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연구

노르만 족의 잉글랜드 침공

박송 입니다. 2019. 8. 18. 10:45



노르만 족의 잉글랜드 침공

헤이스팅스 전투

Battle of Hastings      



시대1066년

1072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가 비잔티움을 격파하고, 노르만이 이탈리아에 남은 마지막 비잔티움 영토를 정복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1115년 비잔티움 제국에서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 시대에 르네상스가 시작되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던 영국은 11세기까지만 해도 툭하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렸던 나라다. 선사 시대 켈트 족의 침략에 이어 기원전 55년과 이듬해 로마 공화정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영국 본토(고대 로마 시대에는 브리타니아로 불림)를 두 차례 공격했다. 제정 로마 시대에는 아예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해 4세기 후반 게르만 족의 침입을 받을 때까지 로마의 영토로 머물렀다. 게르만 족이 다녀간 뒤에는 6세기부터 앵글로 색슨 족이 영국을 지배했다. 10세기에는 오늘날 덴마크를 구성하는 데인 인이 3대에 걸쳐 왕조를 형성한 일도 있다.

다시 앵글로 색슨 왕조가 영국을 지배했던 1066년의 헤이스팅스 전투는 영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바이킹’ 출신인 노르만 족과의 이 싸움에서 앵글로 색슨 왕조가 패배하는 바람에 영국은 노르만이 지배하는 국가로 탈바꿈했다. 다만 이 전투 이후로는 어떤 외부 민족도 영국을 두 번 다시 지배할 수 없었다.

헤이스팅스 침공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원주민인 노르만 족은 넓게는 게르만 족의 일파로 분류된다. 흔히 ‘바이킹’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8세기 무렵 본국에 왕조가 들어서자 민족 대이동을 단행했다. 그중에서도 프랑크 왕국 쪽으로 진출한 덴마크계 노르만 족은 911년 센 강 하류에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당시 프랑스 왕이던 샤를 3세가 악명 높은 노르만 인과 싸우느니 차라리 땅을 나누어 주고 그 수장을 ‘공(公)’으로 임명한 것이다. 센 강 하류에 정착한 노르만 인은 재빠르게 현지에 적응해 나갔다. 본래의 종교를 버리고 크리스트 교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고유어 대신 토착 언어인 프랑스 어에 동화되었다.

이즈음 잉글랜드에서는 데인 인이 왕권을 잡고 있었다. 앵글로 색슨 계열로 훗날 ‘참회왕(Saint Edward the Confessor)’이라는 별명이 붙는 에드워드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였지만 데인 인의 침략을 피해 어머니의 친정인 노르망디 공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1042년 에드워드가 귀국해 왕권을 잡음으로써 데인 왕조는 3대 만에 막을 내리고 잉글랜드는 다시 앵글로 색슨 계열의 국가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성당을 지어 ‘참회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에드워드 왕은 성장기의 기억을 더듬어 노르만 인을 중용하는 정책을 폈다. 그의 치세는 평화로웠지만 아들이 없어 후계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1066년 1월 그가 죽은 후 자문의회의 결정에 따라 처남 해롤드가 왕권을 물려받자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이 자신이 후계자라는 증표를 내보이며 잉글랜드로 진격했다.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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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의 부대는 같은 해 7월 잉글랜드로 출발했다. 하지만 북풍 때문에 8주 동안이나 항구에 발이 묶였다. 그 사이 잉글랜드에는 노르웨이의 하롤 3세가 이끄는 군대가 쳐들어왔다. 해롤드는 윌리엄이 쳐들어오는 것을 알았지만 우선 노르웨이 군대를 물리쳐야 했다. 전투는 이겼지만 잉글랜드 군의 전력은 크게 떨어졌다. 노르웨이 군을 격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르망디 군이 잉글랜드에 도달했다. 그러나 미리 준비했던 군의 보급품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해롤드는 군대 해산을 명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 군과 노르망디 군은 마침내 10월 14일 런던에서 남동쪽으로 8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헤이스팅스에서 만났다. 병력은 7,000여 명씩으로 비슷했다. 다만 해롤드의 군대는 보병 중심이었고, 윌리엄의 군대는 제대로 훈련받은 기사단이 주축을 이뤘다. 전력 면에서 윌리엄 군의 사기가 더 높았음은 자명한 일이다. 해가 저물 무렵 해롤드는 노르망디 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고, 수장을 잃은 잉글랜드 군은 맥없이 무너졌다. 윌리엄은 같은 해 성탄절에 잉글랜드의 왕 윌리엄 1세로 등극하고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헤이스팅스 전투가 펼쳐진 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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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1세는 곧바로 앵글로 색슨 귀족들의 잔재를 없애는 일에 몰두했다. 토지를 몰수해 노르만 제후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왕실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 전국의 토지와 인구를 기록하는 작업도 시작했다. 왕이 중앙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중앙집권적 봉건 제도가 잉글랜드에 처음 시행된 것이다. 노르망디 사람들이 대거 귀족으로 합류하면서 그들의 언어인 프랑스 어와 프랑스풍이 유행했다. 궁정에서 프랑스 어만 사용되고 영어는 서민들의 언어로 전락한 것이 바로 노르만 왕조 때의 일이다.

또한 윌리엄 1세는 교황과 대립하며 교회에 대한 국왕의 권리를 주장했다. 주법정과 교회법정을 분리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역사가들은 윌리엄 1세의 이런 행동이 훗날 헨리 8세가 영국 국교인 성공회(The Anglican Domain)를 세우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윌리엄 1세가 죽은 후 그의 장남 로버트가 노르망디 공국을 물려받고, 차남이 잉글랜드의 왕 윌리엄 2세로 등극했다. 하지만 윌리엄 1세의 막내아들인 헨리 1세는 윌리엄 2세가 죽은 뒤 큰형을 견제하고 왕위를 가로챘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형 로버트의 노르망디 공국을 공격해 잉글랜드가 노르망디를 지배하는 시대를 열기도 했다. 헨리 1세가 반포한 〈자유헌장〉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것으로 훗날 시민의 권리를 옹호한 〈마그나 카르타〉의 원형으로도 주목받는다. 헨리 1세 이후에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을 겪던 노르만 왕조는 그의 외손자 헨리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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