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구

최우 /삼별초

박송 입니다. 2010. 8. 18. 19:47

 

 

 

<해설>

 

낭독자 고종 14년 3월, 점술로 사람들을 현혹했던 주연지라는 사람이 최우 의 측근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사건에 연루 되어 장군 김희제가 희생되었으며, 강화도에 유배돼 있던 희종은 최 우의 분노를 사서 교동으로 유배지를 옮겨 유폐되었다.

<해설> 지난 시간 마지막 부분에 소개했던 이른바 ‘주연지의 모반사건’의 줄 거리가 대충 그렇습니다. 그 사건의 전개과정과 결말은 이미 소개했 습니다만 의문 나는 점 한두 가지를 짚어보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기로 하죠.

 

먼저, 과연 장군 김희제가 최우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에 가담하였느 냐, 하는 점입니다.

낭독자 하루는 주연지가 은밀히 최우에게 “지금의 왕은 곧 왕위를 잃을 상 이며 최공이 장차 왕위에 오를 상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최우는 자신이 신뢰하는 심복 김희제에게 주연지의 말을 전하였는데…

<해설> 문헌 기록으로만 보자면, 최우가 주연지로부터 들은 은밀한 이야기 를 김희제에게 몰래 털어놓았을 정도로, 장군 김희제는 최우의 충실 한 심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해 전에 고려군이 우가하 군사 를 물리칠 때에도, 김희제가 최우에게만은 은밀하게 미리 출병사실 을 보고하고 나서 군사를 움직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두 사람 사이의 신뢰는 돈독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데 최우는 나중에, 주연지의 집에 모여서 자신을 죽이고 강화도에 귀양 가 있는 희종을 복위시키려는 반란음모에 김희제가 연루돼 있 다는 참소를 접하고서 멀리 전라도 나주에 가 있던 김희제를 가차 없이 죽음으로 몰아넣고 맙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서트-1. 테입<234> 윤용혁

 

(35:51 김희제 같은 인물은 자기가 신분적인 면이라든지 여러 면에서 최씨 정권의 도움 을 받아야 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구태여 새로운 작당을 해야 될 필요성이 사실 별로 없 거든요. 그런데 그런 결과로 나왔습니다만 그래서 저는 생각할 때 그것은 김희제하고 최 씨 정권의 대립이 아니고 최씨정권도 권력은 최씨가 가지고 있지마는 밑에 있는 여러 그 룹이 있지 않습니까. 서로 간에 권력을 더 확보하려는 그룹이 있잖아요. 그런 내부적인 여러 가지 갈등관계 속에서 김희제가 어떻게 보면 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거다. 36:45)

<해설> 김희제가 최우에게 반기를 들었거나, 혹은 최우가 김희제에게 반감 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최우 휘하의 몇몇 세력들 사이에서 일어 난 갈등 때문에 장군 김희제가 억울하게 희생된 것이다, 공주대 윤 용혁 교수의 견해가 그렇습니다. 부산대 이종봉 교수의 견해도 엇비 슷합니다.

 

*인서트-2. 테입<236> 이종봉

(32:37 반 최우 정권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실제 개경에 있지 않고 나주에 있었죠. 그렇다는 것은 김희제 같은 경우에는 개경과는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희제 같은 경우에는 무신이지만 문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성장을 하고 있었던 인물이죠. 그러니까 주위에서의 견제, 이런 것 들이 상당히 심했다, 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김희제를 엮어가지고 처 단을 함으로써 이후에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인물을 제거하는 그런 수단으로 삼지 않았느냐. 33:25)

<해설> 김희제가 특출한 무장인데다 문신적인 능력도 지니고 있어서 주위의 견제가 심했을 것이고, 최고 권력자인 최우 역시, 문무를 아우르는 역량을 지닌 김희제가 세력을 키워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반 란 사건을 엮어서 희생시킨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얘깁니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유배돼 있던 희종의 경우 실제로 그 반란사건 의 배후에서 어떤 역할을 하기는 했을까요?

 

*인서트-3. 테입<236> 이종봉

(30:39 유배 가 있는 세력은 그 지방에 있는 수령이라든지 이와 같은 세력들이 항상 감 시를 하고 있을 거니까 희종이 개경에 있는 세력과 어떤 연관을 가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근데 개경에 있는 세력은 역으로 희종이 과거에 어떤 최충헌에 의해서 폐위가 되어졌기 때문에 반 최씨정권이라는 이념은 가지고 있지요. 그러기 때문에 최충 헌이라든지 혹은 최우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가능한 한 희종을 등에 업고 반란을 도 모하면은 일정하게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는 그런 측면이 있겠다, 할 수가 있겠습니다. 31:28)

<해설> 강화도가 비록 개경과 가까운 거리라 해도, 바다 건너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던 희종이, 그런 처지에서 세력을 규합해서 자신의 복위를 위해 반란을 꾀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그들이 죄가 있고 없고는 결국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다, 이런 얘기가 됩니다.

<음악> (브릿지)

 

대신1 (급히 들어와서)대왕폐하, 금주에서 급한 보고가 올라왔사옵니다.

고종 금주라면 저 남쪽 경상도 금주를 이르는 것이오?

대신1 그러하옵니다.

고종 고하도록 하시오.

 

대신1 왜선 수 척이 금주 해안으로 접안하여 약탈 만행을 저지르고 도주 하는 것을 추적하여 무찔렀다 하옵니다.

고종 허허, 지난번에도 금주에 왜적이 내습하였다 하지 않았소? 어찌하여 근래 남부지방에 왜인들의 침탈이 이리 잦은 것이오?

대신1 이대로 두어서는 왜의 침입을 근절시킬 수 없을 것이옵니다.

고종 그럼 어찌 해야 한다는 말이오?

 

대신1 그 동안 사신 왕래가 뜸했는데 이참에 일본국 조정에 사신을 보내 서 왜적의 침략을 항의하고 엄중 경고를 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해설> 사실 이 무렵의 고려와 일본의 관계는, 특별하게 외교단절을 선언하 지는 않았지만, 필요할 경우에만 어쩌다 한 번씩 사신을 보내는 정 도였지 활발하게 문물을 교류하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남해 안에 왜가 침공했다는 기사 역시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유 독 고종13년인 1226년부터 그 이후로, 고려의 남부 해안지역에 왜 인이 침공했다는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낭독자 -고종 13년 정월, 왜가 경상도 해안의 주와 군에 쳐들어오자 거제 현령 진용갑이 해군을 거느리고 나가서 물리쳤다.

-같은 해 6월에 왜가 금주(金州)에 쳐들어왔다.

-고종 14년 4월, 왜가 금주에 쳐들어오자 방호별감 노단이 군사를 일으켜 적의 배 2척을 나포하고 30여급의 머리를 베었다.

-같은 해 5월, 왜가 웅신현에 쳐들어오자 별장 정금억 등이 산간에 잠복하였다가 기습 공격하여 일곱 명을 목 베어 죽였다.

