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연구

중세유럽의 형성

박송 입니다. 2010. 5. 21. 19:40

 

 

◎중세유럽의 형성

 

 

 

역사학자 도슨 Dawson은 유럽이란  지리적 인종적구분이라기 보다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문화적 단위라 평하였다.  유럽의 어원은 소아시아의 셈족이 사용하던 어둠을 뜻하는 말이다: ereb.  페니키아인에게  유럽은 해가 지는 서녘 땅으로  의미하였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북방에 있는 형태를 모르는 피안의 세계'를 유럽으로 여겼다. 그리스 극작가 아킬로스(Aeschylus 472 B.C)와  히포클라테스등은  페르시아전쟁에 관한 언급을 통해  보스포로스, 다다넬스 해협의 서쪽을 유럽이라 칭하였다.  이소크라테스는  페르시아인과의 구별을 위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인을 유럽인이라 하였다. 알렉산더대왕의 이집트 묘비명에는 “그는 유럽의 지배자”로 각인되었다.

 

유럽의 기원은 실질적으로 게르만의 이동에 따라 로마제국의 해체과정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따라서 대다수 역사지리학자들은  로마문명이 게르만 야만족과의 융합과정에서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세 로마카톨릭교회는 기독교문명과 유럽문명을 동일시하여 소아시아지역과의 지리적구분을 강조하였다.  특히 6세기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유럽이란 기독교 교리에 의해 로마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지역'으로  선전하였다. 유럽이  최초로 개념화된 것은  칼(샤를르) 마르텔에 의한 아랍과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732년 Poitier에서의  이슬람세력을 격퇴시킨 마르텔의 군대는 새로운 군사공동체로 부각되었다. 즉  그는 자신의 군대를 유럽공동체:europenses의 군대라 칭하였다. 9세기 카롤링왕조이후  외부 이민족(아바르족, 터키족등)으로부터의 위협받는 지역을 유럽과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즉 유럽내부의- 로마카톨릭 세력 및 비잔틴세력의- 힘의 균형과 통일이 파괴될 때도 유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유럽문명의 탄생과 카로링왕조

 

카롤링왕조의 탄생에서 해체되는 과정에서 특히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되는 시기에 (751-962년)에 성립발전된 유럽문명은 다른 문명과의 지리적, 종교적 구분을 뚜렸하게 하였다. 이시기 게르만족은 점차적으로  로마화, 라틴화, 카톨릭화되었다. 이러한 결실은  프랑크왕국과 로마교회와의 정치종교적 타협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특히 프랑크왕국의 성립이래-특히 칼 대제(샤를마뉴)의 등장이래- 정복전쟁의 산물로써 미개한 게르만지역은 빠른 속도로 카톨릭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프랑크족 중심의 서유럽 정치적 개편작업은 게르만족이 카토릭세력과  융합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카롤링왕가와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휴는 고대로마의 유산과 게르만사회의 구조적, 실체적 접목을 의미하였다. 교황으로부터 샤를마뉴가 로마제국황제의 후계자로 대관된 것은 바로 정치적 통합력으로서 로마 카톨릭교회와의 게르만적 재구성을 의미한다.

 

실질적으로 서로마제국이 결정적으로  붕괴된 것은  7-8세기 칼 마르텔 궁제 (714-742)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지중해를 내해화한 이슬람세력을 파리근교 프와티에에서 물리쳤고 (732),  유럽의 중세사회로의 전환을 가속화한 은대지제도등 장원제도의 골격을 완성하였다.  이슬람의 침입과 연관된 카로링조의 성장은 그의 아들  피핀 751-768, 칼, 샤를르대제 768-814를 통하여 완성되었다.  당시 프랑크왕가는  로마교회 즉 교황을 보호하는 군주의 역할을 하는 정치군사적 책임이 중요시 되었고, 반면 교황은 정신적 수장으로 기독교제국의 교회 수장권을 인정받았다.

 

유명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인 랑케는 그의 저서 '로마적-게르만적 제요인'을 통해  “카톨릭적 봉건유럽의 형성과정은 구제국의 와해와 민족이동이 수반한 오랜 혼돈과  분열 및 창조적 재구성의 과정이며. 즉 로마라틴적, 게르만적, 기독교적 요소의 독특한 중세적 융합의 소산이다.”이라 평하였다. 결론적으로 카롤링조의 정치적, 군사적 통합과 이에 따른 유럽의 카톨릭화는 구로마제국의 영토와 변방 서유럽지역의  통합을 가속화시켰다. 따라서 문명사적으로 '유럽은 지중해세계의 일부가 아닌 새롭고 독자적인 사회형성에 직접적인 기초'로 성장하게 되었다. 

