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문학사

세르반테스

박송 입니다. 2010. 5. 20. 02:04

 

스페인이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극작가·시인.

 
그의 소설 〈돈 키호테 Don Quixote〉(1605)는 60여 가지 언어로 완역 또는 부분적으로 번역되었고, 꾸준히 판을 거듭하고 있으며, 작품에 대한 비평적 논의도 18세기 이래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라는 두 인물은 미술·연극·영화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세계 문학의 다른 어떤 허구적 인물들보다도 일반에게 친숙한 모습이 되었다. 세르반테스는 위대한 실험가로서, 서사시를 제외한 모든 주요문학 장르에 손을 댔다. 그는 뛰어난 단편소설 작가였으며, 그의 〈모범 소설집 Novelas exemplares〉에 실린 몇몇 작품은 규모는 작지만 〈돈 키호테〉에 필적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는 1547년 9월 29일(성 미카엘 축일) 마드리드에서 32㎞가량 떨어진 알칼라데에나레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며, 분명히 10월 9일 세례를 받았다. 본래 하급 귀족이었으나 영락한 가문의 일곱 자녀 중 넷째였고, 아버지는 이발사 겸 외과의로서 접골·사혈 등 사소한 의료행위를 했다. 가족은 여러 마을을 떠돌아다녔으며, 세르반테스가 어렸을 때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 없다. 〈모범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의 한 대목으로 미루어보아 한때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나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당시 비천한 출신의 작가들까지 포함한 대부분의 스페인 작가들과는 달리 그는 대학에 다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느 무렵엔가 열렬한 독서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마드리드에 있는 한 공립학교 교장으로 에라스무스적인 지적 성향을 지니고 있던 후안 로페스 데 오요스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라는 이름의 어떤 인물을 가리켜 그의 "친애하는 생도"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1569년의 일로, 만일 그것이 세르반테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면 당시 21세였을 미래의 작가는 전에 그 학교의 교생이었거나 아니면 로페스 데 오요스에게 배운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발표한 최초의 시(펠리페 2세의 젊은 왕비 발루아의 이사벨이 죽은 것을 애도하는 내용)가 나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군인 및 노예 시절
 
1569년 세르반테스는 스페인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다. 이탈리아로 건너간 이유가 당시 한 난투사건에 가담한 결과 법망에 의해 수배된 '학생'이 그였기 때문이었는지의 여부는 또다른 수수께끼이다. 아무튼 이탈리아로 간다는 것은 당시의 많은 스페인 젊은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출세하기 위해 택하는 길이었다. 그는 한동안 로마에서 추기경 줄리오 아크콰비바 가문의 집사로 일했던 것 같다. 그러나 1570년에는 스페인 왕국령이던 나폴리에 주둔해 있던 스페인 보병 연대에 속해 있었으며 약 1년간 그곳에 머물다가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셀림 2세 치하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는 위기에 이르렀고, 투르크인들은 1570년에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투르크 선단과 베네치아, 교황령, 스페인 해군과의 교전은 불가피했다. 1571년 9월 중순 세르반테스는 '마르케사호'를 타고 출항했다. 이 배는 오스트리아의 후안 공이 이끄는 대함대 소속으로, 이 함대는 10월 7일 코린트 근처의 레판토 만에서 교전에 들어갔다. 치열한 전투는 투르크의 참패로 끝나 이후 투르크는 지중해의 패권을 잃게 되었다. 세르반테스의 무공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들은 한결같이 그의 용맹함을 입증하고 있다. 열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후방에 남기를 거부하고 격전의 중심에 뛰어들었으며, 가슴에 총상을 2번 입었고 3번째 입은 총상으로 평생 왼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항상 자랑스레 전공을 회상했다고 한다. 1572~75년에는 주로 나폴리에 근거를 두고 군대생활을 계속했다. 나바리논에도 있었고 튀니스와 라골레타의 전투에도 참여했으며, 한편으로 틈만 나면 이탈리아 문학을 접했음이 분명하다. 1575년 9월 세사 공과 요한 공이 스페인 왕에게 보내는 추천장을 지니고 스페인으로 떠난 것은 사령관으로 진급하기 위해서였거나 단순히 군대를 떠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색인 : 레
 
판토 전투).
 
이 항해에서 타고 가던 배가 난파하여 바이에른 해적선에게 사로잡혀 세르반테스는 형제 로드리고와 함께 당시 이슬람교도 세계에서 그리스도교도 노예매매의 중심지였던 알제리에서 노예로 팔렸다. 그가 지니고 있던 편지들을 발견한 노예상인들이 그를 매우 중요한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몸값이 올라가 잡혀 있는 기간도 길어졌지만, 한편으로는 4번이나 탈출을 꾀하다 실패했을 때도 사형이나 고문, 신체 손상 등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의 주인이었던 배교자 달리 마미와 하산 파샤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에게 상당히 너그럽게 대했다. 같은 시기에 알제리에 잡혀갔던 그리스도교도 포로들의 생활을 기록한 적어도 2개의 문헌에 세르반테스가 언급되어 있는데, 그는 포로 사회에서도 분명히 용기와 지도력으로 명성을 얻었던 것 같다. 로드리고가 자유의 몸이 된 지 3년 만인 1580년 9월 마침내 그의 가족은 성삼위일체회 수도회 수사들의 도움과 중재로 세르반테스의 석방을 위한 금화 500에스쿠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하산 파샤가 팔다 남은 노예들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는 세르반테스의 생애에서 가장 모험에 찬 시기로서, 그의 여러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돈 키호테〉에 나오는 포로의 이야기와 알제리를 무대로 한 2편의 희곡 〈알제리의 교통 El trato de Argel〉·〈알제리의 감옥들 Los baños de Argel〉, 그리고 본격적인 자서전 형식으로는 씌어진 적은 없지만 다른 여러 작품에 나오는 일화들이다.
 
