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연구
영국의 역사
8-12 세기 영국 역사 연표 (701-1200)
------------------------------------------------------------------------------- 1066년 노르만디 공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마지막 침공을 지휘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 랜 드 인을 물리치고, 노르만디 왕조의 첫 왕 윌리엄됨. 1154-1189년 플랜트재닛 왕조의 첫 왕 헨리 2세 통치. 법률의 개혁과 더불어 국민이 왕궁에 들어갈 수 있게 되다. 이 궁중 재판의 전례에서 영국의 관체제가 발전. 교회의 권한을 축소시 키려는 헨리의 시도에 토마스 아 베켓이 켄터베리 성 1170년에 헨리의 기사 네명에게 암살. 이것이 로마 교회에 대한 왕권의 반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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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성립 이후부터 현재의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에 이르는 브리튼 제도의 역사이다. 현재의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이루어져 있다. 1707년 연합법에 의해 웨일즈 및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으며, 1800년 연합법으로 아일랜드 왕국이 연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되었다. 이후 1922년,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결과 아일랜드 공화국이 독립하여 북아일랜드만이 영국에 속하게 됨으로써 현재의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되었다.[1] 약어는 United Kingdom 또는 UK가 흔히 쓰이며 대한민국에서는 흔히 영국으로 표기한다. 목차연합 왕국의 성립과 18세기의 영국[원본 편집]1707년 연합법의 공표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연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되던 당시에 웨일스는 이미 1535년 웨일스 법에 의해 잉글랜드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아일랜드 역시 1536년 잉글랜드에 의해 다시 정복되어 아일랜드 왕국의 군주를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가 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만이 별개의 왕국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면서 두 왕국이 한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명예혁명과 재커바이트의 반란[원본 편집]제임스 2세의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전제 정치는 결국 영국 의회의 반발을 가져왔다. 1688년 네덜란드의 총독이자 메리 공주의 남편이었던 오렌지공 윌리엄이 영국 의회의 지원을 받아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는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이 후 영국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게 된다.[2] 그러나, 스튜어트 왕가의 본향인 스코틀랜드와 가톨릭 교도가 다수인 아일랜드에서는 스튜어트 왕가의 복귀를 요구하는 재커바이트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1688년과 1745년에 두 차례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으나 결국 1746년 완전히 진압당하였다. 대영 제국[원본 편집]![]() 1756년,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유럽, 북아메리카, 인도, 서인도 제도의 여러 나라와 식민지가 참여한 최초의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 176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와 인도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3] 이 후 영국은 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지 건설을 지속하게 된다.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생하였으며 그 결과 미국의 독립으로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게 되었으나,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정책은 계속 이어졌다.[4] 1770년 제임스 쿡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였으며 그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식민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671년 무굴 제국으로부터 인도에서의 통상권을 획득하였다. 그 후 프랑스의 프랑스 동인도 회사와 아시아 지역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세 차례의 카르나티크 전쟁의 결과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인도는 점차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803년 경 영국은 인도의 거의 전역을 식민 통치하였다. 경제의 발전[원본 편집]18세기 중엽 영국에서는 대량 생산을 위한 공장의 건설이 이루어지는 등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석탄, 철강, 방직과 같은 새로운 산업은 영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1765년 제임스 와트는 증기 기관을 발명하였으며 이후 대량 생산이 도입되어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데이비드 흄, 데이비드 리카르도, 애덤 스미스와 같은 많은 고전경제학 학자들이 경제학 이론의 기초를 닦았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5][6] 그러나,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은 엔클로저 운동에 의한 농민 계층의 몰락과 불결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하는 빈민층의 확대, 아동 노동, 공해와 같은 여러가지 문제도 함께 가져왔다.