 

역사학자 H. Pirenne는  카롤링왕조가  중세사회의 핵심적 위치를 찾은 중요한 정치세력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이 없었더라면 프랑크왕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하메드 없이 칼 대제는 생각 할 수 없다.” 또한 게르만의 침입에도 로마의 로마적 요인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유지된점을 중시하였다. 그는  “게르만이   파괴한 것은 제국이 아니라, 제국의 정부이다' 라고 기술하였다.

 

중세 게르만 왕국의 변화

 

카롤링 왕조의 몰락원인은 무었보다도 9세기 초 -10세기 초 이슬람세력의 증대와 노르만족의 침입에 따른  3차 게르만의 민족이동에 기인한다.  노르만족은  프랑스와 잉글란드, 지중해지역등 전유럽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침입을 감행한 반면  이슬람세력은  지중해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여  에스파니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시칠리, 남부이탈리아 지역에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서유럽지역은  두 세력의 침입으로  분열되고, 황폐화되었다. 카롤링왕가는  독일에서는  911년까지, 프랑스에서는 987까지 명맥이 유지되었다. 결국  칼대제의 중앙집권적 통일 위업은  사후  50년도 가지 못하고  한계에 부닥치고  실패하게 되었다.  특히 9세기 이후  프랑크왕국이 분열하는 과정에서 지방분권적 요인이 강력히 대두되여 기존의  봉건적 은대지제도는 변모하였고, 중앙집권을 위한  가신의 지방파견은 성사되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중세 게르만 왕국의  특성(11-15세기)

 

1. 카톨릭 공동체의 유럽과 봉건사회라는 새로운 사회적 틀이 체계화되었다.  역사학자 M. Bloch는  카로링의 해체이후 10세기-14세기까지의  유럽적 상황을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종합하고 있다: “국가기능의 심각한 쇠약화, 토지의존적 사회로의 전환, 낮은 생산성과 전반적 빈곤화,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무력감과 절망감, 장원화된 개인들의  상호의존적 인간관계.” 한편  이시기 기독교 제국으로써의 유럽은  개념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역사학자 Karl Bosl의 주장에 따르면,  칼대제의 전략적 목표였던  기독교제국으로서의 유럽이라는 정신적 통일과업은  결국 실패하였다. 특히 11세기이후 황제권과 교황권을 상징하던 서임권 투쟁속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유럽은 이후  지리적 개념으로 남았다. 특히  13세기이후  십자군원정과   마르코폴로의 중국여행이후 유럽은 지리적으로 개념화되었다.

 

물론  중세 게르만 왕국은  지역적 왕권( koenigsherrschaft)이 바탕이된 지방영주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그들은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황제와 교황과의 대립구도안에서  제 3세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하였다.  그러한  배경은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의 카놋사의 굴욕과  그레고리 교황의  몰락과 이후 아비뇽의 유수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서유럽이 해체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중앙집권적  정치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지방분권세력의 덕택이었다.  사실상 9세기이후 지방영주의 강력한  대두는  유럽봉건세력의 중추세력을 담당한 셈이었다. 이러한 지방세력들은  약화된 중앙정부, 정치권위의 사유화, 봉토의 불입권 ( immunitas)을  토대로 고립된 농촌공동체를 장악하여  예속적 신분의 경작자계층(농노계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2. 분권적 정치질서의 제도화는 주종제(vassalage)의 확립과  농노제에 입각한 장원적 생산체제를 강화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지방영주는 중세유럽의 분권정치와 장원경제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적 현상은  중세 일본에서도 생성되었다. 한편   게르만 왕국의  분권적 봉건제는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급진전되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지역에서는  서서히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제와 근대 중앙집권적 국가의 성립관계를 살펴볼 때 분권화와 예속화만이 중세유럽사회의 특징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3. 보편적 정치공동체의 이념이었던  로마제국의 이념은 명목을 유지하였다.  게르만 왕국은  962년 Otto I 대제 (936-973)의  신성로마제국의 대관으로 로마정신은 형식상 유지되었지만 (나폴레옹이 합스부르크제국을 해체하는 1806까지 존속) 실질적인 정신적, 정치적 통일세계의 목표는 이루지 못하였다.  10세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은 로마신민으로서의  통일된 국가관으로 무장될 수 없었고, 단지  기독교공화국  또는 기독교 왕국의 정치적인  신민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근대적 의미의  중앙집권국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제국의 넓은   영토에는 주민들이 분산되여 엷게 정착하였고, 도시는 서부와 남부에 불과 몇 개만 존재하였다. 지금의 도로의 역할은 미약하였고,  흔히 오솔길인 로마길을 따라 사람들이 이동하였다. 당시의 왕은 일정한 성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13세기 까지는 '방랑하는 왕'으로 제국을 평정하였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행정조직과 공무원제도는 실현될 수 없었고,  다만 봉건적으로 개인적인 유대관계에서 국경의 행정과 재정은 유지되어야 만하였다. 토지는 가장 중요한  권력의 상징이었고,  교육을 포함한 교회의 특권은 포기될 수 없었다.  따라서 황제권를 유지할 근대적의미의 중앙집권적 관료제, 상비군, 조세제도등은 정착되지 못하였다.  다만 중세적 장원제도에 입각한 철저한 지방분권세력에 의존하여 제국은 통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정치적 의미가  결정적으로 상실된 것은 15세기 종교개혁에 파장에 따라  유럽사회가  분열된 이후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유럽의 정신적 통합은 어느 누구도 관심 밖이 일이었다.  다만 기독교의 분열과  종교적, 교회적 변화만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황제, 교황 및 교회의 보편주의는 결정적으로 붕괴되었고  지방분권적, 민족적 다양성과 관련된 공통의 문화와 문명의식이 성장하게 되었다.

