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유명 글 모음

허난설헌

박송 입니다. 2010. 9. 10. 22:32

 

허균.허난설헌
2001년 09월
허균.허난설헌
1569∼1618 / 조선중기의 문인, 정치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 저술
선정배경
문화관광부는 조선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며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저술한 허균(許筠 : 1569∼1618)선생과 애상적이고 도교적인 시풍의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 1563∼1589)선생을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교산 허균과 난설헌 허초희는 문향(文鄕) 강릉이 낳은 빼어난 오누이 문인이다. 조선 중엽 강릉에서 태어난 허균은 혼란한 시대에 잦은 국난과 외침, 파쟁에 시달리면서도 부패하여 무너져 가는 나라를 걱정하면서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였는데,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유교사회 하에서도 불교와 도교, 천주교 심지어 민속종교를 넘나드는 사상의 자유로움을 지녔을 뿐 아니라, 오도된 권위와 사회적 질곡에 맞서 개혁과 저항의 행동가로 평생을 보냈다.

그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사상의 획일성에 반기를 들고 부패한 정치와 잘못된 제도를 실천적으로 개혁하려 했으며,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며 오직 두려워 할 만한 자는 백성뿐이라고 갈파하여 왕조사회를 뒤흔들었고, 더 나아가 바른 정치를 이끌어나갈 호민(豪民)인 민중들이 힘을 보여줄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미래지향적 이상국가의 실현을 현실정치를 통해 실천하기를 꿈꾸었다. 따라서 그를 선구자나 선각자라고 평하기보다는 실천가요, 행동가요, 개혁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조선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유일하게 복권되지 못했으며, 모두가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한글로 이상국가의 꿈을 그린 <홍길동전>을 남겼다. 한마디로 그의 꿈은 평등사회, 개방사회, 국제사회를 실천하는 것이며, 이미 400년 전에 우리가 나아갈 민주사회의 바른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이 특히 부각된다.

허균의 누이인 난설헌 허초희는 27세로 요절하였지만, 사후에 나온 213수의 난설헌 시집으로 동양 삼국에 가장 뛰어난 여성시인으로 평가를 받았다. 난설헌은 여성에게 주어진 질곡의 사회적 제한을 극복하지 못하고 규원(閨怨)의 세 가지 한(고부간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 두 자녀의 죽음)을 품고 살면서도 신선적 초월의 세계관을 그린 시에 자신의 한을 선명하게 표백했음은 놀라운 일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가 엄연히 존재하던 사회에서 여성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에 탁월한 시상을 형상화한 점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허난설헌은 작은 나라에 태어난 것,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 인품과 시재를 겸비한 지아비를 못 만났고 자녀에게 모성애를 베풀지 못한 것을 세 가지 한이라 하였다. "참으로 하늘 선녀의 글재주를 지녔다"든가 "시와 문장은 하늘이 내어서 이룬 것들"이라는 허균의 평가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시에 응축된 시적 상상력과 영롱한 신선적 세계관은 시대를 초월한 감동으로 지속될 것이다.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 가을 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 /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感物傷我心 涕淚沾衣袂) – [감우(感遇)] 허난설헌

 

 

조선중기 천재 여류시인

위는 조선중기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의 시 [감우]이다. ‘감우’란 느낀 대로 노래한다는 의미이다. 허난설헌은 시 속에 나오는 난초같이 살다간 시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당호가 난설헌(蘭雪軒)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은 여성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인 나라는 아니었다. 고려시대 비교적 분방하던 여성들의 삶은 가부장 중심의 가족관계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이념체계 안에서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점차로 위축되었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대부분의 여성들은 집안을 지키고 후세를 낳아 기르는 역할만을 맡아 이것에 순응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속에서 여성이 자기 이름으로 시를 쓰고 이를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기에 남성 중심의 가치체계가 확고해지던 조선중기, 허난설헌이라는 여류시인의 등장과 그 삶의 궤적은 그녀의 천재성과 함께 당시 여성들의 고통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허난설헌의 존재가 독특한 것은 그녀가 사대부가의 여인이었으며,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당시 강조되던 현모양처로서의 부덕을 갖추었다거나 성공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올곧게 그녀가 창작한 시의 탁월함 때문이었다는 데 있다. 허난설헌은 왜곡된 형태이긴 하나 제한적으로 사회활동이 자유로워 문재를 뽐내는 것이 가능하던 황진이 같은 기생도 아니었고, 화가로서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율곡 이이 같은 훌륭한 자식을 길러낸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신사임당처럼 부덕을 상징하는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시로서 그 이름을 남겼고 훗날 그녀의 시는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지식인 문인들에게 격찬을 받으며 오랫동안 애송되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가풍 속에서 성장