[7]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과 같이 기계를 파괴하는 과격한 노동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8] 19세기[원본 편집]![]() 1800년 연합법과 아일랜드 합병[원본 편집]연합왕국으로서 영국의 두 번째 단계는 1800년 연합법을 통해 1801년 1월 1일부터 아일랜드 왕국을 연합왕국의 일부로서 합병한 것이었다. 이로써 영국의 정식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되었으며, 이후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결과 아일랜드가 독립할 때까지 이 체제가 지속되었다. 아일랜드 왕국의 합병은 1170년 노르만 왕조이래 지속되어 온 잉글랜드의 왕의 아일랜드 침공 및 정복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노르만 왕조의 정복 후 잉글랜드의 왕은 아일랜드를 통치하였으며, 새로운 연합왕국이 된 영국의 국왕 역시 이미 17세기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개신교 교도를 얼스터 지역에 이주시켰다. 이들 개신교도들은 아일랜드 주민의 로마 가톨릭 신앙뿐 아니라 아일랜드 고유의 문화와 적잖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1800년 연합법에 의한 아일랜드 합병은 정치, 법률적으로도 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 지방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1641년 아일랜드 봉기 이후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아일랜드 의회에 대한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하였다. 아일랜드의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개신교 이주민들은 종종 개신교 패권주의로 불렸다. 18세기에 이르러서도 가톨릭 교도에 대한 정치 참여의 금지는 지속되었으며 영국 성공회의 신자가 아닌 이른바 "비국교도" 전체로 정치 참여 금지가 확대되었다.[9]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의 이러한 조치에 맞서 아일랜드 단결 협회등을 만들어 저항하였으며 결국 1798년 아일랜드 봉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1798년 아일랜드 봉기는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미국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에 고무받은 것이었으나 영국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공회 교도만으로 이루어진 아일랜드 의회는 영국과의 합병에 동의하고 영국은 1800년 연합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를 환영하는 아일랜드 주민은 극소수였다.[10] 나폴레옹 전쟁[원본 편집]1806년 11월 21일 프랑스 제국의 통치자였던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선포하고 영국의 무역을 봉쇄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후 대륙봉쇄령을 중심으로 한 나폴레옹 전쟁이 발생하자 영국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의 중심국가가 되었고 수차례의 전쟁이 벌어졌다. 1815년 영국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7년 전쟁 이후 두 번째로 유럽 전역과 세계 각지를 무대로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원본 편집]빅토리아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간인 1837년부터 1901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의 영국은 산업 혁명을 거쳐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세계 곳곳을 자국의 식민지로 점령하여 대영 제국의 절정기를 맞게 된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흔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다. 한편, 1832년 선거법의 개정으로 투표권이 중산층에게까지 확대되었으나 여전히 투표권을 획득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난다. 아편 전쟁[원본 편집]![]() ![]() 1840년, 제1차 아편 전쟁 19세기 영국의 주요 무역 중 하나는 청나라에 대한 아편 판매였으며, 아편 금수 조치를 단행한 청나라와 두차례에 걸친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11] 아편 전쟁의 결과 영국은 청나라와 난징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898년 홍콩을 포함한 신지에를 99년간 할양받게 된다.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중국에 반환되었다. 20세기 초반[원본 편집]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함으로써 빅토리아 시대 역시 막을 내렸다. 20세기 초, 대영 제국은 여전히 세계 제 1의 제국으로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1921년 당시에는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넘기는 4억 5천8백만 명 이상, 지구 육지 면적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670만 제곱 킬로미터의 영토를 차지했다.[12] 20세기 초반은 두차례의 세계대전이 있었던 전쟁의 시대였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이 있었으며 이 전쟁에서 영국은 사상 최초의 국가 총력전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역사상 최초로 공중전과 탱크, 화학 무기가 등장한 전쟁이었다. 