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미인도

홍랑을 기리며

박송 입니다. 2011. 10. 15. 15:56
글 제 목 홍랑을 기리며
 
작 성 자 조이너
 
 
  김금조 샘이 올리신 古詩를 熟讀 하고자,
오늘 시간 좀 있어 각종자료 등 공부 좀 해 보았습니다

금조 형이 화두를 올려 누가 제대로 풀이 하나를 기다리시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 고등학교 고문 시간에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홍랑 은 우리가 늘 꿈꾸었던 그런 재색 겸비한 마음의 연인
고죽 최경창 도 당대에는 풍류에 내노라 하는 삼당(三唐)시인

불같은 러브스토리에 400년 전으로 돌아가
가슴 밑바닥부터 저려오는 알싸한 아픔과 연민을 체휼케 합니다(본문 일부 인용)
그리고 몇 시간 동안 너무 행복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샘님.

이제 조 공은 어디가야 홍랑 을 만나게 되는지..
놀라운 것은 소생이 얼마 후 가야할 곳
파주군 탄연면 에 위치한 400년 된 선산에서
불과 10여리 지척에 홍랑과 고죽이 묻혀 있다니.. 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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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랑은
함남 홍원(洪原) 출생. 1573년(선조 6)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시명이 높았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북평사(北評事)로 경성(鏡城)에 주재할 때 그 막중(幕中)에 머물렀다. 고죽과의 사이에 소생이 있었고, 임진왜란 중에도 고죽의 시고(詩稿)를 간직하여 병화에서 구하였으며, 죽어서는 고양(高陽)의 고죽 묘 아래에 묻혔다.
한 수의 시조로써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 임제와 한우,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손꼽히는 황진이와 서화담 그리고 허균과 매창의 이야기 등 수많은 기녀들의 사랑과 이별은 지금도 가슴 밑바닥부터 저려오는 알싸한 아픔과 연민을 체휼케 한다. 그 중 홍랑의 최경창을 향한 사랑과 절개는 마침내 엄격한 신분세계의 벽을 허물게 하였던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홍랑은 관북의 홍원(洪原) 기녀로 문과에 급제한 최경창이 군관의 문관보좌 벼슬인 북도평사로 경성(境城)에 갔을 때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이다. 최경창은 이달, 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이름 높은 풍류 문장가였다. 이듬해 최경창의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갈 때 영흥(永興)까지 배웅했는데, 돌아가는 길에 함관령의 비 내리는 저문 날 버들가지와 함께 사랑의 애틋함을 함께 담은 시조 한 수를 전했다고 한다.

묏버들 골라 꺾어 보내노라, 님 계신데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이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헤어져 서울로 돌아간 연인이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은 홍랑은 7일 밤낮을 달려 서울에 올라왔지만 만나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경창은 그 뒤 벼슬길이 평탄하지 않아 좌천과 사직을 거듭하다가 53세 되던 해에 종성부사로 제수되었다. 갑작스런 승진을 문제삼은 조정에서 다시 성균관직강으로 벼슬명을 고쳐 제수받고 돌아오던 도중 종성객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홍랑이 스스로 얼굴과 몸을 망쳐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최경창의 저작은 훼손되지 않고 남아서 나중에 <고죽유고(孤竹遺稿)>로 전해지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홍랑의 공이라고 알려져 있다. 홍랑의 산소는 파주군 교하면 다율리에 있는 해주 최씨의 선산에 연인과 함께 아래위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조 기녀로는 유일하게 양반가문인 최씨 후손들의 제사도 받고 있으며, 조상으로 모셔지고 있다. 현재 산소 올라가는 길 입구에는 해주 최씨 집안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홍랑을 자신들의 할머니라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이 집안에서 홍랑을 생각하는 마음은 각별하다.
비라도 부슬부슬 내리는 봄날이 오면 부끄럽게 피어나는 버들가지를 한 움큼 꺾어 들고 사랑을 위해 자신의 온몸을 불사른 홍랑의 무덤을 찾아가 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산소에서 내려오는 길에 등을 맞대고 하나의 비석으로 서있는 고죽시비와 홍랑가비를 만나보고 오는 것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옆에서 본 비석에는 '詩人洪娘之墓' 라 새겨진것같다. 적절한 비명이라 생각했다.
근자 심묘하여 파주막걸리 한 잔 올려 드리고 버들가지도 한 줌 올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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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랑에 관한 다른 야설은 두 사람이 한양에서 해후 하는데
최경창의 풍류와 홍랑의 엄청난 러브스토리가 곁드려 있어
왠만한 드라마 뺨칠 정도이다