 
 
 
 
 
 
작가시절
 
스페인으로 돌아온 뒤, 세르반테스는 여생의 대부분을 이전의 격동과 위험스러운 시기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방식으로 보냈다. 그는 지루하고 힘든 일을 하며 항상 돈에 쪼들렸던 것 같다. 〈돈 키호테〉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그로부터 25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귀국한 뒤 곧 그는 물가가 올랐으며 많은 사람들, 특히 그의 가족과 같은 중류 계층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현저히 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레판토 해전에서 거둔 승리는 옛 일이 되고 말았다. 세르반테스의 무훈에 대한 기록은 이제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보상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사업에 따르는 여러 군데 행정직에 지원해보았으나 허사였다. 고작 얻을 수 있었던 것은 1581년 왕의 특사로 잠시 오랑에 파견되었던 것뿐이었으며, 펠리페 2세와 궁정을 따라 새로이 병합된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 갔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이무렵 젊은 유부녀 아나 데 비야프란카(또는 아나 프란카 데 로하스)라는 여성과 연애 사건을 일으켰고, 그결과 딸 이사벨 데 사아베드라를 낳았다. 이사벨은 그의 유일한 딸이었고 뒤에 그의 집에서 자랐다. 그후 1584년 자신보다 18년 연상의 여인인 카탈리나 데 살라사르 이 팔라시오스라와 결혼했다. 그녀는 라만차의 에스키비아스 마을에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애정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세르반테스가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야 할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결혼이 그럭저럭 괜찮은 동반 관계로 자리잡았다고 보아서 안 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가 당시 쓰고 있던 시나, 최초로 출판된 소설이자 새롭게 유행하던 전원 로맨스 〈라 갈라테아 La Galatea〉(1585)의 등장인물들이 카탈리나에게서 영감이나 모델을 얻었다고 보아야 할 이유 역시 없다. 출판업자 블라스 데 로블레스는 이 작품에 1,336레알을 지불했는데, 첫 작품치고는 만족할 만한 값이었다. 이 작품을 아크콰비바의 친구 아스카니오 콜론나에게 헌정한 것은 후원을 얻으려는 시도였으나 소득이 없었던 것 같다. 시인 루이스 갈베스 데 몬탈보를 위시한 문학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 책은 세르반테스에게 고급 독자층 사이에서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작가의 생전에 이 작품이 스페인어로 다시 발간된 것은 1590년의 리스본판과 1611년의 파리판뿐이었다. 〈라 갈라테아〉는 이야기 중간에서 갑자기 끝나버리는데,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여러 번 의사를 표명했던 것으로 보아 세르반테스는 분명히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스페인 연극의 황금기가 막 시작되려던 이무렵에 세르반테스는 극작에도 손을 댔다. 1585년 가스파르 데 포라스라는 극장 지배인과 2편의 극을 쓰기로 계약했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이 일찍이 썼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술회했던 〈혼동 La confusa〉이다. 수년 뒤에 그는 이 시기에 20~30편의 희곡을 썼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적어도 관중의 야유는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의 수는 확실하지 않으며, 남아 있는 것은 〈라 누만치아 La Numancia〉·〈알제리의 교통〉 2편뿐이다. 그는 9편의 희곡을 들고 있으나, 그중 몇몇 작품은 제목으로 미루어보아 뒤에 〈8편의 새 희곡과 8편의 막간극 Ocho comedias, y ocho entremeses nuevos〉(1615)에 실린 작품들의 원형인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주요도시에는 상설극장들이 설립되고 있었고 전에 없이 오락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희곡 시장은 급성장했다. 그러한 요구에 부응해 나타난 로페 데 베가는 스페인 연극에 자신의 독창성을 부여해 그의 작품에 비하면 세르반테스의 것들까지 포함한 이전의 모든 희곡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어색한 것이 되었다. 극작가로서는 실패할 것이 뻔했음에도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극작품을 받아줄 지배인들을 계속 찾아다녔다. 1587년경에는 글을 써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음이 분명해져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해야만 했다.
 
그는 무적함대를 위한 식량조달관이 되었다. 농촌에서 억지로 옥수수와 기름을 차출하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으나, 결국 이것이 그의 고정직이 되었다. 일 때문에 그는 안달루시아 지방 일대를 돌아다녀야 했고, 이는 작품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미로처럼 복잡한 재정적 문제의 책임을 맡고 있었고, 장부상의 수지를 맞추지 못할 때는 상관들과 거듭 반복되는 불화를 겪었다. 또한 시나 교회 당국과 끊임없는 마찰을 빚었고, 교회로부터는 여러 차례 파문을 당했다. 문제시된 회계와 협상에 관해서는 상당한 자료들이 남아 있다.
 
