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사화
시대 | 1498년~15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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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기득권을 가진 보수세력과 개혁 성향의 신진세력은 있다. 성종 치세에도 기존의 훈구세력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 사림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려 말 조선과 타협하지 않았던 길재 등이 지방에 내려가 후학들을 길러내면서 시작되었다. 사림은 주자학적 원칙을 강조하며 정권의 물갈이를 요구하였다. 이들 가운데 김종직이 중앙정계에 처음 등장하면서 사림의 진출은 계속 이어졌다.
성종대에는 훈신과 사림 간의 정치적 입장은 달랐어도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하지만 성종 이후 대립이 격화되면서 사림세력이 많은 피해를 입는 사화가 발생하였다. 연산군 4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는 유자광을 비롯한 훈구대신들이 사림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당시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록한 것을 계기로, 유자광 등이 연산군을 충동하여 김종직 계열의 사림파를 제거했다.
갑자사화는 임사홍 등이 연산군을 부추겨 연산군의 생모를 폐위하는데 앞장 섰던 세력들을 제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훈구대신의 상당수가 제거되었지만, 사림세력 역시 큰 타격을 입으며 연산군 폐위 때까지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했다.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앉힌 반정공신들의 기세에 눌려 정국을 장악하지 못한 중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세력인 조광조를 영입하여 정권을 맡겼다. 사림 최초로 정권을 장악한 조광조는 현량과를 설치해 사림세력을 대거 등용하고, 향약을 조직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중종이 점차 조광조에 대한 신뢰를 거두자, 이를 간파한 훈구세력이 조광조를 참소하여 사림세력을 대거 제거하였다. 이 사건으로 훈구파가 권력을 장악했지만, 외척 간의 내분으로 을사사화가 발생하자 훈구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사림은 계속된 시련 속에서 꾸준히 성장하여 16세기 중엽 선조 이후에는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림의 성장 배경은 지방에 근거를 두고 끊임없이 후학을 키워내는 자생력 덕분이었다. 게다가 상대적인 참신함을 바탕으로 기존세력을 비판함으로써 왕의 신임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림은 지나치게 선명성을 강조하여 주자학적 원칙론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주자학 이외의 다른 학문의 발전을 막는 경직성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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