 

4. 중세유럽의 정치문화의 특징은 보편주의와 지방주의의 대립에 있었다.  교회권력과 국가권력의 대립  또는 교권과 속권의 대립은  유럽중세 전반에 걸쳐 유지된 이원적 구조이다.  이러한 이중적 구도는 그리스도교가 대변한 로마,라틴제국의 이념과 왕실 및 봉건영주를 대변한 지방배타주의에서 그 특징적인 상호관련성을 잘 이해 할 수 있다.  두개의 보편주의인  교권과 속권은 상호 대립과  타협을 통해 중세의 역사적인 흐름을 가늠하였다.  역사학자  Kohn과  J. Huizinga등도 이에 동의 하였다.  '기독교적 유럽의 정치적 전개는 이중적 기초위에서 시작되었다.  즉  보편적인 기독교적 세계공동체 이념을 표방하며, 성격에 있어서는 야만적인 게르만적이며, 전통에 있어서 로마적인 여전히 불안정한 권력체계라는 현실이 그것이다.”

 

중세 기독교사회의 유럽문명사적 의미

 

로마제국의 멸망이후 생성된 분권적인 중세 유럽사회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정신적 사회였다.  이러한  기독교 공동체사회는   서구 문명사적으로  최초로 종교를 앞세운 지식과 의지의 사회를  성립시켰다. 이로써 기독교 문명은 성장 발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로마제국의 문명체계은 로마시민의  의무를 결속하기위한 강력한 정신적 제도적 장치가 부재하였다.특히 의무에 대한 교육적 조직체가 전혀 없었다. 또한 전체민중의 공동체의식을 조장하기위한 강력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가 없었다 . 즉 의지의 사회를 넓히기 위한 지식사회의 폭이 협소하였다. 로마의 지배층은  권력과 재산은 물론 지식을  독점하였고,  전체 민중의 지적수준은 혼란하였다. 특히 로마제국 말기 국가를 지탱할 확고한 종교사상이 없었고 미신이 만연하였다. 결국 로마몰락의 교훈으로 기독교는  종교와 교육의 힘의 공동체로서  민중의 의지를 결합시킬 수 있다는 명제를  남겼다.

 

로마카톨릭 교회는 로마제국에서 볼 수 없었던 '계통있는 민중설교의 조직' 역할을 담당하였고, 또한 일종의 수십 개의 종합대학을 갖추고 오늘날의 메스컴 역할을  당당케하였다. 따라서 카톨릭사회는 교육에 의해서 통치되는 사회라는 근본적 인식을 가능케 하였다. 특히  -“만인으로 하여금 알아야 한다”는 공적 기능의 틀을 제시하였다. 특히 카톨릭교회는 일반 대중에게 끝없는 선전과 교육을 통해 (대학과 수도원 학교의 역할  “근대교육   국가의 건설”의 기틀을 제공한 점을 높이 평가 해야 한다.