<해설> 앞에서 소개한 왜의 침략지점 중 금주는 경상남도 김해이며, 웅신현 은 지금의 경남 진해의 웅천지방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일 본열도의 어디에서 온 약탈자들일까요? 윤용혁, 이종봉 교수의 얘 기를 이어서 들어보시겠습니다.

 

*인서트-4. 테입<234> 윤용혁

(39:08 한국에서 건너가면 쓰시마, 그 다음에 이끼라는 섬이 있지 않습니까, 이끼섬, 그 다음에 또 건너면 본섬에 도착하는데 그 일대에 마쓰오라든가 그런 해안지역이 있습니 다.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 중간쯤에. 그것이 한반도로 건너가는 직선구역인데 대체로 그 일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海民들이란 말이죠. 근데 이 지역들이 공통적으로 보면 사실 식량을 공급할 그런 좋은 저기가 없습니다. 결국 그 사람들이 주로 들어오게 되는 건데 정부에서 어느 정도 통제가 될 때에는 왜구가 사실 별로 없잖아요. 이 시기가 되면 벌써 통제가 이완됐다. 39:54)

 

*인서트-5. 테입<236> 이종봉

(35:07 고종 13년 이전에는 왜구가 고려에 침략한다든지 그런 예는 전혀 없었지요. 그 래서 고종 13년에 왜구라는 세력이 등장을 하게 되는데 이 세력들은 대마도라든지 일기 도라든지 평오도라든지 이와 같은 지역의 세력들이 경제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곤궁에 처한 상황에 이르니까 한반도 남부 즉 주로 경상도 지역을 노략질하는 이와 같은 측면을 보여주지 않았느냐, 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력들은 주로 대마도라 든지 이와 같은 지역을 거쳐서 대마도에서 쉽게 올 수 있는 지역, 거제라든지 金州인 김해라든지. 35:05)

<해설> 이종봉 교수의 애기 중에 ‘고려에 왜구가 침략했다’는 표현이 나오 는데요, 여기서 용어정리를 하고 넘어가기로 하죠. 고려사 등의 사 서에는 일본 열도 쪽에서 우리의 남해안에 침투한 세력을 왜(倭)라 고도 하고 어떤 경우 왜인(倭人)이라고도 표기하고 있으며 도둑 적 (賊)자를 뒤에 붙여서 ‘왜적’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시기 에 일본열도의 중앙조정을 나타낼 때는 일본, 혹은 일본국이라고 나 라 이름을 제대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익히 들어온 ‘왜구’라는 말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박용운 고려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고려시대사’에서 이렇게 기술 하고 있습니다.

 

낭독자 고려말에 들어와 고려를 괴롭힌 외침세력으로 왜구라는 말이 등장 한다. 여기에서 왜구란 왜인들의 구도집단(寇盜集團)이 침입한 사 실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본래 그것은 단순하게 “왜인들이 어디어 디를 구략(寇掠)하였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그러던 것이 고려말에 이르러 이들의 약탈행위가 잦아지면서 하나의 술어로 변 하여서 왜인들의 구도행위를 표현하는 명사가 되었다. 이리하여 왜 구라는 말은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연안에서 구도행각을 하던 일본인 해적집단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해설> 구도, 혹은 구략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구도’는 도적 구(寇)자에 훔칠 도(盜)자이며, 구략은 역시 도적 구(寇)자에 노략질할 략(掠)자 입니다. 고려사절요 원문을 보면 ‘왜가 금주에 침입하였다’를 한문으 로 왜구금주(倭寇金州)라고 적고 있습니다. ‘왜구금주’에서 왜(倭)는 주어이고 구(寇)는 ‘쳐들어오다’라는 뜻의 동사로 쓰였습니다. 그런 데 고려말엽에 이르러 왜의 침탈이 빈번해지자 이때부터 ‘왜구’라 는 말이 ‘왜가 침입하였다’라는 술어로 쓰인 게 아니라 노략질을 일 삼는 왜인 해적집단을 일컫는 명사로 굳어져버렸다, 이런 얘깁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그런데, 문헌기록에 ‘왜’나 ‘왜인’으로만 나타나다가 1227년 5월의 기록을 보면 번듯하게 ‘일본국’이라는 공식 명칭을 쓴 기사가 등장 합니다.

낭독자 일본국이 글월을 보내와서 도적의 배들이 변경을 침범한 죄를 사과 하고 이어서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고 호시하기를 청하였다.

<해설> 물론 앞에서 등장했던 ‘왜’나 ‘왜’인이 한반도 해안을 침탈한 해적집 단인 반면에 여기 나오는 ‘일본국’은 일본의 중앙조정을 일컫습니다.

 

일본 조정에서 왜인들의 한반도 해안지방 약탈행위를 사죄했다는 얘기는, 그들 해적집단을 일본 중앙조정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 하 였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공주대 윤용혁 교수의 얘깁니다.

*인서트-6. 테입<234> 윤용혁

(40:59 일본 같은 경우는 교토에 천황이 있고 그리고 이 시기에는 가마쿠라에 막부가 있 잖습니까. 주로 실제 업무는 가마쿠라 막부에서 보게 되는데 교토하고 가마쿠라는 많이 떨어져 있어요. 가마쿠라는 도쿄부근이니까 굉장히 거리가 멀고 그러는데, 교토하고 가 마쿠라하고도 거리가 멀고 지리적으로, 그 다음에 규슈지역하고 또 거리가 엄청 멀지 않 습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시기는 중앙정부가 완전히 규슈지역까지 통제가 제대로 되 지 않은 그런 시기다, 이렇게 볼 수가 있고. 41:41)

<해설> 일본조정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던 막부(幕府)가 거리상으로 너무 멀 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규슈지역이나 대마도에서 한반도 쪽으로 배를 타고 약탈에 나서는 왜구들을 통제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 깁니다. 경기대 이재범 교수 역시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인서트-7. 테입<235> 이재범

(30:43 이 당시에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땝니다. 그래서 하나의 중세 막부정치가 행해지 고 있었던 땐데 이 때 가마쿠라는 지금의 동경부근에 있어서 이쪽 규슈까지는 직접적인 세력이 미치지 못 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래서 아마도 대마도랄지 이끼 섬 또 규 슈의 서북부 이 일대 사람들이 고려를 침공을 하고 약탈을 하게 된 것에 대해서 아마 이 사람들은 일본 국내에서도 그러한 약간의 불만이 많은 세력으로 여겨졌던 것은 아닌지 이렇게 추정을 해보고 있습니다.31:26)

 

<해설> 앞에서 일본이 고려에 글을 보내서 호시(互市)를 청하였다 했는데 그것은 곧 상호간에 무역을 하자고 제의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면 고려에서는 일본의 우호관계 제의와 호시 제의를 수락하였을까 요? 고려사 세가편 고종 14년 12월의 기사는 이렇습니다.

