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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 가을 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 /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感物傷我心 涕淚沾衣袂) – [감우(感遇)] 허난설헌 |
조선중기 천재 여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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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자유로운 가풍 속에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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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결혼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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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까지 알려진 허난설헌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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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풍경/허초희
날신날신 실버들 기슭을 덮고
물신물신 꽃냄새 바람을 돌고
달이뜨니 호수는 거울 같은제
기집애들 흥이라 밤새 노랠세.
長堤十里柳絲垂 장제십리유사수
隔水荷香滿客衣 격수하향만객의
向夜南湖明月白 향야남호명월백
女郞爭唱竹枝詞 여랑쟁창죽지사
기슭엔 버들이요 바람엔 향내로다
호수에 달이밝아 그영이 거울인제
기집들 노래노래로 흥이겨워 하더라. 詩/ 허난설헌 譯/김억 ※시인 소월의 은사로 잘 알려진 안서 김억 선생의 한시 번역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위의 시도 한번은 4행시로 번역하고 또 다시 시조형식의 3행으로 창작하여 한수의 시라도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롭게 하였습니다.
꽃과 나와 어느 쪽이 더 예쁜가요-許蘭雪軒(허난설헌)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에 묻혀 있는 시 한수
長干行(장간행) 장간을 왕래하면서- 許蘭雪軒(허난설헌)
家居長干里
가거장간리
來往長干道
래왕장간도
折花問阿郞
절화문아랑
何如妾貌好
하여첩모호
우리 사는 집은 장간리 마을
장간리 길을 오고 가면서
꽃가지 꺾어 님에께 묻네
꽃과 나와 어느 쪽이 더 예쁜가를.
昨夜南風興
작야남풍흥
船旗指巴水
선기지파수
逢着北來人
봉착북래인
知君在揚子
지군재양자
지난밤에 남풍이 불었는데
배의 깃발이 파수로 되어 있었어
북쪽에서 온 사람을 만나 물어 보니
우리 님은 양자강에 계신다 하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蘭雪軒). 강릉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작품 일부를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 애송되었다.女心/허초희淸金明月珠 청금명월주
贈君爲잡佩 증군위잡패
不惜棄道旁 불석기도방
莫結新人帶 막결신인대
아름다운 금과 빛나는 옥으로
노리개를 만들어 드리오니
길가에 버리는건 아깝지 않지만
다른 여자 허리춤엔 매어주지 마시길...
허난설헌, '야야곡(夜夜曲)'
▪ 주제 : 남편에 대한 그리움
<해제>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이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전체 2수로 이루어진 칠언절구의 한시이다. 조선 시대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과도한 조세와 부역, 군역 등으로 도망하는 농민이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편을 전방에 보내고 남편의 군복을 지으며 외로이 남편을 그리워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잘 형상화된 작품이다. 작가는 자신의 고통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시대 다른 여성들의 고통에도 주목하여 작품을 창작했다.
추야곡1(秋夜曲 1)-허난설헌(虛蘭雪軒) : 가을밤의 노래
蟪蛄切切風瀟瀟(혜고절절풍소소) : 쓰르라미 절절하고 바람은 소소한데
芙蓉香褪永輪高(부용향퇴영륜고) : 연꽃 향기 바래고 가을달은 높기만 하다
佳人手把金錯刀(가인수파금착도) : 가인이 금가위 손에 잡고
挑燈永夜縫征袍(도등영야봉정포) : 등불 돋운 기나긴 밤에 길 떠날 옷 깁는다
