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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物論제물론

박송 입니다. 2012. 3. 31. 02:59

 

 

 

 

 

 

 

 

 

 

 

齊物論제물론

 

 

 

옛사람은 그 지혜가 지극한 데가 있었다. 어디까지이르렀느냐 하면 처음부터 사물은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것은 궁국에 도달한 경지라서  덪붙일 것도 없다. 그 다음으로는 사물이 있기는 하나 처음부터 封봉, 즉 경제가 없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 다음은 몸이 있기는 하나 처음부터 시비가 있지 않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시비가 나타나는 것은 도가 이지러졌기 때문이다. 도가 이지러지는 것은 이즈러지기 때문이다.

 

자연 또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없는 것일까.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있는 것은 昭氏소씨가 琴금을 탄주해서이고,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없는 것은 소씨가 금을 탄주하지 않아서이다.

 

原文원문: 古之人고지인은 其知有所至矣기지유소지의니라惡乎至오호지오.有以爲未始有物者유이위미유물자니 至矣盡矣지의진의하여 不可矣可矣불가의가의니라 其次以爲有物矣기차이위유물의나 而未始有封也이미시유봉야니라 其次以爲有封焉기차이위유봉언언이나 而未是有是非也이미시유시비야니라 是非之彰也시비지창야로 道之所少以虧也도지소이휴야이니라 道之所以虧도지소이휴는 愛之所以成애지소이성이니라 果且有成與虧乎哉과차유성여유호재아 果且無成與虧乎哉과차무성여유호재아 有成與虧유서여휴는 故昭氏之鼓琴也고소씨지고금야이고 無成與虧무성여휴는 故昭氏之不鼓琴也고소씨지불고금야니라.

 

註주:古之人고지인. 고대의 사상가들은 이상적인 사실이나 인물을 말할때 ′古고′라는 말을 붙었음. 有以爲未始有物者유이위미시유물자: 以爲이위.는 ′생각하는′의 뜻.

 未始與物미시여물이란 처음부터 사물이란 없었다. 즉 처음부터 사물이란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 至矣盡矣지의진의 궁국에 도달하여 나무랄 데가 없음. 未始有封也미시유봉야 처음부터 封봉이란 없었다. 봉은 처음에 토지의 경계, 한계. 是非之彰也시비지창야. 彰창은 나타내다, 드러내다의 뜻. 道之所以虧도지소이휴 愛之所以成  所以소이는원인, 까닭. 도가 이지러진 까닭으로 사랑이이루어졌다의 뜻. 昭氏소씨 뒤에 나오는 소문소문과 같은 사람. 고대 거문고의 명인.

 

解說해설: 장자도 노자와 공통되는 바탕을 갖는다. 道도는 양자에 공통되느 것이고′무위자연′을  근본의 입장으로 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무엇을 도로 규정하고 무엇을 무위자연으로 하느냐 하는 점에선 양자의 사이에 미묘한 相違상위가 있고, 그 상위는 차츰 폭을 넓혀 가고 있다.

 

장자가 먼저 문제삼았던 것은, 있는 그대로인 진리는 어떻게 얻어지느냐 하는 인식론이다. 있는 그대로란 인위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 자연이고, 바꾸어 말하다면 무위자연이 된다.

 

왜 이와 같은 있는 그대로인 진리를 아는 일이 곧ㄱ바로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것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인 진리 추구법을 문제삼고 있는 것은, 상식의 진리 추구 방법의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식의 진리 포착이 어떤 점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노자도 말했지만 인간의 말이 갖는 불안전서ㅓㅇ, 따라서 상식적 사고법의 결함이 그 원인인 것이다.위리늬 사물을′안다′고 한다. 안다고 하는 말은 ′나눈다′는 것을 語源어원으로 하고 있다.인간은 혼돈상태인 하나의 것을 그대로 지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으므로, 반드시 이것을 둘로 나눔으로써 ′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판단이란 하나의 것을 반쪽으로 끊ㅅ는 것이고 이해란 도리를 좇아 분해하는 것이다. 분석 역시 나누고 쪼갠다는 뜻이다.

 

이렇듯 애당초 하나인 것을 둘로 분해시키는 게 인간의 사고법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문제는 분해라는 인위를 가하는 일은, 있는 그대로인 진리를 훼손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상식으ㅡ로선 하나의 공간을 이곳과 저곳, 앞과 뒤, 왼쪽과 오름쪽으로 二分이분한다.그리하여 이곳과 저곳이라는 장소의 구별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것일까?

이곳이란 자기라는 인간의 현제 있는 장소를 가르키고, 저곳이란 자기가 없는 장소를 가르킨다.

만일 내가 지금 있는  장소에서 이동했다고 하면, 지금까지 이곳이었던 곳이 저곳이 되고, 저곳이 었던곳이 이곳이 되어 버린다. 즉 이곳 저곳이라는 구별은 나의 신체에 대해서만 이는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인간의 신체를 떠난 절대적 공간이라는 거ㅓㅅ을 생각한다면 거기에 곳 저곳은 물론이고 앞뒤나 좌우라는 차별도 모두 없어지고 말 것이 아닌가

즉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멋대로 전후 좌우와 같은 차별을 만들어 낸다. 만일 그러한 인위를 버리면, 있는 그대로인 공간에 차별은 없고 다만 하나임을 알게 되리라.

