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禪/이탈리아사 연구

아우렐리아누스/황제

박송 입니다. 2024. 3. 1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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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37대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Aurelianus
 
이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Lucius Domitius Aurelianus
출생
214년 9월 9일
사망
275년 9월 (향년 61세)
로마 제국 트라키아 카이노프루리움
재위 기간
로마 황제
270년 5월 ~ 275년 10월 (5년)
전임자
후임자
배우자
자녀
성명 미상의 딸
종교
아우렐리아누스의 칭호
존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칭호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Germanicus maximus: 게르만족 정복자)[1]
고티쿠스 막시무스( Gothicus maximus: 고트족 정복자)[2]
레스티투토르 오리엔티스(Restitutor[3] Orientis: 동방의 재건자)[4]
레스티투토르 오르비스(Restitutor Orbis: 세계의 재건자)[5]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장군으로서의 경력2.3. 찬탈2.4.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2.4.1. 반달족 격퇴2.4.2. 알레만니족 격퇴 및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건설2.4.3. 고트족 격퇴 및 다키아 속주 포기2.4.4. 팔미라 제국 정복2.4.5. 갈리아 제국 정복2.4.6. 개혁
2.4.6.1. 솔 인빅투스(무적의 태양신)와 전제군주제 시행2.4.6.2. 화폐 개혁2.4.6.3. 경제 개혁
2.5. 암살2.6. 가족
3. 평가4. 여담

1. 개요

로마 제국의 제37대 황제. 즉위 전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270년 3월 전임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3세기의 위기 중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를 수습하고 제국을 재건한 인물이다. 역대 로마 제국의 황제 중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였다.

즉위 직후 반달족, 알레만니족, 고트족 등의 게르만계 부족들을 시작으로 3세기의 위기 동안 로마 제국을 지속적으로 괴롭혀오던 이민족들을 일시적으로 섬멸하거나 격퇴시켰다. 이후 아예 나라를 세우고 떨어져나간 제국 동부의 팔미라 제국과 서부의 갈리아 제국도 병탄하여 제국을 재통합 시킨다. 이후 항구적인 제국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내치와 제도 개혁에 골몰했으나, 개인 비서와의 사소한 트러블이 계기가 되어 암살당한다.

로마 멸망 후 오랜 시간 그저 군인 황제 시대의 지나가는 황제 1 정도로 취급받았으나 현대에는 그가 중간에 죽지만 않았더라도 로마 제국의 모습을 획기적으로 바꿨을 유능한 황제라는 데 대체적으로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아우렐리아누스는 서기 214년 또는 21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일리리아 출신인 것으로 짐작되지만 일부 사료는 그가 그리스에서 태어났다고 기술했다. 역사학계의 정론은 아우렐리아누스가 일리리아의 농민 출신이라고 보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아우렐리아누스는 사실 로마 정착민 출신일 수도 있으며 사회적 지위가 더 높았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아우렐리아누스는 235년경에 로마군에 입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 휘하에서 게르만족에 맞서 싸웠고 갈리에누스 황제가 창설한 기병 군단의 장교로 복무했다.

2.2. 장군으로서의 경력[편집]

아우렐리아누스는 기병대 지휘관 아우레올루스의 휘하에서 여러 전공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참여한 기병대는 제국 서방과 동방을 오가며 게르만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에 맞서 싸웠고 제국 곳곳에서 횡행하는 반역자들 토벌에 앞장섰다. 그러던 268년 아우레올루스가 스스로를 갈리아 제국 황제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으로 자처하며 갈리에누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토벌에 나서 밀라노 근방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우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우레올루스를 밀라노에 가둬놓고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전투를 지휘하던 중 근위대장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에게 피살되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아우렐리아누스가 갈리에누스 암살에 가담했다고 밝혔지만, 그가 정말로 암살에 동의한 게 맞는지, 암살에 얼마만큼 관여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새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치하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달마티아 기병대의 지휘권을 맡았고 뒤이어 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에 임명되어 황제 다음가는 로마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269년 발칸 반도를 침략한 고트족을 토벌하러 출정한 클라우디우스는 나이수스에서 기병대를 매복한 후 고트족을 유인해 방심한 그들을 습격했다. 이때 아우렐리아누스는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맹활약했고 고트족 5만 명이 이 전투에서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어 노예 시장에 팔렸다. 살아남은 고트족들은 마케도니아로 탈출했지만 로마 기병대의 끈질긴 추격과 식량 부족으로 고통 받아 여러 전사들이 굶어죽자 하에무스 산맥으로 숨었다. 이에 클라우디우스는 하에무스 산맥을 포위했고, 고트족은 로마군에게 포위된 채 추운 겨울을 보내는 동안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대다수가 사망했다.

