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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경의 글씨 기운에 압도당하다

박송 입니다. 2019. 6. 28. 12:02


안진경의 글씨 기운에 압도당하다



‘절대 거장’ 안진경의 글씨 기운에 압도당하다

 


 




 

 

 

 

 

 

안진경

 

안진경의 글씨에 관해서 단적으로 잘라서 말하기는 무척 난해합니다.

 

안진경이 살아갔던 세월만큼, 많았던 세태의 변화만큼, 그의 글씨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많지는 않겠지만 일부 올라오는 자료들을 보시고 나름대로 분석하시기를

바랍니다.

 

안진경의 글씨를 설명할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잠두연미(蠶頭燕尾) 혹은

잠두서미(蠶頭鼠尾),안근(顔筋),옥루흔(屋漏痕)그리고

철획(鐵畵),은구(銀鉤)등입니다.

 

잠두연미,잠두서미 등은 주로 해서에서 구양순의 마제잠두(馬蹄蠶頭)

와 대비되어 많이 쓰이는 표현입니다.  용어상에서 구양순과 안진경의 글씨를

외적인 면에서 일차적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안근은 안근유골(顔筋柳骨)이란 말로써 안진경의 글씨와 유공권(柳公權)의글씨를

함께 일컬을때 사용되는 말인데,  두사람의 글씨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표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참고로 안근이라고 해서 근기(筋氣 즉 肉氣)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유골이라고 해서 골기(骨氣)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글씨는 골기와 육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야 좋은 법입니다.  둘중 어느

하나만 지나치게 강조된다면 좋은 글씨로서의 조건이 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는 다만 저의

사적(私的)인 표현입니다만  의미의 전달이 제대로 되었기를 바랍니다. 더욱 엄밀히 말하자면

근기와  육기도 구분해야합니다.)

 

옥루흔이란 말은 아직 정확하게 고증되지는 않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후대에 와서 그 설명이

추가되었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집에서 물샌(비가 샌)흔적이라는 뜻이 됩니다.

 

저의 방식대로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비오는 날이나  유리창에 이슬 방울이 잔뜩 맺혔을때

물이 흘러내리면서자연스러운 흐름이 생깁니다.  그리고 완전히 흘러 내리지 않고 맺혀있을때

그 끝부분이 둥글게 형성됩니다.  아마도 이러한 흐름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는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미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방법같습니다.

 

장욱을 통해서 전수받았다는 저수량의 추획사(錐畵沙)라는 필법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추획사란 송곳으로 모래위에 글씨를 쓰면 그 굵기가 일정하게 나온다는 의미의 필법입니다.

사람마다 해석은 다르지만  물방울의 흐름과 비교해보아도 비슷한 의미가 될 듯 합니다.  단순히

굵기만 일정한게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이런 필법들과 안진경의 가계전승의 전서,예서의

필법이 융합되어서 안진경만의 서체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철획과 은구는 말 그대로 철과 같은 기세의 획과 은으로 만들어진 갈고리라는 뜻입니다.

같은 갈고리(鉤)라도 은구라는 표현을 함으로써 다른 느낌을 표현해 줍니다. 

주로 행서와 초서에서 많이 인용되는 표현입니다.(철획과 은구라는 표현에 관해서는

안진경 이전부터도 여러가지 표현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철획(鐵畵)이라고 쓰고 나서 철화 로 읽지 않고 철획으로 읽었습니다.

획(劃)이라는 한자도 따로이 있지만 화(畵)라는 글자에도 '긋다'라는 의미의

'획'이라는 음가가 있습니다. 화자로서 자주 쓰이다 보니 도(刀)자(字)를 첨(添)하여

획(劃)이라는 누증자(累增字)를 또 만들었다고 합니다.  모두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다시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특히 고문헌(古文獻)일수록 이런 음가나 특히 의미의 변화가 심하니

주의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앞서 적은바가 있듯이  남아 있는 기록들에 의거하면 안진경 당대(當代)에는 안진경의 글씨에 대한

평가 자료가 거의 없는 편입니다.  구양순과는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안진경의 글씨에

대한 평가는 송대에 이르르서야 소식(蘇軾)이 '안진경은 서예의 집대성자'

라는 높은 평을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안진경의 글씨에 대해서 안진경 당시의 평가가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안진경을 시기하여 일부러 평을 하지 않았다던지 평을 빼버렸다던지

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대하여 저의 의견을 조금만 피력하자면, 당시에 유행(?)하던 서체와는 거리감이 있었다는 것이

 저의 관점입니다. 