1922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독립함으로써 영국의 정식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이 된다. 영국은 1939년에서 1945년에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에 승리하였으나 그 피해 또한 극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원본 편집]![]()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민족주의, 제국주의와 같은 정치 경제적 갈등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영국은 처음부터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벨기에의 중립국 지위보장에 대한 독일 제국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선전포고와 함께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 기관총, 화학무기, 야간 폭격, 탱크 등 이전의 전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참혹한 전쟁이었으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17년에 이르러 동맹국은 차례 차례 항복하기 시작하였고 1918년 독일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전쟁 이후 영국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요르단과 잔지바르를 자국의 식민지로 편입하였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라크를 식민지로 편입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를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시켜 보호국으로 삼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27년, 이라크는 1932년에 독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립에 대한 약속 때문에 영국을 도왔던 인도는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독립운동이 거세졌다. 아일랜드 독립[원본 편집]![]() 1918년 아일랜드는 영국 의회와 분리된 별도의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1919년 아일랜드 의회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이로 인해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결과 1921년 아일랜드는 대영 제국 하에 자치를 인정 받는 조건으로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약은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아일랜드 내부의 요구와 충돌하였고 결국 아일랜드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던 아일랜드 공화국군, 옛 IRA는 패배하였으며 아일랜드는 영국내 자치국으로 남게된다. 1949년 아일랜드는 영연방을 탈퇴하여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으며, 이후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신 IRA가 결성되었으며 1969년 PIRA가 분리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PIRA는 2005년 무장 투쟁의 중단을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원본 편집]![]() 1939년 영국과 영국령 인도와 같은 영국의 식민지들은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1년에는 제국의 아시아 식민지를 침공한 일본에도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5년 추축국 세력은 연합군 세력에게 패배하였고, 전쟁은 끝이 났다. 20세기 후반 이후[원본 편집]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인도를 비롯한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하였다. 그러나,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많은 나라들이 여전히 영연방에 속해 있다. 1950년대 집권 노동당은 복지 국가를 내세워 대대적인 사회 복지 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 복지 정책은 흔히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으로 대변된다. 1980년대 집권에 성공한 마거릿 대처의 보수정권은 사회 복지를 대폭 후퇴시키고 많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등 대처리즘에 입각한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정책은 신자유주의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식민지의 독립과 영연방[원본 편집]![]() 1947년 인도, 파키스탄 등 다른 문화권의 나라들이 독립하여 영연방에 가입함으로써 영연방은 문화적 다원주의로의 체제 개혁이 불가피해졌다. 1950년 영연방 총회는 성명을 발표하고 '영국 국왕은 영연방의 수장(首長)이며 자유로운 결합의 상징'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의 서약은 사실상 필요 없게 되었다. 2003년 짐바브웨의 탈퇴로 2006년 기준으로 총 53개의 독립국가(52개의 정회원, 1개국은 특별회원)가 회원국이다. 최근 상황[원본 편집]1945년에 영국에서의 복지 국가와 세계 최초이면서 가장 광범위한 의료 제도의 출현을, 경제 복구의 요구가 영국 연방 도처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민족 국가 영국을 만드는 동안 보여주었다. 