2.3. 찬탈

270년 3월, 고트족을 괴롭히던 전염병이 로마군에게도 퍼지는 바람에 클라우디우스가 병에 걸려 시르미움에서 사망했다.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를 신격화한 후, 형 고티쿠스와 원로원의 명에 따라 본국 이탈리아 동북부의 아퀼레이아에서 후방을 방어하며 원정군의 병참을 관리한 퀸틸루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동생 퀸틸루스는 그나마 남아 있는 극소수의 기록들에 따르면 177일동안 재위를 지키는 동안 안정적으로 제국의 내정을 다스렸다. 그는 많은 양의 주화를 적정한 수준에서 관리하며 발행해 물가를 잡았고, 불필요한 숙청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형 고티쿠스와 달리 로마군에 입대해 원로원 의원, 총독까지 올랐음에도, 군사적 업적이 거의 없었다.

당시 아우렐리아누스는 다누비우스 전선에서 기병대장으로 있었다. 그는 다누비우스 방어선 일대의 로마군을 사실상 사병화하여, 이들의 지지 아래 새 황제로 추대되는 방식으로 황제를 선포했다. 이때 로마군은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아퀼레이아에 머물고 있던 퀸틸루스가 군율을 엄하게 함에도 그 능력이 자신들의 장군 아우렐리아누스보다 비루하고 업적이 전무해 불신임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원로원을 강하게 압박했다. 이런 가운데, 퀸틸루스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승리할 가망도 없고, 자신이 제위를 지키겠다고 버티면 내전이 심화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자신의 주치의를 맡고 있던 안티오키아의 요한네스에게 자신의 정맥을 끊어 명예롭고 귀족적인 죽음을 주게 해달라고 명령하고 자결했다고 요안니스 조나라스 등은 기록했다.

이렇게 퀸틸루스가 죽자, 아우렐리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내전을 준비하다가, 유일무이한 황제가 됐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보내 원로원을 압박하고, 마치 퀸틸루스가 찬탈자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을 동원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사실은 전염병에 걸려 죽어간 고티쿠스에게 제위를 약속받았다는 논리 등을 강요하며, 원로원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원로원은 퀸틸루스 추대를 취소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무력을 앞세운 아우렐리아누스의 요청을 들어줬다.

2.4.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제위 등극 이후, 황제로 등극한 뒤부터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죽음에서 자신이 황제 서거를 본 사람이라고 재차 주장하며, 전임자 퀸틸루스를 찬탈자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아우렐리아누스의 과거와 그가 유일무이한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보인 행태 때문에, 원로원의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끝까지 강조했고, 이를 믿지 않은 이들을 불경, 반역으로 몰아 죽이거나 추방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 선전을 통해 자신의 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이를 믿으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272년에는 자신이 거병했던 것은 퀸틸루스가 자신의 형을 독살했기 때문이라고 선전하면서, 자신이 정통임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에도 성과는 미미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즉위 직후부터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에게 도움을 구했다. 이후, 그는 안티오키아누스를 집정관에 지명하면서, 그에게 재차 도움을 구했다. 이런 배경으로 안티오키아누스는 생애 두 번째 집정관에 올랐다. 그는 아우렐리아누스의 조치 아래 후기 로마제국에서나 볼 형태로 "집정관이자 수도 장관"이 되어 사실상 내각을 이끌게 됐다.[6]

이렇게 되자 아우렐리아누스는 여러 논란 속에서 불안했던 정통성을 안정시킬 수 있게 됐다. 그는 공권력 회복과 20년 동안 찬탈자와 반역자들에게 잠식된 국가를 되돌려놓겠다고 발표했다.

2.4.1. 반달족 격퇴

황제에 즉위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먼저 발칸 반도와 이탈리아 북부 일대에서 날뛰고 있는 반달족을 축출하기로 했다. 그는 270년 말에 로마에서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이탈리아 북부를 휘젓고 있던 반달족을 격파했다. 그들이 발칸 반도로 달아나자, 그는 이듬해 판노니아로 진군해 반달족을 또 다시 격퇴하여 다뉴브 강 이북으로 내쫓았다.

