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엽
- 레미 드 구르몽(1858~1915)
시몽,
- 나무 잎새 떨어진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몽, 너는 좋으냐?
-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 있다.
시몽, 너는 좋으냐?
-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몽, 너는 좋으냐?
-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몽, 너는 좋으냐?
-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려니가까이 오라, 밤이 깊어가고 바람이 분다. 시몽, 너는 좋으냐?
-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 청년이 되어 아내 세실리아 만났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세레명을 정해야 하는데 성인들의 이름들이 참으로 생소 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의 명칭, "시몽-시몬" 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발음이 비슷하기에 반가운 마음에 나의 본명이 되었습니다.십자가를 예수님 대신 메고, 어찌타가 우연히도, 골고다 언덕까지 올랐던 시몬, 이라는 사실은 정말 나중에서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이 가을.가없이 지는 낙엽를 바라보며, 지나온 삶을 잠시 회상하여 봅니다.요즘은 부쩍, 가을 노래가 가슴을 와 젖어 듭니다. 아, 가을 오면 가지 말아라...!
눈
- 구르몽
시몬, 눈은 그대 목처럼 희다.
시몬, 눈은 그대 무릎처럼 희다.
시몬, 그대 손은 눈처럼 차갑다.
시몬, 그대 마음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불꽃의 입맞춤으로 받아 녹는다.
그대 마음은 이별의 입맞춤에 녹는다.
눈은 소나무 가지 위에 쌓여서 슬프다.
그대 이마는 밤색 머리칼 아래 슬프다.
시몬, 그대 동생인 눈은 안뜰에서 잠잔다.
시몬, 그대는 나의 눈, 또한 내 사랑이다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1884년에 파리
국립 도서관의 사서가 되었으나, 발표한 글이
문제가 되어 면직당하고, 1889년 상징파 잡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를 창간하여 비평과 미학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26세 때 낭창에 걸려 얼굴이 추해지자 서재에 묻혀서 살았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시, 소설, 평론을 썼으며,
대표적인 상징시 '낙엽'은 전세계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저서로는 '프랑스어의 미학' '문학 산책''철학 산책' 등이 있다.
니벨룽겐의 노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들이 구전되던 끝에 하나의 위대한 대서사시로 흡수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니벨룽겐의 노래`이다. 그래서 `니벨룽겐의 노래`는 작가가 따로 밝혀지지 있지 않다. 1200년 경 Passau 지방의 한 주교에 의해 집대성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비기독교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혹이 많다. 또 양피지에 글을 써야하기 이유로 글을 쓴다는 것이 많은 자금이 요구되던 시대였기에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봉건영주의 후원을 받은 지식인이 쓴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구체적인 작가는 여전히 미상으로 남아 있다. . 즉, `니벨룽엔의 노래`
가 어느 한 개인에 의해 다듬어 졌을지언정 그것의 내부에는 수많은 일반 민중과 대다수 권력 소외층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고, 또한 한 개인에 의해 집대성되어 그것이 문자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이후인들에 의해 다시 윤색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독일민족 전체의 사상과 생활상이 작품 속에 젖어있다 하겠다. 그러면 이 `니벨룽엔의 노래`는 과연 한 위대한 영웅의 부침과 그의 죽음을 둘러싼 복수전만을 담아내려고 했겠는가 하는 점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자신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혈족간의 전쟁도 서슴지 않던 지배계급, 민중에게 세속적 압박을 가중시켰던 종교로 인해 민중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정서를 답은 노래나 시가들을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정서를 다른 방법으로 표출하고자 했고, 그 한 유형이 되었던 것이 영웅 서사시
의 형태였을 것이다.

Ⅰ. 중세 초기의 독일 문학
(1) 전승된 8세기의 저작물들
(2) 두운법 문학(Stabreimdichtung)
(3) 주술 문학
(4) 초기 봉건주의의 말기 문학
Ⅱ. 전성기의 독일 문학
(1) 개요
(2) 슈타우펜 왕조 시대의 문학
니벨룽겐의 노래(Das Nibelungenlied)
Ⅰ. 작품의 연원과 성격
Ⅱ. 등장 인물
(1) 지크프리트(Siegfried)
(2) 크림힐트(Kriemhilde)
(3) 군터(Gunther)
(4) 하겐(Hagen)
(5) 브륀힐트(Brunhilde)
독일의 문화는 칼 대제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발전하기 시작했다. 카롤링 왕조 르네상스(서기 800-950)로 알려져 있는 이 시기는 고전시대와 고대 기독교의 전통을 통합시킨 것으로 고대 게르만의 유산을 몰아내었다. 수도원과 성당의 학교에서는 학문의 전성기를 수도원 작업실에서는 책장정, 상아조각, 금 세공 등을 포함한 예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아헨에 있는 팔츠 경당은 카롤링 왕조 시기의 우수한 건축물에 속하며, 문학 영역에 있어서는 고대 독일어의 대담한 언어학적 기념물인 종교 서사시, [구세주]가 눈에 띄는데 이 시는 게르만 시기의 고대 영웅시를 휠씬 능가하는 작품이다.