1588년 무적함대가 참패한 뒤에 스페인의 상업 중심지이자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인 세비야로 갔다. 1590년 서인도제도 의회에 지원하여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비어 있는 4개의 요직 가운데 하나라도 얻기 원했으나, 그의 청원은 깨끗이 거절되었고 회계에 대한 분쟁과 급여 체불은 계속되었다. 그는 문단과 어느 정도 교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 권의 책을 샀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것들을 읽으려 시간을 냈음이 분명하다. 1592년에 로드리고 오소리오라는 극장 지배인에게 6편의 희곡을 써주기로 계약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조달관 업무는 계속되었고, 분쟁은 막바지에 이르러 1592년 9월 카스트로델리오에 며칠간 감금되었다.
 
 
1594년 마드리드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중 다시금 안달루시아로 돌아가 체납된 세금을 거두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것은 승진에 해당하는 일이기는 했으나 이전 일보다 나을 바가 없었고, 전과 마찬가지로 재정적 곤란과 분쟁이 따르는 일이었다. 세르반테스에게는 사업가 기질이 없었다. 아마도 상호 합의에 의해 그 임무는 1596년에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전해에 그는 사라고사에서 열린 시 경연대회에서 1등상(은수저 3개)을 수상한 바 있었고 세비야로 돌아와 비로소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행실에 관한 심술궂은 풍자 소네트나 이어서 당시에 서거한 국왕에 대한 은근히 불경스런 소네트가 씌어진 것도 이 시기였다. 다시금 그는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1597년 여름에는 3년 전에 맡았던 회계에 차질이 생겨서 세비야 왕실 감옥에 감금되어 1598년 4월말까지 그곳에 있었으며, 세르반테스는 그곳에서 〈돈 키호테〉를 구상한 듯하다. 이후 4, 5년간의 행적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세비야를 떠나 아마도 잠시 에스키비아스와 마드리드에서, 그리고 분명히 바야돌리드(1601~06년 왕의 궁정이 그곳에 세워졌음)에서 〈돈 키호테〉의 첫부분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초기 단편들 중 〈린코네테와 코르타디요 Rinconete y Cortadillo〉·〈질투심 많은 엑스트레메뇨 El celoso extremeño〉는 프란치스코 포라스 데 라 카마라가 잡다한 글들을 엮은 미발표 선집에 실리게 되었다.
 
1604년 7월(또는 8월)에 세르반테스는 출판업자이자 서적상인 프란치스코 데 로블레스에게 〈라만차의 현명한 신사 돈 키호테 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의 저작권을 팔았다. 그가 받은 액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9월에 출판이 허가되었고, 1605년 1월에 발간되었다. 출판되기도 전에 책의 내용이 당시 세르반테스와 최악의 관계에 있던 로페 데 베가를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으리라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텍스트의 상당히 많은 오류들이 오랫동안 저자의 실수로 여겨졌으나, 오늘날 많은 오류에 대한 책임이 마드리드에 있는 후안데라쿠에스타인쇄소의 식자공들에게 있음이 밝혀졌다. 〈돈 키호테〉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1599년에 나온 마테오 알레만〈구스만 데 알파라체 Guzmán de Alfarache〉 제1부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1605년 8월 이전에 마드리드에서 2판, 리스본에서 2판, 발렌시아에서 1판을 찍었고, 뒤이어 1607년에 브뤼셀, 1608년에 마드리드, 1610년에는 밀라노, 1611년에는 다시 브뤼셀에서 판을 거듭했다. 〈라만차의 현명한 기사 돈 키호테의 제2부 Segunda parte del ingenioso cavallero Don Quixote de la Mancha〉는 1615년에 나왔으며, 1612년에는 토머스 셸턴이 번역한 제1부의 영역판이 나왔다. 세르반테스의 이름은 곧 스페인뿐 아니라 영국·프랑스·이탈리아에도 알려졌다.
 
그러나 저작권을 팔았다는 것은 그가 자신이 쓴 소설의 제1부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재정적 이익을 누릴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는 후원자와 관련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해야 했다. 책을 젊은 공작 베야르에게 헌정한 것은 실수였으나,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었던 레모스 남작과 톨레도의 대주교 산도발 이 로야스와는 좀더 나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어 레모스 남작에게 제2부와 3편의 작품을 헌정했다. 그리하여 재정적 형편이 다소 나아졌으나 세르반테스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국민적 작가로서 인정받기를 갈망했으며, 로페 데 베가나 시인 루이스 데 공고라 이 아르고테에 견줄 만한 명성을 원했다. 자신의 변변하지 못한 위치에 대한 의식은 〈파르나소로의 여행 Viage del Parnaso〉(1614) 또는 이후의 2~3편의 서문들, 그리고 몇 가지 외적 자료들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교적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야심과 소설 형식에서의 지칠 줄 모르는 실험 의욕은 남은 생애가 12년도 채 남지 않은 57세의 세르반테스로 하여금 가장 왕성한 창작기를 맞이하게 했다.
 