전후 영국의 정치적 역할의 한계가 1956년 수에즈 사태에서 확실해짐에 따라 영어의 국제적 통용은, 동시에 1960년대에 영국의 대중 문화는 외국에까지 퍼지는 동안, 영문학이나 영국 문화에 지속적인 충격을 주었음을 뜻한다. 1970년대에 국제 경제의 하향세 이후 경기 침체와 산업 쟁의의 시대에 뒤이어 1980년대는 마거릿 대처 수상이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전후 정치적 경제적인 전환점을 보여주었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지지자는 그녀가 경제 부흥을 이루었다고 하고, 비판자는 그녀 때문에 사회불균형이 더 커졌다고 말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나아가 이러한 경향이 토니 블레어의 지도 아래 대부분 계속되었다. 영국은 1973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 연합의 구성원이었다. 오늘날 노동당 내각의 태도는 유럽연합과의 통합으로,[13] 보수당은 몇몇 권리와 자격의 반환으로[14] 그리고 자유민주당은 현재 정책의 지지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16년 영국 유럽 연합 회원국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브렉시트가 결정되면서 영국은 새로운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각주[원본 편집]
------------------------------------------------------------------------------- 13-14 세기 영국 역사 연표 (1201-1400) -------------------------------------------------------------------------------- 1215년 1249-1284년 1264년 1314년 1348- 1349년 -------------------------------------------------------------------------------- 1624-30 스페인과의 전쟁. 1646 왕이 스코틀랜드에 항복; 주교제와 국교의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폐지되고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확립. 1663 신교 자유를 부여하려는 왕의 첫 번째 시도 실패. 1944년
선사시대 선사시대의 영국에 관해서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브리튼섬이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던 5만 년 전에 이미 혈거수렵(穴居狩獵)의 종족이 살았으나, 빙하의 확대와 함께 떠난 것으로 보인다. 영국해협의 함몰로 대륙과 떨어지고 난 뒤 갈리아 ·발트해 연안 등의 지방에서 새 종족이 건너왔으며, 이어 신석기시대에 이베리아인 등 비(非)아리안계 인종이 이주하여 수렵 ·목축과 원시적인 농경에 종사하였다. 그후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 초기에 걸쳐 대륙의 켈트 제족이 침입하여 선주민을 제압하고 정착하였으며, 북부에 거주한 게일인보다 남부에 거주한 브리튼인이 진보한 문화를 가졌다. 그들은 물고기와 짐승고기 외에 밀 ·보리 ·귀리 등을 먹었으며, 짐승가죽 외에 삼[麻]과 양모의 직물을 착용하였다. 또 다신교를 믿고, 소부족으로 갈라져 서로 독립해 있었으며, 딘 또는 둔이라고 하는 방벽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런던(London)이라는 지명은 소택지의 성을 뜻하는 켈트어 린딘(Lyndyn)에 기인하며, 나중에 로마인이 이를 라틴어로 론디니움(Londinium)이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2 로마인의 점령 영국 브리튼섬의 켈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로마의 지배였다. 갈리아 지사(知事)로서 프랑스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의 종족이 브리튼인의 지지를 받아 저항했기 때문에 BC 55년과 BC 54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이 섬을 원정하였다. 브리튼의 부족들은 연합하여 대항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를 격파하고 템스강 주변의 일부를 제압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후 본국의 정치 때문에 3개월 만에 떠났으며, 로마인의 본격적인 공격은 약 1세기 후까지 연기되었다. 제정시대(帝政時代)의 클라우디우스는 43년 원정군을 일으켰고, 80년대에는 로마 군대가 스코틀랜드까지 침공하였다. 그후 로마인은 타인 하구(河口)에서 솔웨이만(灣)까지 브리튼섬을 동서로 횡단하는 장성을 구축하였으며, 현재의 잉글랜드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을 약 4세기 동안 지배하였고, 런던이 상공업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의 유적은 여러 군데에 있는데, 런던 등지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바스에서 발굴된 온천이 특히 유명하다. 랭커스터 ·맨체스터 ·윈체스터 ·체스터 ·레스터 ·글로스터 ·우스터 등의 지명의 어미는 당시의 병영지(兵營地)를 나타내는 라틴어의 성(城:Castra)에서 유래한다. 당시 켈트인의 비극으로는 이케니 부족의 여왕 보아디케아의 반란과 참패의 비화가 유명하다. 3 앵글로색슨 영국 영국은 4세기 후반까지 픽트인 ·스코트인 등 북방계 켈트인의 침입과 함께 게르만인의 침입이 시작되어 로마인의 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하였는데, 그후에도 색슨 ·앵글 ·주트 등의 게르만인의 침입이 잇따랐으며 대륙에서의 게르만의 민족이동, 특히 고트인의 로마침입에 따라 5세기에 로마의 군대가 철수하자 로마의 지배는 완전히 끝났다. 침입한 게르만인은 원주민인 브리튼인과 싸웠으며, 6세기 말에는 현재의 잉글랜드에서 북부와 동부를 앵글인, 템스강 이남을 색슨인, 켄트주(州)와 와이트섬을 주트인이 차지하고, 켄트 ·에식스 ·서식스 ·이스트앵글리어 ·마시어 ·웨식스 ·노섬브리어의 7개 왕국을 건설하였다. 로마시대의 그리스도교는 게르만적 다신교(多神敎)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7왕국 시대에 성(聖)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다시 도입되었다. 생활의 중심은 농촌으로 옮겨지고, 로마시대의 도시는 일부를 제외하고 폐기되었다. 주민은 장로 ·자유민 ·노예로 나뉘었고, 노예는 죄인 또는 채무불이행자였다. 장로의 권력은 큰 것이었으며, 국왕을 세워도 절대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후일의 마그나 카르타는 이 전통에 기인한다. 