<대성당들의 건조(10세기-15세기)>
중세 초기와 후기는 예술사에 있어 로마네스크(1000-1250)와 고딕양식 시기(1250-1500)로 알려져 있다. 로마네스크 시기는 그 당시를 지배하던 다양한 왕조에 의거하여 세분될 수 있다. 색슨족 왕들이 통치하였던 시기(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까지)인 ‘오토대제 시기의 예술’은 로마네스크의 초기 형태로서 힐데스하임에 있는 성 미하엘 교회에서 그 건축양식은 절정을 이루었다. 슈파이어에 있는 제국 대성당과 마리아 라하 수도원 성당은 잘리어족 황제들의 통치시기(11세기 중반에서 12세기 중반)에 세워졌다.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은 보름스, 림부르크, 밤베르크와 나움베르크에 성당을 건립하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중반)때 최고조에 달했으며 이때 조각작품이 건축물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영역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의 명작으로는 밤베르크에 있는 [기수]와 나움베르크의 기증자인 [에케하르트와 우테의 상]이 있다.
고딕 건축양식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매우 느리게 전파되었다. 1248년에 쾰른 성당을 세움으로써 고딕 양식은 절정기를 구가하였다. 이후에 프라이부르크와 울름의 성당과 레겐스부르크 성당을 건축하여 다시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독특한 독일적 형태는 특히 남부 독일에서는 14세기와 15세기의 ‘독일 교회당’(슈베비쉬그뮌트와 뉘른베르크의 성 로렌츠와 성제발트)을, 북부 독일에서는 ‘벽돌 고딕양식’(뤼벡의 성 마리아 교회와 시청, 슈트랄준트와 로스톡의 시청)을 개발하였다. 후기 고딕 패널화는 특히 라인란트(쾰른의 화가, 슈테판 로흐너) 및 베스트팔렌 주(예를 들어, 화가 콘라트 죄스트)에서 발전하였다. 조상은 프랑쏘냐에서, 특히 바이트 슈토쓰와 틸만 리맨슈나이더가 제작한 제단에서 예술적으로 정점에 도달했다. 중세 문학은 초기에는 성직자들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뒤늦게야 평신도들의 작품도 이 범주에 포함되었다. 그 사이, 약 1200년 경은 궁전 서사시(파르치팔, 트리스탄과 이졸데), 영웅 서사시(특히 리벨룽겐의 노래)와 무엇보다도 독일 음유시인의 거장인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의 모든 시 등을 포함한 기사도 서사시의 시기였다.
<종교개혁에서 계몽주의까지 (16세기-18세기)>
근세는 심층에까지 미치는 종교적, 사회적 변혁과 더불어 시작된다. 종교개혁은 사실상 일종의 혁명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성성번역은 근세 문어체 독일어의 기초를 놓았으며 이 새로운 언어를 창의 대가, 한스 작스가 자신의 활극적인 희극에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16세기는 독일 문학이나 건축의 절정기는 아니었다. 비록 북부 독일에서 베저 르네상스의 형태(예를 들면 브레멘 시청)로 독특한 지역적 양식이 주목을 받기는 했어도 르네상스식의 건축물은 매우 드물었다. 오히려 이 시기는 독일 회화의 황금기였으며 알브레히트 뒤러의 시대였다. 뒤러(예를 들면 [사도들], [아담과 이브])외에도 이 시기는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이젠하임 제단), 루카스 크라나하, 한스 홀바인 부자, 한스 발둥 그린과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알렉산더전투)의 시대였다.