 
한편 가정생활도 여의치 못했다. 1605년 6월 바야돌리드에 있는 집앞 길에서 칼부림이 일어나 어처구니없게도 온 가족이 체포되었다. 뒤에 그들이 마드리드로 궁정을 따라갔을 때도 그는 여전히 돈문제로 분쟁에 휘말렸으며, 이사벨의 시끄러운 결혼문제까지 겹쳐 끊임없이 고통을 받았다. 가족은 그뒤 여러 해 동안 여러 동네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카예데레온에 정착했다. 당시의 많은 작가들처럼 세르반테스도 1610년 나폴리 총독이 된 레모스 남작의 비서직을 얻고자 했으나 실망만 안게 되었다. 1609년에 당시 유행하던 종교단체인 '지복성사의 노예'(Slaves of the Most Blessed Sacrament)에 가입했던 그는 4년 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재속 회원이 되었는데, 이는 보다 진지한 결단이었다. 또한 1612년에는 일종의 작가 단체인 아카데미아 셀바헤에 참여하는 등 문단 생활에 전보다 활발히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에 12편의 소설이 실린 〈모범 소설집〉이 발표되었다. 그 서문에 유일하게 알려진 작가의 자화상이 실려 있다. "독수리 같은 생김새로, 짙은 갈색 머리카락, 부드럽고 훤한 이마, 명랑한 눈매, 균형이 잘 잡힌 매부리코, 20년 전까지만 해도 금발이었으나 하얗게 세어버린 수염, 커다란 콧수염, 작은 입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빨들, 이빨은 이제 6개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건강하지도 않고 아래윗니가 제대로 맞지도 않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키에 피부색은 흰 편이다. 어깨는 다소 묵직하고, 걸음걸이는 그다지 가볍지 않다." 이 서문에 밝힌 대로 세르반테스가 카스티야 방언으로 최초로 독창적인 노벨라(이탈리아풍 단편소설)를 썼다고 한 주장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으나 각 작품의 정확한 창작 연대는 불확실하다. 선집에는 약간의 다양성이 있어, 크게 로맨스에 기초한 이야기들과 사실적인 이야기들로 구분된다. 악한소설과 비슷한 노벨라 〈개들의 대화 El coloquio de los perros〉와 그 틀이 되는 이야기인 〈사기 결혼 El casamiento engañoso〉은 아마도
〈돈 키호테〉에 버금가는 독창적인 작품들일 것이다. 17세기에는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더 인기가 있어서, 제임스 매브는 이런 이야기만을 면밀히 선별하여 1640년에 영역판을 냈다. 19~20세기에는 사실적인 이야기들을 선호했으나, 다른 이야기들도 공정한 평가를 받았다.
 
1614년에 세르반테스는 〈파르나소로의 여행〉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신화를 모방하여 풍자적 어조로 쓴 긴 알레고리 시로, 산문으로 된 후기가 덧붙어 있다. 당대의 많은 시인들을 칭송하는 한편 몇몇 시인들을 풍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작가는 시를 쓴다는 것이 자신에게 쉬운 일이 아님을 인정하면서도 시야말로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 될 순수예술이라고 경의를 표하고 있다. 자신의 희곡 중 단 1편도 상연되지 않으리라 낙심한 그는 1615년 그중 8편을 골라 8편의 희극적인 막간극과 함께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이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그 희극들은 창의성과 독창성이 부족하지는 않으나, 연극이라는 매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막간극들은 걸작으로 간주된다.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 제2부를 쓰기 시작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1614년 7월말 이전에 절반 이상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9월경에 날조된 제2부가 타라고나에서 알론소 페르난데스 데 아베야네다라는 신원불명의 아라곤인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책은 나름대로 장점도 있으나 원전에 비하면 조잡한 것이었다. 로페 데 베가의 찬미자였던 이 작가는 서문에서 세르반테스에게 근거 없는 모욕을 퍼부었는데, 세르반테스는 당연히 반격하여 응수했다. 하지만 당대의 어떤 문학적 경쟁자들 사이에 오간 욕설에 비하면 그의 반격은 비교적 절제된 것이었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소설 제59장 이하에서도 페르난데스 데 아베야네다와 '가짜' 돈 키호테 및 산초에 대한 비판을 싣고 있다. 〈돈 키호테〉 제2부는 1615년말 제1부를 펴냈던 같은 인쇄소에서 출간되었다. 그것은 1616년 브뤼셀과 발렌시아에서, 1617년 리스본에서 재인쇄되었고, 1617년 바르셀로나에서는 처음으로 제1·2부가 합본되었다. 제2부의 프랑스어 번역판은 1618년에, 영역판은 1620년 이전에 나왔다. 제2부는 제1부에 잠재된 가능성을 작가의 목적에 맞게 이끌어내어 친숙해진 테두리 안에서 내용을 다양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2부가 제1부보다 더 풍부하고 심오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말년의 세르반테스는 여러 편의 작품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나, 그것들은 실제로 씌어지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분명히 발표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작품들로는 〈베르나르도 Bernardo〉(스페인의 전설적인 영웅의 이름)·〈정원에서의 주일들 Semanas del jardín〉(〈데카메론 Decameron〉 형식의 이야기집)·〈라갈라테아〉 속편 등이 있다. 실제로 출판된 작품은 마지막 로맨스인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의 사역:북방의 이야기 Los trabaios de Persiles y Sigismunda, historia setentrional〉(1617, 사후 출판)뿐이다. 거기에서 세르반테스는 사랑과 모험을 내용으로 하는 영웅 로맨스를 헬리오도로스(230경~240 활동)의 〈아이티오피카〉풍으로 개작하려 했는데, 이는 17세기 프랑스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될 지적으로 탁월한 장르였다. 교훈과 오락을 동시에 제공하려는 의도를 지닌 〈페르실레스〉는 로맨스가 지닌 신화적·상징적 잠재력을 활용한 야심적인 작품으로 발표되자 큰 성공을 거두어 2년 만에 스페인어로 8판이 나왔고, 1618, 1619년에는 각기 프랑스어 번역판과 영역판이 나왔다.
 
