여학생의 질문이 나에게는 왜 그렇듯 잔인하게 들렸던 것일까. 나는 마치 여학생을 짓뭉개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빨간색이오.”
얼마 후 그 여학생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화장실에 버렸다. 여학생의 편지를 화장실에 버린 행위는, 단순하고 유치한 심리와는 달리, 나의 일생을 통해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다. 물론 당시의 나로서는 까마득히 몰랐지만 그것이 일테면 나의 위악(僞惡)의 시초였던 셈이다. 훗날 대학 시절을 거치면서 이 위악이야말로 나에게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 ㉤세상에 대한 나의 무기는 바로 위악이었을 터이다. 사회과학 식으로 말한다면 위악이 나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이 위악은 자연스럽게 죽음이라거나 탐미주의 혹은 허무주의 등과 뒤섞여 세상에 대하여 깊게 병든 한 청년의 문학이 되어 갔다.
- 송기원, 아름다운 얼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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