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연구

헨리 1세

박송 입니다. 2019. 9. 12. 11:17



헨리 1세

다른 표기 언어 Henry I



요약 테이블
출생1069, 잉글랜드 요크셔 셀비
사망1135. 12. 1, 노르망디 리옹라포레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막내아들이며 가장 유능했던 인물로 왕의 집행력을 강화했고, 부왕과 마찬가지로 노르망디도 다스렸다. 정복왕 윌리엄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이어받은 윌리엄 2세가 사고로 죽자, 헨리는 3일 뒤인 1100년 8월 5일 왕위에 올랐다. 불안정한 왕위 계승 문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는 독창적인 '자유 헌장'을 발표했는데, 이 헌장에서 그는 근거 없는 과세와 교회의 수입에 대한 몰수조치를 비롯해 전임자가 저지른 권력 남용을 끝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옛날의 앵글로색슨계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스코틀랜드의 공주 마틸다와 결혼하여, 스코틀랜드인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잉글랜드인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토대를 확립했다. 그는 이후 교회와의 갈등을 봉합했고, 봉건 영주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막내아들이며 가장 유능했던 인물로 왕의 집행력을 강화했고, 부왕과 마찬가지로 노르망디도 다스렸다(1106~).

정복왕 윌리엄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이어받은 윌리엄 2세가 사냥을 하다가 사고로 죽자, 헨리는 3일 뒤인 1100년 8월 5일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왕위에 올랐다.

맏아들로서 봉건사회의 관습에 따라 아버지의 상속 재산인 노르망디를 물려받은 로버트 커토즈(로베르 2세) 공작은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왕위 계승권 주장은 이듬해에 가서야 가능했다. 그러나 부유한 앵글로노르만 봉건 영주들이 대부분 로버트 공작을 지지했기 때문에, 헨리의 왕위 계승은 불안정했다.

헨리는 되도록 많은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다. 그는 독창적인 '자유 헌장'을 발표했는데, 이 헌장에서 그는 근거 없는 과세와 교회의 수입에 대한 몰수조치를 비롯해 전임자가 저지른 권력 남용을 끝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옛날의 앵글로색슨계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스코틀랜드의 공주 마틸다와 결혼하여, 스코틀랜드인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잉글랜드인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토대를 확립했다. 또한 그는 형 윌리엄 2세가 추방한 학구적인 캔터베리 대주교 성 안셀무스를 다시 불러들였다.

1101년 로버트 커토즈가 마침내 잉글랜드를 침공하자, 유력한 봉건 영주 몇 명이 헨리 곁을 떠나 로버트에게로 갔다.

그러나 수많은 봉건 영주들과 대부분의 앵글로색슨족 및 성 안셀무스의 지지를 받는 헨리는 침략자들과 협상하여 우호적인 타협안을 이끌어냈다. 로버트는 잉글랜드 왕위를 요구할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헨리가 노르망디에 갖고 있는 영토와 막대한 연금을 받았다. 로버트는 십자군 원정의 영웅이었지만, 방종하고 우유부단한 통치자여서 노르망디를 혼란에 빠뜨렸다. 잉글랜드로 망명한 노르망디 성직자들은 헨리에게 노르망디 공국을 평정해달라고 간청했고, 이리하여 형을 몰아내고 아버지의 영토를 재통일하겠다는 헨리의 야심은 도덕적 근거를 얻게 되었다.

헨리는 노르망디의 봉건 영주들을 뇌물로 매수하고 이웃 군주들과 협정을 맺는 등 사전 준비 작업을 마친 다음, 1106년 노르망디 남서부에 있는 탱슈브레에서 로버트의 군대를 무찌르고 로버트를 사로잡았다. 그는 평생 동안 로버트를 풀어주지 않았다(탱슈브레 전투).

1104~06년 헨리는 노르망디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와 싸우면서도 교회의 옹호자임을 가장하는 불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성 안셀무스는 1100년 망명에서 돌아오자 교황 파스칼리스 2세의 개혁에 헌신했는데, 이 개혁의 목적은 교회를 세속 군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교황은 세속 군주가 성직자에게 땅을 하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성직자가 세속 군주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자 안셀무스는 헨리로부터 주교구를 받은 성직자들을 주교직에 임명하기를 거부하고, 그 자신도 헨리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를 거부했다.