뒤러의 [묵시록]에서 생생하게 묘사된 인간의 잔인성은 30년 전쟁에서 현실로 나타났으며 이 전쟁은 국토를 초토화하고 인간의 정신을 피폐케 하였다. 이에 대한 슬프고도 심금을 울리는 묘사가 세계문학에 대한 독일의 기여인 바로크 시에서 뿐만 아니라 요한 야콥 크리스토펠 폰 그림 멜스하우젠이 쓴 악동을 소재로 한 소설인 [모험가 심플리치시스무스]에 잘 나타나 있다. 바로크 건축양식은 바로크 문학보다 더 이후에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1700년 경, 일반 저택이나 교회건물은 드레스덴에 있는 다니엘 푀펠만의 작품, [성채]와 게오르그 베어의 [성모교회], 베를린에 있는 안드레아스 슐뤼터의 [병기고], 뷔르쯔에 있는 발타자르 노이만의 [주교저택]등과 같은 건축물에서 볼 수 있듯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남부 독일의 로코코 양식에 의한 대부분의 중요한 건축물들은 아삼 형제(특히 벨텐부르크, 뮌헨의 성 네포묵성당)와 침머만 형제(특히 비젠교회)들의 작품이며 반면에 프러시아 로코코 양식은 포츠담에 있는 게오르크 벤체스라우스 폰 크노벨스도르프의 상수시 궁전에서 절정에 달했다.
독일 음악은 바로크 시기에 점차 발달하여 그 정점에 달했다. 이를 위한 토대는 16세기와 17세기의 북부 독일 오르간파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 시기에 위대한 작곡가 3인-요한 세바스찬 바하, 게오르그 프레드릭 헨델,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은 독특한 고유의 표현 양식을 개발하였다. 독일 계몽운동(1680-1780)은 중요한 3명의 사상가를 배출하였다. 철학가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임마누엘 칸트가 이성과 종교를 종합하기 위해 노력한 반면에 고트훌트 에프라임 레씽은 사회에 이성과 관용을 가르치길 원했다. 이론(함부르크 희곡론)과 실제(현자 나탄)에 있어서 레씽은 희곡예술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데 성공하였다.
<시대정신과 세계혁명 (19세기)>
철학자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세계를 변증법의 용어로 설명하였다. 칼 맑스는 유물론으로 헤겔을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머리로가 아니라 두 발로 서있게”하려 하였다. 현대 독일문학의 선구자인 극작가 게오르그 뷔히너와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혁명을 꿈꾸었지만 성취하지는 못했다. 하이네는 현대 독일문학의 길을 닦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음악의 혁명을 일으켰으며 [뉘른베르그의 명가수]라는 작품으로 민족 오페라를 창시하였다. 그는 또한 작품 [니벨룽엔의 반지]로 금세기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술작품을 창조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다양한 예술과 양식들은 표류하기 시작했다. 독일 산업의 급속한 팽창시기(1871-1874)와 세기 전환기 사이에서 건축가와 화가들은 역사주의로 기울어졌고 그 결과 이전 시기에 지배적이었던 다양한 형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간계층의 세계는 빌헬름 라베와 테오도어 폰타네와 같은 소설가들에 의해서 현실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사회문제들은 게하르크 하우프트만이 그려냈다. 그의 작품, [직조공]은 독일 자연주의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 되었다. 건축, 화학 그리고 디자인에서 하나의 통일된 양식을 산출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시도는 아르누보에 의해 성공을 거두었다.
토마스 만은 자신의 소설에서 중간계급의 세계를 대가답게 묘사하는 데 성공하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으로 부르조아지에게 충격을 가했으며 그에 의해 영화 역시 새로운 예술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나치 정권이 모든 예술 분야의 복종을 요구하여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작품활동을 포기하거나 망명해야만 했을 때 이러한 모든 예술의 발전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2차 대전 이후에 이러한 예술가들 또한 “국내 망명”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맥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동독에서든 서독에서든 누구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나 국토의 무자비한 분단과 양독의 모든 예술분야에 있어서의 차변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동질성에 대한 자각은 여전히 존재하였다. 이러한 동질성이 회복된 지금 독일문학은 새로운 발전단계에 돌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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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
독일 역사는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수세기 동안 독일이 중앙집권적 정부를 가지지 않았으며 1817년 독일제국 건립 이전에는 수도가 없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때까지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제국 연방구조로 인해 많은 수의 도시들이 발달하였으며 이들은 서로 건설적인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다. 독일 최초의 오페라 하우스는 1678년 함부르크 시민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그 다음 세기에 소궁정 소재지, 바이마르는 예술이 꽃핀 독일의 주요한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 문화는 도시와 궁정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 왕가의 전통과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의 전통에 힘입은 바 크다.