부족은 혈족공동체였으며, 가장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공산생활(共産生活)을 하였다. 사우샘프턴(Southampton) ·버밍엄(Birmingham) ·햄스테드(Hampstead) 등의 지명의 어미는 가족이 사는 곳을 의미하며, stead는 독일어의 Staad(도시), ham은 독일어의 Heim(집)과 어원이 같다. 7왕국은 약간의 성쇠를 거쳐 9세기 전반에는 웨식스왕 에그버트에 의해 통일되어 잉글랜드 왕국이 성립하였으며, 전 잉글랜드가 그 지배에 복종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란 앵글인의 토지라는 의미이다. 8세기 말부터 시작된 북방 데인인의 침입은 9세기 중엽부터 규모를 더하였으며, 웨식스 지배하의 각 왕국 중 동쪽의 여러 나라는 데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에그버트의 손자 앨프레드와의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며, 그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 손자 에셀스탠은 각각 데인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전 잉글랜드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10세기 말부터 데인인은 조직적 ·국민적 침입을 시작하였으며, 11세기에는 웨식스왕 에셀레드 2세가 노르망디로 망명하고, 데인인 카누트왕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4 노르만 정복 영국의 카누트가 죽은 뒤 데인 왕조는 2대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후 에셀레드의 아들 에드워드 참회왕이 노르망디에서 돌아와 앵글로색슨 계통의 왕가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1066년 에드워드가 죽은 뒤 의동생 해럴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노르망디공(公) 기욤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진격해 왔으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군을 격파, 윌리엄 1세(정복왕)가 되었다. 이것이 영국사에서 말하는 노르만정복(Norman conquest)이다. 그는 대륙의 봉건제를 채택하였으며, 앵글로색슨인의 토지를 노르만 제후에게 봉지(封地)로서 나누어 주었다. 또 전 잉글랜드의 토지 ·인구 ·가옥 등을 기재한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을 작성하여 왕실재정의 기초를 굳히고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시작하였다. 둠즈데이란 그리스도교의 최후의 심판날을 의미하는데 이 장부의 기재사항이 최종적 권위라는 뜻에서 그렇게 명명하였다고 한다. 후일 지주와 지배계급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봉건적 억압을 ‘노르만의 멍에’라 하여 저주하고, 옛날의 앵글로색슨 사회를 이상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윌리엄 1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와 대립하여 교회에 대한 국왕의 관리권을 주장하고 주법정(州法廷)과 교회법정을 분리하는 등 왕권을 신장시켰다. 교회재판권을 둘러싼 헨리 2세와 대주교 토머스 베케트의 싸움, 또 후일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한 영국국교회(英國國敎會) 확립의 연원(淵源)도 여기에 있다. 헨리 1세가 죽은 뒤 즉위한 조카 스티븐과 딸 앙주 백작부인 마틸다 사이에는 왕위계승권이 계속되었는데, 스티븐이 죽은 후에는 결국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가 프랑스에서 와서 왕위에 올랐으며, 이에 플랜태저넷(앙주)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세력을 회복한 제후(諸侯)를 누르고, 재판제도의 정비, 관료제와 용병제(傭兵制)의 확립 등으로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으로 유명한 다음의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조카 존왕[失地王]은 헨리 2세 이래의 대륙 영토의 절반을 잃고 중세를 과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1215년에 러니미드에서 존왕에게 49개조로 된 마그나 카르타(Magna Charta:대헌장)에 서명하게 하고, 왕권을 제한하였다. 이 헌장은 봉건제후의 권력 확보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런던 이하의 자유시(自由市)의 특권을 인정하고 자유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적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의 아들 헨리 3세도 남은 대륙령(大陸領)을 상실하고 실정이 많았기 때문에, 귀족들은 주대표(州代表) 몽포르를 지도자로 내세워 반항하였으며, 그 밖에 시민대표도 포함시킨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의회의 기원이며, 3명의 에드워드왕 시대에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에드워드 3세 때 주와 도시의 대표가 왕에게 청원서를 내고 이를 귀족과 고위성직자가 심의하는 관행이 생겼으며, 상하 양원제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한편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대륙령을 잃었기 때문에 왕권을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려고 했는데, 웨일스는 곧 잉글랜드령이 되었으나 스코틀랜드는 1313년에 에드워드 2세군(軍)을 대파하여 독립을 확보하였다. 5 왕위계승시대 프랑스에서는 샤를 4세가 죽은 뒤 카페 왕조가 발루아 왕조로 바뀌었는데, 이에 영국은 카페가(家)의 혈통을 가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면서 133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1453년까지 계속된 백년전쟁의 발단이며, 왕위계승전인 동시에 사실은 일찍이 상실한 앙주령(領)을 회복하고 최대의 양모시장인 플랑드르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전반에는 영국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한때는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헨리 6세 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후로는 계속 패배하여, 마침내 칼레 외의 모든 대륙령을 상실하고 전쟁은 끝났다. 