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붕
주세붕이 일곱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석에 있어 빗질을 못하자 자신을 머리를 감고서 기름을 바른 뒤 그의 어머니 머리카락에다 갖다 대어 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건너오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의 효성을 기특하게 여겼다.
그 뒤 그의 아버지상을 당하여 산소 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그곳에서 거처하였는데 3일에 한 번씩 내려와서 어머니를 뵈면서도 자기 방에는 한 차례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집에 개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주세붕이 출입할 때마다 따라다녔다. 그런데 주세붕이 상주가 된 뒤로는 그 개에게 고기를 주어도 먹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주세붕의 효성이 짐승까지 감동시켜 그렇다고들 여겼다.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어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살던 옛 터에다 사우(祠宇)를 지어 봄가을로 제향을 지내며 백운서원(白雲書院)이라고 불렀다.
백운서원은 좌우(左右)의 질서가 정연하였다. 주민들 가운데 준수한 자를 모아서 학문을 강론하며 연습하게 하였고, 곡식은 저축하고 남은 것을 가져다 학생들의 숙식 자료로 제공하였으며, 녹봉에서 얼마를 떼어 경전(經傳)과 사기(史記)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강독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다. 서원 터를 처음 닦을 때에 그 터에서 구리로 된 그릇 3백여 근(斤)을 얻게 되어 그것을 팔아 경비로 썼다.
그 뒤 명종 5년(1550)에 퇴계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의 교화는 임금을 경유하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퇴폐한다는 취지로 감사(監司)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금에게 보고를 드리되, 송(宋)나라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 학규(學規)에 의거하여 임금이 서원 이름을 짓고 편액(扁額)을 써주며 겸해서 전토와 노비를 내려주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도록 하였다.
주세붕 선생 글씨
감사 심통원(沈通源)이 그의 말대로 임금에게 보고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이름을 지어 내려주고,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서원 기문(記文)을 짓도록 명하였다. 또한 그 일로 인하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책을 내려 주었으니, 사원(祠院)에 임금이 이름을 지어주고 편액을 써서 내려주는 일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명종 5년에 대사성으로서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주세붕은 조정에서 벼슬한 30년 동안을 한결같이 가난한 선비처럼 지내며 산과 못가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여 지금까지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에는 가끔 그가 남긴 자취가 있다.
60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저서(著書)로는 『죽계지(竹溪誌)와 무릉지(武陵誌)』가 있고 합천(陜川)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