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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박송 입니다. 2010. 7. 26. 18:06

 

 

김소월 (金素月, 1902∼1934)

 

1. 시인의 삶

 

시인. 본관은 공주. 본명은 정식(廷湜).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성도(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에요.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했어요.

 

사립인 남산학교 (南山學校)를 거쳐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했어요.

 

1923년 일본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했어요.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曺晩植)을 교장으로

서춘(徐椿)·이돈화(李敦化)· 김억(金億)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어요.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어요.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羅稻香)이 있어요.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했어요.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어요.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했어요.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했어요.

 

 

 

 

2. 작품활동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 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 (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 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어요.

 

작품 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했어요.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 〈첫치마〉,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제비〉, 〈강촌 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삭주구성 朔州龜城〉, 〈가는 길〉,

〈산 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 新天地》의 〈왕십리 往十里〉 등이 있어요.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 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했어요.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 〈꽃촉 (燭)불 켜는 밤〉(1925), 〈무신 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 〈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 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문명 文明》에 〈지연 紙鳶〉(1925)을 발표하고 있어요.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 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어요.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어요.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했어요.

 

 

 

 

가족사항

조부는 공주 김씨의 金相疇이고, 부친은 金性燾, 모친은 張景淑이다. 仁姐라는 여동생이 있고,洪明熙의 딸 洪實丹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슬하에 장녀 龜生, 차녀 龜媛, 장남 俊鎬, 차남 殷鎬, 삼남 正鎬, 사남 洛鎬 등

4남 2녀를 두었지요.

 

 

소월의 연대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02년

본명은 廷湜이고 필명/아호는 素月이다.
고향(본적)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일명 남산동) 569번지이다.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 외가에서 9월 7일(음력으로 8월 6일) 태어나다.

북한ㆍ연변 자료에 의하면, 소월의 출생년도는 1903년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착오이다. 최근의 북한자료(리동수 지음 김재남 해제, 《북한의 비판적 사실주의 문학 연구》, 살림터, 1992, 240면)는 이를 바로잡고 있다.

 

1904년

부친이 정주ㆍ곽산간 철도를 가설하던 목도꾼들에게 몰매를 당했고, 이로 인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죽을 때까지 폐인생활을 하였다. 북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 부랑자들에게 구타를 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때 광산업에 종사하여 재산을 모으기도 했던 조부 김상도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자라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국이 식민지화의 길로 치닫게 되다.

이 때를 즈음하여, 유학과 한문에 소양이 높은 할아버지의 훈도 밑에서 구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수많은 민담ㆍ민화 등을 들려주었던 숙모 桂熙永이 숙부 應悅에게 시집옴으로써 소월은 그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다.

 

1909년

남산보통학교(일설에 의하면 사립학교)가 설립되자 머리를 깎고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아버지의 정신병으로 인하여 집안은 더욱 쪼들리게 되었으나 할아버지의 훈도와 할머니ㆍ어머니의 지성어린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하다.

 

1914년

연변ㆍ북한 쪽 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에 <긴 숙시(熟視)>를 썼고 이것을 후에 《근대사조》(1호,1916)에 발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5년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다. 5월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안서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다.

이 때 소월시의 원천(源泉)이 된 한시ㆍ민요ㆍ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6년

세살 많은 홍실단(일명 丹實) 여사와 결혼하다.

연변ㆍ북한 자료에 의하면, 남산학교를 졸업한 후집에서 쉬다가 이 시기에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하여 시를 짓기 시작했고, <먼후일>을 썼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부 연변ㆍ북한 자료에 오산학교 입학 시기를 1917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소월이 15세(공식적인 나이로는 14세)에 해당되는 년도는 1916년이다

 

1919년

북한 자료에 의하면, 동급생을 선동하여 이들과 함께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잡혀가던 도중에 요행히도 몸을 피하였다고 한다.

4월에 <춘조>를 탈고하다.

 

1920년

이 시기에 <그리워>(창조 5호, 1920. 3) 등과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동으로>(학생계 창간호, 1920.7)를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하다.
<춘조>를 《학생계》(3호, 10)를 발표하다.