2.4.2. 알레만니족 격퇴 및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건설[편집]

271년, 아우렐리아누스가 반달족을 축출하기 위해 발칸 반도로 간 사이 알레만니족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급히 이탈리아로 돌아갔지만 플라켄티아 인근에서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그의 패배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절망에 빠진 로마인들은 앞다퉈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며 구원을 호소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포기하지 않고 군대를 수습한 후 파노의 메타우루스 강 근처에서 주둔하고 있던 알레만니족을 공격하여 파노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쳤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는 철수하고 있는 알레만니족을 추격하여 파비아에서 괴멸시켰다. 그는 이 공적으로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받았다.
 
파란 선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세르비우스 성벽
빨간 선
기원후 3세기에 지어진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하지만 게르만족이 로마를 위협했다는 사실은 로마인들에게 심히 큰 충격을 줬기 때문에, 위협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였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 주변에 새로운 성벽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르비우스 성벽을 허문 지 300년 만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 세워졌다. 여기에 피사우룸과 파눔 포르투나이 등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도 요새화했으며, 조화와 단합의 여신 콩코르디아의 이미지를 새긴 주화를 주조하여 모든 로마인이 단합할 것을 촉구했다.

2.4.3. 고트족 격퇴 및 다키아 속주 포기

이탈리아를 침략한 알레만니족 섬멸에 성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다키아 속주를 침략한 고트족을 무찌르러 출격했다. 그는 우선 그들을 다키아 속주에서 축출하고 다뉴브강을 건너 고트족을 다시 격파하고 고트족 지도자 칸나바우데스를 주살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고티쿠스 막시무스의 칭호를 얻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동방 제노비아를 상대로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나우강 전선의 안정화가 매우 중요하였고 그로 인해서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 결정이 영구적이었는지 임시적이었는지는 황제가 일찍 죽으면서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었다.[7][8] 이후 다키아 속주에 남겨진 부족들은 5세기까지 다뉴브 강을 건너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로마인의 정체성을 유지해 현재의 루마니아로 이어졌다.

한편 아우렐리아누스는 모에시아 수페리오르 속주를 개편, 다키아 아우렐리아나 속주를 편성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일대를 방어하게 했고, 세르디카를 다키아 아우렐리아나 속주의 수도로 정했다.

2.4.4. 팔미라 제국 정복

272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로마 제국의 동방 영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팔미라 제국의 여왕 제노비아는 로마의 곡물 수출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로마는 몇주 만에 빵이 바닥나 기근의 위협을 받았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 제국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제노비아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녀는 자신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예라고 주장했고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 자신을 비교했다. 하지만 제노비아의 용기와 군사적 역량은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했다. 그녀는 사냥을 즐겼고 군복을 입고 말을 탔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부대 맨 앞에 서서 도보로 수 킬로미터를 행군했다. 아우렐리아누스 이전에도 여러 로마 장군과 군대가 팔미라 제국을 제압하기 위해 접근했으나 제노비아는 그들을 쉽게 격파했다. 또한 제노비아는 행정 능력도 탁월하여 엄격한 절약 정책을 실시해 재정을 풍족하게 관리하면서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관대하게 베풀었다.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맹을 체결하고 위급 시에는 지원군을 파견하기로 약조했다.

아우렐리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아시아로 진군하자, 제노비아는 이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그녀가 그동안 만난 상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로마 군대의 맨 앞에서 진군하여 안키라[9]를 함락시켰으며 끈질긴 공성전 끝에 티아나를 공략했다. 이때 티아나 시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자신은 복수할 생각이 없으며 그들에게 손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칙령을 내려 그들을 안심시키고 도망자들을 도시로 불려들었다.

이때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티아나 공성전이 생각보다 쉽게 진행되지 않자, 아우렐리아누스는 열받은 나머지 "도시를 함락하면 개 한 마리도 살려주지 않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막상 도시가 함락되자 생각을 바꿔 주민들을 해코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앞서 한 약속을 잊었나며 항의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내가 개 한 마리도 살려주지 말라 한 건 사실이다. 그러니 개를 죽여라!"라고 답했고, 병사들은 박장대소하며 기분을 풀었다. 그 후 아우렐리아누스는 관대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며, 전쟁에서 이기면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병사들은 기꺼이 따랐다고 한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여기에 더해 자의가 아닌 강요에 의해 팔미라 여왕의 병사로 근무했던 자들에게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러한 관대한 조치는 시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로마군은 에메사의 성문 앞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다.

