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연구

이탈리아 역사

박송 입니다. 2010. 6. 29. 14:58

 

 

초기 7왕국 시대 (BC.753 - BC.509)
B.C. 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로마가 창건되었다는 건국신화가 전해지고 있고 8세기부터는 라틴과 사비나 도시국가를 합하여 7왕국 시대를 이루었다. B.C. 7세기경에는 이탈리아계 민족을 제압하고 남하하는 켈트족을 무찔러 영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 B.C. 509년부터 시작된 공화정 시대에는 매년 2명의 집정관이 귀족 중심으로 구성된 원로원을 지배하였는데 전쟁 중에는 집정관이 장기집권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
◈ 로마 공화정 시대 (BC.509 - BC.27)
B.C. 3세기에는 남 이탈리아에 있는 그리스의 식민도시도 정복,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시켰고 다시 B.C. 146년에는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까지도 합병했다. 그러나 결과로 마리오와 술라같은 집행관이 장기집권하는 폐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후 영토가 점차 확장되면서 공화정 말기에는 삼두정치체제가 형성되어 로마제국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당시의 삼두정치의 권력자는 시이저, 폼페이우스, 크라쿠스였는데 이것이 제 1차 삼두정치이다.

.............................................................................................................................................................
◈ 로마제국 시대 (BC.509 - AD.476)

제 2차 삼두정치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이끌었다. 이들 중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함으로써 그는 B.C.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곧 황제로 추앙되었다. 이로서 로마제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로마는 5현제로 인해 약 20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을 평화롭게 보내며 최고의 전성시대를 누렸다. 이 때의 영토는 북으로는 영국, 남으로는 사하라, 서로는 이베리아반도, 동으로는 이란에 까지 미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A.D. 18년 이후 적자승계, 경제력과 군사력이 성장한 지방 속주의 반란, 게르만족의 민족이동과 기독교 세력의 확대 등으로 거대했던 로
마제국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디오클레시아노 대제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으나 결국 A.D.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는 동과 서로 나뉘게 되었고 서로마제국은 A.D. 476년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로마제국에 의해 탄압을 받던 기독교는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칙령'에 의해 국교로 승인되었다.

.............................................................................................................................................................
◈ 중세시대와 르네상스 (11세기 ~ 16세기)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는 동 고트족과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노 황제, 그리고 롬바르드족,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의 지배를 당하다가 962년 오토 1세가 세운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로 들어갔다. 한편 남 이탈리아는 827년 튀니스에서 건너온 이슬람세력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 비잔틴의 지배하에 있던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팔레모를 중심으로 발전해나갔다. 이때 많은 작물들이 이탈리아로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시칠리아에 여러 문화가 혼재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슬람 교도의 시칠리아 지배는 노르만인들에 의해 끝났다.

11세기 이후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각 영주들이 지방을 장악하게 되어 봉건영주의 도시국가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로마 황제와 교황간의 세력쟁탈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0세기말부터 시작된 비잔틴과의 교역을 통해 11, 12세기에 로마의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도시국가의 수공업과 상업이 번성하면서 베네치아, 제노아, 피사, 밀란, 플로렌스 등의 도시는 산업과 상업, 금융의 중심지가 발전해 나갔다. 또한 북부 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기사계급도 상인과 토지 소유자들로 구성된 도시세력과 결탁, '코무네'라는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자치체를 이루었다. 이 도시들은 왕조체제의 강화로 인해 오래 가지는 못했고 14세기에 들어서 도시국가는 외부의 위협과 내란에 직면하게 되면서 자치도시를 포기하고 각 도별로 절대군주의 권력시대가 열렸다. 한편 상업의 발달은 물 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더 넓은 세계를 향한 시장을 확보하는 지리상의 발견을 가져왔고 절대군주의 도시국가 세력과 교황권의 싸움이 도시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특정 유력인에게 시정의 권한을 위임하는 '시뇨리아'의 출현을 가져왔다. 소도시에서 시작된 시뇨리아는 대도시로까지 확대되었고 피렌체같은 도시도 메디치가의 지배에 들어갔다. 이렇게 도시의 발전과 비잔틴을 비롯한 주변문화와의 교류, 상인들의 생각의 변화에 기초해 고전학문과 예술을 되찾자는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르네상스 문화가 탄생했다. 르네상스는 피렌체의 메디치가를 위시한 도시세력과 교황의 후원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는데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와 같은 뛰어난 예술가들이 탄생했다.

이후 1453년 동로마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가 지중해로 진출하면서 무역이 발달했던 베네치아, 제노아와 같은 상업도시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대서양을 중심으로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절대 군주의 통일국가를 형성하게 되면서 이탈리아는 세력확장을 노리는 강대국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특히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국가는 16세기 이후부터 19세기초까지 스페인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북부 이탈리아의 사보이 왕국만은 합스부르크家와 부르봉家의 대립을 이용해 세력을 확장, 18세기에는 사르데냐, 리구리아에서 롬바르디아에 이르는 지역까지 영토를 넓혀나갔다.

.............................................................................................................................................................