독일이 통합된 이래로 베를린에는 세 개의 오페라 하우스(독일 오페라, 국립 오페라운터 덴 린덴, 그리고 희극 오페라)와 여섯 개의 일류 극단이 있으며 이로써 베를린은 현재 함부르크나 뮌헨과 거의 맞먹는 문화도시가 되었다. 함부르크 주립 오페라단의 명성은 현대적 작품들을 초연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며 바이얀 국립극장(뮌헨의 주립 오페라단을 지칭함)은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상연하여 명성을 얻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극장은 함부르크의 도이췌 샤우슈필하우스, 뮌헨의 캄머슈필레, 그리고 베를린의 레니너 광장의 도이췌 테아터와 뷔네 등이다. 그러나 이들이 독일 극장계의 유일한 횃불은 아니다. 쾰른,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드레스덴 그리고 라이프치히 역시 오페라와 드라마에 있어 중요한 도시들이다. 발레에 관한 한 슈투트가르트와 부퍼탈은 중요한 곳이다. 비록 지방에서는 재원의 한계가 있다하더라도 이들 역시 종종 주목할 만한 작품을 선보인다.
<음악은 점점 국제화된다.>
오페라 극단이 날이 갈수록 국제화되듯이 관현악단 역시 그러하다. 서독에는 약 95개의 관현악단이 그리고 동독에는 88개의 관현악단이 존재한다. 이들 중 일부는 방송국이나 오페라 극단에 속해 있는 반면에 다른 일부는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서독은 해마다 평균 2백만 명의 오케스트라 청중과 8백만 명의 오페라 청중을 유치하고 있다. 오늘날의 독일 음악문화의 세계적인 위상은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와 허버트 폰 카라얀이 전임 지휘자로 활동한 베를린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의 활약에 의한 것이다. 바이얀 심포니 오케스트라, 북부 독일 방송협회 오케스트라, 서독 방송협회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드레스덴 국립악단 그리고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같은 수많은 오케스트라단이 제 2위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의 주도적 위치는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다. 현재의 오케스트라단들이 바이로이트 페스티발과 슐레스비히-홀스타인 페스티발 등을 개최하고 있으며 이들은 유럽음악 페스티발 중에서 급속하게 확고한 위치를 다져가고 있다.
독일 극단이나 오케스트라, 페스티발이 수많은 외국인 배우나 음악가들을 독일로 불러모으듯이 독일의 예술가들도 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트 마주어가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마주어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전임지휘자였다. 그외에 크리스토프 돈나이, 미햐엘 길렌, 볼프강 자발리쉬, 클라우스 텐슈테트와 귄터 반트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이다. 성악가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와 헤르만 프라이는 독일가곡을 널리 보급하는 탁월한 사절의 역할을 해 왔다. 페터 호프만과 레네 콜로는 브리기테 파스밴더와 힐데가르트 베렌스와 더불어 세계 도처의 오페러 하우스에서 초청공연을 가졌다. 에리카 쾨쓰, 안네리제 로텐베르거, 프릿츠 분더리히, 루돌프 쇽, 한스 호터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이며 이들의 목소리는 레코드를 통해 쉽게 들을 수 있다. 프리츠 부쉬, 오토 클렘퍼러, 한스 크나퍼르츠부쉬, 오이겐 요훔과 요셉 카일버트 등의 위대한 지휘자와 발터 기제킹, 빌헬름 켐프, 빌헬름 바크하우스와 에두아르트 에르트만 등의 피아니스트 역시 이에 견줄만한 인기를 누렸다. 신세대의 피아니스트로는 게하르트 오피츠, 크리스티안 자카리아스, 크리스토프 에쉔바하와 유스투스 프란츠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안네 소피 무터는 세계 정상급의 바이올린 연주자이다.