죽기 3일 전에 쓴 헌정사에서, 세르반테스는 '이미 한 발을 말 등자에 올려놓고서' 감동적인 어조로 세상에 하직을 고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까지 맑은 정신을 잃지 않고 최후의 평정한 상태에 도달했던 것 같다.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던 것처럼 1616년 4월 23일이 아니라 4월 22일에 사망했을 것이 거의 확실시되며, 매장 확인서에 따르면 바로 다음날 '카예데칸타라나스'(지금의 카예데로페데베가)에 있는 맨발의 삼위일체회(Discalced Trinitarians)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남긴 유언장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요성과 영향
 
세르반테스의 가장 위대한 작품 〈돈 키호테〉가 나온 것은 1세기 이상에 걸쳐 이루어진 스페인 산문소설 작가들의 혁신적이고 다양한 성취의 결과였다. 그 직전에 악한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작품들이 갑작스레 유행했었는데, 세르반테스 역시 〈린코네테와 코르타디요 Rinconete y Cortadillo〉라는 악한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의 다른 어떤 종류의 소설들보다도 많이 출판되었으나 당시 스페인에서는 눈에 띄게 쇠퇴해가던 장르였던 기사도 로맨스의 패러디인 〈돈 키호테〉는 흔치 않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인 노신사는 그러한 로맨스들을 읽는 데 중독이 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져서 그 이야기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으며 자신도 순례기사가 되어 세상에 나가 몸소 기사도 로맨스를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주인공의 행적이 기본적으로 사실적인 소설의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개발할 만한 괄목한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입증되었다.
 
돈 키호테, 산초 판사, 돈 키호테의 말 로시난테 등은 즉시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1605~17년 페루에서 독일로 이어지는 축제 행렬에도 이들의 모습이 등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책을 이후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16세기말에는 특히 외국에서 그 주가가 치솟았다. 〈돈 키호테〉는 산문으로 된 일종의 서사시로 간주되었고, 작가의 아이러니가 지닌 '장중하고 진지한 어조'는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때로는 이것을 정치적이거나 기타의 내용을 싣고 있는 위장된 풍자로 보는 비의적 해석들도 나타났다. 노신사를 점차 동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에 의한 해석적 변형의 시작을 알렸으며, 가장 희극적인 책의 우스꽝스러운 주인공은 가장 슬픈 책의 비극적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그 같은 왜곡에도 불구하고 세르반테스의 소설은 오늘날 의심할 여지 없는 깊이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소설사에서 〈돈 키호테〉는 선구자적 역할을 한 소설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증거는 디포·필딩·스몰렛·스턴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또
 
한 스콧, 디킨스, 플로베르, 페레스 갈도스, 멜빌, 도스토예프스키 등 19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주요작품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어 왔다. 나아가 조이스에게서 보르헤스에 이르기까지 사실주의 이후의 20세기 많은 작가들에게도 〈돈 키호테〉의 영향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영향'이라기보다는 세르반테스가 소설이라는 장르가 지닌 가능성의 핵심을 갈파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뿐 아니라 〈돈 키호테〉는 다른 장르나 매체의 예술가들에게도 탁월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다. 17세기 이래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많은 연극·오페라·발레·음악 작품이 만들어졌으며, 20세기에 들어서는 영화·텔레비전·만화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또한 〈돈 키호테〉는 호가스·고야·도미에·피카소 등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작품의 삽화로는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것들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돈키호테
배경 16세기 말//감옥과 상상 속의 여러 장소//  
 
