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구

여진과 한국사

박송 입니다. 2019. 7. 13. 10:40

尹瓘

척경입비도

 

윤관과 예종, 여진을 정벌하다                                  

윤관과 예종, 여진을 정벌하다

여진족의 뿌리는 말갈족이다. 말갈족은 고려 초기부터 빈번히 변방을 습격했다. 그들은 일정한 근거지 없이 산악지대나 늪가에 살면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일찍이 고려에서 북방에 장성을 쌓은 것이나 동해안의 요해지에 성을 쌓은 것은 이들 여진의 침략 행위와도 관계가 많았다. 특히 문종은 문종 34년(1080)에 3만여 병력을 동원하여 동북 여진을 정벌, 북방의 여진족을 잠재웠다. 그런데 이후 완안부라는 여진족의 신흥 세력이 등장하면서 고려와 여진과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완안부 추장, 즉 금 태조 아구타의 세계에 관해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평주 지역의 승려 금준이란 자가 여진으로 도망쳐 아지고 촌에 살았다고 하는데, 금준의 본명은 김지선이라고도 하고 혹은 승려 김행지의 아들 김극수라고도 한다. 그가 처음 여진족 아지고 촌에 들어가 여진 여자를 얻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고을태사였다. 고을태사는 활라태사를 낳았고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낳았는데 그중 큰아들이 핵리발이요, 둘째 아들이 영가였다. 영가는 매우 웅걸하여 세력을 얻었다. 그리고 영가가 죽자 그의 형 핵리발의 큰아들 우야소가 뒤를 이어 추장이 되었으며, 우야소가 죽자 그의 아우 아구타가 뒤를 이었다.

말하자면, 금나라 황실 시조 및 완안부의 추장이 고려 출신이라는 것인데 금 황실의 고려출자설은 당시 널리 회자될 정도였다. 여진족은 고려출자설을 바탕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한편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는 데 이용하곤 했다.

완안부는 추장 영가 때에 이르러 주위의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고 지금의 간도 지방을 복속하는 한편, 갈라전 지역까지 남하하는 등 급격히 세력을 뻗어 나갔다. 갈라전은 고려 북방의 장성과 바로 인접한 곳으로 완안부의 남하는 앞으로 고려와의 충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여진족을 발흥시킨 영가는 후대 목종으로 추존된 인물로서 그가 핵리발의 뒤를 이어 추장이 된 것은 헌종 즉위년(1094)이었다.

영가가 완안부를 이끌고 있던 시절에는 고려에 대해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과 고려의 관계는 매우 원만한 편이었다. 1103년 영가가 죽고 그의 조카 우야소가 뒤를 이으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야소가 완안부의 새 추장이 되자 부내로를 비롯한 반대파들이 반기를 드는 등 동여진 내부에 또다시 분열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결국 우야소는 부내로를 공격하기 위해 정주 지역에 진을 치게 되었고, 마침 갈라전 지역을 두고 여진족과 신경전을 벌이던 고려는 여진족의 움직임을 침공으로 의심하였다. 당시 고려 왕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정주로 보내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게 했다.

1105년 2월 공명심에 들뜬 임간이 군사를 이끌고 너무 멀리 쳐들어가는 오판을 자초하는 바람에 여진과의 첫 전투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일로 임간은 파직되고 그 후임으로 추밀원사 윤관(尹瓘)이 발탁됨으로써 이른바 윤관의 ‘여진 정벌’이 시작되었다.

국민총동원부대 ‘별무반’의 창설

1105년 3월, 임간의 뒤를 이어 출정한 윤관은 적 3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오히려 고려군의 피해가 더 심해 쓰라린 첫 패배를 맛보야만 했다. 윤관의 패배는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보병이 주축이 된 군사력만으로 기마부대인 여진군을 따라잡는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무리한 일이었다. 싸워봐야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윤관은 일단 여진군에게 백기를 들고 절치부심 후일을 기약하였다.

임간에 이어 믿었던 윤관마저 패하고 돌아오자 숙종은 분한 마음에 천지신명께 서약까지 하며 여진 정벌을 천명했다. 하지만 여진족 기마병의 위력을 직접 경험했던 윤관의 생각은 달랐다.

“신이 패한 까닭은 적들은 말을 탔고 우리는 걸으면서 싸워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별무반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기마병으로 구성된 신기군을 중심으로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그리고 특수병인 도탕군, 경궁군, 정노군, 발화군과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으로 각각 편성된 별무반은 나이 스물 이상의 모든 백성이 입대해야 하는 의무군이었다. 문무양반은 물론이고 아전, 농민, 장사치, 노비, 승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징발 대상이었으니 별무반은 그야말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총동원부대였다.

