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禪/이탈리아사 연구

스파르타쿠스/반란

박송 입니다. 2024. 3. 18. 17:09

스파르타쿠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으며, 관심이 갔던 인물은 바로 노예 반란을 이끌었던 스파르타쿠스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스파르타쿠스의 단독 열전이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당대의 유명한 정치인들의 열전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크랏수스, 카토, 폼페이우스, 키케로, 카이사르 등등의 쟁쟁한 인물들의 열전에서 그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인으로 로마의 밑에 위치한 카푸아 지역의 검투사였다. 저자는 스파르타쿠스가 술라의 동방원정 때 징용되어서 들어온 이민족이라고 추측했다. 그 뒤 그는 어떤 잘못을 하여서 로마의 대역죄를 지었고, 그 결과 검투사가 됐던 것 같다. 그는 동료 검투사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 베수비우스 산에서 로마군을 격퇴하고 북쪽으로 진군하며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지만 결국 부하들의 반발로 이탈리아 남부로 향했다. 북으로 향하는 도중 로마 정규군을 크게 이겼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자만하지 않고 로마의 정예병과 최대한 접전을 피하며, 남부로 피신했다. 남부에서 반란군은 내분에 빠지는데 크릭서스가 이끄는 켈트족과 골족 세력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머물길 원했으나,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를 넘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는 결국 자신들이 생존할 유일한 방법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로마와 근접한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끊임없이 로마의 정예병에 시달려야 하고 장기전으로 흐를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스파르타쿠스는 다시 북쪽을 향해 진군했다.

 

로마는 이런 반란군의 분열을 이용하여, 남부에 남은 크릭서스의 군대를 박살 내고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를 다시 공격했다. 놀란 스파르타쿠스는 북진을 포기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분열된 세력을 수습하여 전력을 정비했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정예군단을 다시 한 번 격파하여 반란군의 위용을 과시했다.이에 로마는 가장 모략적이고 음험한 정치가 중 한 사람인 크랏수스를 스파르타쿠스의 토벌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크랏수스는 반란군을 이탈리아 남부로 몰아냈고, 방어벽을 세워 장기전으로 반란군을 괴롭혔다. 스파르타쿠스는 시칠리아 섬으로 도주하여 재기를 꾀했지만 해적들에게 속은 덕에 섬으로 건너가지 못 했고, 결국 그는 크랏수스의 포위망을 벗어나 반도의 중부로 진군했다. 뒤를 쫓는 크랏수스의 군대와 조우한 스파르타쿠스는 최후의 전쟁에서 크랏수스를 향해 돌격하였고, 결국 이 돌격이 실패함으로 반란군은 패배했다. 그 뒤 크랏수스는 잔존 반란군을 토벌했으며, 살아남은 반란군 일부는 스파르타쿠스가 행하려 했던 계획인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탈출하려고 도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온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스파르타쿠스 전쟁은 로마의 모순점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반란을 통해 우리는 로마인과 외부 민족의 차별적인 대우, 자유민과 노예의 차별적인 대우를 유추할 수 있다.

 