◈ 국가통일
이탈리아에 자유이념을 심어준 계기가 된 것은 나폴레옹과 프랑스혁명이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고 봉건적 특권을 폐지했으며 교회 재산까지도 몰수하는 등 프랑스혁명 정신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또 당시 프랑스 혁명의 구호였던 자유, 평등, 박애의 개념이 이탈리아에도 전해져 정치, 사회 부문에서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1820년부터는 결사조직인 MASSONERIA와 함께 CARBONERIA당 등의 비밀조직이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831년에는 마찌니에 의해 이탈리아에 자유, 독립, 국가통일, 그리고 공화국의 건설을 주창하는 '이탈리아 청년당'이 결성되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1848년 사보이 왕국의 엠마누엘2세 국왕, 카보우루 재상, 가리발디 장군 등이 주축이 되어 프랑스, 오스트리아와의 계속적인 외교교섭과 3차에 걸친 끈질긴 독립전쟁(1차: 1848∼1849, 2차: 1859년 불오 전쟁, 3차: 1870년 보불 전쟁)을 통해 1870년 염원하던 반도전체를 포함한 국가통일을 이루었고 다음해인 1971년 로마를 수도로 정했다.
이 과정에서 사보이 왕국의 재상 카보우르는 강대국의 대립을 이용하는 외교력을 발휘해 먼저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해방시키고 토스카나 왕국, 교황령 등 중부 이탈리아를 병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또 가리발디 장군은 시칠리아를 원정, 섬 전체를 손안에 넣었다. 이로서 반도 북동부의 오스트리아 영토와 교황의 영향권에 있던 로마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탈리아를 통일, 1861년 엠마누엘 2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했다. 통일 후 이탈리아는 자유무역주의를 지향하면서 국가의 통일된 행정과 경제제도를 채택해 실질적인 통일의 효과를 노렸으나 한편으로는 자유무역과 북부의 제도를 남부에 강요하는 꼴이 되어 이에 적응하지 못한 남부의 경제는 쇠퇴해 갔다. 특히 생산력이 낮은 농업이 원인이 되어 남부는 마치 북부의 식민지와 같은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남북간의 격차가 심화되자 정부는 주민들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식민지 경영에 나섰고 1880∼1910년에 이르는 30여년동안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정치적으로 국내에 사회주의와 국가주의의 기운이 팽배한 가운데서도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살아나는 듯 했으나 파업과 폭동이 발생, 사회적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1차 대전이 발발했고 이탈리아는 연합국측에 가담했다. 전쟁이 연합국측의 승리로 끝나자 이탈리아는 이에 대한 성과로 아디제江 상류와 이스트리아 지방을 오스트리아로부터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경제불황으로 사회는 불안에 빠져들었다. 노동자들이 생산공장을 점거하고 를 관리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 에 대한 반감을 가진 상인과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이 세력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
◈ 현 대
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과 공화정 준비시대

식민지를 넓혀가던 이탈리아는 1915년∼1918년 사이의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연합군에 가담, 승리는 하였으나 세계적인 경제불황으로 국내 경제사정이 나빠지고 정치적인 불안이 쌓이면서 1923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대두하였다. 무솔리니는 세계공항에 대응해 중요산업과 은행에 정부자본을 투입하고 정치적으로는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북아프리카 시장확보에 나서 1936년 에티오피아를 점령했다.

이후 1937년에는 독일, 일본과 함께 반공(ANTICOMINTERN)동맹을 맺고 국제연맹을 탈퇴한 후 이어서 1939년에는 독일과 비밀협약인 '철의 동맹'을 체결하는 등 제국주의에 앞장섰다. 그러나, 독일, 일본과 함께 참전한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황이 불리해지고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의 저항이 거세져 1943년 이탈리아 내각이 무솔리니 퇴진을 가결, 무솔리니는 체포되고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해 7월에는 '바도리오 임시정권'이 들어섰고 연합국에 항복했다. 한편 무솔리니는 독일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북부에 '사회공화국'을 세워 독일군과 함께 저항을 하면서 잠시 체면을 유지하였으나 연합군의 상륙으로 그것마저도 결국 1945년 붕괴되고 말았다. 이 때 스위스로 도주하던 무솔리니는 처형되었고 이후 이탈리아의 정치는 기독교민주당, 사회당, 공산당 등 반 파시즘과 레지스탕스 운동을 한 세력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전후 1946년 5월에는 이탈리아 국왕이었던 에마누엘 3세가 퇴위하면서 왕세자인 움벨트 2세가 섭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46년 6월 제헌의회 선거와 함께 실시한 정치형태 선택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왕제를 폐지하고 공화국 체제를 취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1947년 12월에는 제헌의회의 토의를 거쳐 '공화국 헌법'이 공표되었고 1948년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가 초대 대통령으로 DE NICOLA가 지명되었다. 이탈리아는 1947년 2월 '파리강화조약'으로 식민지시대에 개척한 많은 영토를 잃고 말았는데 리비아는 독립국가로,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는 연합국가로, 소말리아는 10년간 UN의 신탁통치에 들어갔다.

'서양사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럽의 어원과 기원   (0) 2010.06.30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황제들   (0) 2010.06.30
오딧세이아   (0) 2010.06.23
러시아 역사   (0) 2010.06.05
노르웨이   (0) 2010.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