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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입구/강정

박송 입니다. 2011. 10. 8. 03:35

 

선인장 입구

 

                                                                 “표적은 죽음으로써 긴장과 공포로부터 해방되지.

                                                                       그것 때문이지, 그렇게 웃는 얼굴이 되는 건.”

                                                                    —스즈키 세이준 감독, 영화 〈피스톨 오페라〉에서

 

 

   강 정

 

 

 

상처를 천 년 정도 문지르면 꽃이 필까

이 몸이 만 년을 견디는 나무가 될까

그러나,

가시는 최초의 고백이거나

최후의 사정射精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입술이 천지를 헤매다

한낮 소나기로 지난밤의 지도를 바꾼다

우뚝 선 허공에 물기가 마른다

은박銀箔을 두른 태양이 애인의 머나먼 창문 앞에서 혼절한다

신기루 같은 기억의 방사선이

대기의 과녁으로 떠오르면

나는 백 개의 다른 이름으로 쪼개져

세계의 궁륭 깊숙이 칼침을 던진다

마지막 물기를 베어 물고

낱낱의 공기입자로 바스러지는 바람

매 순간의 절벽 앞에서

사랑은 더운 향기를 깨물고

온몸에 가시를 두르는 천형 아닌가

독 오른 신열이 한 줄로 꿰어내는 땅과 하늘 사이

숨어 있는 빛의 허물이 이 몸 안에서 눈뜰 때

뭇매 맞은 영혼들 데불고 천진한 원귀寃鬼를 두드려 깨우리

이곳은 대지의 마지막 문

제 몸과 사별하는 도마뱀과

만 년을 침묵하는 이구아나와

시체를 먹고 살찐 까마귀 떼도 정렬하라

최선의 종말로 최악의 이해를 얻는,

웃음이 가시로 뻗친 초록의 총구銃口 앞으로

 

 

 

                         —《문예중앙》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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