백년전쟁의 2년 후에는 국내의 왕위계승권을 두고 1455년부터 30년간 내전이 계속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의 아들인 랭커스터공(公)이 장남의 아들인 리처드 2세를 대신하여 즉위, 헨리 4세로서 랭커스터 왕조를 세운 이래로 그를 지지하는 랭커스터파와 에드워드 3세의 막내아들의 손자 요크공(公) 리처드를 옹립하는 요크파가 대립한 것이다. 이 전쟁은 양가의 문장(紋章)이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렀다. 리처드가 전사한 후 요크파가 승리하자 헨리 6세는 망명하고, 에드워드 4세가 요크왕조를 열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 때, 왕이 어린 것을 틈타서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가 왕과 그 동생을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에 올라 리처드 3세가 되었는데, 랭커스터가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인 웨일스의 튜더가(家)의 헨리가 리처드 3세를 격파하여 헨리 7세가 되고,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그 동안, 노르만 때문에 앵글로색슨적 자유를 박탈당하고 농노화(農奴化)된 농민의 지위는 14세기에 들어서부터 차츰 향상되고, 농민의 계층문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1348∼49년의 흑사병은 인구의 1/4 이상을 죽이고, 남은 농민의 지위를 높였다. 영주계급(領主階級)은 농업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억압을 강화하였으며, 이에 와트 타일러 등의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는 실패했으나 농민의 감소로 부역의 폐지와 지대(地代)의 인하, 영주직영지(領主直營地)의 대출(貸出) 등이 부득이했으며, 장원(莊園)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한편, 14세기에 영국의 무역은 양모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머천트 스테이플러스가 일종의 상인 길드로서 무역독점권을 가지고 왕실재정의 한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곧 스테이플러스의 규제에서 벗어난 모험상인의 활약이 뚜렷해졌으며, 15세기에 들어서자 모험상인회사가 등장하여, 모직물 무역의 독점권을 가지게 되었다. 6 절대왕정에서 시민혁명으로 영국에서 장미전쟁으로 귀족세력이 쇠퇴하자 헨리 7세는 귀족이 가신단(家臣團)을 거느리는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고, 향신(鄕紳)과 시민을 추밀원(樞密院)에 기용하였으며, 해운법을 제정하여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재정을 단단히 하는 등 절대주의 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리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영지를 몰수하였다. 그가 처형한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작품 《유토피아》가 양모가격의 등귀(騰貴)에 따른 인클로저운동과 함께 이들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밑에서 섭정(攝政)이 된 서머싯공(公)과 그의 실각 후의 워릭 백작은 카톨릭에 따르던 교지(敎旨) 내용마저 신교화함으로써 헨리의 사업을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사후에 즉위한 누이 메리는 교황과 화해하여 카톨릭으로 돌아갔으며, 수장령(首長令)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다. 메리의 사후에 즉위한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파의 반목에서 오는 정정(政情)의 곤란성, 특히 몰수 수도원령을 차지한 신흥계급의 반감에 대처하기 위하여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정책을 부활시켰으며, 새로이 수장령과 통일령을 제정하고(1559) 신앙개조(信仰箇條)를 정비하여 영국국교회를 명실공히 확립하였다. 여왕은 가신단의 해체, 수도원령의 몰수, 인클로저운동 등으로 생긴 빈민대책으로서의 구빈법의 제정, 도제조례(徒弟條例)의 제정 등 국내정책을 충실히 하는 한편 식민사업도 추진하였으며, 러시아회사 ·레반트회사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설정하는 등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을 밀어나가고, 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하여 절대왕정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여왕은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고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1605년의 가이 포크스 등 카톨릭 교도의 화약음모사건을 계기로 카톨릭을 탄압하였으며, 엘리자베스시대부터 세력을 키워온 칼뱅파(派) 청교도도 박해하였다.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제임스의 대립은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1628년 의회가 공채(公債)나 조세(租稅)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 함부로 백성을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청원을 통과시키자 왕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왕은 재원조달을 위해 1640년에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하자 곧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단기의회이다. 