 

 

서유럽의 역사적 전개과정/카톨릭사회의 성장과 발전과정

 

1단계: 476-751년(서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카롤링왕가의 성립까지)

기본적 특징: 로마적 요소와 게르만적 요소의 혼재와 융합의 복합적 과정. 사회적으로는 게르만적 풍습, 관습의 강화되며 로마적 요소와 혼란과 혼동에서 동화와 융합의 특징.  경제적으로 라티푼디움(대토지소유제)의 해체와 촌락공동체의 형성과 확산. 정치적으로 로마의 조세와 행정 및 사법제도 등의 쇠퇴와 지방영주의 권한강화(지방분권제도의 강화)

2단계: 8-10세기: 카롤링왕조의 탄생에서 해체(751-962년 신성로마제국의 탄생)까지

게르만족의 로마, 라틴화, 카톨릭화의 특징. 프랑크왕국의 정복전쟁의 산물로 게르만왕국의 카톨릭화가 성사. 즉 프랑크족 중심의 서유럽 정치적 개편작업으로 게르만-로마적 요인이 융합과정의 초석 역할을 수행함. 특히 프랑크 왕국의 카로링가와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휴는 고대 로마유산과 게르만사회의 구조적, 실체적 접목을 의미함. Rome-idea: 로마제국의 후계자를 뜻하는 정치적 이념의 전통을 확립하여 그리스-로마의 지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함. 즉 정치적 통합력으로서의 로마 카톨릭교회와의 게르만적 재구성을 의미함.

 

로마제국의 결정적 붕괴는 7-8세기로 본다. 지중해를 내해화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유럽은 중세사회로의 전환이 불가피했다. (장원제도 등) 이슬람의 서유럽 침입과 연관된 프랑크족의 카로링가의 성장을 주목하라. 732년 칼 마르텔이 프와티에에서 이슬람세력을 격파시키면서 강국으로 급성장함. 이후 피핀 751-768, 샤를르대제 768-814로 서유럽의 정치적 권력이 집중되었다. 800년 칼 대제의 바티칸에서의 황제등극: 로마교황으로부터 대관은 게르만족의 로마구제국의 후예자 상속을 뜻함, 황제는 로마교회(교황)를 보호하는 군주의 역할: 정치적 책임과 교황은 정신적 수장으로 황제임명권을 통한 교회 수장권을 인정 받음.

 

L. von Ranke “카톨릭적 봉건유럽의 형성과정은 구제국의 와해와 민족이동이 수반한 오랜 혼돈과  분열 및 창조적 재구성의 과정이며. 즉 로마라틴적, 게르만적, 기독교적 요소의 독특한 중세적 융합의 소산이다.”카롤링조의 정치적, 군사적 통합과 이에 따른 유럽의 카톨릭화는 구로마제국의 서유럽지역의 통합을 가능케 함.

 

문명사적 의미. 유럽의 형성은 이제 지중해세계의 일부가 아닌 새롭고 독자적인 사회형성에 직접적인 기초가 됨. H. Pirenne는 카롤링왕가의 탄생으로 중세사회의 핵심적 위치가 확보되었다고 평가함. “이슬람이 없었더라면 프랑크왕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하메드 없이 칼 대제는 생각 할 수 없다.”게르만의 침입에도 로마적 요인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유지되었음을 주목하라. “게르만이   파괴한 것은 제국이 아니라, 제국의 정부”이다.


3단계: 카롤링가의 쇠퇴이후-종교개혁 이전까지(11-14세기) 

카롤링 왕조의 몰락원인은 이슬람세력의 증대와 노르만족의 침입에 따른 결과이다. 3차 게르만의 민족이동은 9세기 초~10세기 초에 있었다. 노르만족의 프랑스와 잉글란드 및 전유럽 지역에 대한 침입으로 인한 결과. 당시 이슬람세력 역시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다. (에스파니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시칠리, 남부 이탈리아 지역 포함), 비잔틴제국이 쇠퇴하는 시기이며 서유럽지역은 두 세력의 침입에서 분열되고, 황폐화되었다. 한편 카롤링왕가는 독일에서 911년까지, 프랑스에서 987년 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결국 칼대제(샤를마뉴)의 중앙집권적 통일 위업은  50년도 못가서 한계에 부딪치고 실패하였다. 즉 9세기이후 강화된 지방분권적 요인이 크게 대두하여 봉건적 은대지제도가 정착하고 중앙 가신의 지방 파견의 한계를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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