별무반은 여진을 다시 정벌하려는 야심찬 계획의 하나로 진행되었으나 그 이듬해 숙종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여진 정벌의 과제는 그의 아들 예종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예종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중신들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여진을 토벌할 것을 상소했다. 예종은 출병할 것을 결심하고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임명했다. 윤관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이 일찍이 선왕의 밀지를 받았사옵고, 이제 전하의 엄명을 받았사옵니다. 감히 3군을 통솔하고 적의 보루를 격파하여 우리 강토를 개척하고 지난날의 국치를 씻겠사옵니다.”

“충성스러운 말이오. 당연히 그래야지요.”

예종이 기뻐했다. 그러나 부원수 오연총은 윤관의 태도가 못마땅하여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뭘 믿고 그리도 자신하는 게요?”

“장군이나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죽음의 땅으로 가서 국가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겠소? 무엇을 의심하는 게요?”

오연총은 끽소리 없이 입을 다물었다.

예종은 서경에까지 나가 위봉루에 올라 윤관에게 부월을 하사하고 전송했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다

1107년 11월, 윤관과 오연총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동부 변방으로 진군한 후 일단 군대를 장춘역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병마판관 최홍정과 황군상을 각각 정주와 장주에 파견하여 여진 추장을 꼬이도록 했다. 과거 숙종 때 포로로 잡힌 여진 추장 허장과 라불을 석방하려고 하니 직접 와서 이들을 데려가라는 것이 그 명목이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여진 추장 고라와 그 일행 4백여 명이 도착하자 윤관은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고려군의 환대에 그만 경계심을 풀어버린 여진군은 밤새 술을 마시며 추장의 석방을 축하하다 윤관의 기습공격에 그만 섬멸되고 말았다.

고라를 비롯한 여진 지휘군이 일거에 섬멸되자 윤관은 20만 대군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윤관이 이끄는 5만 3천의 군대가 정주 대화문을 나서는 것을 신호로 중군병마사 김한충이 이끄는 3만 6천 7백의 병력이 안륙수로 향하였으며 나머지 10만 병력도 각각 정주와 선적진, 도린포 등지로 떠났다.

정주를 출발한 지 반나절, 윤관이 이끄는 5만 부대가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대내파지 촌이었다. 이곳에 있던 여진족들은 고려군이 새까맣게 몰려오자 겁에 질려 모두 마을을 버리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손쉽게 대내파지 촌을 함락해 버린 윤관은 거기서 더 전진하여 문내니 촌으로 갔다. 이 지역의 여진군은 동음성에 진을 치고 고려군에 저항하며 쉽게 성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윤관은 임언과 최홍정에게 정예부대를 내주어 이들을 모두 몰아내게 했다.

어렵사리 동음성을 함락한 윤관은 군사를 이끌고 그 다음 제물 대상인 석성(石城)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여진군이 일대 항전을 준비하며 고려군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석성 지역에서 여진군과 맞닥트린 윤관은 먼저 이들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하지만 여진군은 굴복하지 않고 석성으로 들어가 화살과 돌을 마구 퍼부으며 결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이에 질세라 고려군도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지만, 여진군의 완강한 저항을 뚫지는 못했다. 공격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자 윤관은 용감하기로 이름난 장수 척준경을 불렀다.

“날이 저물면 상황이 더 위급하게 될 것이니 그대가 장군 이관진과 함께 적을 공격해 주기 바라네.”

“이번이야말로 지난날의 과오를 씻을 절호의 기회이니 이 한 몸 희생하여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윤관의 특명을 받은 척준경이 흔쾌히 승낙했다. 척준경은 일전에 임간을 따라 여진 토벌에 참여하였는데 그만 실패하여 파직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윤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복직이 되어 이번 전투에 참여한 것이었다.

명예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라 여긴 척준경은 방패를 들이밀며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뚫고 적진으로 몸을 던졌다. 마침내 적진으로 들어간 척준경이 적장 여러 명을 쳐 죽이는 맹위를 떨치자 덩달아 기세가 오른 고려군은 여진군을 일시에 궤멸시켜 버렸다. 사로잡은 포로 수가 무려 5천을 넘었고 목이 잘린 자도 5천이 넘었을 정도로 윤관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고려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고사한을 비롯한 1백여 개의 여진 촌락은 모두 쑥대밭이 되었고 남녀노소를 비롯한 일반인 사상자들이 다수 발생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바위에 몸을 내던져 자결한 자들도 많았으며 도망쳐 달아나는 자들이 길에서 서로 맞부딪쳐 죽을 정도로 여진족은 참변을 겪었다.