같은 해에 소집된 장기의회에서는 왕과 의회의 반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1642년부터는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국내전쟁이 일어났다. 이 내전은 1647년에 이르러 의회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는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결속하고 각지의 왕당파의 지지를 얻어 다시 국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내전은 독립파와 평등파의 승리로 끝나 1649년 찰스는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하였다. 이 청교도 혁명으로 상원은 폐지되고, 장로파와 토지배분을 요구하는 빈농·군인·직인 등 평등파도 탄압되었다. 크롬웰의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해운법에 의한 네덜란드의 제해권에 대한 도전, 에스파냐 함대의 타파 등 대외정책에서는 성공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엄격한 종교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그가 죽자 1660년 의회는 신교의 자유,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의 존중을 브레다 선언에서 맹세한 선왕의 아들 찰스를 망명처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이고 왕정을 부활시켰다. 새 의회는 소수의 장로파와 다수의 왕당파로 이루어졌으며, 다수파는 국교도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심사율(審査律)의 제정을 비롯하여 국교주의의 재건에 주력하였으나,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은 찰스 2세와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이윽고 의회는 카톨릭 교도인 왕제(王弟)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휘그와 토리의 두 파로 분열·항쟁하였는데, 찰스가 죽자 신왕 제임스 2세는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뿐만 아니라 토리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여왕과 왕으로 만들었다(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의회 내 국왕을 원칙으로 하는 명예혁명이 성립하였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장전(權利章典)이 이듬해 1689년에 의회를 통과하였으며, 그때부터 이는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7 정치혁명에서 산업혁명으로 영국의 정치혁명의 시대는 끝나고,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으로 복위(復位)를 꾀하자 1690년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전비조달 방법으로 1692년에는 국채제도가 시작되었으며, 1694년에는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다. 또 전비재원·화폐개주(貨幣改鑄)·무역차액·법정이자율 등의 문제를 두고 중상주의 논객들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윌리엄 치세의 말기인 1702년부터 의매(義妹) 앤의 치세인 1714년까지의 에스파냐 계승전쟁의 결과 영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허드슨만(灣) 지방·지브롤터·미노르카 등을 획득하였으며, 절대왕정 이래의 식민지체제를 확대하여 국내 상공업자의 이익을 증진하였다. 또 그 동안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합동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윌리엄과 앤 시대에 휘그와 토리는 교대로 정권을 잡았으나, 앤이 죽은 뒤 독일의 하노버가(家)에서 즉위한 조지 1세와 그의 아들 조지 2세의 치세는 휘그의 전성기였으며, 특히 1721∼1742년의 월폴 정권과 1756∼1762년의 대(大)피트 정권은 그 대표이다. 월폴은 책임내각제를 확립하였으며, 토리와도 협조하여 남해포말회사(南海泡沫會社) 사건 후의 경제재건에 성공하였다. 피트는 7년전쟁에서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하였으며, 1763년의 강화로 캐나다, 미시시피 동쪽을 영유하는 영국 제국의 길을 열었다. 1760∼1820년의 조지 3세 재위기간에는 토리 정권이 계속되었는데, 이 시대는 산업혁명으로 영국 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산업의 전분야가 일변하였다. J.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R.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 S.크롬프턴의 뮬 방적기, E.카트라이트의 역직기(力織機) 등이 잇따라 발명된 데다 J.와트의 개량 증기기관도 가세하여 면공업의 비약적 발전이 달성되었다. 또한 새 기술은 제철·채탄에도 파급하였고, 나중에는 철도부설에까지 이르렀다. 농촌에서도 제2차 인클로저운동, 비료개량, 탈곡기의 보급 등에 따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 동안 농촌의 탈곡기 파괴 운동과 도시의 방직기 파괴 운동 등이 있었으나, 이러한 반항도 자본주의의 진전을 막지 못하였다. 사회과학면에서도 J.벤담의 정치학, A.스미스, D.리카도의 경제학 등 자유주의 사상이 중상주의를 대신하여 새시대의 요청에 따랐다. 프랑스가 18세기 말의 정치혁명으로 기도한 사회를, 영국은 경제혁명에 의해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1832년의 선거법 개정, 1846년의 곡물법 폐지, 1849년의 해운법 폐지 등은 모두 산업자본의 이익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산업자본의 발전은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단결도 불가피하였다. 1799년의 단결금지법, 1819년의 피털루사건 후에 있었던 6법 등의 탄압 입법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1837년의 공장법, 1847년의 10시간법 등 보호입법이 실현되었다. 노동조합의 결성도 진행되어 1834년에는 전국 노동조합대연합이 만들어졌다. 