흔히 문명국이라고 생각하면 화려한 외면과 뛰어난 내면적 규율을 떠올리지만, 제국주의 로마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더없이 위대했지만, 내면적인 부분에는 부패가 가득했다. 흔히 공화정 로마는 하층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 최대한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았고, 이것이야말로 공화정 로마의 가장 뛰어난 점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자유는 철저하게 로마인에 한정됐다. 타민족과 타도시 출신의 사람들은 로마인 시민이 누리는 정치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노예처럼 착복당했다. 게다가 로마 안에서도 노예 계급은 여전히 인간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수탈당했다.이 당시 공화정 로마제국에 벌어진 사건은 다음과 같다. 1,2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 세르토리우스의 이베리아 반도 반란,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의 반란, 그리고 이탈리아 소도시의 동맹시 전쟁,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지중해 연안 해적 창궐. 즉 로마는 화려했지만, 화려한 제국주의를 지탱하면서 발생한 수많은 모순들이 전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은 기득권층의 부패를 상징하는 사건이며,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도 동방 민족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시각으로 인해 일어났다. 로마와 이탈리아 소도시가 싸웠던 동맹시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로마의 무지막지한 갑질을 상징하는 사건이며, 시칠리아 노예 반란은 계급 갈등을 상징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전쟁들은 결국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로마의 반작용에서 비롯한 것이다.반란은 아마추어적일 수밖에 없다. 아마추어적인 반란이기 때문에 반란에 어울리는 감성은 냉정이 아니라 열정이다. 반란을 지탱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군중심리고, 이런 군중심리는 결국 열정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아마추어적인 반란군은 늘 의욕에 앞서 로마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는 최대한 로마의 정규군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애초에 급조된 반란군으로 정예화된 로마군과 전면전을 펼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는 몇 번의 전투로 정규군을 이겼지만, 이기면 이길수록 더욱 강력한 상대를 보내서 응수하는 로마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결국 로마의 영향력이 미칠 수 없는 곳으로 피신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었고, 여의치 않자 시칠리아에서 농성을 하려고 했었다. 반란이라는 것은 주동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수동적인 뉘앙스가 강했다. 그는 로마의 주도적인 군세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지만 자신의 집단을 설득하지 못하자 주장을 고집하기보다 군중들의 의견을 따라서 남부로 가는데 동의했다. 그는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했지만 이를 자신의 집단에 전달하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그의 반란군에서는 의견을 달리한 이탈 등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란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의 사후 노예들은 스파르타쿠스를 자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신봉했으며, 로마의 지식인층도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임페라토르(뛰어난 공적을 이룬 장군에게 주는 칭호)에 어울리는 최후라고 하며 칭찬했다. 흔히 우리는 공화정 로마를 매우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카토와 키케로 등등은 자유를 신봉하는 로마의 공화정 체제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들을 자유의 수호자 처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역대의 로마 지성인들은 그렇게 평가했으니까.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화정 로마는 매우 부당한 국가다. 자국 로마인들에게는 자유의 국가일지 모르겠으나, 수많은 식민지의 사람들과 노예의 입장에서는 그저 악독한 수탈자에 불과할 뿐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런 부당한 체제를 옹호하는 카토와 같은 인물을 스파르타쿠스는 가장 경멸했을지도 모른다.결국 그들의 자유는 기득권의 자유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역설적으로 진정한 자유 를 상징하는 인물은제국주의 기득권 체제에 반발한 노예스파르타쿠스가 아닐까?비슷한 사례로 중국의 후한 시대에 황건적의 난을 꼽을 수 있다. 흔히 우리는 한나라를 되살리려고 노력했던 제갈량과 같은 인물들을 두고 위인이라고 칭송한다.

 

 

그리고 황건적의 난은 그저 하층민이 질서를 어지럽히기 위해 일어난 폭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토록 악랄하게 수탈한 한나라를 복원하려는 제갈량이야말로 역적이 아닐까? 황건난이 왜 일어났을까? 바로 하층민들에 대한 수탈이 극에 극을 달해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황건난과 스파르타쿠스의 전쟁은 결국 봉건주의 시대에서 인간이 외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였던 셈이다.수탈이 보편화된고대의 하층민이라고 해서눈감을 문제는 아닌 것 같다.지나친 수탈과 억압이 아닌 적당한 수탈에 그쳤더라면 과연 그들이 난을 일으켰을까?결국 이런 야만적모순을 가졌던 로마 공화정은 카이사르로 인해 제정 국가로 발돋움한다. 지성인들과 로마 시민의 입장에서는 자유의 몰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노예 그리고 식민지 사람들 입장에서는 체제 전복이크게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노비이자 패배자였던 스파르타쿠스였기에 현전하는 기록은 매우 미비하다. 그렇기에 책의 대부분은저자의 유추에 의하여 구성됐다. 그렇기에 책의 내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조심스럽지만, 책 말미에 참고 자료를 살펴보면 저자가 미비한 기록의 인물을 복원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책의 단점은 저자의 유추로 구성된 내용이지만, 역으로 장점 역시도 저자의 탁월한추론이라고 생각한다.사실 기록이 미비한 고대사 영역은 현전하는 미비한 기록을 바탕으로 많은 부분을 역사가의 주관적 유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고대사를 다루는 모든 저작에도 해당하는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논란이 많은고조선 역시와 삼국시대 연구를 생각하면 될 듯싶다.) 아무튼 나는 저자의 의견을 흥미롭게 읽었으며, 분석과 유추 역시도 타당한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저자의 다른고대 전쟁 저작인 《살라미스 해전》과 《트로이 전쟁》도 읽어봐야겠다.