줄거리  
무대는 16세기말 스페인 쎄빌시에 있는 감옥의 미결수 대기실에  
신성모독죄로 끌려온 세르반테스와 그의 하인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이미 수감중이던 죄수들에 의해, 세르반테스는 가상재판을  
받게되며 그 재판에서 불량시인에다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이며  
신성을 모독한 죄가 있다고 판결을 받게된 세르반테스는 극중에서 자기  
변호를 위해 죄수들을 배역으로 연극을 시작한다.  
악랄한 현실에 격분하고 자신의 건전성에 실망하고 기발한 묘안으로  
"나는 천부받은 기사요 악을 타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는 돈키호테와  
그의 하인 산초를 등장시킨다.  
그 두 사람은 곧 악의 타도를 위해 출발을 하는데 처음 난관은  
돈키호테에게 마술왕으로 보이는 풍차와의 결투였고 이 결투에서 패배한  
돈키호테는 작위를 갖고 있지않은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단정을 짓고  
성주를 찾아가 정식 작위를 받고자 한다. 곧 성으로 보이는 여관에  
당도한 그들은 알돈자와 마부, 여관주인, 하녀 등을 만나나  
돈키호테에겐 성주 공주 신하들로 보일 뿐---.  
그 무렵 돈키호테의 집에서는 그의 조카딸 안토니아가 약혼자  
까라스코 박사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광증으로 가출을 한 돈키호테를  
찾기위해 의논을 한 끝에 그를 찾아 그의 광증을 고치기로 하고는  
약혼자 까라스코, 신부, 알돈자는 돈키호테를 찾아 나선다. 결국 그들은  
여관에서 돈키호테를 만나게되며 그때 돈키호테는 알돈자(둘시니아)에게  
성을 방문한 기념으로 행주를 받을 무렵이었고---세사람은 각각 미콩,  
미콩 왕국의 공주및 귀족으로 가장하여 돈키호테에게 기사도를  
발휘하게끔 거짓을 꾸며 구원을 정식으로 요청한다.  
결국 거인으로 보인 포도주 푸대와 일전을 벌인 돈키호테는  
기진맥진한 끝에 현실에 눈을 뜨게되나 그것도 잠시일 뿐 곧 다시  
환상으로 되돌아온다. 다시 이발사와 마부들을 적으로 생각한  
돈키호테는 황금투구(면도대야)를 탈취한 후 승리의 기쁨에 대취되며  
여관주인(성주)으로부터 '상처투성이의 기사'라는 이름으로 작위를  
수여받게되고, 그 무렵 안토니아는 여관 주인에게 자세한 내막을  
알린다.
  