매년선거·비밀투표·보통선거 등의 요구를 내건 차티스트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걸쳐 대청원운동(大請願運動)을 벌였는데 그 결과, 선거법은 1867년과 1884년의 개정을 거쳐 소시민과 노동자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조지 3세 시대의 영국의 발전은 조지 4세, 윌리엄 4세 시대를 거쳐 1837~1901년에 이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국내적으로는 글래드스턴의 자유당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등 2대 정당간의 정권교체에 의한 전형적 의회정치가 행해지고, 선거법 개정과 1871년의 노동조합법 제정 외에 교육·군사·사법 제도의 개정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백인식민지의 자치령화를 실현시키면서도 한쪽에서는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아편전쟁과 애로호(號) 사건을 계기로 중국시장에도 진출하였으며, 기타 수에즈운하를 매입하고 이집트를 보호령화하는 등, 영국 제국주의를 발전시켰다. 8 대영제국 붕괴 영국의 제국주의적 발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독일과 미국 등 후진국의 세계시장 진출과 더불어 1873년에는 공황과 불황이 잇따라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수출은 감퇴하고, 실업인구는 증대하였다. 또 숙련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자 비숙련노동자의 조직과 사회주의운동이 고개를 들었다. 1884년에는 쇼와 웹 등의 페비언 협회, 모리스와 하이드맨 등의 사회민주연맹이 결성되었으며, 1893년에는 번즈와 하디 등의 독립노동당이 형성되었다. 1900년에는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단체의 대표들에 의한 노동자선거위원회가 실현되어 1906년에 노동당이라 개칭되었으며, 그 해 선거에서 29명의 의원을 당선시켰다. 자유당 내각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노동쟁의법 ·노인연금법 ·국민보험법 등의 사회정책 입법을 하였으며, 특히 1908년의 재무장관 로이드 조지의 예산안은 대토지 소유에 대한 중세(重稅)를 사회정책의 재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충격을 주었다. 이 법안은 하원을 통과한 후 상원에서 부결되었으며, 자유당 정부는 1911년 상원의 권한을 크게 제한하는 국회법을 성립시켰다. 독일의 확장정책으로 지위를 위협받은 영국은 프랑스·러시아와 손잡고 대항하였으나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17년 독일의 잠수함작전과 러시아혁명으로 인한 러시아의 연합국 이탈 때문에 영국은 한때 궁지에 몰렸으나, 참전한 미국과의 협력으로 1918년 독일에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미국과 자치령 등의 지위가 향상되고, 상대적으로 영국의 지위가 저하되었다. 특히 1931년의 웨스트민스터 조례(條例)는 본국 의회의 입법이 자치령의 동의 없이는 자치령에 적용되지 않음을 승인하였으며, 이에 대영제국은 사실상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노동당은 전후의 불황을 배경으로 착실한 약진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의 선거에서는 142명의 당선자를 내어 보수 ·자유 양대 정당의 대립을 무너뜨렸다. 노동당은 1923년에는 191명의 의원을 확보, 1924년에는 처음으로 소수당이면서도 노동당 단독내각을 성립시켰다. 1926년에는 보수당 정부하의 노동자 총파업이 패배하여 총파업은 불법화되었으나, 1928년에는 여성참정권이 확대되어 남자와 대등한 정치적 권리가 실현되었다. 1929년에는 노동당이 제1당이 되어 제2차 노동당 내각이 탄생하였다. 1929년의 세계공황은 세계의 정세를 일변시켰다. 미국은 사회자본의 증가로 공황을 극복하였고, 영국은 연방제국과 경제블록을 결성하여 이를 타개하였다. 그러나 이 공황으로 독일 ·이탈리아·일본 등의 군국주의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1930년대 독일에는 나치스 정권이 대두하여 또 다른 확장정책을 노골화하였다. 보수당 정부의 J.체임벌린 총리는 독일에 대한 융화정책을 계속하고 전쟁 회피에 주력하였으나, 1939년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략하자 프랑스와 함께 대독(對獨)전쟁에 돌입하였다. 1940년에 영국은 처칠 총리의 거국일치 내각을 만들었으나 프랑스가 항복한 후의 전국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그러나 1941년의 독일·소련전(戰) 발발, 미국·일본 개전에 따른 미국의 참전으로 전황은 유리하게 돌아갔으며, 1943년에 이탈리아를 항복시키고, 1945년에 독일 ·일본을 항복시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종결에 성공하였다. 노동당은 독일 항복 후의 선거에서 처음으로 절대다수의 의석을 얻었으며, 포츠담회담에서 처칠 대신 새 총리 애틀리가 참석하였다. 노동당 정부는 잉글랜드은행·민간항공·탄광·철도·철강업 등을 잇따라 국유화하고,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철저화로 복지국가정책을 취하였으나, 전쟁에 따른 경제적 곤란, 식민지의 연이은 독립, 미·소 양 블록의 긴장으로 인한 재군비 등 때문에 정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으며, 1951년의 처칠 정부하에서 사회보장제도는 완화되고 국유화 정책도 역전되었다. 1955년 처칠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은 이든 정부는 이듬해의 수에즈 사건으로 국위를 더욱 손상시켰다. 이어 H.맥밀런, A.F.흄의 두 보수당 정부도 미국과 소련의 발전 때문에 영국의 국제지위 향상과 경제발전을 실현시킬 수 없었으며, 1964년에는 정권을 윌슨의 노동당 정부에 넘기고 말았다. 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공동시장의 발전으로 영국은 유럽 내의 상대적 지위마저 저하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영국에서는 노동당 정부에 이어 E.히스 보수당 정부도 EC 여러 나라와 가맹교섭을 속행하였으며, 마침내 영국연방 국가와의 관계, 농업보호문제, 국민감정 등 곤란한 문제를 남기면서도 EC 내의 한 나라로서의 활로를 찾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