전설에서 역사로, 생생하게 복원해낸 스파르타쿠스 전쟁



스파르타쿠스는 고작 74명의 동료 검투사와 함께 로마제국을 위협하는 반란에 불을 댕겼다. 파죽지세로 6만 명의 군사를 모은 그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을 장악했고 로마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로서 스파르타쿠스는 반란군을 이끌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고 한때 로마 군대에서 복무했던 전직 군인이자 검투사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로마 군단에 맞서 하홉 차례나 승리로 이끌며 결국 패배할 때까지 2년에 걸쳐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스파르타쿠스 전쟁 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반란을 극적이고도 사실적으로 설명한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실패는 부분적으로 자신들의 탓이기도 하다. 반란군의 규모는 거대했고 종종 규율이 무너지고 통제를 벗어났다. 다양한 민족 집단이 섞여 있어서 자주 내분에 휩싸였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이탈리아를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약탈의 쾌락에 탐닉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연구의 산물인 스파르타쿠스 전쟁 은 고대 문헌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증거와 역사적인 재연 그리고 한때 스파르타쿠스가 호령했던 이탈리아를 두루 여행한 저자의 경함까지 더한 역작이다.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 Σπάρτακος
 
데니스 포야티에의 조각상 (1830년)[1]
본명
스파르타쿠스 (Σπάρτακος)
출생
스트루마 강 인근
(現 불가리아)
사망
기원전 71년 (향년 39세 또는 40세)
셀레 강 인근
참전
제3차 노예 전쟁
(스파르타쿠스 전쟁)
참전 기간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제3차 노예 전쟁(스파르타쿠스의 난)
2.2.1. 검투사들의 탈주2.2.2. 검투사, 로마군을 격파하다2.2.3. 자유의 투사2.2.4. 로마군이 달아나다2.2.5. 알프스가 보인다2.2.6. 크라수스의 등장2.2.7. 수세에 몰리다2.2.8. 임페라토르의 최후
2.3. 전쟁 이후
3. 평가
3.1. 군사적 역량에 대하여3.2. 후대의 평가
4. 그를 소재로 한 창작물5. 외부 링크6. 관련 문서

1. 개요

고대 로마 시대에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운 검투사 노예.

자유를 갈망하며 억압에 저항했던 그의 항쟁은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불멸로 만들었고, 많은 정치 사상가들과 예술가들, 시민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2. 생애