 

왕희지의 글씨와 구양순,우세남,저수량 등이 최고의 서가(書家)로서

평가를 받는 시대였습니다. 구양순이 북파의 맛을 많이 살렸다고는 하나 결국은 

우세남, 저수량등과 함께 최고의 서가(書家)로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의 계통인

남파의 서풍을 그대로 잇는 계통에 속해 있습니다.(남파와 북파라는 용어에 대해선 다음에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남파의 서풍이란 세련되고 수려하며

자형(字形)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면이 많습니다. 

 

이러한 서풍들의 글씨를 보면 대개 첫눈에 이쁘다던지 아름답다라고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사실이 그러니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안진경의 글씨가 쉽게 환영받지는 못했을 거라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안진경의 글씨를 보고 아름답다라고 하는 사람은 지금도 찾아보기는 힘들것입니다.

 

안진경의 글씨들 중에서도 초기의 것들은 이러한 면을 일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진경

 

중국에서는 서도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지침이 되는 말로 <안근 유골>이라는 말이있다. 이 말은 서도의 대가 안진경과 유공근의 서도 예술의 풍격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로서 <안진경의 글씨에는 힘줄이 있고, 유공근의 글씨에는 뼈가 있다>는 뜻이다. 안진경의 서법은 호방하고 중후한 가운데 탄력이 넘치는 힘줄처럼 느껴져 이를 안체라고도 볼렀다. 글씨는 인격을 나타낸다 는 말이 있듯이 안진경의 서법을 알기 위해선 먼저 그의 인물됨에 초점을 맞춰보자.
안진경은 안록산의 난 때 평원 태수를 맡고 있었다.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하북 24군을 휩쓸고 장안으로 돌격하자 현종은 "하북 24군에 한 명의 의사도 없단 말인가?"라며 통곡했다. 얼마 뒤 평원 태수 안진경이 안록산의 난을 막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에게 타격을 주자 현종은 매우 기뻐했다.
이렇듯 안진경은 나라에 대한 사랑이 많았으며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절개도 곧았다.
안체라 불리는 안진경의 서풍은 구양순, 우세남 등을 대표로 하는 초당 시대의 서풍처럼 화려한 멋은 없지만 성당 시대의 웅장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체를 논할 때 그의 특징으로서 자주 열거되는 것은 <잠두연미>, <횡경수중>이라는 표현이다. 잠두연미라는 것은 안체의 기필은 가로획, 세로획이 모두 누에머리 모양으로 시작된다는 뜻이고, 연미란 글씨의 끝맺음이 마치 제비 꼬리 모양과 같다는 뜻이다. 횡경수중이란 안체의 가로획은 가늘고 세로획은 굵다는 뜻이다.
중국 서도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동진의 서도가 왕희지가 전아한 서풍으로 서도계에 새로운 시대를 연 이래 수백 년 동안 왕희지로 대표하는 왕체가 서도계를 지배하여 왔다. 당나라 초당 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서도가들이 배출되었으나 역시 그 누구도 왕체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안진경이 출현함으로써 비로소 왕체에서 벗어나 성당 시대의 숨길을 전하는 새로운 서풍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마치 초당의 서도가가 다투어 왕체를 배웠듯이 송나라 시대에 들어와서도 안체를 배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다음은 유공근에 대하여 알아 보자. 유공근은 먼저 왕희지의 서법을 배우고 그 후에 안진경에게 사사하였다. 그리하여 역대 서도가의 장단점을 취사 선택하여 마침내 자기 자신의 서체인 유체를 창안해 냈다. 유체는 단정하고 날카로우면서 뼈가 드러난 듯하여 유골이라고도 일컬어 진다.
당시의 고관들이나 황후들까지도 앞을 다투어 거금을 싸들고 유공근을 찾아와 비문의 휘호를 부탁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선조의 비를 세움에 있어 유공근의 휘호를 얻지 못하면 불효자라고 할 정도로 그의 글씨는 유명하였다. 또 조공이나 무역의 임무를 띠고 중국을 방문한 외국인들까지도 많은 돈을 주고 유공근의 글씨를 사 가지고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유공근은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돈을 사회에 봉사하는 데에 썼다.