최경창(崔慶昌)과 홍랑(紅娘)의 사랑

조선 선조 임금 때 최경창 은 호를 고죽(孤竹)이라 했는데, 선조 6년(1573)에 함경도 북도 평사(北道評事)가 되어 경성(鏡城)으로 가서 근무했다.

경성의 관기들은 얼굴이 예쁘고 가무에도 뛰어나 널리 소문이 나 있었는데, 풍류에 달통한 최경창이 그 속에 묻히게 되었으니, 기생들과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최경창은 특히 당나라 시풍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삼당시인(三唐詩人)' 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기생들의 마음을 휘어잡기에 꼭 알맞은 인물이었다.

최경창은 곧 경성 기생 중에서 특별히 이름이 나 있던 홍낭(紅娘)과 깊은 사랑을 하였고, 홍낭은 최경창에게 기생으로서가 아닌 여인의 깊은 순정을 바치게 되었다.

홍낭은 밤이면 여성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던 최경창에게 맨몸을 던져, 여러 가지 놀림을 받으면서 황홀한 감흥 속으로 빨려 들어가, 깎아지른 절벽의 벼랑 끝에 선 듯한 절정의 순간까지 끌어올려져,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애원하듯 흐느끼며 끓는 정감을 불태웠고, 낮이면 능숙한 가무로 그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이듬해 따뜻한 봄날, 최경창은 관직이 바뀌어 서울로 돌아오게 되니, 홍낭은 작별을 아쉬워하며 쌍성(雙城)에까지 따라왔다. 함관령(咸關嶺) 고개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픈 작별을 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궂은비가 내리고 또한 날도 저물어 어두워지면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

홍낭은 최경창에게 안겨 헤어지기 아쉬워 몸부림을 치면서 눈물을 비 오듯 쏟아, 빗물과 눈물이 범벅되어 옷자락과 비단치마를 모두 적셨다. 이때 홍낭은 노래 1장을 지어 애끓는 간장을 실어 서름 겨운 목소리로 불러 드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묏버들 갈  것거......' 하는 시조이다.

이 시조를 쉽게 풀어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버들가지 가려 꺾어 보냅니다 님의 손에,

가시거든 창 밖에다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 잎이 돋아나면, 이 몸이라 여기소서.

이렇게 해 헤어졌는데, 홍낭은 늘 최경창을 잊지 못해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최창경은 홍낭을 이별하고 떠나온 이듬해 봄(1575), 병으로 자리에 누워서 그 해 겨울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병석에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홍낭은 소식을 들은 바로 그 날 집을 나서서,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밤낮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만에 서울에 닿아 최경창을 만났다.

홍낭은 최경창의 품에 안겨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얼굴을 비비며 울고 또 울었다. 아마도 1년 반 동안 떨어져 있어서 그리움이 덩어리져 맺힌 심정을 눈물로 녹여내려는 듯, 소리 없이 흐느끼며 눈물을 줄줄 쏟았다.