허난설헌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동과 서로 사림들이 붕당된 후 동인의 영수가 된 허엽의 딸로 태어났다. 양천 허씨이며 어렸을 때 이름은 초희였다. 당시 여성들이 거의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지 못하였던 데 비해 허난설헌이 초희라는 어엿한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볼 때 그녀의 집안은 당대 여타 사대부 가문에 비해 여성에게 관대하였던 것 같다. 허엽은 동인 중에서도 북인계에 가까운 인물로 북인들은 대개 그 사상적 기저가 성리학 이념 하나에만 고착되지 않고 여러 분야에 비교적 열려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허엽 가문의 학문에 대한 열린 가풍은 딸 허난설헌에게 남자와 똑같은 교육기회를 주었으며, 아들들에게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질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당대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은 허성, 허봉이 허난설헌의 오빠이며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 허난설헌의 남동생이다.

 

가족 중에서 허난설헌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은 둘째 오빠 하곡 허봉으로, 허봉은 여동생의 문재를 일찍이 알아보고 이를 독려하였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 이달에게 여동생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이달은 뛰어난 문학성을 가졌으나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나 벼슬길이 막힌 불운한 시인이었다. 그는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지어 선조 때의 삼당파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허난설헌과 허균 남매를 가르쳐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허난설헌은 나이 8세 때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한시를 지어 주변의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시는 신선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받아 그 상량문을 지은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 시에서 어린 허난설헌은 현실의 어린이의 한계와 여성의 굴레를 모두 벗어버리고 가상의 신선세계에서 주인공이 되는 자신을 과감히 표현하여 신동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렇듯 허난설헌은 훗날 조선후기 문인 서포 김만중이 논하였듯이 가문과 스승의 격려 속에서 조선시대 규중의 유일한 여류 시인으로 성장하여 갔다.


허난설헌의 글씨와 그림 [앙간비금도]. <출처: wikipedia>

 

 

불행한 결혼생활

허난설헌은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했다. 김성립은 안동 김씨로 그녀보다 한 살이 많았다. 김성립은 5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한 명문 가문의 자제였다. 당시 사림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된 상황에서 동인은 또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는데 김성립은 남인계에 속한 인물이었다. 당시 남인은 북인보다 사상적으로 성리학에 더 고착되어 있었고 보수적이었다. 자유로운 가풍을 가진 친정에서 가부장적인 가문으로 시집 온 허난설헌은 시집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양반가의 여성에게조차도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시를 쓰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는 달갑지 않는 존재였다. 허난설헌의 시어머니는 지식인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남편 김성립은 그런 그녀를 보듬어주기보다는 과거공부를 핑계 삼아 바깥으로 돌며 가정을 등한시하였다. 뛰어난 오빠와 남동생을 보고 성장한 허난설헌에게 평범한 김성립은 성에 차지 않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8세 때 이미 신동이라고 소문난 아내를 김성립은 버거워했다. 허난설헌의 남동생 허균은 훗날 자신의 매형인 김성립에 대해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한다”고 평하였는데, 이 평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립은 무뚝뚝하고 별다른 재기는 없는, 고집 세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허난설헌은 결혼 초기에 바깥으로 도는 남편을 그리는 연문의 시를 짓기도 하였으나, 어느 순간 김성립과의 결혼에 회의를 느끼고 남성 중심 사회에 파문을 던지는 시를 짓기도 하였고, 때로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하였다. 그러는 사이, 허난설헌의 친정은 아버지 허엽과 따르던 오빠 허봉의 잇따른 객사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허난설헌은 두 명의 아이를 돌림병으로 잇달아 잃고 뱃속의 아이를 유산하는 불행을 당한다. 이때의 슬픔을 그녀는 [곡자]라는 시로 남겨놓았다.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무능하고 통이 좁은 남편,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슬픔 등으로 허난설헌은 건강을 잃고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시로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 예언은 적중해 허난설헌은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지듯이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 사후 남양 홍씨와 재혼하였지만 곧이어 터진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하였다.