동북 9성의 축조

여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윤관은 제일 먼저 예종에게 승전보를 알렸다. 승전 소식을 접한 예종은 기뻐하며 좌부승지 심후와 내시형부원외랑 한교여를 전선으로 파견, 윤관과 그 부하 장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조서를 보냈다.

여진족 1백여 개 촌락을 평정한 윤관은 부하 장수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동북계의 국경선을 획정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 획정된 국경선의 범위는 동으로 화곶령까지, 북으로 궁한이령까지, 서로는 몽라골령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경선이 획정되자 윤관은 성곽 건설에 전념하여 몽라골령에 950간에 달하는 성곽을 쌓고 영주성이라 불렀으며 화곶령에는 992간을 짓고 웅주성이라 이름붙였다. 그리고 오림금 촌에는 774간을 지어 복주성이라 이름하고 궁한이 촌에는 670간을 지어 길주성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영주성 안에는 호국인왕사와 진동보제사라는 두 개의 절을 세웠고 또한 이 지역에 고려 주민 수천 호를 이주시켜 살게 하기도 했다.

윤관의 대활약에 힘입어 고려는 영주, 복주, 웅주, 길주 4주와 함주, 공험진을 합친 6성을 새로이 쌓게 되었다. 윤관은 6성에 만족하지 않고 같은 해 예종 3년(1108) 3월, 의주와 통태, 평융 세 곳에 더 성을 쌓아서 마침내 9성의 축조를 완성시켰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윤관의 동북 9성이다.

척경입비도

윤관이 9성을 개척하고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 고려대학교 박물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당시 축조된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 《고려사》는 영주와 웅주는 길주 근방이고, 복주는 뒤의 단주(단천), 공험진은 백두산 동북쪽의 소하강가에 있었다고 하는데 후대 일본 학자들은 훨씬 남쪽으로 내려잡아서 9성의 위치를 함흥평야 일대라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공험진을 경원의 아오지보라고 보는 이른바 두만강 이북설이 지배적이다.

동북 9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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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의 위치가 어찌되었건 간에 당시 9성 3백리 땅이 여진과 고려 사이에 분쟁의 씨앗이 된 이유는 그 지역이 과거 고구려 영토였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고려는 이 지역을 수복하고 싶어 했고 아울러 완안부의 남하를 경계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반면 동여진은 고구려 멸망 이후 이미 몇 백 년째 그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영유권을 주장하려 했다. 동북 9성의 설치 이후에도 여진이 끊임없이 이 지역의 수복을 위해 맹렬한 반격을 시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진의 반격과 척준경의 대활약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는 여진의 반격은 이미 1108년 초, 윤관의 9성 축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1월에 윤관과 오연총이 정예군사 8천을 이끌고 길이 좁은 가한촌 병항소로라는 지역을 지나가다 여진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는데, 이때 고려군은 거의 죽거나 흩어져 달아나고 겨우 10여 명만 고립되어 적과 대항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연총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고 윤관은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이 소식을 들은 척준경이 이들을 구하기 위해 용사 10여 명과 함께 적진으로 돌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그의 아우 낭장 척준신이 만류하며 길을 막아섰다.

“적진이 견고하여 돌파는 불가능합니다. 왜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 하십니까. 제발 가지 마십시오.”

하지만 척준경은 “늙은 아버지를 부탁한다.”는 말만을 남기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윤관과 합세한 척준경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이, 때마침 최홍정과 이관진이 구원병을 이끌고 진군해 들어왔다. 구원병이 도착하자 여진군은 흩어져 달아나고 윤관과 오연총, 척준경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영주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영주성에 돌아온 윤관은 척준경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부터 나는 너를 친자식처럼 여길 것이니 너도 나를 아비와 같이 생각하거라.”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여진 추장 아로환 등 403명과 주민 1천여 명이 항복하였다. 이들은 윤관이 평정한 지역에 살던 자들로 추운 겨울에 옮겨 갈 곳이 마땅하지 않고 또 싸울 힘도 없으므로 자진 항복한 것이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월 하순이 되자 2만에 달하는 여진 군대가 갑작스럽게 영주성 남쪽에 진을 치고 싸움을 걸어왔다. 수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한 윤관은 적을 상대하지 않고 그냥 수비에만 전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이때 척준경이 반대하고 나섰다.