2.1. 출생

스파르타쿠스 개인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며, 어디까지가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단순한 전설인지도 알 수 없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그는 트라키아[2] 유목민 출신으로, 명민한 정신과 대단히 튼튼한 신체를 갖추었고, 신분에 비해서 훨씬 교양 있는 인물로 트라키아인보다는 그리스인에 가까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목민 출신이라고 기록된 부분을 다르게 해석하여, 트라키아 마이디(Maidi) 부족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당시 트라키아에는 그리스어 스파르타코스라는 이름의 촌락이 있었는데, 라틴어 스파르타쿠스와 같기 때문에 그를 이 촌락 출신이라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즉 그리스 스파르타와는 별 관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웅전》에서는 또 그의 아내[3]는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부족 출신으로 디오니소스의 광기에 들린 여자 예언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트라키아 디오니소스 숭배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아피아노스의 기록에 의하면 스파르타쿠스는 한때 로마군의 병사로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만, 스파르타쿠스가 로마군을 상대로 사용한 비범한 전술 능력을 볼 때 그가 태어날 때부터 노예 출신이 아니라 본래는 교양 있는 자유인이었으며, 군대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는 가설이 그럴 듯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적지 않다. 고대 사회는 현대 이상으로 지식과 기술의 전수가 신분의 공고화, 권력, 부의 세습과 직결되어 그 전수 과정이 매우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4] 콜린 맥컬로의 소설《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이 가설을 적당히 비틀어서 스파르타쿠스가 실제로는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인으로 전직 군단병이었고, 모종의 이유로 탈영병 취급을 받아 검투사로 전직하였는데, 당시 검투사 세계에서 인기있던 기믹 중 하나인 "트라키아인" 역을 맡으면서 이름을 그 역에 맞게 스파르타쿠스로 바꾸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기묘하게도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키기 3년 전인 BC 77년 겨울에서 BC 76년에 걸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트라키아의 마이디 부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전쟁이 스파르타쿠스가 노예로 전락한 중대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2.2. 제3차 노예 전쟁(스파르타쿠스의 난)

 

2.2.1. 검투사들의 탈주

기록이 확실하지 않아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는 추정과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으나, 아무튼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는 노예가 되어 이탈리아로 끌려와 검투사가 되었다.

스파르타쿠스가 들어가게 된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는 렌툴루스 바티아투스라는 남자가 소유한 곳으로 이곳 검투사들은 트라키아인과 갈리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두고 바티아투스 소속 검투사들이 실제로 트라키아와 갈리아 출신이라는 설과 당시 검투사 세계 양대 기믹이 트라키아인과 갈리아인이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는 설이 갈린다. 양쪽 다 나름대로 역사적인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라 현재는 두 가설 모두 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기록에 의하면 스파르타쿠스가 소속된 검투사 양성소는 다른 곳보다도 검투사들에 대한 대우가 상당히 가혹한 곳이었던 듯하다. 사실 노예나 포로들이 혹독한 대우를 받으며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당시 로마의 검투사는 상당히 인기 있는 직업이었고, 노예나 하층민보다 자유인(로마 시민) 비중이 더 높았으며, 검투 시합도 매일매일 목숨을 거는 수준으로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현대의 이종격투기 선수들과 비교하는 게 아주 적절할 정도. 다만, 인권에 대한 현대적인 개념이 거의 없었던 당시의 특성을 감안하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비참하고 위험한 시합을 하며 혹독한 대우를 받는 검투사들도 엄연히 존재했다. 바티아투스 아래의 검투사들이 바로 그 지경이었던 것.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 양성소의 잔혹한 대우에 반발하여 BC 73년 여름, 74명의 동료 검투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바티아투스에 대한 기록은 이후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스파르타쿠스와 수십 명의 검투사 동료들만의 소규모 탈주극에 불과했다. 양성소를 탈주한 스파르타쿠스와 그 동료들은 베수비오 화산의 산악 지대로 도망쳤다. 보통 화산 지역은 암석만 그득한 황폐한 지역이지만, 베수비오 화산이 분화해 폼페이를 덮치는 것은 이로부터 150년 뒤인 원수정 시대의 일이였고 따라서 당시의 베수비오 화산은 화산인지도 모를 정도로 삼림이 울창한 곳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베수비오 화산은 숨고 산적질하기 딱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위협하고 짐을 빼앗는 산적질을 하기 시작했다.

계속된 산적질에 카푸아에서도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소규모의 토벌대를 파견하였는데 스파르타쿠스 일당은 이들을 격퇴하고 빼앗은 무기와 갑주로 무장한 뒤 더 심하게 날뛰었다. 이들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고 이를 듣고 합류한 노예, 불량배, 부랑자들로 인해 카푸아 지방 정부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할 수 없이 중앙 정부인 로마에 노예들의 진압을 요청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2.2.2. 검투사, 로마군을 격파하다

처음에 로마 정부는 이들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하였으며 때문에 정규 로마 군단병 레기온이 아닌 시민군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3천 명의 신병이 긴급히 징집되었고 이들은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5]의 지휘하에 스파르타쿠스를 토벌하러 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법무관 글라베르는 베수비오 산으로 올라가는 길들을 모두 철통같이 막고 한 발짝 한 발짝 올라가며 노예군을 깨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노예군은 산 속에 널려있는 야생 넝쿨을 꼬아 밧줄을 만들어 그것을 타고 험한 바위를 타고 내려와 글라베르군의 뒤편으로 돌아가 순식간에 습격했다. 불의의 기습에 깜놀한 로마군 3천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다가 노예군의 공격에 박살이 났다.

