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 행렬
비는 내리는데 공양하는 사람이많아 빈대떡을 사먹었다.(공양은 봉선사에서 해결)
건강을 기원하는 약사여래!
두번째 운악산 봉선사
969년 고려 광종20년에 법인국사(法印國師)-탄문(坦文)이 창건하고 운악사(雲嶽寺)라 하였다.(구전)
그후 1469년 조선 예종 1년에 세조(世祖)의 비 정후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이산에 모시고는 광릉(光陵)이라 하고, 이어 당사를 선왕의 능침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삼고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奉先寺)라
하였다. 1592년 선조(宣祖)25년 임진왜란과 1636년 인조(仁祖)14년 병자호란 당시 소실된 것을 1637년 계민선사가 복구하였다. 1551년 명종 66년에는 교종의 수찰사로 지정되어 여기서 승과시를 치루기도 하였으며,
전국사찰을 감독하는 5규정소(糾正所)로 조선말에는 16개 중법산의 하나로 조선불교의 중추적기관으로 역할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공양 행렬
비는 내리는데 공양하는 사람이많아 빈대떡을 사먹었다.(공양은 봉선사에서 해결)
건강을 기원하는 약사여래!
두번째 운악산 봉선사
969년 고려 광종20년에 법인국사(法印國師)-탄문(坦文)이 창건하고 운악사(雲嶽寺)라 하였다.(구전)
그후 1469년 조선 예종 1년에 세조(世祖)의 비 정후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이산에 모시고는 광릉(光陵)이라 하고, 이어 당사를 선왕의 능침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삼고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奉先寺)라
하였다. 1592년 선조(宣祖)25년 임진왜란과 1636년 인조(仁祖)14년 병자호란 당시 소실된 것을 1637년 계민선사가 복구하였다. 1551년 명종 66년에는 교종의 수찰사로 지정되어 여기서 승과시를 치루기도 하였으며,
전국사찰을 감독하는 5규정소(糾正所)로 조선말에는 16개 중법산의 하나로 조선불교의 중추적기관으로 역할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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