추야곡2(秋夜曲 2)-허난설헌(虛蘭雪軒) : 가을밤의 노래
玉漏微微燈耿耿(옥루미미등경경) : 물시계 소리 희미하고 등잔불은 반짝거리는데
罹幃寒逼秋宵永(이위한핍추소영) : 휘장 안으로 추위 스며들고 가을밤은 길기만 하다
邊衣裁罷剪刀冷(변의재파전도냉) : 변방으로 보내는 옷 다 지으니 가위는 차갑고
滿窓風動芭蕉影(만창풍동파초영) : 창에 가득 바람 불어오니 파초 그림자 어른거린다
애절한 매미 소리에 스산한 바람
연꽃 향기 가시고 높이 뜬 하얀 달
가위를 손에 쥔 채 임 그리는 여인
긴 밤에 등잔불 돋우며 군복을 꿰매네
물시계 소리 나직하고 등잔불 깜박이는데
비단 휘장 싸늘해 오고 가을밤은 길어라
전방에 보낼 옷 짓고 나니 싸늘한 가위
바람 따라 창에 어리는 파초 그림자 <ebs 수특 게재>
夜夜曲(야야곡) -깊은 밤의 노래 許蘭雪軒(허난설헌) 玉淚微微燈耿耿(옥루미미등경경) 옥 같은 눈물 소리 없이 흐르고 촛불은 깜박깜박, 羅瑋寒幅秋宵永(라위한폭추소영) 차가운 비단 휘장 가을밤은 길기도 하다. 邊衣裁罷剪刀冷(변의재파전도냉) 변방으로 보낼 옷 다 짓고 나니 가위조차 싸늘하고, 滿窓風動芭蕉影(만창풍동파초영) 바람에 일렁이는 파초 그림자만이 창에 가득하구나. * 옥루 : 초에서 흘러내리는 촛농 |
▪ 짜임
제1수 | 기․승 | 쓸쓸한 가을밤의 정취 |
전․결 | 임을 그리워하며 임의 군복을 꿰매는 여인 | |
제2수 | 기․승 | 긴 가을밤을 지내며 옷을 짓는 여인 |
전․결 | 외로움과 임에 대한 그리움 |
▪ 얼개 돋보기
선경(先景)) | 계절적 배경 → 분위기 조성 | 후정(後情) |
가을밤의 쓸쓸함 | 임의 군복을 짓는 여인의 외로움과 그리움 |
여성과 빈민은 같은 처지다
시대의 모순에 맞서 싸운 저항시인 허난설헌
▣ 이덕일 역사평론가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은 <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1931)에서 허난설헌이 ‘소천지(小天地·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세 가지 한으로 여겼다고 적었다. 그러나 허난설헌은 조선의 다른 여성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동인 영수 허엽(許曄)의 딸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주들도 진서(眞書·한문)를 배우지 못하던 시대에 그는 둘째오빠 허봉의 배려로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한시(漢詩)를 배울 수 있었다.
△ 허난설헌의 시비와 무덤. 그는 모순된 조선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 었다.(사진/ 권태균) |
8살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을 지을 정도였던 여동생의 영특함을 높이 산 조치였다. 허난설헌은 이달과의 만남을 통해 사회 모순에 눈뜨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백광홍(白光弘)·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평가될 정도로 당시(唐詩)에 능했던 이달은 서얼이란 이유로 등용되지 못했다. 문(文)의 나라 조선에서 뛰어난 문재(文才)임에도 서얼이란 이유로 천대받는 이달을 보면서 허난설헌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떴다. 허난설헌이 최경창과 백광홍을 예로 들면서 “낮은 벼슬아치 녹 먹기 어렵고/ 변군(邊郡)의 벼슬살이 근심 많아라/ 나이 들어 벼슬길 영락하니/ 시인이 궁핍하다는 말 이제야 알겠네”(‘견흥’(遣興)) 라고 노래했다. 서얼이 아니었던 최경창·백광홍의 궁핍에 대한 노래는 역으로 서얼 출신 이달의 궁핍 정도를 짐작게 한다.
남편 없는 집에서 외로움에 떨다
이달을 통해 사회 모순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허난설헌은 열여섯 무렵 혼인하면서 사회 모순에 직접 발을 디디게 된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과거에 거듭 낙방했다. 허난설헌은 ‘강남에서 독서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寄其夫江含讀書)에서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은 오시질 않네”라고 노래하고, ‘연꽃을 따며’(采蓮曲)에서는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 행여 누가 봤을까 반나절 얼굴 붉혔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훗날 이수광(李?光)이 <지봉유설>에서 “이 두 작품은 그 뜻이 음탕한 데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고 평할 정도로 아내의 사부곡(思夫曲)까지 음탕으로 몰던 사회였다. 허난설헌은 사부곡까지 음탕으로 몰던 조선 남성들의 처신을 조롱했다.