“만약 지금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날로 많아질 것이오. 그때 가서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구원병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내가 전날에 싸워 이기는 것을 여러분이 보셨으니 오늘도 나가서 죽을 힘을 다해 싸우겠소. 여러분은 성 위에 올라가 구경이나 하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결사대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간 척준경은 여진 선봉대와 혈투를 벌인 끝에 19명의 목을 베는 용맹을 발휘했다. 척준경의 활약에 사기가 떨어진 여진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고 당당히 개선한 척준경은 윤관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진군의 반격은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예종 4년(1109) 여진군은 마침내 화친을 청해 왔다. 고려와 계속 싸워 봤자 도저히 승산이 없는데다가 그 와중에 북쪽의 거란(요)으로부터 어떤 화를 입을지 몰라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여진은 화친의 조건으로 9성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저 9성만 반환해 준다면 종전처럼 고려를 상국으로 받들겠노라고 간청하고 나왔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이 지역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왔던 고려는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려의 화친 거부로 9성 일대는 또 한 번의 싸움을 하게 되었고, 이때 출동한 윤관과 오연총은 그만 여진군에 패하여 돌아왔다.

9성의 반환과 윤관의 불명예 퇴진

9성 지역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자 예종은 1109년 6월 23일 신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9성의 반환 여부를 논의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날의 강경론과 달리 화친하자는 쪽으로 중론이 모아졌다.

9성의 반환에 찬성한 주화파는 평장사 최홍사 등 28명이나 된 데 반해, 반대한 주전파는 예부낭중 박승중 등 2명에 불과했다. 결국 이 날의 회의는 종전과 같은 군신관계를 회복하고 9성의 땅을 반환해 주는 것으로 결정이 나고 말았다. 거듭되는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친 것은 고려도 여진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예종은 7월 2일 9성의 반환을 여진 측에 정식으로 통보하였다. 마침 고려에 와 있던 여진의 사신 요불과 사현이 이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쏟아내었다고 하니, 이 지역에 대한 여진인의 마음고생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실 고려에서는 9성 지역만 차지하고 나면 북방의 적들을 쉽사리 가로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9성은 결과적으로 끊임없는 전쟁의 화근만 될 뿐이었다. 게다가 이주해 온 백성들마저 온갖 질병과 전쟁으로 고통을 겪게 되자 고려에서도 더 이상 9성 지역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된 것이다.

9성이 반환되는 것으로 결론이 나자 그동안 여진 정벌을 탐탁지 않게 여긴 중신들이 여진 정벌의 과오를 문제 삼으며 들고 일어났다. 평장사 최홍사를 비롯한 정벌 반대파들은 윤관과 오연총을 겨냥, “무리한 정벌을 일삼아 국력을 소모하게 했다.”며 연일 직격탄을 쏘아댔다. 하지만 이들이 정작 겨냥한 것은 여진 정벌의 공을 세운 윤관 세력이 조정에 돌아와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문책론에 밀린 예종은 윤관의 원수직을 거두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 때문에 개경에 돌아온 윤관과 오연총은 왕에게 보고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모를 당했다.

예종의 수습에도 불구하고 문책론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고 조정 대신들은 계속해서 패전한 죄를 물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두 원수는 나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움직였을 뿐이 아닌가. 싸움에 나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이 상례이거늘 어찌 이들에게 죄를 묻겠는가.”

예종의 두둔에도 불구하고 반대파들은 파업까지 단행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최홍사, 임의 등이 주축이 된 탄핵론은 수십 일을 끌다가 윤관과 오연총을 면직하고 공신호마저 삭탈하는 극약 처방으로 간신히 수습되었다.

여진 정벌의 맹장 윤관은 ‘무모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시킨 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입고 불명예 퇴진을 하였다. 하지만 그의 공적을 잊지 못한 예종의 배려로 이듬해 예종 5년(1110) 오연총과 함께 다시 복직되어 명예를 회복하는 듯했다.

이미 자존심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윤관은 복직 제의를 정중히 사양하였다. 예종은 “여론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파직한 것이니 내 마음을 받아들여 하루빨리 관직에 나오라.”고 달래었지만 윤관은 끝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없었던 윤관은 이듬해 허무하게 세찬 풍진의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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