만약 안진경과 유공근이 살아 있었더라면 나는 여태까지의 조상들의 묘에 안체와 유체를 써서 조상님의 묘를 빛나게 할 것이다.
안진경은 나라를 진정히 나라를 사랑했으며 남자처럼 절개도 곧아 충신으로써 이름을 남길 수 있었는데 이러한 성격이 바탕이 되어 안체라는 새로운 글씨체까지 만들어 충신에다 명필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유공근은 황제에게 두려워 하지 않고 간언을 올렸다 한다. 이러한 점에서 유공근도 충신이고 유체란 뼈같이 생긴 글씨체까지 만들어 안진경과 같이 충신에다 명필가로 이름을 남겼다.

 

“봉황이 몸을 뒤치는듯” 왕희지도 놀랄 개성

 

금석문

서예는 옛적 선인들의 글씨를 재해석해 새 개성을 표출하는 법고창신의 정신이

가장 진득하게 표출되는 장르다. 흔히 이땅의 옛 글씨를 두고 진나라의 왕희지,

당나라의 구양순, 안진경 등 중국 대가들의 아류로 얕보는 경우가 적지않다.

하지만 기실 우리의 옛 서예 전통은 쓰는 이의 정연한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중국

대가들 못지않게 법고창신의 본령을 치열하게 실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땅의 서예사가 정리되지 않은 탓에 여전히 생소하지만, 선인들은 중국의

다채로운 필법들을 우리 미감과 정신세계에 맞게 독창적으로 변모시킨 걸작들을

남겼다.

중국 필법 우리미감으로 소화

유려하면서 꼿꼿한 필치 명품

선불교에 몰두했던 옛 승려들의 글씨, 즉 선필을 새긴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금석문은 그런 선인들의 예지를 보여주는 문자유산 가운데 하나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승유묵’전에서 그 금석문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니 8세기 통일신라 승려 영업의 ‘해동고신행선사비’와 12세기

고려의 명필인 승려 탄연의 ‘문수원중수기비문’이 그것이다.

‘해동고신행선사비’는 역대 금석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글씨로 손꼽히는데,

중국에까지 널리 명성이 알려졌다. 경남 산청 지리산 자락의 고찰 단속사터의

비석글씨지만 현재는 탁본만 전해진다. 이 절에 주석했던 고승 신행선사를 추모한

글이다. 이상적 비례와 균형미를 중시했던 서예의 대부 왕희지의 글씨풍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유려한 글씨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꼿꼿하고 맑은 획의

기운이 내비친다. 선승다운 담담한 필력이 깃든 탓일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문인 평자들은 앞다퉈 이 금석문을 법첩으로 만들고 친구들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명필 이광사는 <서결>에서 “영업의 글씨는 여위고 힘이 있어 취할 만하다”고

했고, 대감식안이던 강세황이 왕희지 글씨로 착각했다는 일화도 있다. 문신 서거정

또한 <필원잡기>에서 승려 영업을 김생과 고려의 명필 탄연과 버금가는

서예거장으로 점찍었다. 이런 상찬은 오늘날도 이어져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같은 크기의 금판을 능가하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하기도 했다.

한자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신라에서 불과 몇백년 사이 중국에 버금가는

명필들이 나오고, 각종 금석문이 널리 새겨진 것은 이 시대 문화의 불가사의한

원숙함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대 서예사를 주도했던 선필의 전통은 12세기 고려의 걸출한 명필인 대감국사

탄연에서 더욱 옹골찬 개성미로 열매를 맺는다. 왕희지의 고전미와 안진경의

파격미에다 고려문화의 질박한 부드러움, 꼿꼿한 기상을 한데 녹여 강골·유연한

탄연체를 창안한 것이다. ‘문수원 중수기비문’은 이런 글씨세계가 응축된

정수다. 강원도 춘천 청평사 중수사실을 기록한 비문글씨로 파편 일부만 남아있고,

전문은 탁본에 전한다. 비문으로 보는 탄연서체의 핵심은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송곳 같은 필획의 결기다. 서화가 위창 오세창은 옛 그림, 글씨 품평모음집인

<근역서화징>에서 옛 문헌을 빌어 탄연의 글씨를 이렇게 극찬했다.