272년 6월, 로마군과 팔미라군은 안티오키아 근방과 에메사 근처에서 두 번에 걸쳐 격돌했다. 제노비아는 두 번의 전투 모두 참전해 병사들을 독려했고, 부하 자브다스도 탁월한 군략을 보였지만, 아우렐리아누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두 차례 전투 모두 패한 제노비아는 팔미라로 도주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프로부스를 이집트로 파견해 로마의 밀 공급지인 이집트를 확보함으로서 로마의 빵 부족 현상을 해결하게 한 뒤 본인은 팔미라를 포위했다. 제노비아는 팔미라에서 항전하면서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통치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 공성전에서 친히 전열의 맨 앞에 서서 군대를 지휘하다가 창에 맞아 부상당했다. 이 시기 그는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로마인들은 여자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다며 나를 바보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제노비아의 성격과 위엄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그녀가 전쟁을 위해 준비한 돌, 화살, 그리고 각종 원거리 무기의 종류를 모두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벽의 모든 구역에 두세 개의 발리스타가 설치되었으며, 그녀의 군용 무기에서 인위적인 불이 뿜어지고 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필사적인 용기로 무장시켰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관대한 항복 조건을 제노비아에게 제안했지만 제노비아는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거부했다. 그녀는 곧 기근이 돌아 로마군이 사막 지대에서 퇴각할 것이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군대가 지원하러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누스는 탄탄한 보급로를 확보해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켰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마침 샤푸르 1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팔미라에게 대규모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으며, 그나마 보낸 소수의 병력은 아우렐리아누스가 급파한 기병대에게 격퇴되었다. 얼마 후 프로부스가 이집트 평정을 완료한 후 아우렐리아누스와 합류하자,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제노비아는 가장 날랜 낙타에 올라타 달아났다. 그러나 그녀가 유프라테스 강둑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에게 생포되어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끌려왔다. 팔미라는 곧 항복했고 아우렐리아누스는 특별히 약탈을 금지했다. 그 대가로, 팔미라는 막대한 양의 황금과 무기, 말, 낙타, 비단, 보석을 헌납해야 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에 600명의 병력을 남기고 에메사로 돌아가 승전에 따른 포상과 징벌을 실시했다. 이때 그는 제노비아에게 어떻게 로마의 황제들에게 감히 맞서 싸울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노비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우레올루스 갈리에누스 같은 사람을 로마 황제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폐하만을 나의 정복자, 나의 주군으로 인정할 뿐입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를 로마로 끌고 가 개선식에 참석시키게 한 뒤 자신 역시 귀국길에 올랐다가 도나우 강을 건너 약탈을 자행하고 있던 사르마티아인들을 토벌했다. 그런데 273년, 팔미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제노비아의 친척인 셉티미우스 안티오쿠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600명의 수비대가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0]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급히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로 진군해 단숨에 함락시키고 도시를 사흘간 약탈하는 걸 허용했다.[11] 이때부터 동방에서 번영하는 도시였던 팔미라는 쇠퇴했고 나중엔 촌락으로 전락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피르무스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에 대한 밀 공급을 또다시 끊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이집트로 진격해 반란을 몇 주만에 평정하여 이집트의 소요를 잠재웠다. 이렇듯 동방 질서를 회복한 공적으로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동방의 재건자라는 뜻의 레스티투토르 오리엔티스(Restitutor Orientis) 칭호를 수여받았다.

2.4.5. 갈리아 제국 정복

274년,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 정복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엔 외교를 통해 갈리아 제국을 복속시키기로 했다. 갈리아 제국의 황제 테트리쿠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끌고 온 로마군과 샬롱에서 대치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눈치채고 황위에서 물러나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로마 제국에게 귀속시키기로 했다. 그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밀사를 보내 신변을 보장해주면 귀순하겠다고 제안했고, 아우렐리아누스는 흔쾌히 수락했다. 274년 2월 또는 3월, 테트리쿠스는 아들 테트리쿠스 2세와 함께 로마군에 귀순했다. 그러나 갈리아 제국군은 테트리쿠스 부자를 배신자라고 비난하였고, 끝까지 싸울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전투가 벌어졌고, 아우렐리아누스는 격전 끝에 갈리아 제국군을 섬멸했다. 이후 트리어에 입성하여 자신의 주화를 주조하게 하였고, 갈리아 제국의 관원들이 제 자리를 계속 유지하게 했다. 또한 여전히 복종하지 않던 루그두눔[12]을 점령하고 막대한 벌금을 매겼다.