낭독자 왕은 박인에게 공문을 주어 일본에 보내서 양국이 대대로 우호관계 를 가지고 있는 만큼 약탈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해설> 일본의 화친제의에 고려에서도 화답을 했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박 인이 고려 사신으로서 일본에 갔을 때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일본 조정에서는 고려 사신 박인이 지켜보거 있는 가운데,

일관리 고려의 바닷가에 침략하여 민가를 약탈한 도적무리의 수괴들을 끌 고 왔습니다.

일대신 그자들을 고려 사신이 보는 앞에 꿇어앉히도록 하라!

일관리 예. (때려서 꿇어앉히며)꿇어앉아!

일대신 우리 일본은 고려의 조정과 고래로부터 선린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 거늘 네놈들이 고려의 해안지방에 침투하여 인가를 약탈하다니, 그 것은 곧 천황폐하를 배반한 것이고 우리 일본을 배반한 것이다. 저 도적 수괴놈들의 목을 쳐라 !

일관리 예. (칼 빼고) 이야앗!

 

<해설> 그렇게 왜구들을 처단하는 모습을 고려 사신에게 직접 보여줌으로써 일본은 고려와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갈망하고 있다는 속내를 드 러내 보였던 것입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자, 그럼 이제부터는 이 당시 최우라는 사람이 고려 조정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사서에 나타난 상징적 사례들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고종 14년 5월-.

낭독자 최우가 여러 장군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효과> (사람들 잔치판에서 웃고 떠드는)

최우 (취한)자, 자, 오늘밤엔 마음껏 마시고 취해보도록 하라. 무엇들 하 는가? 모두 잔을 비우라!

<효과> (사람들, 술잔 들이켜는 등)

최우 아니, 이 즐거운 잔치판에 음악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여봐라, 풍악 을 연주하라!

<음악> (흥겨운)

최우 자, 자, 흥겨운 잔치판에서 재신이니 추신이니, 체면가릴 것 무어 있 는가? 모두 일어나 춤을 추도록 하라!

<효과> (몰려 나가 춤을 추는데)

(요란하게 천둥 치는 소리)

(사람들 비명 지르며 설왕설래)

 

최우 (겁먹은)아, 아니,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진동하다니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여봐라! 푸, 풍악을 멈추어라!

낭독자 최우는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울리자 두려워서 풍악을 그만두게 하 였다.

<해설> 풍악이 멈췄으나 잔치는 계속되고 있었는데 최우에게 잘 못 걸려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상장군 조염경이었습니다.

낭독자 조염경에게는 김홍기라는 사위가 있었는데 그 사위가 아무런 죄도 없이 최우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었다. 조염경은 사위의 억울한 죽 음을 불쌍하게 여겨서 온 집안이 소식을 하였다.

 

<해설> 소식(素食)이란 소박한 식사를 칭하는 말로서 고기반찬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최우의 집안에서 열린 잔치판에서도 조염경은 그렇게 소식을 했겠지요.

최우 아니, 조염경 상장군, 어찌하여 그대는 고기반찬을 앞에다 잔뜩 쌓 아두고도 먹을 생각을 아니하는가!

조염경 아, 저, 최공, 저의 집안이 본래 소찬을 먹는 집안이라서…

최우 (탁자 치며)누구를 바보로 아는가! 나는 그대가 소식을 하는 까닭을 다 알고 있다. 그대가 만일 이 최우에 대해서 딴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면 혼자된 딸을 다시 출가시켜서 새 사위를 맞이해야 할 것이 야. 알겠는가!

 

<해설> 이런 협박을 받은 조염경은 그 다음 처신을 어떻게 했을까요?

조염경 죽은 사람은 이제 잊고 새 출발을 하도록 하거라.

염경딸 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조염경 어차피 네 남편 김홍기는 세상을 떠났다. 헌데, 젊은 나이에 수절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느냐? 그러니…

염경딸 (울먹)아버지, 도대체 남편이 죽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러십니까? 그건 사람이 할 도리가 결코 아닙니다.

조염경 미안하구나. 아비가 지금 조정에서 몹시 곤란한 처지를 맞이하다 보 니…(흐느낀다) 참으로 미안하구나.

염경딸 (흐느끼고)아버지의 처지가 정 그러하시다면…알겠습니다. 재가를 할 터이니 배필을 정해 주시지요.

낭독자 조염경은 최우가 두려워서 과부가 된 그의 딸을 낭장 윤주보에게 강제로 혼인시켰다. 새로 들어온 사위 윤주보가 첫날밤에 꿈을 꾸었 는데, 갑자기 죽은 김홍기가 꿈에 나타나서 윤주보를 마구 때리는 것이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윤주보는 결국 죽고 말았다.

 

<해설> 그러니까 최우의 강압으로 조염경이 딸을 다시 시집보내서 새 사위 를 맞았는데, 첫날밤에 죽은 옛 사위인 김홍기가 나타나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새신랑을 공격하였고, 그 바람에 두 번째 사위도 죽 고 말았다, 이런 얘깁니다. 어떤 기록에는 꿈에 나타난 옛 남자가 새로 들어온 신랑의 성기를 때렸더니 죽었다, 이렇게도 돼 있습니 다. 하지만 설화풍의 이 기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상장군이 라는 최고의 무신계급을 가진 조염경 같은 사람도, 당대의 권력자 최우 앞에서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음악> (브릿지) 짧게

 

<해설> 두 번째 사례를 살펴볼까요? 참고로 다음 얘기에 나오는 자연도는 지금의 경기도 영종도를 말합니다.

낭독자 승려 한 사람이 죄를 범하여 자연도로 귀양을 갔다. 그런데 먼저 귀 양 가 있던 문대순이라는 사람과 서로 미워하였다. 그래서 몰래 사 람을 보내서 최우에게 이렇게 거짓으로 일러바쳤다.

승려 최공! 지금 여기 자연도에 유배 중인 문대순이라는 자가 몰래 사람 을 모아서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하고 있습니다. 곧 군사를 일으켜서 개경으로 쳐들어갈 계획을 꾸미고 있습니다!

 

최우 무어라? (분노)흐음…문대순과 그 일당의 목을 베어오도록 하라!

낭독자 최우가 낭장 이분(李賁)을 보내 문대순 등 5 명을 체포하여서는 전 후 곡직을 묻지도 않고 죽여 버리니 조야가 모두 애달프게 여겼다.

<해설> 거짓으로 꾸며 올린 참소 한마디에 해명을 기회도 없이 목숨을 내놓 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최우 정권 하에서의 관리들의 처지였습니다.

<음악> (브릿지) 짧게

 

<해설> 한 가지 사례를 더 소개하기로 하죠.

낭독자 인걸(仁傑)이라는 남경 사람은 남보다 실력이 뛰어나 신기군에 소속 돼 있었다. 마침내 그는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방을 누비며 약 탈을 일삼았다. 하루는 도성으로 들어갔는데 나졸이 그가 인걸인 것 을 알아차리고 최우에게 고하였다.

나졸 최공! 그, 그 자가 왔습니다요!