“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 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탄 그 꼴/ 아침부터 양양주에 취하고 나선/ 황금 채찍 휘둘러 대제(大堤·중국 호북성 양양(襄陽) 남쪽에 있던 색주가)에 다다랐네./ 아이들은 그 모습에 손뼉 치고 비웃으며/ 다투어 백동제(白銅?·악곡 이름)를 불렀다네.”(‘색주가를 노래함’(大堤曲))
과거에 거듭 낙방하고 난설헌과도 사이가 서먹해진 김성립은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허난설헌이 ‘술집의 노래’(靑樓曲)에서 “길가에는 술집 10만이 늘어서 있고/ 집집마다 문밖에는 칠향거(七香車·향목으로 만든 수레)가 멈춰 있네”라고 노래한 것은 색주가나 드나들던 남편 같은 인물들에 대한 풍자였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혼인생활만이 아니었다. 18살 때(1580) 아버지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한데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으며, 게다가 스물한 살 때인 선조 16년(1583)에는 가장 의지하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갑산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허봉은 이듬해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한 채 선조 21년(1588) 38살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역시 객사했다.
남편 없는 집에서 허난설헌은 외로움에 떨었다. “시름 많은 여인 홀로 잠 못 이루니/ 먼동 틀 때면 비단 수건에 눈물 자국 많으리”(‘사계를 노래함’(四時詞))라는 노래나 “비단 띠 비단 치마 눈물 흔적 쌓인 것은/ 임 그리며 1년 방초 한탄함이로다(‘규방의 한’(閨怨))”라는 노래는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허난설헌은 이 불행이 남성에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한정’(恨情)에서 “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 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라고 노래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 남성들에 대한 실망은 진정한 남성상에 대한 희구로 나타났다.
“선봉대 나팔 불어 진영문을 나서는데/ 붉은 깃발은 얼어붙어 날리지 않네/ 구름은 캄캄한데 서쪽 신호불이 반짝이고/ 밤 깊은데 기병은 평원을 사냥하네/ …/ 장군은 밤중에 용성(龍城) 북으로 진군하고/ 전사들의 북소리 병영을 울린다/ …/ 금창은 선우(單于·흉노족의 왕) 임금의 피로 씻고/ 백마 타고 천산(天山)의 눈을 밟고 개선하네.”(‘변방을 노래함’(塞下曲))
중국 고대 한(漢)나라 장수의 북방 흉노족 정벌을 그린 노래로서 비록 중국 남성을 빌렸지만 허난설헌이 바라는 남성상이 담겨 있는 노래이다. 색주가의 남성을 조롱하고, 대륙을 달리는 기상을 지닌 그를 조선의 여성인 시어머니가 사랑할 리 없었다. 허균이 ‘훼벽사’(毁璧辭)에서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있었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라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어머니에게 미움받은 그의 의지처는 두 아이였으나 남매에게도 비극이 잇달았다.
△ 허난설헌이 그린 <양간비금도>. 허난설헌은 둘째오빠 허봉의 배려로 한시를 배울 수 있었다. (사진/ 권태균) |
슬픈 세상을 떠나 도교의 세계로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더니/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프구나 광릉(廣陵·아이들 묻힌 곳) 땅이여/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네/ 사시나무 가지에 바람 소소히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 속에서 반짝이누나/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불러서/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자식을 애곡함’(哭子))
이런 불행은 그를 도교의 세계로 안내했다. 도교는 현실에 상처받은 그에게 피안의 세계였다. 이덕무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규수 허경번(許景樊·허난설헌)은 뒤에 여도사가 되었는데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白玉樓)의 상량문을 지었다”라고 쓴 것처럼 ‘여도사’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슬픔이 가득 찬 세상을 떠나 ‘흰 봉황새 타고’ 도교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신선이 노니는 노래’(遊仙詞)에서 “피리 부는 소리 잠시 꽃 사이에 끊기는 동안/ 인간 사는 고을에는 일만 년이 흐른다오”라고 노래한 것에선 허무한 인간 세상을 떠나 신선들의 세상으로 가고 싶었던 그의 심정이 드러난다. 허난설헌은 ‘달 속에 있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의 마지막 구절에서 피안의 세계를 구체화한다.