이렇게 해서 갈리아 제국을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거대하고 화려한 개선식을 열었다. 개선식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갈리아의 왕 테트리쿠스와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였는데, 각자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연도에 늘어선 군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제국의 재통합을 환영했으며 원로원은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세계의 재건자라는 뜻의 레스티투토르 오르비스(Restitutor Orbis)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개선식이 끝난 뒤 제노비아를 로마 근교의 티볼리의 어느 저택에서 살게 해줬고 그녀의 세 딸은 로마 귀족들과 결혼했다. 또한 테트리쿠스와 그의 아들은 예전의 재산을 그대로 유지했고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테트리쿠스는 나중에 루카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2.4.6. 개혁

아우렐리아누스는 가공할 만한 군사적 업적을 남겼지만, 그가 로마 제국의 후임자들에게 남긴 최고의 업적은 바로 대대적인 내정 개혁과 황제권의 절대화였다. 실제로 이후 등장하게 될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의 대대적인 국가 개혁은 아우렐리아누스가 청사진을 그리고 추진했던 조치를 그들이 이어받는 형태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우렐리아누스는 과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이은, 도미나투스(= 전제군주정)의 아버지와 같은 황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개혁 방법은 여러 부분에서 도미티아누스의 것과 많이 비슷했다. 따라서 권력 강화 방법은 과거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연상될 정도로 냉혹한 측면이 많았고, 이는 그가 사후 프로부스보다 인격적으로 잔혹하고 교양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게 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의 개혁은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됐음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도미나투스 설계도 그 자체였다.
2.4.6.1. 솔 인빅투스(무적의 태양신)와 전제군주제 시행[편집]
모든 혼란을 수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솔 인빅투스(Sol Invictus)[13] 숭배 의식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그는 태양신 숭배를 통해 제국의 모든 민간인 및 군인들을 하나로 단합하여 외적에 맞서 싸우기를 희망했다. 이 숭배의 중심지인 신전은 274년에 아우구스투스 영묘 북부 지역에 지어졌고 12월 25일을 솔 인빅투스 기념일로 지정했다. 이는 강력한 통치권자가 없다면 구심점을 잃어 분열해 버리는 제국의 동부와 서부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황위를 찬탈해 선황의 권위를 활용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고려한 조치였다. 군인 황제 시대 이전에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제위를 계승한 황제들은 선황을 신격화하고 그와 자신의 연결 고리를 강조하는 것으로 권위를 쌓았는데, 아우렐리우스는 그럴 수가 없었던 것.

그래서 그는 동전에 자신의 모습을 새기면서 데우스 에트 도미누스 나투스(Deus Et Dominus Natus)[14]라는 문구를 덧붙이도록 하고, 황제의 모든 명령에는 하나의 강력한 신과 통치자의 위엄을 강조했다. 이는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채택한 절대군주제에 그대로 재도입되어 굳어지게 됐다.

이어 후대 기독교도 사가들과 일부 역사가들의 기록처럼, 아우렐리아누스는 솔 인빅투스를 최정점으로 하는 로마 국교를 완성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황제가 이 국교의 유일한 대리인이며 최고 사제에 올라 군대, 원로원, 관료 등을 계서제에 집어 넣고자 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그가 이를 시행하던 중 암살되면서 끝내 무산됐다.

그래서 후대의 기독교사가 락탄티우스는 그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충분했다면 기독교 박해를 실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그대로 재도입됐기 때문이다.
2.4.6.2. 화폐 개혁
 
 
아우렐리아누스의 초상이 그려진 화폐.

아우렐리아누스는 뒤이어 화폐 제도도 개혁했다. 그의 통치 초기, 로마에서 동전 주조를 맡았던 펠리키시무스가 노동자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펠리키시무스는 동전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원재료인 은을 빼돌리고 질이 떨어지는 동전을 주조해왔는데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를 처벌하려 하자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 반란을 단호하게 진압하고 펠리키시무스를 재판에 회부해 처형했다. 이에 일부 민중이 폭동을 일으키자, 그는 군대를 투입해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했다.[15]

또한 황제는 이 반란과 연루된 원로원 의원 몇 명을 사형에 처했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는 5%의 은을 함유한 안토니아니 동전을 주조하게 했고 모든 오래된 저질 동전을 회수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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