 

하를 멸망시킨 은은 천하의 주인이 되고, 이윽고 탕이 죽고 外丙외병이 즉의했다. 탕에게는 太丁태정이란 태자가 있었지만 탕보다 일찍 죽었던 것이다. 외병은 태정의 동생이었다. 그렇지만 외병은 즉의 3년 만에 죽고 다시 그 아우 中壬중임이 즉위했으나 역시 4년 만에 죽었다.

 

이리하여 이윤은 일찍 죽은 태정이 아들 太甲태갑을 세웠다. 적자를 세워 질서를 바로잡았다는 데서 이윤은 현인이라 말을 듣는 셈이다.

그런데 태갑은 포악하고 시조인 탕의 법을 좇지 않아, 이윤은 3년 뒤  그를 桐宮동궁으로 추방해 버렸다. 동궁은 탕의 능이 있는 곳이다. 태갑은 그곳에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으므로, 이윤은 다시 3년 뒤 맞아 왕으로 받들었다.

 

이윤은 이렇듯 왕을 추방하든가 복귀시키든가 했고 죽은 뒤에는 은의 종묘에 合祀합사 되었다. 즉 예사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기》는 그뒤의 은 王統왕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아들이 뒤를 잇는 일이 있는가 하면 동생이 후계자가 되는 일도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형제 상속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이윽고 왕위 계승의 싸움이 일러나고 은의 국력은 차츰 약해졌다.

 

국력의 척도는 제후가 입조입조 하느냐로 알 수 있다.  도읍에 제후가 문안드리러 오지 않게 되면 나라의 활력이 약해졌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때 중흥의 영주가 나타났다. 바로 盤庚반경이었다. 탕부터 셈하여 19대째 왕인데, 형제 계승이 많아 세대로 말하면 탕의 10대손쯤이다. 반경은 천도를 결행했다.

 

탕은 반경에 이르는 동안 다섯 차례 도읍을 옮겼다. 최초의 도읍지는 박(毫호)이었다. 반경은 이때 安陽(안양.하남성)이라는 곳에 옮겼는데, 이것은 대이동이었다. 주민은 이 이동을 슬퍼하고 왕을 원망했다. 그러나 반경은 ㅜ결행했다. 그 까닭은 퇴폐적인 기품이 온 나라에 넘쳐 있었으므로 민심을 일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도읍으로 정해진 곳은 ′은′이라 불리는 지방이었다.탕이 시작한 국호는 ′상′인데′은′이라 불린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라.은의 존재는 의심되고 있었다.《사기》로는 그 존재가 알려지고 있었지만 유적이나 유물로는 뒷받침되지 않았다.

 

그런데 은은 문자를 발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甲骨갑골에 새겨진 문자에 의해 자기들의 기록을 남겼다. 갑골이란 거북껍질이나 집승뼈라는 뜻이다. 짐승뼈를 불에 태우고 그 균일에 의해 사물을 점쳤던 것이다.

 

은시대 이전에도 뼈를 태워 길흉을 점치는 일은 있었다. 그러나 은 시대 이전의 뼈에 문자가 새겨져 있지 않다.무엇을 점쳤는가. 이것은′貞門정문의 辭사라고 한다. 균열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점의 판단을 繇辭요사라고 한다.이것이 은 시대에 이르자 갑골에 문자가 새겨졌다. 개중에는 그 점이 맞았는지 어떤지 결과까지 있었다. 통틀어 ′卜辭복사′라고 불린다.

 

짐승뼈라 하여도 대부분이 쇠뼈로. 견갑골 부분이 가장 많았다. 거북껍질은 등보다 배 쪽이 많이 사용된다.

이 갑골편의 발견은 우연한 일이었다.

 

1899년, 國子監祭酒국제감제주로 王懿榮왕의영이란 인물이 있었다. 국자감은 성균관을 말하며,′제주′는 그 장관이다. 그 문하생으로  劉顎유악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왕의엉의 영향을 받아 金石學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다.

 

왕의정에게는 학질이라는 지병이 있었는데, 지금의 말라리아이다. 특효약인 키니네가 없는 시대라, 학질이라면 ′용뼈′가 그 약이었다.왕씨으이 하인이 약방에 가서 그 용뼈를 사오면 그것을 빻아 ㅜ가루로 만들고 물에 타 마시곤 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 용뼈에서 이상한 부호 같은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용뼈, 즉 갑골은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농부가 하나 둘 주워다가 베이징의 약방에 빨고 있었다.

유악은 갑골 연구는 羅振玉나진옥에게 계승되었다. 그는 1910년 갑골의 출토자가 안양현 소둔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때는 혼란기라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좀더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1928년 조사단이 안양에 파견되었고, 단원 중에는 董作賓(동작빈:1895~1963)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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