작품설명 장선영(외국어대학교수)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유사이래 수많은 작가가 이 세상에 걸작을 남겨놓았다. 그 중에서도  
인류의 문화와 더불어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작품은 세익스피어의  
<햄릿>, 괴에테의 <파우스트>, 톨스토이의 <부활>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다음으로 인류에게 가장 많이 읽혀졌다는  
돈키호테는 어느 선위에 놓아야 그 작가 세르반테스(1547-1619)가  
흡족해 할까? 서반아 문학사에도 이 작품이 세계에서 가장 잘 된  
소설이라는데 이의를 제기치 않는다. 그렇다, 누가 감히 이 작품이  
서반아 문학의 금자탑이며 또한 세계문학의 최고봉이라는데 이견을  
내놓을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런 대작(大作)을 남겨놓은  
세르반테스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이  
<돈키호테>를 쓴 동기가 그의 삶에 불운(不運)을 준 사회에 대한 도전에  
의해서 생겨났던 것인 만큼 우리의 호기심은 더욱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하겠다.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사회에 대해 토하는 울분을,  
다시말해서 마음 속의 울분을 행동으로 보여준 작중인물이다.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기이하게 보여서 우리는 그를 가리켜  
광인(狂人)이라고 부르지만 그러나 그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이다.  
흔히 돈키호테를 가리켜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인물이라고 평하지만  
실은 이상보다는 행동에 앞서는 사나이이다. 행동! 이것은 허약한  
지식인이 몹시 부러워하는 합리적인 모험이다. 세르반테스도 이 부류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는 돈키호테같은 기인(奇人)을 내세워 갖가지  
기상천외한 행동들을 일으키게 한다. 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세르반테스의 기구한 사연이 있다.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잉태된 작중인물(作中人物)이다. 세르반테스는 사회에  
대한 증오를 돈키호테를 통해 폭발한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살아온 길을  
살펴보면 그에 대해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다.  
세르반테스는 가난한 외과의(外科醫)의 7남매 중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도 빈한하고 형제도 많은 지라 별로 귀여움도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 또한 정규 교육도 받을 수 없었다. 타고난 재주와  
공부하고 싶다는 열의는 대단했지만 현실은 그에게 최소한도의 충족감도  
주지 않았다. 고로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한 그는 어려서부터 불만이  
많았다. 이 불만은 급기야 20세 되던 해 가출(家出)하는 결과를 빚었다.  
마드리드에 와서 로뻬데 오요스가 경영하는 사숙(私塾)에 들어가  
라틴어와 고전문학을 배웠다. 여기서 그는 글짓기대회에 나가서 장원을  
하는 등, 주위에서 문재(文才)가 있다는 칭찬을 들었으나 곧 이태리로  
건너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일자리를 찾아 그 먼  
곳으로 떠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태리에서도 별로 뾰족한 수가 없어서  
군대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571년 레빤또해전(海戰)(오토만제국과  
서번아를 비롯한 기독교연합국들과의 싸움으로서 레빤또는 그리스  
해협에 위치하고 있다)에 참전했다. 이 바다싸움에서 그는 용감히  
싸웠으나 그만 왼팔을 잃고 일생동안 불구가 되었다. 할수없이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그만 알제리 해적을 만나 포로가 되어 그만 5년 동안  
노예신세로 전락했다. 수차 탈출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그때마다 갖은 곤욕을 치렀다. 그가 결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이유는  
왕제(王弟)의 추천장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서반아에 가기만  
하면 이른바 출세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신만고끝에  
몸값을 치르고 귀국했으나 그 추천장은 이미 시효(時效)가 지난 거였다.  
아무도 이 레빤또해전의 용사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할수 없이  
호구지책으로 글을 썼다. 희곡이든 소설이든 닥치는 대로 썼다. 그러나  
당시 글을 써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18세나 아래인 처녀와 결혼을 함으로 해서 생활은 더욱더 곤궁했다.  
견디다 못해서 1587년, 즉 40세 되던 해 무적함대의 군량조달을 위한  
이른바 군량징수관이 되었다. 결국 이것은 관직(官職)인데, 여기서  
우리는 세르반테스가 감투에 굉장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에 지쳤기 때문에 한번 잘 살아보겠다는  
것이 지대한 야심이었다. 그래서 문재(文才)를 이용해서 글을 썼다.  
그러나 돈벌이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관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여러방법으로 운동한 결과 군량징수관이 된 것이다. 그는 자기  
직무에 충실했다. 어찌나 충실했던지 농민들로 부터 사정없이 마구  
식량을 징수하는 바람에 원성을 들을 정도였다. 이 원성이 상부에  
보고되자 회계감사관이 왕명(王命)을 받아 조사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세르반테스가 식량을 부정 착복한 것이 들어났다. 실은 회계감사관의  
계산착오로 그렇게 된 것인데 세르반테스의 변명도 듣지않고 무조건  
투옥시켰다. 왜냐하면 회계감사관은 세르반테스는 느끼는 바가 많았다.  
나라를 위해서 팔까지 잃고 게다가 군량징수관으로서 충성을 다하였건만  
국가로 부터 받은 보수는 고작 감옥살이가 아닌가? 자신의 양심적  
성실성은 사회의 모든 모순과 불의에 의해 여지없이 패배당하고 만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 자기를 단순한 사감때문에 억지로 유죄언도를  
내린 그 회계감사관에 대해 그는 심한 구토를 느꼈다.그리하여 그는  
결심하였다. 이 모든 사회악과 싸우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힘이  
없었다. 그러나 붓이 있었다. 그리하여 붓을 휘둘러 천하의 불의와  
대결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무모하게 정면대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내적 성격과 사회저류를 깊이 파고 들어가서 날카로운 분석으로  
사회의 모든 불합리성을 냉철하게 풍자하려고 하였다. 이렇게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돈키호테이다. (얼마 안있어 세르반테스는 누명이  
벗겨져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 회계검사관은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것이 세르반테스를 몹시 슬프게 했다.)  
출옥하자 그는 관직도 떨어졌는 지라 다시 호구지책으로 희곡을  
쓰면서 돈키호테에 대한 구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드디어 1605년  
<돈키호테> 전편이 빛을 보게 되었다. 대성공이었다. 당장 장안의  
지가(紙價)를 올려 그 해에 무려 6판이나 찍어냈다. 그러나 정작  
세르반테스는 경제적으로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몇 푼 안되는 돈을 받고 미리  
넘겨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출판업자는 벼락부자가 되고  
세르반테스는 분통이 가슴만 칠 뿐이었다. 어찌나 화가 났던지  
<돈키호테>의 후편(後篇)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을 정도였다. 그러자  