 

최우 그자라니, 누구를 얘기하는 것이냐!

나졸 남경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는 인걸이라는 그 자 말입니다.

최우 무어라? 인걸이 도성에 발을 들였다는 말이냐, 허허허…

낭독자 최우가 사람을 보내 그를 수색하게 하였는데 인걸이 두려워하는 기 색이 없으니 사람들은 그가 인걸인 줄을 알지 못 하였다. 그 사이에 인걸은 시치미를 떼고 속여서 이렇게 말하였다.

인걸 누구를 찾으십니까요?

 

나졸 으음, 키가 크고 수염이 더부룩한 낯선 사내가 여기 있었는데 혹시 보지 못 하였느냐?

인걸 아, 저쪽으로 갔으니 빨리 가서 붙잡으시오!

나졸 오, 그래? 알겠다.

인걸 헌데, 나졸 네 이놈! 나도 그 말에 좀 올라타야겠다. (말에 오르며)으 이차! 내가 바로 네놈이 찾는 인걸이다 이놈아, 이럇!

<효과> (말 한 마리 달려가는)

(사람 하나, 마에서 떨어지는)

낭독자 인걸은 말 뒤에 올라타자마자 앞에 탄 기병의 머리채를 잡아채서 떨어뜨린 다음, 그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니, 열 마리의 말이 뒤 쫓아 갔으나 잡지 못 하였다. 이후 인걸은 이천에 숨어 있었는데 고을 사람이 이것을 알고 고하여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인 인걸이 형의 집행을 앞두고 말했다.

 

인걸 (에코)내가 평소 불의를 많이 행하였으니 죽음을 받은들 후회는 없 다마는, 다만 6군의 선두에서 적진을 들락거리면서, 적의 장수를 죽이고 기를 펴보는 것이 꿈이었는데, 해보지도 못하고 남의 손에 이렇게 죽다니, 이것이 다만 한스러울 뿐이다. 자, 내 목을 쳐라!

<해설> 결국 인걸은 최우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목이 달아납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앞에서 소개한 사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최우는 자신에게 반 기를 드는 사람이나 세력에 대해서는 앞뒤를 가리거나 절차를 따지 지 않고 가차 없이 처형합니다. 그럼으로써, 예전 같으면 중방의 일 원으로서 가장 강력한 견제세력이 될 수 있었던 상장군 조염경 같 은 사람이, 최우의 한 마디에 과부가 된 딸을 무리하게 재가시킬 정 도로 오금을 펴지 못 했던 것입니다. 이종봉 교수의 얘기를 들어볼 까요?

*

인서트-8. 테입<236> 이종봉

(43:57 자기와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인물에 대해서는 제거를 하고 자기에 정치적인 도움 을 주는 세력에 대해서는 우호적으로 등용을 하고 이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었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최우는 이 시기에 정치를 하면서 요즘으로 말한다면 以 夷制夷, 이와 같은 정책들을 취하면서 자기한테 우호적인 세력들은 적극적으로 포섭을 하면서 민심을 무마하고 또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성장하려는 세력이라든지 혹은 자기에 게 반대되는 세력이라든지 이와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가감 없이 처단을 해서 정치적으 로 안정을 시켜나가지 않았느냐. 44:50)

 

<해설> 그렇다면 최우가, 자신의 아버지였던 최충헌보다 훨씬 더 막강한 독 재 권력을 전횡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윤용혁 교수 는 최우가 사적(私的)으로 확보한 강력한 군사력 때문이었을 것이라 고 진단합니다.

*인서트-9. 테입<234> 윤용혁

 

(45:27 최우 시대는 그 이전의 최충헌으로부터 독재 권력을 이어받았지마는 이어받는 것 만으로는 안 되잖아요. 한계가 있지요, 그런데 그 독재 권력이 가능한 것은 사실은 군사 력 아니겠어요. 군사력이 있기 때문에 독재권력이 가능한 거고 최유 시대에는 사병이 훨 씬 더 조직화 되고 확대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도방이라고 하는 것도 확대되고 가병 이 런 것도 마별초도 나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전대에 비해서 독대권력의 기 반이 더 확대됐다, 그런 기반 위에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거다. 46:10)

<음악> (브릿지)

 

<효과> (말 한 마리 달려와 멈추고)

장수 (말에서 내리고)대왕폐하, 북방 국경지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식 이옵니다.

고종 혹시, 몽골이 군사를 움직인 것은 아니오?

장수 아직 몽골은 움직임이 없사오나 동진의 공세가 만만치 않사옵니다.

동진 군사가 국경을 넘어서 북방의 정주와 장주 쪽으로 진군해오고 있다 하옵니다.

 

고종 최공, 사태가 더 위태로워지기 전에 방어군을 편성해서 출정시켜야 되지 않겠소?

최우 예, 대왕폐하. 상장군 조염경을 우군병마사로 임명하고, 대장군 김승 준을 지병마사에, 그리고 추밀원사 정공수를 중군병마사에, 상장군 정순우를 후군병마사에 임명하시옵소서.

고종 알겠소. 임무를 부여받은 장군들은 삼군을 거느리고 출동하여 기필 코 동진의 군사들을 물리치도록 하시오.

최우 삼군은 출정하라!

<효과> (북 소리 세 번)

 

(군사들, 함성 지르며 내달리는)

낭독자 군사가 출정하자 왕은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재추에게 명하여 천황 당에서 초제를 지내 승전을 빌었다.

<해설> 고종이 동진과의 전투에서 고려군의 승전을 빌면서 지냈다는 초제 (醮祭)는 옥황상재와, 하늘의 별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의 의식 을 일컫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 시기에 동진이 고려의 국경을 침범 한 배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인서트-10. 테입<234> 윤용혁

 

(48:04 동진 사람들은 여진족 집단이거든요. 지리적으로 보면 우리 함경도 쪽이라든가 그 위쪽 만주지역 이런 지역인데 우리고려의 동북지역 함경도를 포함해서 그런데, 대체 로 여진족들이거든요. 그리고 여진족은 오랫동안 자기세력들이 있잖아요. 그걸 갖다가 국가체제로 조직화 한 것이 포선만노다, 이렇게 볼 수 있고 그래서 안정된 국가가 만들 어졌다고 볼 수가 없고 불과 20여 년 지속하다가 그대로 스러졌기 때문에 아직 체제라 든가 이런 것들이 갖춰지지 못 했다 이렇게 봐야 될 것 같고 그래서 어떤 힘의 공백 상 태에서. 48:54)

<해설> 비록 북방의 고려 국경을 넘어 침공한 동진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 기 때문에 고려에서 삼군을 편성하여 방어에 나서기는 했으나 그렇 다고 고려가 크게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예깁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고종14년 12월의 고려사절요 기사 중에는 흥미로운 내용 한토막이 실려 있습니다.

낭독자 어사대에서는, 동네에서 집비둘기나 매를 기르는 것을 금하는 조치 를 내렸다. 새를 기름으로써 공무를 폐하고 상호간에 쟁송을 일으키 기 때문이었다.