그러자 로마 정부는 2차로 법무관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 지휘 아래 다시 시민군 4000명을 편성하여 보냈다. 이때 바리니우스는 그의 부관인 루키니우스 코시니우스에게 군사력의 절반을 지휘하게 하였다가 각개격파당했고, 코시니우스는 별장에서 마음놓고 목욕을 하다가 스파르타쿠스의 기습을 받아 벌거벗은 채 허둥지둥 하다가 살해당했다. 바리니우스는 스파르타쿠스 반란 도당을 포위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밤 중에 시체를 살아있는 것처럼 세워놓고 빠져나가는 속임수를 썼다. 이 사실을 알아낸 로마군은 곧바로 스파르타쿠스를 추격했지만 얼마 못 가서 크게 패했고, 바리니우스는 도망치긴 했지만 말과 파스케스, 군기를 모조리 스파르타쿠스에게 빼앗겼다. 군대가 군기를 적에게 빼앗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죽을 죄였고, 여러 개의 나뭇가지를 묶어서 만든 도끼인 파스케스는 그 당시 로마 고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인데 이걸 외국도 아니고 반란 노예 무리에게 뺏긴 것이다. 로마의 위신에 얼마나 큰 구멍이 났을 지 알 만하다.

2.2.3. 자유의 투사

두 차례에 결쳐 로마 정부가 파견한 토벌대를 무찌르자 스파르타쿠스의 명성은 로마 전역에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 전역의 노예들이 반란에 합류하였다.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고의적으로 양치기들이 많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그의 생각대로 양치기들은 앞을 다투어 스파르타쿠스에게 합류했다. 당시의 양치기 노예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발이 빨랐으며 난폭하기로 이름이 높았기에[6] 스파르타쿠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으며, 노예는 아니지만 그들과 처지가 별로 다를 것 없고 사회에 불만이 많은 하층민들도 반란에 합류하였다. 반란에 합류한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에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산적떼는 가공할 숫자로 불어나게 된다. 문헌마다 숫자가 4만, 7만, 9만, 12만 등으로 다양하지만,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적은 수인 4만이라도 고대에는 엄청난 수였다.

이리하여 스파르타쿠스의 탈주는 단순한 노예 탈주 사건이 아니라, 로마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최대의 노예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노예군은 누케리아, 투리, 메타폰툼 등의 도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그때마다 병력을 확장하고 전리품도 대거 탈취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로마에 학대받았던 원한이 첩첩히 쌓여 있던 노예 병사들은 살인, 약탈, 강간, 방화 등을 수시로 저질렀다. 로마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약탈을 막으려고 했으며 이탈리아에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노예군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스파르타쿠스의 가장 친한 동지인 크릭수스 역시 "로마놈들을 죽이자!"는 의견을 가졌고, 이 때문에 나중에 둘이 갈라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도 스파르타쿠스의 "내년에 로마군이 쳐들어올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두에게 받아들여졌고, 이에 따라 그는 야생마를 잡아 기병대를 조직하고, 양치기들을 모아 군인으로 키우는 등의 준비를 했다. 또한 ,  같은 사치품의 구입을 금지하고 이나 구리를 구입하게 함으로써 장래에 쓸 무기를 만드는 치밀함을 보였다.