가짜 <돈키호테> 후편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세르반테스는 할 수 없이  
이 가짜들을 몰살시키기 위해서 다시 붓을 들었다. 그러나 전편만큼은  
정열이나 감동이 없는 그런 작품이 되고 말았다. 어쨌던간에 이 후편은  
1615년에 나타났는데,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부터는 작가로서  
여유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워낙 불운(不運)으로 점철된  
일생인지라 시름시름 앓다가 1619년 끝까지 손에 붓을 쥔 채 한많은  
삶을 끝냈다. 그러나 그는 <돈키호테>를 남겨놓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인류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빛나고 있다.  
여기서 보다시피 '돈키호테'는 저자 세르반테스의 사회에 대한 복수의  
화신(化身)이다. 다지 그 복수가 풍자와 해학의 방법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돈키호테>의 등장인물은 약 600명되지만 주인공은  
편력기사라고 자처하는 돈키호테와 그의 종자(從者) 산쵸 판사이다. 이  
두 사람이 서반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별의별 기행(奇行)들을  
저지른다. 이에 대해 철없는 독자는 깔깔 웃음을 터뜨리지만 인생의  
참뜻을 깨달은 독자는 한숨을 쉬거나 또는 눈물을 흘린다. 왜냐하면  
가장 인생을 고생스럽게 산 세르반테스가 오열을 터뜨리면서 쓴 이  
작품속에서 그 독자는 눈물의 수정체(水晶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참여의말 (기획의 말)//
(작가의 말)//
(연출의 말)//손진책  
<<연출에 임하면서>>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문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처럼 인류에게  
널리 사랑을 받아온 고전(古典)도 드물 것이다.  
고전(古典)이 갖는 힘은 그것이 지닌 의미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초월하여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라도 크게  
공감을 주고 감동을 받게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더구나 일생을 사회의 냉대와 불운 속에서 파란만장하게 살고 간  
세르반테스가 그의 극적인 사회경험을 통하여 본 사회의 모순됨에 대한  
저항정신을 작품 <돈키호테>에 담은 것은 지성인과 선인이 구축당하고  
악하고 약은 자들만이 설치는 세상을 한 번 통렬하게 비꼬아주고 싶어서  
였던 것으로 보인다.  
뮤지컬 <돈키호테>는 마치 각색의 바이블과도 같은 데일 워써만의  
창의적인 구성과 작곡자 미치 레이의 훌륭한 음악이 낳은 빼어난  
작품이다.  
당시의 세르반테스가 느꼈던 감옥과도 같은 현실이 곧 작품의  
무대설정을 감옥으로 제한하고 있다. 여기서 내게 흥미있게 보여진 점은  
세르반테스가 곧 <돈키호테>로 넘나들고 모든 죄수들이 작품의 여러  
등장인물 노릇을 한다는 동양적인 연극술이다.  
곧 쉽게 말하자면 이것이 곧 서양의 마당극이라는 점이다.  
서양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마당극의 묘미와 장점을 번역극을 통해  
알려주고자 했던 이번 작품에서 나는 관객의 환상속에서 탄력없는  
박제성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이 빚어낸 살아있는 역동적 인간들이  
직접 무대를 채우기를 바랬다. 그래서 가능한 연출, 또 연기에 어려움이  
더 하리라 생각하면서도 모두를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극이 진행 되도록  
해봤다. 그것이 내가 해야될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꿈을 갖는다. 그러나 그 꿈을 마음 속에서만 간직하고  
있을 뿐 감히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무기력한 현대인에게 행동파  
'돈키호테'의 실천의지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흔히 인간의 유형을 햄릿 형과 돈키호테 형으로 구분하지만  
돈키호테는 사색없는 우둔한 행동파는 아니다.  
그는 자유와 정의를 생명보다 소중히 생각하며 인간성에 충실하고  
사회의 품격을 높이기 위하여 과감한 자기 희생을 실천한다. 어떠한  
실패에도 굴하려 하지 않고 이상을 실현키 위한 굳건한 정신과 결심은  
이기주의적이고 타산적인 왜소한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려 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줄로 믿는다. 어려운 뮤지컬 공연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협조해 주신 김희조님, 박만규님, 서현석님께 감사드리며 짧은 기간동안  
무리한 연습일정 속에서 열성적으로 땀을 흘려준 출연자, 스탭, 그리고  
도와주신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기타의글 (인사말)//김동훈(한국연극협회이사장)  
<<5월 청소년 공연예술제>>  
5월 청소년의 달을 맞이하여 연극, 전통예술, 무용 등 무대예술을  
망라하여 '85 청소년 공연 예술제'가 올려진다. 국립극장,  
한국방송공사(KBS), 문교부, 노동부, 문예진흥원, 청소년연맹, 예총  
산하 공연예술단체들이 청소년 문화환경 개선과 조성에 고군분투하여 그  
운동의 하나로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된 이번 행사는 청소년문화에  
대한 괄목할만한 잔치가 될 줄 믿는다.  
사실 신극 80년에 이르는 오늘까지 우리는 '청소년과 연극문화'에  
대해 절실하게 추구하거나 그 방법론을 구체화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근년에 들어서 몇몇 단체나 개인이 지면이나 세미나 등을  
통해 연극의 교육적 기능을 주장하면서 연주요육이 실제화되기를  
추진하기에 이르고 있으니 말이다.  
연극계 내적으로 봐서 이 사실은 민족의 격동기 속에서 그 수난사와  
함께 면면히 이어온 신극 초창기 60년대의 순수한 정열로 마련해 온  
기틀, 70년대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크게 활기를 띄기 시작하여 비로소  
연극분화가 사회 일부분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모두의 염원인 연극이 직업화와 전문화의 길로 접어든 동시에  
외곬을 걷던 연극이 비로소 주변을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연극예술은 다 알다시피 종합적이고, 현장에서의 생동감있는, 남이  
만든 대본 또는 스스로 구성하여 자신의 몸으로 재창조하는 풍부한 예술  
행위이다.  
따라서 풍부한 인간성을 배양하고 건전한 시민이 되며 능력있는  
지도자가 되게 하려면, 그 무엇보다 삶과 밀접히 관련된 연극의 본질을  
청소년교육의 일환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좋은 연극을 관람할 기회를  
청소년들에게 마련해 주는 것과 동시에 유치원부터 자기 표현에 대한  
훈련을 키워 주어야 한다. 건전한 놀이의 장을 만들어 주어 청소년기의  
갈등, 불안 등을 표현함으로써 정신건강을 튼튼히 한다는 것은  
국가정신문화를 발달시키고, 또한 요즈음 사회문제화 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제문제를 해결 또는 예방하는 데도 그 지름길이 된다고  
본다.  
이번 '청소년 공연예술제'에 한국연극협회는 세르반테스 원작 손진책  
연출의 뮤지컬 <돈키호테>로 참여한다. 연극계의 전 인력이 투입되어  
만들어지는 이 무대는 필시 청소년 인생관 형성에 크게 이바지 하리라고  
본다. 중고교에 재학중인 학생은 물론 일찍 직업일선에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근로 청소년들에게도 꼭 필요한 작품이라 권장하고 싶다.  
이번과 같은 대대적인 행사를 빌어서나마 기업은 기업대로, 연극인은  
연극인대로, 일선 교육자 혹은 교육 연구가는 또 그들대로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계속된다면 우리나라도 곧 청소년 문화가 꽃피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번의 <돈키호테> 작업을 위해 노고하는 연출 손진책 선생을  
비롯하여 극계의 연기진과 스탭들에게 감사하며 그 밖에도 공연을 위해  
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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