 

<해설> 이 기사의 내용을 통해서 당시 고려의 고관들 사이에 매를 비롯한 새들을 집에서 기르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집에서 비둘기 한 마리를 빼앗았던 것이 이의민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빌미가 되었다 는 얘기를 소개한 바 있는데요, 집에서 새를 기르는 것을 금지한 이 유가 관리들이 새를 기름으로써 공무를 소홀히 하고 상호간에 쟁송 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인서트-11. 테입<236> 이종봉

 

(46:42 고려시대에는 매를 상당히 많이 길렀었죠. 그래서 나중 되면 원나라에서도 은방 을 설치했죠. 응방(鷹坊)을 설치해서 전문적으로 매를 길렀었고 우리나라의 매는 고려시 대만 유명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 조선 시기에 가서도 고려의 매는 일본으로 수출되는 이 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매는 고려사ㅣ대 조선시대에 상당히 인접국가의 중 요인물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동물이 매가 아니냐,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47:31)

 

<해설> 사냥에 쓸 매를 기르는 풍습은 고려나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 니었습니다. 백제의 나라 이름, 즉 국호를 언급할 때 흔히, 백제니 십제니 혹은 위례국, 남부여 등 여러 가지 이름들을 열거하는데요, 고려시대에 지은 제왕운기를 보면 백제를 응준(鷹準), 혹은 나투(羅 鬪)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고 돼 있습니다. 학자들은 응준과 나투가 모두 조류(鳥類)의 일종인 매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것들이 정식 국호였다기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백제를 지칭할 때 사 용한 일종의 별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응준의 응(鷹)자가 바로 송 골매나 해동청을 가리키는 글자이며, 나투의 ‘라’자 역시 ‘새그물 라 (羅)’자로서 매를 일컫습니다. 따라서 외국 사람들 사이에서 백제가 ‘매가 유명한 나라’로 통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매를 길러 사냥에 활용했던 삼국시대의 그런 전통이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 것입니 다.

<음악> (브릿지)

 

<해설> 주연지의 반란 사건 때 최우는, 그 반란 모의에 가담을 했는지조차 불분명한 상태에서 연루혐의가 있는 인물들을 앞뒤 가리지 않고 가 차 없이 처단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천하의 최우라 할지라도 반란 혐의가 있는 세력을 향해서 무차별로 창칼을 휘두를 수만은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부하 (급히 들어와서) 최공, 서북면의 회음진 별장이 서경에 모반을 꾀하 는 자가 있다는 첩보를 전해왔습니다.

최우 무어라? 서경에서 반란사건이 보고되었다 했느냐? 그래서 어찌 처 결했다는 것이냐?

부하 서북면 병마사가 서경에 공문을 보내서 모반을 꾀한 자를 찾도록 했으나 결국 찾지 못 하였다고 합니다.

최우 분명 모반한 자가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는데도 색출하지 못했다는 말이냐?

부하 예, 아마 워낙 은밀하게 진행된 일인지라…

 

최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감히 이 최우를 향해서 창칼을 겨누는 자 가 분명 있는데 유야무야 넘겼다가 나중에 닥칠 화를 어찌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냐? 모반사건을 고해바친 자를 당장에 개경으로 압 송하라 전하라!

부하 최공, 모반을 고한 자는 죄인이 아닌데 어찌 개경으로 압송하라 하 시는지요?

최우 당장 압송하라는데 어찌 그리 말이 많은 것이냐!

 

<해설> 모반사건이 있다고 고해바친 사람을 붙잡아 와서 어찌하겠다는 것이 었을까요? 어쨌든 그 당사자가 개경으로 압송되어서 최우 앞으로 불려나옵니다. 최우가 어떻게 하는지 들어보시죠.

부하 모반 사건을 고한 자가 바로 이 자입니다.

 

최우 알겠느니라. 저 사람에게 비단옷과 금띠, 그리고 조랑말 한 필, 능 라 50필, 명주와 모시 각 10 필, 쌀 30섬을 내가 상으로 줄 것이 다. 뿐만 아니라 대왕폐하께 저 사람을 특별히 포상하도록 주청을 올릴 것이다.

 

<해설> 최우의 주청을 받은 고종 역시 그에게 내구마 한 필과 능라 40필, 명주 백 필, 그리고 베 2백 필을 하사합니다. 서경에서 압송돼 온 그 사람은 어쩌다 모반사건에 대한 첩보를 고해바쳤다가 선물더미 에 파묻히는 행운을 거머쥔 셈이지요.

얼마 뒤에 회음진의 도령 회간이라는 사람이, 모반을 꾀한 당사자라 면서 한 사람을 잡아왔는데, 그 회간에게도 비단 40필과 내구마 한 필을 상으로 내려줍니다. 이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 루어서 사실 그것은 무슨 대단한 반란사건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우가 모반을 고해바친 사람에게 그처럼 파격적인 포상을 한 의도가 궁금해집니다. 고려사절요에는 북인지 심(北人之心), 즉 북쪽 사람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했다 고 기록돼 있습니다.

 

*인서트-12. 테입<234> 윤용혁

(51:53 北人 하면 말 그대로 북쪽사람, 북쪽 변경사람, 다시 말해서 서북면 사람, 이렇게 봐야 될 것 같고요, 역시 국경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중앙과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소원하 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적라고 가장 가까울 수 있는 곳이 도 국경지방 아니겠습니까. 또 적이 쳐들어왔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역할을 해줘야 할 사람이 또 북쪽 변경지방 사람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변경지방 사람들의 향배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중요한 거죠. 52:37)

 

<해설> 아무리 고려 조정의 권력을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는 최우라지만 전통 적으로 개경의 조정세력에 대하여 반감을 가져온 서경, 즉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방면의 민심은 무력으로 억눌러서 다스려질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처럼 물량공세를 취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인서트-13. 테입<236> 이종봉

 

(49:17 군사적으로는 서경이 변경지역과 맞닿아 있고 정치적으로는 계속적으로 반 최우 세력이 존재했던 지역이 서경이었죠. 그러기 때문에 서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물론 무력적으로 진압할 수도 있지마는 무력적으로 진압하는 것 보다 온건적인 유화책을 통해 서 그들의 민심을 수습해보려는 그런 입장을 가졌다, 라고 할 수거 있을 것 같습니다. 사전 칠백 결은 정말 어마어마한 토지죠. 이것을 그들에게 주고 그렇게 해서 북쪽 사람 들의 마음을 얻으면서 최우정권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해보려는 그런 의도를 가졌지 않느 냐. 50:17)

<음악> (브릿지)

 

<해설> 고려사절요 고종 15년 6월의 기사를 보면 아주 처참하고도 엽기적 인 느낌이 드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낭독자 장생서의 죄수들 가운데 자색이 아름다운 한 여인이 있었는데…

<해설> 여기서 장생서(掌牲署)란 고려시대에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을 바치 는 일을 맡아 보던 관아를 일컫습니다.