 

 

중국과 일본까지 알려진 허난설헌의 시

허난설헌은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시는 족히 방 한 칸 분량이 되었다고 한다. 허난설헌의 시집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작들을 모두 태웠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은 찬란한 천재성을 가진 누이의 작품들이 불꽃 속에 스러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가 친정 집에 남겨놓고 간 시와 자신이 암송하는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냈다.

 

1606년 허균은 그 시집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에게 일람하게 하였다. 당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은 허난설헌의 시를 보고 매우 경탄하였다. 그리고 이를 중국에 가져가 중국에서 [허난설헌집]을 발간하였다. 그녀의 시는 일약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고 중국의 문인들이 앞을 다투어 그녀의 시를 격찬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애송되던 허난설헌의 시는 18세기에 가서 동래에 무역차 나온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녀의 시는 1711년 일본의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간행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난설헌의 시는 조선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재평가되어 그녀를 규방의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하였다. 다만, 중국에서 발간된 그녀의 시들 속에 중국의 당시를 참고한 듯한 부분이 일부 발견되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난설헌의 작품인가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그녀의 시집이 동생 허균에 의해 간행된 만큼 편집에 있어서 일부는 허균의 생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중기, 여성에게 가장 혹독했던 시기에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녀의 뛰어남을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밤풍경/허초희

 

        날신날신 실버들 기슭을 덮고 


                 물신물신 꽃냄새 바람을 돌고


                 달이뜨니 호수는 거울 같은제


                 기집애들 흥이라 밤새 노랠세.

 

 
                  長堤十里柳絲垂 장제십리유사수


                  隔水荷香滿客衣 격수하향만객의


                  向夜南湖明月白 향야남호명월백


                  女郞爭唱竹枝詞 여랑쟁창죽지사

 
                 기슭엔 버들이요 바람엔 향내로다

                호수에 달이밝아 그영이 거울인제

                기집들 노래노래로 흥이겨워 하더라.

             
           詩/ 허난설헌 譯/김억
          ※시인 소월의 은사로 잘 알려진  안서 김억 선생의 한시
          번역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위의 시도  한번은 4행시로 번역하고 
          또 다시  시조형식의 3행으로 창작하여 한수의 시라도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롭게 하였습니다.
 
 

 
 
 
 
 
 

꽃과 나와 어느 쪽이 더 예쁜가요-許蘭雪軒(허난설헌)

-= IMAGE 1 =-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에 묻혀 있는 시 한수



長干行(장간행) 장간을 왕래하면서- 許蘭雪軒(허난설헌)

家居長干里
가거장간리 

來往長干道
래왕장간도
 
折花問阿郞
절화문아랑 

何如妾貌好
하여첩모호 


우리 사는 집은 장간리 마을

장간리 길을 오고 가면서

꽃가지 꺾어 님에께 묻네

꽃과 나와 어느 쪽이 더 예쁜가를.

昨夜南風興
작야남풍흥 

船旗指巴水
선기지파수 

逢着北來人
봉착북래인 

知君在揚子
지군재양자
 
지난밤에 남풍이 불었는데

배의 깃발이 파수로 되어 있었어

북쪽에서 온 사람을 만나 물어 보니

우리 님은 양자강에 계신다 하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蘭雪軒). 강릉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작품 일부를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 애송되었다.
 
 
 
 女心/허초희 
 

淸金明月珠   청금명월주

贈君爲잡佩   증군위잡패

不惜棄道旁   불석기도방

莫結新人帶   막결신인대

 

아름다운 금과 빛나는 옥으로

노리개를 만들어 드리오니

길가에 버리는건 아깝지 않지만

다른 여자 허리춤엔 매어주지 마시길...

  
 
  허난설헌, '야야곡(夜夜曲)'

 

주제 : 남편에 대한 그리움

 

<해제>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이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전체 2수로 이루어진 칠언절구의 한시이다. 조선 시대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과도한 조세와 부역, 군역 등으로 도망하는 농민이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편을 전방에 보내고 남편의 군복을 지으며 외로이 남편을 그리워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잘 형상화된 작품이다. 작가는 자신의 고통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시대 다른 여성들의 고통에도 주목하여 작품을 창작했다.