 

1922년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하다. 동급생에 나도향이 있었고 한 반 아래에 박팔양이 있었으나 특별한 교우관계를 갖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ㆍ1운동 이후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함박눈>(개벽 28호, 10)을 발표하다.

 

1923년

배재고보(7회)를 우수한 성적으로(총 44명중 4등) 졸업하다. 고향에 돌아와 평북 정주군 림포면 사립학교 교원이 되다. 아동교육에 종사하면서 시창작에 정진하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서정시를 창작하고, 그것들을 《개벽》 등에 발표하다. <장별리>도 이 때 지은 작품이다.

사립학교 교원생활이 창작이나 집안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 시기에 집안이 더욱 피폐해져 가다.
처가의 도움으로 일본 동경에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다. 학자금이 제대로 조달되지도 않았고 상과에 취미도 없어 괴로운 학창생활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10월경 귀국하다.

이즈음에 서울생활을 하게 되고 나도향 등과 어울렸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의 서울생활의 느낌을 시로 읊은 것이 <서울밤>과 <不稱錘秤> 등이 아닐까 추측된다.

 

1924년

김동인 김찬영 주요한 김억 전영택 김유방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가담하여 서울에 체류하였으나, 곧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방현)에서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 지국일을 맡아보며 소일하다.

그러나 《東亞日報社史 1》의 기록에 의하면 소월이 동아일보지국장 일을 맡기 시작한 것은 1926년 8월부터이고, 그만둔 시기는 927년 3월이다.

 

1925년

유일한 시론 <詩魂>(《개벽》 59호, 5)을 발표하고, 이해 말에 《진달내》(12)을 매문사에서 상재하다. 1934년6월 사남 낙호가 출생하다.

12월 23일(일설에 의하면 24일)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 자택에서 사망/자살하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마약 중독으로 추정된다.
《조선중앙일보》(12.30)에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씨의 돌연사망 기사가 났고, 《동아일보》(12.30)에 소월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찍은 흐릿한 소월 사진이 소개되다.

소월은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터진고개에 묻히다.

 

1935년

김기림 김동인 김동환 김억 이광수 이은상 유도순 박종화 박팔양 정지용 등 문인 백여명이 서울 종로에 있는 백합원에서 소월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지다.

안서가 《조선중앙일보》(1.22-26)에 <요절한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을 쓰고, 이어 《신동아》(2)에 소월을 추모하는 <弔詩>를 발표하다. 김억이 쓴 <요절한 박행시인 김소월에 대한 추억(3)>(《조선중앙일보》 1.23) 본문에 소월의 친필이 소개되다.

 

1939년

《여성》에 소월의 <박넝쿨타령> <성색> <세모감> <술과 밥> <절제> 등 유고 시편이 발굴되어 발표되다.
김억이 박문서관에서 《소월시초》를 펴내다.

소월의 묘를 서산면 왕릉산으로 이장하다. 

 

 

 

往十里

 

 

김소월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비니 09.12.19. 17:39

제가 사는 한양대 근처에 소월 문화센터가 있는데, 오늘 나갔다가 입구에 있는 시비를 읽고 마음에 촉촉한 감동을 느껴 이곳에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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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리자 09.12.19. 22:42

신당동에서 태어나 왕십리, 행당동에서 어린시절 보내고,학교다니고 한양대 근처가 나의 소녀적 놀이터 였다우.한번 가봐야 되겠네요.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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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니 09.12.20. 19:56

정말요? 한양대 근처 지금은 제 놀이터가 되었죠, 떡볶이집도 많고 까페도 많고 술집도 많고 산책로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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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리자 09.12.21. 00:55

기찻길옆으로 걸어가던 그 곳..사근동 맞지요 ,오래전 추억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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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weon 09.12.20. 14:32

한때 몹시도 비를 좋아한 적이 있었지 2연까지는 항상 외면서 ㅎㅎ 그랫더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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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니 09.12.20. 19:59

저도 비 몹시 좋아해요, 아직도... 여고생 땐 교복 바람으로 친구하고 둘이서 장대비 그냥 맞으며 삼청동까지 걸어갔다 온 적도 있었죠... 미친 바람 같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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