그런데 이때는 함경도와 평안도 기생은 서울로 데리고 들어와 살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또 마침 명종 왕비 인순왕후의 사망으로 국상이 있었던 시기라, 비록 국상의 상복 기간은 지났지만, 평온한 시대와는 달라서 홍낭은 서울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 고향인 경성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이때 홍낭은 나라의 법을 한없이 원망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길을 떠났는데, 최경창은 떠나는 홍낭에게 시 두 수를 지어 주었다. 그 중 한 수의 시를 번역해보면 이렇게 절절히 가슴을 오려내는 것 같았으니,

아쉬워 보고 또 보며 그윽한 난초 드리오니(相看脈脈贈幽蘭)

이제 가면 머나먼 곳 어느 날에 다시 오리?(此去天涯幾日還)

함관령의 옛날 노래 다시 불러 무엇하리?(莫唱咸關舊時曲)

지금도 궂은비 내려 첩첩 산길 어둡겠지(至今雲雨暗靑山)

라고, 옛날 함관령 이별을 생각하며 애끓는 심정을 읊고 있다.

최경창의 후손들에 의하면 홍낭은 홍원(洪原) 기생으로 '애절(愛節)'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고,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리고 최경창이 사망한 후에, 홍낭은 몸을 꾸미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고 파주(坡州) 무덤으로 달려와서, 묘 근처에 움막을 짓고 수묘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홍낭은 모든 집안 살림살이를 다 버리고, 오직 최창경의 시 원고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피란 해, 그 원고가 전란에서 보호될 수 있었다고 하니, 그 정성은 놀라운 데가 있다.

홍낭은 사망하고 최경창의 무덤 아래에 묻혔는데,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나 있었다.




 
노마 조공! 너무나 해박하고 자상한 접근에 감사합니다. 공부를 어찌나 열심히 하셨던지
제가 배우는 바가 너무 많습니다.본문에 '300년을 지켜냈다네'는 400년으로 고쳐야 한다면서
또 그냥 올리는 실수를 범했구요. 시인 홍랑지묘라는 비석도 사진으로 볼 수 있었고 묘소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게 된 것도 참으로 기쁩니다. 1978년이던가 중학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홍랑의 시를 처음 만났고 그 때 내게도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낼 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공요....

그 후 1987, 고3 한문 시간에 홍랑의 생애와 행장을 가르치면서
이 여인의 이름다운 사랑을 가슴 속 깊이 새겨 두었나봐요.
깊이 공부하시고 깊은 관심 가져주셔서 저도 억수로 행복합니다.
그런데 형께서 '체휼'이란 어려운 어휘흫 사용하셨는데
제겐 그 뜻이 잘 해석되어지지 않아요. 전자 사전으로 찾아 보고 대입을 시도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홍랑에게 소생이 있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이 시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듭니다.
다음 또.
 
07/10
 
조이너 저도 어쩌다 인용하다 보니 이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체휼 이란
전능하신 분이 아랫사람들에게
도저히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체험하게 하여 주는 일

일반 검색 창에는 풀이가 없고 질의응답에서 찾았습니다.
성경에서 쓰는 말이랍니다

글도 말과 같이
자칫 속내 들어낼까, 실수할까
오랜 시간 주고받기가 결코 쉽지 않을 진 대
큰 무리 없이
노마 형과 장시간 행복하게 대화하였음을 감사드립니다

방금 찐한 경상도 사나이
서영호(재경 부산고 동기회장) 군이 전화 했는데
“종환이 니 부산에 개잡으러 가자”
오는 길에 난 밀양 무안근처 처갓집에 들릴 란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여보 개.. 개띠에다 개 냄새도 나는 못 맡네”
성의 생각해 혼자 중얼 거려보았다.

이 황홀한 계절에
마인드 라도
럭셔리 하게
리치 하게
보내 세요
 
07/11
 
노마 조이너님. '체휼'의 뜻이 그러하다면 너무 격찬을 받는 것 같아 되물어 본 것입니다.주위의 처녀 선생님들께 빨리 검색하라 했더니 조이너 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지요. 노마가요 여름에 강하다면 막걸리 한 병 들고 파주 홍시인 뵈러 가자고도 할 것인데, 원체 땀을 많이 흘리는 터라 자신이 없군요. 좋은 계절에 강녕하시온저!
 
07/11
 
나루하나 조종환 사관님!
"홍랑" 심층 강의, 감사합니다.
앞에선 뭔가 좀 어렵다 했는데, 확 풀립니다.
역시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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