“육지와 바다가 변해도 바람 수레를 타고 오히려 살아서, 은창(銀窓)으로 노을을 눌러, 아래로 구만리 머나먼 세계를 굽어보리. 옥문이 바다에 임하면 웃으며 삼천 년 동안 맑고 얕은 상전(桑田)을 보도록 하시며 손으로 삼소(三?)의 해와 별을 돌리면서 몸은 구천(九天)의 풍로(風露) 속에 머물게 하소서.”
그러나 이런 세계는 마음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허난설헌은 문제의 본질에 접근했다. 불행은 개인적인 성향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산물이란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모순된 사회구조의 정점에 억압이 있었다. 허난설헌은 억압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여성의 시각을 넘어서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동질감을 갖게 된 것이다.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높은 다락에선 풍악 소리 울렸지만/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느낌을 노래함’(感遇))
이처럼 피지배층의 빈곤과 지배층의 부유를 비판하던 허난설헌의 분노는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모든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로 확산되었다.
“수(戍)자리 고생 속에 청춘은 늙어가고/ 장정(長征)의 괴로움에 군마도 여위어가네.”(‘변경을 지키러 나가는 노래’(出塞曲))
“모든 백성들이 달공이 쳐들고/ 땅바닥 다지니 땅 밑까지 쿵쿵거리네/… / 성 위에 또 성을 쌓으니/ 성벽 높아 도적을 막아내겠지/ 다만 무서운 적(恐賊) 수없이 몰려와/ 성 있어도 막지 못하면 어찌 할 거나.”(‘성 쌓는 원한을 노래함’(築城怨))
노동의 소외까지 간파하다
‘가난한 이웃·수자리 군인·축성하는 백성’은 모두 사회구조의 하부에 있는 피지배층들이었다. 축성으로도 막지 못할 ‘무서운 적’은 바로 그 백성들이란 함의가 담겨 있었다. ‘가난한 여인을 읊음’(貧女吟)에서 허난설헌은 ‘여성’과 ‘빈민’이 같은 처지임을 간파한다.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김쌈 솜씨 모두 좋은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중매 할미 모두 나를 몰라준다네/ 추워도 주려도 내색을 않고/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오직 아버님만은 불쌍하다 생각하시지만/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를 알리요// 밤새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 삐걱삐걱 베틀 소리 차갑게 울리네/ 베틀에는 한 필 베가 짜였는데/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손으로 가위 잡고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가난한 여인을 읊음’)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 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간파한 소외론이었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을 인류(동료인간)로부터 소외시키는 데 나아간다”라는 마르크스의 말과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라는 난설헌의 시구는 같은 인식의 소산이다.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를 알리요’라는 구절은 가난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되는 여성의 아픔을 절절히 노래한 절창으로서 그 자신이 가난한 여인에게 깊게 동감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시구이다. 이렇게 허난설헌은 한 여성의 시각을 넘어 사회 전체의 모순에 칼을 들이대는 저항시인이 되었다.
허균은 “우리 누님은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다”라면서 “그래서 삼구홍타(三九紅墮)라는 말이 바로 증험되었다”라고 덧붙였다. 삼구홍타는 허난설헌이 23살 때(1585) 지은 ‘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며’(夢遊廣桑山詩)에서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차갑네”(芙蓉三九朶/紅墮月霜寒)라고 노래한 것이 27살 때 죽을 것을 예견했다는 뜻이다. 야사 <패림>(稗林)도 27살 때의 어느 날 목욕 뒤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27)의 수인데,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고 전한다. 허균이 “유언에 따라서 다비(茶毘)에 붙였다”고 증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한 많은 세상에 그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시집 간행
허난설헌이 세상을 떴을 때 동생 허균은 만 20살이었다. 그는 누이의 시를 묶어 <난설헌집>(蘭雪軒集)을 간행해 서애 유성룡으로부터, “이상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허씨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라는 발문을 받았다. <난설헌집>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에서도 출간되면서 소천지 조선을 넘어 중국에까지 문명이 알려졌다. 숙종 37년(1711)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되었으니 조선 여인 최초의 한류였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개인적인 한으로 삭이는 대신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파악하고, 그 부당함을 노래했다. 그는 불행했던 한 여류시인이 아니라 모순된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