낭독자 그 장생서의 서리가 당직 날에 자색이 고운 그 여인을 강간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굳세게 저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여자 그 손 치우지 못 하겠느냐. 내 비록 죄수의 몸으로 갇혀 있으나 이 나라 대정의 아내이니라! 그런데 어찌 외갓 남자에게 내 몸을 함부 로 맡기겠느냐! 썩 물러가라!

 

낭독자 그러나 서리는 그 여자를 기어이 강간한 뒤에 돼지우리에 가두어버 렸다. 그러자 돼지들이 앞을 다투어 그 여자를 물어뜯었다. 여자는 사람 살려달라고 다급하게 불렀으나 서리는 거짓으로 그러는 줄 알 고 구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이튿날 날이 밝아 가보니 여자의 몸 은 돼지에게 다 뜯어 먹히고 뼈만 남아 있었다.

 

<해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이 사건은 당시 고려에서는 상당히 충격 적인 사건이었을 텐데, 역사책에는 사건의 내용만 담담하게 서술돼 있을 뿐, 그 강간범을 어떻게 처리했다는 등의 뒷얘기는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고,

대신2 대왕폐하, 동진군사 천 명이 국경을 넘어 장편진에 주둔하고서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옵니다.

낭독자 고종15년 가을 7월에 동진군사 천 명이 장평진에 주둔하자 삼군을 보내 방어할 계책을 의논하였는데,

대신1 대왕폐하, 이제 막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장평진으로 쳐들어왔던 동 진 군사들이 물러갔다 하옵니다.

낭독자 그리하여 방어군의 파병을 그만두었다.

 

<해설> 몽골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긴장감이 감도는 상태에서 이렇듯 동 진 군사들이 빈번하게 국경을 넘나들자 고려 조정으로서는 골칫거 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고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서 를 내립니다.

고종 (에코)동진이 우리 고려의 국경과 가까운 곳에 은거하면서 빈번하게 우리의 변방을 침략하다가 우리가 군사를 내어 쫓아가서 토벌하면 문득 달아나고, 군사를 철수시키면 다시 침입하여 엿보고 노략질을 하니 이들을 막을 방도가 어디 있겠는가? 자고로 서경(書經)을 보면 공경대부들과 더불어 논의하라 일렀으니 마땅히 문무4품 이 상의 관직을 가진 사람은 각각 장구한 계책을 조목조목 작성하여 짐에게 올리도록 하라!

<해설> 고종 임금의 이런 조서를 받들어서 신하들이 얼마나 실효성 있는 대책을 제시했는지, 그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음악> (브릿지)

 

<해설> 이번에는 권력자 최우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과연 정당하게 사 용하는지, 그리고 최우는 과연 이전의 무인집정자들에 비해 청렴하 다 할 수 있었는지를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낭독자 어떤 승려가 자혜원을 지으려고 강음현에서 아름드리 재목을 마구 베어냈다. 이에 강음현 수령 박봉시가 그것을 중지시키고 그 재목 들을 관에 바치도록 조치하였다. 그러자 그 승려가 대장군 대집성 에게 부탁하여 그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아 가지고 왔다. 하지만 박봉시는 듣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편지를 써주었던 대집성이 최우에게 청을 올려 교정소(敎定所)의 편지를 보내왔다. 박봉시는 그래도 따르지 않았다. 화가 난 대집성은 그 사실을 최우에게 호소 하였고 결국 최우는 가음현 수령 박봉시를 먼 고장으로 귀양보냈 다. 그때 사람들이 분하게 여겨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해설> 여기 나오는 가음현은 지금의 황해도 금천입니다.

그 가음현의 수령이었던 박봉시야말로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 하고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의 직분을 흔들림 없이 꼿꼿하고 청렴하게 수행했던 공무원의 표상이라 할 만한데, 결국 최우에게서 상이 아니라 유배형을 받게 된 셈이지요.

<음악> (브릿지) 짧게

 

<해설> 두 번째로는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지역에 해당하는 임피현의 현령에 관한 이야깁니다.

낭독자 임피 현령 전승량은 상장군 김현보가 자기집의 전원(田園)을 대적으 로 조성하는 것을 보고 그 토지에 대한 조세를 또박또박 받아서 관 아에 들이고는 그가 부당하게 빼앗은 땅을 백성에게 돌려주었다. 그 러자 김현보는 안찰사 최종유에게 청탁해서 받아들인 조세를 반환 하도록 하였다. 이에 전승량은 통분하여 받았던 세금을 관아에 있던 은 그릇으로 일단 변상해준 다음에, 조정의 법사(法司)에게 내막을 보고하였다. 법사에서는 불법으로 전원을 조성한 김현보와 그의 청 탁을 들어준 안찰사 최종유를 탄핵하였는데,

 

최우 (서류 뒤적이며)이것이 무엇인가?

관리1 임피현령 전승량과 안찰사 최종유에 대한 탄핵서류입니다.

최우 이 서류 (찢으며) 찢어버릴 터이니 없던 일로 해!

낭독자 결국 최우가 나서서 탄핵절차를 중지시켰다.

<음악> (브릿지) 짧은

 

<해설> 마지막으로 고종 16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관리2 부르셨습니까, 최공?

최우 흐음, 격구장을 새로 만들라 했는데 왜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이야?

관리2 여기 저기 알아보고 있으나 격구장 만들 땅이 마땅치 않아서…

최우 멀리 갈 것 없이 내 집 바로 옆에다 만들라고 지시하지 않았느냐! 땅이 없다는 게 무슨 소리냐?

관리2 하지만 그 곳은 공터가 아니라 모두 백성들이 살고 민가여서…

최우 민가든 뭐든 다 헐어버리면 될 것 아니냐!

 

낭독자 최우는 자기 이웃에 있는 가옥 백여 동을 강점해서 격구를 하기 위 한 구장을 건설하였는데 동서의 너비가 수백 보요, 평탄하기가 바둑 판 같았다. 그리고 매번 격구를 할 때마다 반드시 동네 사람들을 동 원하여서 먼지가 일지 않도록 물을 뿌리게 했다. 얼마 뒤에 또 인가 를 허물어서 구장을 넓혔는데 최우가 강점한 인가가 무려 수백 호 에 달하였다.

 

<해설> 이 외에도 자신이 가진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한 사례가 사서에 자주 나타납니다. 우리는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을 때 이 른바 봉사십조라는 것을 올려서 개혁정치를 할 것처럼 선언했던 사 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최우의 경우에도 최충헌 사후에 권력을 물 려 받았을 때, 최충헌이 부당하게 탈점했던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 주고, 아버지인 최충헌의 측근에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관리들을 과감하게 쳐내는 등 청렴한 개력정치를 할 것처럼 여러 조치들을 취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윤용혁, 이종봉 교수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보시겠습니다.