2.2.4. 로마군이 달아나다

이듬해 로마 정부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 판단하였고 더는 묵과할 수가 없어 그해에 선출된 두 집정관, 루키우스 겔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에게 각각 2개 군단의 정예 병력을 주어 스파르타쿠스의 진압을 맡겼다. 두 명의 집정관이 군단 지휘권을 가지고 2개 군단의 정규군을 적국의 정규군도 아닌 일개 폭도 무리의 토벌에 투입한 것은 로마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이 무렵 스파르타쿠스와의 의견 차이로 그의 동료 크릭수스가 일부 병력을 데리고 떠나갔는데, 로마 집정관 겔리우스의 군단병들이 이들을 추격하여 가르가노 산에서 대파시키고 크릭수스를 죽인다. 이 소식을 들은 스파르타쿠스는 나머지 병력과 북상하여 갈리아로 달아나려 시도하였고 이를 렌툴루스가 가로막았다. 두 명의 집정관이 출정했는데, 한 사람만 앞길을 막은 이유는 당시 로마 집정관들이 둘이서 합쳐서 이기기보다는 군사적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 본인의 병력만으로 이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렌툴루스는 자신 휘하의 병력만으로 급히 싸움을 걸었는데 이것이 패인이 된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렌툴루스의 군단을 거짓말처럼 격파하였고, 이 때 로마군은 수치스럽게도 스파르타쿠스에게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 이 전투에는 이름도 없고, 로마 역사가들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채 그냥 졌다고 썼을 뿐이라서 스파르타쿠스가 어떤 전술을 썼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숫자만 믿고 무식하게 돌격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렌툴루스의 로마군이 노예군의 일부를 포위했을 때 스파르타쿠스가 나머지 노예군과 함께 렌툴루스를 기습했다고 한다. 곧이어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을 추격해오는 겔리우스의 군단도 격파했으며,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으로 부임한 전직 집정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병력까지도 격파한다.

이는 지중해 최고의 군사적 영광에 빛나는 로마로서는 크나큰 치욕이었다.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물건에 불과한 노예 검투사와 그 검투사가 지휘하는 노예군에게 로마의 높으신 분들인 현직 집정관 2명과 전직 집정관 1명이 연달아 패배한 것이다. 군단 수만 따져봐도 집정관 1인당 2개 군단이니 6개 군단이 패배를 당한 셈이다.[7]

그 다음에 들어온 소식은 로마 고위층이 경악하며 그들의 분노를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스파르타쿠스가 포로로 붙잡은 로마인들에게 검투사 경기를 시켜 서로 죽이게 했던 것이다. 이 경기는 전사한 크릭수스를 위해 벌인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전사자를 위해 경기를 바치는 것은 로마의 높으신 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일로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길이 남아 로마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되었다.

2.2.5. 알프스가 보인다

두 집정관을 패배시킨 스파르타쿠스와 동료들은 계속 북상하였고 가는 길에 합류하는 인원 덕에 12만까지 불어난다[8]. 능력을 상실한 로마군의 추격을 뿌리친 이들은 알프스 산맥까지 행군하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남하를 시작해 나폴리 지방으로 내려온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것이 스파르타쿠스 최대의 (그리고 사실상 유일의) 실수라고 평가한다. 그냥 진군했으면 자유를 얻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 본인이 자유를 찾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던 것은 분명한 만큼, 왜 이렇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스파르타쿠스 측의 사정이나 의사 결정을 대변하는 기록이 전무한지라, 여러 추측만이 분분할 뿐이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은 스파르타쿠스의 수하들(특히 트라키아 출신이 아닌 이들) 가운데 다수가 야만족이 들끓는 빈곤한 벽지인 트라키아로 향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인데, 반란 초기부터 스파르타쿠스의 말을 잘 듣지 않았던 노예들의 행태로 보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배리 스트라우스 같은 경우는 스파르타쿠스 군단의 상당수를 이뤘던 켈트 게르만족이 소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두번째 세대 노예였던 점을 얘기하고 있다. 즉, 그들에게 알프스 이북은 고향이 아니라 타향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가 세력 확대를 위해 포섭한 이탈리아 남부의 빈민과 유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평생 이탈리아 남부에서 살아왔을 그들에게 거대한 알프스 산맥이 주는 위압감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사실 스파르타쿠스에게는 단신으로 혹은 따르는 자들만 이끌고 고향으로 떠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2.2.6. 크라수스의 등장

스파르타쿠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안 원로원은 로마 제일의 부자인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스파르타쿠스 토벌의 명을 내린다. 크라수스는 노예군이 절대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님을 알고는 패주한 집정관의 군대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징집한 병사를 합친 무려 8개 군단으로[9]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과 맞서 싸우게 된다.