‘마치 연꽃이 못에서 피어나는 듯하고, 단단한 뼈가 가운데 박히고 겉에는 고운

살이 둘러 있어 재주있는 목수가 좋은 재목을 가지고 사방을 알맞게 깎아 만든

그릇 같아서 전연 아로새기고 깎은 흔적이 없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배워서 얻은

것이겠는가? 하늘에서 받은 재주일 것이다.’

이동국 서예박물관 전시과장은 “날카롭지만 가볍지 않고, 부드러운 듯 단단한

것이 탄연 글씨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탄연의 글씨는 한마디로 강철 같은 획의

힘찬 필세가 압권이다. 날아갈 듯한 행서체지만 침착하면서도 통쾌하다고들

평한다. 역시 <근역서화징>에 인용한 <나려임랑고>란 문헌은 “붓 놀림이 마치

봉황이 몸을 뒤채는 듯하다’고 묘사한다. 탄연의 시대가 고려청자의 최상급품이

생산되는 문화전성기였던만큼 욱일승천하는 당대의 국가적 기상과 문화적 분위기가

빈티 없는 서체로 반영된 것이다. 두 거장의 금석문은 당대 문화의 최고 정점기에

만든 불교예술의 기품과 미감을 집약시켰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도쿄국립박물관 ‘안진경 특별전’ 리뷰

‘한석봉’ ‘김정희’ 명필들의 교과서
‘왕희지’ 능가한 한중일 서예사 거장
서체 변천부터 후세 영향까지 망라
대만 고궁박물관·중국 소장품 등
동아시아 글씨 문화 보물 한자리


글씨의 품격과 멋은 몰라도 된다. 느낌 말고는 거리낄 게 없었다.

 

도쿄국립박물관의 드높은 천장과 벽, 사이 공간은 온갖 기운을 내뿜는 전통 한문 글씨들의 대경연장이 되었다. 한중일 서예사의 가장 큰 거장이라는 1600년 전 왕희지를 1400년 전 당나라 초 대가들이 추앙하며 본떠 쓴 명품 글씨들과, 1300년 전 다시 왕희지를 극복하고 나온 안진경의 친필 글씨들이 지금 쓴 듯 활기를 내뿜으며 눈앞에 펼쳐졌다. 한자의 시작인 거북등딱지 갑골문의 문자들이, 글씨 예술이 가장 찬란했던 당나라 시대 태종 현종 황제들이 남긴 대작 글씨들이 숲처럼 버티고 서있다. 당나라 초기 ‘3대가’ 저수량·우세남·구양순과 송나라 거장 소동파·미불, 명·청대 거장 동기창·조지겸의 필적들도 콕콕 눈가에 박혀서 들어온다. 역사를 가로지르는 강렬한 그네들 글씨의 기운이 눈과 마음을 훑고 지나가면서 수천년 전부터 수백년 전까지 글씨를 쓴 예술가, 선비들의 내면을 어림하게 해준다. 한자로 된 서예 글씨가 어떻게 글자 모양이 바뀌고 높은 경지를 추구해갔는지를 내부에 들어서면 스스럼없이 직감적으로 깨닫게 되는 대향연이다.

 

지난 1월16일부터 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경내의 도쿄국립박물관 헤이세이관(평성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안진경’은 글씨 문화사의 거대한 덩어리 그 자체다. 5천년 역사를 지닌 한자가 중국 역대 명필들의 걸작들을 통해 첩첩산중 혹은 장강의 기세로 뻗어 나가는 동아시아 서예사의 대하 같은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세계 최고의 서예컬렉션을 보유한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의 명품들과 일본에 산재한 중국 명글씨 컬렉션들을 모아 차린 이번 전시는 규모와 기획, 깊이 등에서 앞으로 두번 다시 보기 힘들 동아시아 서예사의 찬란한 보물 잔치다.