*인서트-14. 테입<234> 윤용혁

(58:20 정부가 새로 들어설 때도 보면 개혁을 한다, 여러 가지 하는 것처럼 뭔가 사람들 의 마음을 수습을 해야 되고 또 자기 정치기반을 새로 다져야 되고 그러면 그런 시간들 이 필요하고 그런 과정에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는 그런 정책이 필요한 거고. 그러나 자기 권력이 확실하게 다져질 때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여러 가지를 하고 감정적으로 도 하고 그리고 사실 독재 권력자가 독재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그런 표시들을 그렇게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 표시를 안 하면 독재 권력을 가지고 있는 거나 안 가지고 있 는 거나 다 똑같은 거니까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은 거겠죠. 59:11)

 

*인서트-15. 테입<236> 이종봉

(55:39 최충헌이 모았던 재산을 환수한다든지 이런 입장을 보였었는데. 이와 같은 부분 들은 결국 무신권력자가 처음에 정치적 집권을 위한 명분, 이데올로기를 확보하기 위한 그와 같은 차원에서 취해졌던 일들이지 그 자신들이 정말 청렴하고 결백한 그와 같은 입 장에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면 최우 같은 경우에도 실질 적으로 토지탈점이라든지 많은 일들을 저지르고 있거든요. 56:23)

 

<해설> 하기야 최충헌 생존 시에도 그의 아들 최우는 모름지기 제2인자로서 아버지와 함께 권력을 남용하여 뇌물을 챙기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부패행각을 저질렀던 전력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던 초기에, 그럴듯한 몇 가지 조치들을 반짝 취했던 것은, 집권 초기의 이미지 제고 차원이었지 장차 개혁정치의 비전을 펼쳐 보인 것은 아니었다,이렇게 결론지어도 무리가 아닐 듯합니다.

그런데 경기대 이재범 교수는 최우가 이처럼 거리낌 없이 조정의 대소사를 전횡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독재자로서의 탁월한 능 력이 뒷받침되었다고 분석합니다. 최우는 이전의 무인 집정자들과는 달리 문신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죠.

 

*인서트-16. 테입<235> 이재범

(45:19 정방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문인들도 두었고 또 서방이라고 하는 것을 두어서 그 곳에서 많은 문신들과 교류를 가졌던 것이 바로 최우입니다. 최우는 상당히 문학에도 뛰 어난 면을 보여서 우리나라의 신품사현, 붓글씨를 가장 잘 썼던 네 사람을 얘기하자면 그 가운데 최우가 손꼽힐 정도로 문무를 다 장악을 했던 그러한 인물이고 상당히 자신의 집권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그런 무려에 자신의 역량을 포함을 해서 실제로 국왕의 존재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그런 탁월한 정치력이 인물로 보아야 할 것입 니다. 46:09)

 

<해설> 신품사현이라는 얘기가 나왔는데요,

낭독자 신품사현(神品四賢)이란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붓글씨를 가장 잘 썼던 네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 네 사람은 신라의 김생(金生)과 고려시대의 유신(柳伸), 탄연(坦然), 그리고 최우(崔瑀)를 말한다.

이들 신품사현의 글씨 중에서 유신이 썼던 글씨로는 순천 송광 사에 남아있는 보조국사비문(普照國師碑文)이 있으며, 현재 춘천에 있는 문수원기(文殊院記)는 탄현의 글씨이다.

 

<해설> 비록 현재로서는 최우의 필적을 확인할 수 없으나, 철권을 휘두른 무인의 이미지가 강한 독재자 최우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통틀 어서 붓글씨를 가장 잘 쓴 네 사람 중 하나였다니 좀 놀랍지 않습 니까. 그의 그러한 문인적인 기질이 무신들뿐만 아니라 문신들까지 장악하여 일인 독재 권력을 공고히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는 얘깁니 다.

<음악> (브릿지)

 

박인 대왕폐하, 신(臣) 박인, 임무 마치고 돌아왔사옵니다.

고종 오, 그래,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해설> 고종 15년 11월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박인이 1년 만에 돌아옵니 다.

고종 그래, 일본국과 화친을 맺는 일은 어찌 되었소?

박인 (걸어가서)여기 일본국 왕으로부터 화친 협력하자는 내용의 첩문을 받아 왔사옵니다.

고종 오, 그래요. 이제 왜인들이 우리 남해안의 민가를 침탈할 걱정은 아 니 해도 되겠구려, 허허허.

낭독자 최우는 일본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화친첩문을 받아서 돌아온 박인 에게 은병 다섯 개, 비단 60필, 베5백 필, 쌀과 콩 50섬, 그리고 말 안장을 주어 포상하였다.

 

<해설> 박인은 국가를 대표하여 이웃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인지라 상 을 주더라도 임금이 주어야 할 터인데 고종을 제쳐두고 최우가 포 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종 15년 12월, 조정의 고위 관리에 대한 인사가 이루어집 니다.

고종 최보순을 판이부사로 임명하고, 김취려를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 로 임명할 것이며, 최우에게는 오대 진국공신을 올려줄 것이오. 또 한 공천원과 최정분을 참지정사로, 최종준을 지문하성사 이부상서 로, 김중귀를 지추밀원사로, 진식을 추밀원부사 어사대부로, 그리고 사광보와 유승단을 추밀원 부사에 임명 할 것이니 맡은바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기 바라오.

 

<해설> 물론 고종을 통해서 임명장이 주어졌지만 인사의 실질적을 내용을 주관한 사람은 최우였겠지요. 이전의 무신집정자 같으면 요직에 등 용된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서 그 정권의 성격과 앞으로의 향배를 가늠하는 일이 가능했으나, 이 무렵의 최우 정권의 경우, 문신과 무 신들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하고 었었기 때문에 ‘어느 자리에 누가 임명되었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길을 찾아서] 진도 삼별초의 길 - '또 하나의 고려' 건국한 삼별초 용장산성 길에서 다시 태어나다

군청선 역사공원 조성 계획…월 탐방객 수천 명에 달해

▲ 궁궐터가 층층이 있는 용장산성과 그 뒤로 능선을 따라 성곽이 둘러싸고 있다. 바로 아래로는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

‘진도, 또 하나의 고려(高麗)’라는 다큐멘터리를 몇 년 전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적이 있다.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자 이에 굴복하지 않고 따로 국가를 만들어 몽고에 항거해 장렬히 전사하며 우리 민족 최초의 자주적 저항운동을 벌인 삼별초의 활약을 조명한 내용이었다. 삼별초라고 하면 강화도에서 40년 가까이 저항한 사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진도에서 웬 또 하나의 고려일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굵고 짧게’ 활약한 그들의 흔적을 용장산성의 길, 즉 삼별초의 길을 따라 살펴보면서 장렬하게 산화한 삼별초의 삶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산물이다. 고려 조정을 장악한 최충헌과 그의 아들 최우가 무인정권 세력을 공고히 다지고 반대파들을 색출하기 위해 수도의 치안 유지란 명분으로 창설한 군사조직이자 특수부대가 바로 삼별초였다. 처음엔 야별초란 이름으로 야간순찰과 같은 공적인 임무를 동시에 수행했다.