집정관이 패배한 싸움에 등급이 낮은 법무관인 크라수스가 나선 이유는 두 집정관들이 이미 산적떼에게 패배했다는 망신을 당했으므로 더 이상 군단을 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수스는 8명의 법무관 중에서도 수석 법무관이었고 따라서 두 집정관의 패배 뒤 그가 지휘할 차례였던 것이었다. 또한 원로원이 로마 제일의 부자였던 크라수스가 사비를 털어 병력을 소집하기를 기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다 이 때의 스파르타쿠스는 단순한 노예가 아닌 로마의 집정관 두 명을 연달아 패배시킨 반란군 수장인 만큼 크라수스 입장에서도 이런 적을 상대로 군공을 쌓을 수 있다는 건 탐나는 기회이기도 했을것이다.

크라수스는 결전에 앞서 패배한 집정관의 군단병들에게 로마군의 법정 최고형인 10분의 1형(decimatio), 즉 모든 십인대에 열 명당 한 명을 제비로 뽑고 나머지 아홉 명이 그 한 명을 직접 때려죽이게 하는 형벌을 내린다. 원래 데키마티오는 그 잔혹함이 너무 심하다 하여 집단 항명과 같이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군기를 잡아야 할 상황일 때만 내려졌으며, 설령 선고가 내려진다 해도 상징적으로 선고만 할 뿐 실제로는 아예 시행하지 않거나 극소수 주동자에게만, 그나마 그냥 사형으로 대체하는 식으로 적절히 조치하는 경우가 많았을 만큼 심각한 사안으로 인식되었다. 원래 이 정도 형벌을 집행하면 당장은 승리를 하더라도 나중에 법적, 정치적으로 책임을 추궁받기 십상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자주 져 본 이민족도 아니고 오합지졸 그 이하인 노예군에게 등까지 돌려 도망친 로마군 병사들을 시민들이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겨서 적당히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10] 살아남은 병사들도 전원 군단에서 추방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다가 크라수스가 작전 재개를 결정한 뒤에야 겨우 복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무서운 형벌을 내려 패잔병의 1할을 처형하고 전 군단에게 본보기로 삼은 뒤 로마군은 스파르타쿠스를 조이기 시작한다.

2.2.7. 수세에 몰리다

수의 열세에 서서히 밀린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장화 발끝까지 몰렸다. 불리함을 깨달은 스파르타쿠스는 해적들과 접선해서 선박을 얻어 이탈리아를 탈출하려 했지만 배를 주기로 한 해적들의 배신으로 실패했고, 뗏목을 동원해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로마군의 공격으로 실패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스파르타쿠스가 시칠리아로 달아나서 그 섬을 근거지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본다. 시칠리아는 몇 년 전에도 노예 반란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판단 자체는 옳았지만 문제는 해적들이 로마에 매수당했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스파르타쿠스에게 나쁜 소식이 전해진다. 외국으로 원정을 나갔던 로마 군단들이 속속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를 궁지에 몰아넣고 벽까지 쌓아서 포위망을 완성한 크라수스의 병력들은 "이제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막 이기고 돌아오는) 폼페이우스가 오면 넌 죽는다."고 적을 조롱했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파르타쿠스는 병력을 이끌고 로마군의 포위망을 보기좋게 돌파해버린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말을 통 들어먹질 않는 이놈의 노예들의 고질병이 또 터졌다. 노예군 일부가 스파르타쿠스와의 의견 차이로 갈라져 스파르타쿠스 진영을 이탈하여 독자 행동을 하고 만 것이다. 결국 이들은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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