 

주인공은 8세기 당나라 시대의 명필로 훗날 안진경체를 닦아 중국, 조선과 일본의 서예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 절대 거장 안진경(709~785). 당나라 현종 때 인물인 안진경은 남북조 시대 글씨의 성인으로 꼽히는 왕희지(307~365)의 전아하고 유려한 서체와 달리, 힘찬 박력과 풍성한 양감, 비장한 조화를 겸비한 글씨로 동아시아 서예의 전범이 되었다. 한국인에게는 낯설 것 같지만, 천하 명필이라고 말하는 조선시대의 한석봉, 김정희, 이광사 같은 이들에게 안진경은 반드시 그의 글씨를 따라 쓰며 배워야 할 교과서 같은 존재였다. 조정의 신하로 숱한 모함에 시달리며 지방 태수를 전전했지만 안녹산의 난으로 나라가 위급에 처하자 분연히 의병을 이끌고 일어나 반란을 막았고 그런 애국충절의 정신을 독창적인 글씨체로 체화시키기까지 했으니, 그는 예술사에서 작품과 사회적 실천이 일치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로 추앙받았다.
 

‘왕희지를 넘어선 대가’란 부제가 붙은 이 전시는 글씨 서체의 미학을 보편화하고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안진경 작품 연대기를 ‘제질문고’ 외에 ‘자서첩’, ‘소초천자문’, ‘천복사다보탑비’ 등 걸작 유묵을 통해 보여준다. 선이 굵고 중후하면서도 충실한 감정표현에 눈떠 보는 이들에게 강직하고 절절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안진경 글씨의 특징이다.

 

단연 눈길을 끄는 걸작은 ‘제질문고’란 안진경의 서첩이다. 755년 일어난 안녹산의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고립돼 살해당한 조카를 위해 쓴 이 제문은 피붙이를 잃은 비통한 심정을 녹여 넣고 있다. 왕희의 <난정서>와 더불어 서예사에서 최고의 글씨 보물로 손꼽는 걸작이지만, 얼핏 보면 곳곳에 휙휙 수정 선을 내려긋고 지저분한 고친 글자 투성이의 졸문처럼 보인다. 하지만, 적들에게 살해당한 조카의 영령을 생각하며 써내려간 초고 성격의 심경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살펴볼수록 감동에 젖게 된다. 처음엔 다소곳하게 썼다가 죽은 조카를 회상하며 적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끓이는 대목 곳곳에서 수정하고 거칠게 흘려 쓴 글귀들이 등장하면서 1300년 전 거장의 격앙된 감정, 내면을 그대로 느끼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품으로 중국 본토 누리꾼이 천이백년 묵은 보물을 본토도 아닌 일본에 대여해주었다고 비난 댓글을 쏟아낼 만큼 화제를 모았던 이 작품은 보려면 오랫동안 줄을 서야 한다.
 

특별전의 구성은 절묘하다. 갑골문과 고대 금석문 글씨들이 나오는 1장 ‘서체의 변천’부터 핵심인 2장과 3장의 당나라 시대 안사의 난과 안진경 활약을 배경으로 한 글씨들, 4장 일본의 당나라 시대 글씨 수용, 5장 송나라 때 안진경에 대한 평가를 거쳐 6장 후세의 영향으로 전시가 마무리된다. 시종 안진경의 진작을 주된 뼈대로 삼으면서도 고대 갑골문부터 명 청대까지 역대 서체의 변천과 역대 명필의 필적 비교 등을 통해 중국 서예사의 장강 같은 흐름을 한눈에 보여준다. 8세기 당나라 현종이 중국 산둥성의 명산 태산에 직접 찾아가 절벽에 새긴 예서 글씨 대작인 ‘기태산명’은 탁본을 거대한 두루마기 형태로 풀어 전시장 중앙에서 가장 큰 글씨작품으로 나왔다. 속필로 마구 흘려 쓰는 미친 초서란 뜻의 광초로 일가를 이루었던 당나라 승려 회소의 <자서첩>도 전시에 함께 나와 안진경체와는 또다른 묘미를 일으킨다. 거장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서예의 역사적 흐름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놓은 구성의 재치, 일본 학계의 깊고 풍성한 중국학 연구 수준과 수집역량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중국과 일본의 고대, 중세 서예작품들만 소개되고, 김생, 탄연 등의 한반도의 서예사는 아예 배제된 점이 눈에 걸린다.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서예사 교류에 미진했던 국내 학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24일까지.

 

도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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