야별초가 지방에도 파견되면서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좌·우별초로 나뉘었다. 여기에 몽고군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도망 온 자들로 신의군이 구성되면서 이들과 합쳐 삼별초라 불리게 됐다. 삼별초의 출신 성분부터 몽고에 저항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무인정권의 각별한 배려 속에 삼별초 조직은 더욱 커졌고, 무인정권에 대한 충성심도 남달랐다.

삼별초는 무인정권 3대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다. 삼별초를 창설한 최충헌과 그의 아들 최우, 또 그의 아들 최항. 이렇게 3대 동안 무인정권의 권력유지를 위한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했다. 3대째 최항으로 인해 이후 삼별초가 진도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결정적 단초가 마련된다.

고려 원종 11년(1270) 6월 1일,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대몽항쟁을 포기하고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 삼별초는 반(反)개경정부·반몽고 노선을 표방하고 거사에 나섰다. 어쩌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저항이었는지 모른다. 나라는 몽고에 넘어갔고, 그들을 보호해줄 무인정권도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종결은 결국 그들의 주요 임무가 사라지는 것이고, 강화에서 항몽전쟁을 주도한 그들은 항복 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내년부터 용장산성 궁궐 순차적 복원

▲ 1 궁궐터에서 용장산성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조금 가파르지만 계단으로 잘 닦아 놓았다. 중간 평야지대에 용장산성 홍보관이 있다. 2 용장산성 성곽 위로 억새 군락지가 있다.

결국 그들은 삼별초 해산 조치에 맞서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 배중손·노영희 등이 삼별초 군대와 재물을 1000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게 1270년 6월 3일의 일이다. 두 달 남짓 걸려 진도에 도착한 시점이 8월 19일. 진도는 그들의 새로운 거점이 되었다. <고려사> ‘반역 배중손전’에 삼별초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하고 있다.

“배중손이 야별초 지유(脂諭) 노영희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고는,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외치기를 ‘몽고 군사가 크게 이르러 주민을 마구 죽여대니, 무릇 나라에 힘이 되고자 하는 이는 모두 격구장으로 모이라’고 했다. 잠깐 동안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들었는데, 혹은 달아나거나 사방으로 흩어졌고, 다투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배중손은 고려 정부에서 보자면 반역지였다. 몽고에 항복하기를 거역하고 정부에 저항한 잔당 세력인 셈이다. 그러나 배중손의 입장에서 보자면 삼별초의 살길은 저항뿐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우리 민족 자주와 자존이라는 명분으로 외세에 저항하다 목숨을 버리는 길이 가장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고려 조정의 반역 배중손 장군은 그렇게 진도에 새로운 세력을 구축했다.

삼별초가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선택한 몇 가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만큼 제주도와 같이 본토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되었다.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거점을 정해 지속적으로 세력을 과시해야만 했다. 동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지리적 위치에 있어야 했다.

▲ 용장산성 정상에서 연륙교인 진도대교가 있는 명량해협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앞바다 위에 흰 종이처럼 떠 있는 게 조력발전소다.

본토와 진도 사이의 명량해협, 즉 울돌목은 조류의 유속이 시속 11㎞로 동양에서 가장 빠른 곳으로 꼽힌다. 오죽했으면 물 흐르는 소리가 노루가 우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노루목이라고도 불렸을까. 이순신 장군이 배 13척으로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 왜군의 배 수십 척을 무찌른 ‘3대 대첩’ 중 하나가 그곳이다. 해전에 약한 몽고군이 이곳을 통해 침입하지 못할 것이란 심리적 전술도 작용했다.

둘째, 진도는 <동국여지승람>에서 옥주(沃州)로 기록할 정도로 비옥한 농토와 넓은 평야가 있어 섬인데도 농업이 활발했다. 해산물도 풍부했다. 이는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서 장기간 항전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성곽 700m 복원하면서 등산로도 조성

▲ (좌)용장산성 터에 쌓여 있는 12세기 전후의 기와 조각들. (우)용장산성 주춧돌도 간혹 눈에 띈다.

셋째, 연안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에서 거둔 조곡의 수송선이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조곡선을 탈취하면서 삼별초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개경 정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이중효과를 거둘 수 있는 지역이었다.

마지막으로 진도는 원래 무인정권의 기반이기도 했다. 최씨 무인정권의 3대 집정인 최충헌의 손자이자 최우의 아들인 최항이 승려로 출가해서 주지로 있던 절이 진도에 있었다. 최항은 승려가 되어 만전이란 법명으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권세를 누리며 횡포를 자행했다. 주민들의 원성이 너무 자자해서 조정에서 만전이 있는 절을 해체하라고 명할 정도였다. 절 이름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아마 용장사일 가능성이 높고, 그 용장사의 규모가 방대해서 삼별초군이 진도로 내려갔을 때 그 절을 진지로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서는 삼별초가 진도에 있었던 불과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그렇게 큰 용장산성을 축성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별초는 결과적으로 무인정권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런 군대였다. 

용장산성은 성 안의 면적이 총 89만㎡(258만 평)이고, 둘레는 총 12.85㎞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곳을 근거로 삼별초는 급속히 세력을 확산해나갔다. 나주, 전주, 장흥, 마산, 김해, 동래, 밀양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11월 3일엔 제주를 함락했다. 가는 곳마다 백성의 호응을 얻으며 쉽게 지지를 이끌어냈다.

▲ 복원된 700m의 용장산성 길을 따라 걷고 있다.
무인정권을 보위하는 무력집단으로 출발했고, 농민봉기를 억압하는 데 앞장섰던 그들이 어떻게 농민과 지방세력들의 지지를 쉽게 이끌어냈는가에 대한 의문점도 남는다. 그들의 성향 자체만으로 볼 때 결코 농민들의 지지를 받을 세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리 나왔다. 추측컨대 몽고에 대한 반감이 삼별초의 기존 활동에 대한 반감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감과 자주성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학자들의 정확한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삼별초는 왕온을 황제로 옹립하고 몽고, 즉 원에 복속된 고려의 개경 정부보다 더 자주적인 정부임을 표방했다. 이것은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불과 수십 년 전에 일본에서 발견된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는 당시 일본 조정에서 작성한 메모에 가까운 외교문서로 ‘고려에서 보내온 의심 나는 몇 가지 사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1268년과 1271년에 고려에서 온 두 개의 외교문서가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한다. 1268년 개경 정부에서 보낸 문서는 일본도 원나라에 항복해서 예를 갖추고, 그렇지 않을 땐 정벌에 나설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반면 1271년의 경우 고려가 강화도를 버리고 진도로 천도했으며, 원나라, 즉 몽고가 일본을 침략하려고 하니 사전에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병력을 진도로 지원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게 바로 ‘진도, 또 하나의 고려’라고 하는 주요 근거가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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