헨리는 주교직과 대수도원장직이 종교적인 성직일 뿐만 아니라 커다란 부의 원천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경우 주교직과 대수도원장직은 왕에게 군사적으로 봉사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는 주교와 국왕의 봉건적 유대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군주에 대한 교회의 충성 서약과 세속 군주의 성직 임명권 문제 때문에, 결국 안셀무스는 2번째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왕과 교황 및 대주교 사이에 수많은 편지와 협박이 오간 뒤, 탱슈브레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타협이 이루어졌고, 이 타협안은 1107년 런던에서 비준되었다(서임권 논쟁). 헨리는 성직 임명권을 포기했지만, 안셀무스는 충성 서약 문제에서 헨리에게 굴복했다.

런던 협정과 탱슈브레에서 잉글랜드가 거둔 승리를 통하여 앵글로노르만 국가는 다시 통일을 이루었고 평화를 되찾았다.

그후 헨리는 딸 마틸다(모드라고도 함)를 독일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결혼시키고, 유일한 적출자인 윌리엄을 후계자로 내세웠다. 인질로 잡혀 있는 로버트 커토즈의 아들 윌리엄 클리토는 헨리의 노르망디 소유권에 도전했고, 윌리엄 클리토의 지지자들(프랑스의 루이 6세, 앙주 백작 풀크, 도처에 존재하는 헨리의 관리들과 높은 세금에 진저리가 난 노르망디의 활동적인 봉건 영주들)은 2차례에 걸쳐 노르망디 동부지역을 공격했다.

헨리는 이 거센 도전과 공격을 물리쳐야 했다. 그러나 1120년 무렵에는 이미 봉건 영주들이 모두 굴복했고, 헨리의 아들은 앙주 왕가의 여자와 결혼했으며, 전투에서 패배한 루이 6세는 최종적인 강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120년 11월 헨리의 아들이 '화이트십호'의 난파로 목숨을 잃어 헨리의 후계자 계획이 무너지자, 이 협정도 산산이 부서졌다. 마틸다 왕비가 1118년 죽은 뒤, 1121년 헨리는 루뱅의 아들레드와 결혼했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 1125년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죽자, 헨리는 딸인 독일 황후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불러들여 후계자로 삼고, 봉건 영주들로 하여금 마틸다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마틸다는 1128년 앙주 백작의 후계자인 조프루아(제프리) 플랜태저넷과 결혼하여 1133년 첫아들을 낳았으며, 이 아들이 나중에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되었다. 1135년 헨리 1세가 노르망디 동부지역에 있는 리옹라포레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총애를 받던 조카인 블루아의 스티븐은 마틸다의 왕위 계승권을 무시하고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

그후 마틸다는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며, 이리하여 치열한 내전의 막이 올랐다. 이 내전은 1154년 스티븐 왕이 죽고 어떤 반대자도 없는 가운데 헨리 2세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결말이 났다.

헨리 1세에 대한 평가

헨리 1세는 잉글랜드에 평화를 가져오고, 노르망디를 비교적 안정시켰으며, 영국 해협 양쪽에서 행정체계를 현저하게 발전시킨 수완과 지성을 갖춘 군주였다. 아버지가 세운 앵글로노르만 국가는 헨리 시대에 다시 통일을 이루었다. 왕이 임명한 판사들은 잉글랜드의 각 주를 체계적으로 순회하기 시작했다.

그의 통치정책은 매우 효율적이었지만, 지나치게 억압적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헨리의 치세는 종전의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군주국에서 미래의 관료 국가로 나아가기 시작한 중요한 첫걸음이 되었다. 또한 이전의 노르만족 지도자들이 보여준 광범위한 제국주의에서 국력 강화와 내정 발전으로 방향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헨리는 주요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위험이 따르는 전쟁보다는 외교나 뇌물 매수를 더 좋아했다. 그는 1106년 노르망디를 정복하여 국내 평화를 유지하고, 앵글로노르만 국가를 반란과 외침에서 지키고, 이웃 군주들과 동맹을 맺는 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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