뉘른베르크의 국립 게르만 박물관은 독일문화의 독특한 보고이다. 드레스덴의 그뤼네 게뵐뵈는 주로 바로크 공예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고대 마이스터 예술 갤러리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만하다. 구동독 지역의 예술은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동독 박물관에 비치되어 있으며 북부 독일의 상업 및 농업문화는 함부르크의 알토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서독 및 남서독 문화는 본의 라인 박물관과 칼스루에의 바덴주립 박물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가장 뛰어난 자연과학 전시회들은 본의 알렉산더 쾨니히 박물관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젱켄베르크 자연 박물관 그리고 슈투트가르트의 자연과학 박물관에서 접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모든 도시와 지역에서 접할 수 있는 수많은 특수 박물관들 중에서 브레머하펜 항구에 “떠” 있는 독일 향해 박물관과 뉘른베르크의 보석 박물관, 울름의 빵 박물관 등만을 소개한다.
베를린, 쾰른,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 뮌헨은 수많은 박물관과 갤러리의 소재지로서 현대 독일예술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나치 정권 아래서 외부와 차단되었던 독일의 현대예술은 몇몇의 이름을 들자면 빌리 바우마이스터와 에른스트 네이와 같은 추상예술의 주창자와 초현실주의자, 맥 찜머만과 에드가 엔데, 키네티즘과 옵아트의 대표자인 귄터 워커와 하이쯔 막 등의 노력으로 세계적인 모더니즘 계열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조각가인 오토 허버트 하엑, 그래픽 예술가 호르스트 얀센, 오브제 예술가 요셉 보이스 등의 매우 독창적인 작품들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안젤름키퍼와 게오르그 바젤리쯔 역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현대예술의 세계적 경향을 알 수 있는 광장으로서 4년에 한 번씩 카셀에서는 대규모의 도쿠멘타 전시회가 열린다.
<1945년 이후의 문학>
독일 문학은 1945년에 공백기를 맞이한다. 뛰어난 작가들 대부분이 나치를 피해 망명을 떠났으며 그들중 소수만이 마지못해 귀국하였다. 또한 이들 중 단지 토마스 만, 베르톨트 브레히트, 칼 쭈크마이어(반나치연극인 [악마의 사령관]으로)가 대중의 호응을 얻었을 뿐이다.
나치 점령하에서 ‘국내 망명’에 들어선 작가들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선을 끌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였으며 나치 정권을 지지했던 작품성이 별로 좋지 않은 작가들은 그 생명이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들 대신에 오늘날 많은 젊은 작가들이 등단하였다. 독일의 젊은 세대는 특히 전쟁 포로의 귀환을 다룬 볼프강 보헤르트의 [문밖에서]와 나치 치하에서의 문학의 궁핍시기 이후에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였던 귄터 아이히와 파울 첼란의 시에 감명을 받았다. 전쟁기간과 전후 시기는 하이리히 뵐(어느 광대의 의견), 볼프강 쾨펜(온실), 귄터 그라스(양철북)의 소설에서 다뤄지고 있다. 그라스는 문학적 영감을 거의 자신의 고향인 단치히(현재는 폴란드령 도시, 그단스크)에서 얻었다. 마르틴 발저(전반부)는 콘스탄스 호숫가에 살면서 작업하고 있다. 지그프리드 렌츠 (독일어 수업)는 북부 독일에서 살고 있다. 과거와 협상하고 현재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러한 노력은 그 다음 세대의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는 그리 전형적인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정신영역으로 들어가 앉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동독의 작가들은 비록 비호하는 입장이기는 하였으나 자신들이 속해 있는 정치 제도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이들 중 크리스타 볼프(나뉘어진 하늘)와 슈테판 하임(다비드왕 보고서)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정치색이 짙은 곡을 썼던 볼프 비어만, 소설가 에리히 뢰스트, 시인 라이너 쿤체와 같은 구동독 작가들에게 정권은 망명을 강요하였다. 독일의 분단과 통일이 문학의 주요 주제가 될 것인지 아닌지, 된다면 어느 정도까지 될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이다.
독일 작가, 특히 독일 독자들은 언제나 외국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출판사가 2천개가 넘는 독일은 미국과 독립국 연합체 다음가는 세계 3위의 출판대국이다. 1990년 6만6천 종의 책이 출간되었으며 이들 중 4만8천 종이 초판이었고 번역서는 7천 종이 넘었는데 영어 번역서가 이의 절반이 넘었다. 또한 11,800종의 새로운 소설이 등장하였다. 약 3,600개의 서점이 있는 독일의 서적거래는 그 규모가 약 60억 유로에 이른다. 소규모 서점도 경쟁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 독일이 소매가격제도를 정착시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전문학술서적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독일 전문학술서적 출판업자들은 외국에 지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작품은 영어로 발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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