 

추야곡1(秋夜曲 1)-허난설헌(虛蘭雪軒) : 가을밤의 노래

 

蟪蛄切切風瀟瀟(혜고절절풍소소) : 쓰르라미 절절하고 바람은 소소한데

芙蓉香褪永輪高(부용향퇴영륜고) : 연꽃 향기 바래고 가을달은 높기만 하다

佳人手把金錯刀(가인수파금착도) : 가인이 금가위 손에 잡고

挑燈永夜縫征袍(도등영야봉정포) : 등불 돋운 기나긴 밤에 길 떠날 옷 깁는다

 

추야곡2(秋夜曲 2)-허난설헌(虛蘭雪軒) : 가을밤의 노래

 

玉漏微微燈耿耿(옥루미미등경경) : 물시계 소리 희미하고 등잔불은 반짝거리는데

罹幃寒逼秋宵永(이위한핍추소영) : 휘장 안으로 추위 스며들고 가을밤은 길기만 하다

邊衣裁罷剪刀冷(변의재파전도냉) : 변방으로 보내는 옷 다 지으니 가위는 차갑고

滿窓風動芭蕉影(만창풍동파초영) : 창에 가득 바람 불어오니 파초 그림자 어른거린다

 

 

애절한 매미 소리에 스산한 바람

연꽃 향기 가시고 높이 뜬 하얀 달

가위를 손에 쥔 채 임 그리는 여인

긴 밤에 등잔불 돋우며 군복을 꿰매네

 

물시계 소리 나직하고 등잔불 깜박이는데

비단 휘장 싸늘해 오고 가을밤은 길어라

전방에 보낼 옷 짓고 나니 싸늘한 가위

바람 따라 창에 어리는 파초 그림자 <ebs 수특 게재>

 

夜夜曲(야야곡) -깊은 밤의 노래 許蘭雪軒(허난설헌)

玉淚微微燈耿耿(옥루미미등경경) 옥 같은 눈물 소리 없이 흐르고 촛불은 깜박깜박,

羅瑋寒幅秋宵永(라위한폭추소영) 차가운 비단 휘장 가을밤은 길기도 하다.

邊衣裁罷剪刀冷(변의재파전도냉) 변방으로 보낼 옷 다 짓고 나니 가위조차 싸늘하고,

滿窓風動芭蕉影(만창풍동파초영) 바람에 일렁이는 파초 그림자만이 창에 가득하구나.

* 옥루 : 초에서 흘러내리는 촛농

 

짜임

제1수

기․승

쓸쓸한 가을밤의 정취

전․결

임을 그리워하며 임의 군복을 꿰매는 여인

제2수

기․승

긴 가을밤을 지내며 옷을 짓는 여인

전․결

외로움과 임에 대한 그리움

 

얼개 돋보기

선경(先景))

계절적 배경

분위기 조성

후정(後情)

가을밤의 쓸쓸함

임의 군복을 짓는 여인의 외로움과 그리움

 

 

여성과 빈민은 같은 처지다

시대의 모순에 맞서 싸운 저항시인 허난설헌

 

이덕일 역사평론가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은 <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1931)에서 허난설헌이 ‘소천지(小天地·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세 가지 한으로 여겼다고 적었다. 그러나 허난설헌은 조선의 다른 여성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동인 영수 허엽(許曄)의 딸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주들도 진서(眞書·한문)를 배우지 못하던 시대에 그는 둘째오빠 허봉의 배려로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한시(漢詩)를 배울 수 있었다.

 

△  허난설헌의 시비와 무덤. 그는 모순된 조선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

었다.(사진/ 권태균)

 

8살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을 지을 정도였던 여동생의 영특함을 높이 산 조치였다. 허난설헌은 이달과의 만남을 통해 사회 모순에 눈뜨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백광홍(白光弘)·최경창(崔慶昌)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평가될 정도로 당시(唐詩)에 능했던 이달은 서얼이란 이유로 등용되지 못했다. 문(文)의 나라 조선에서 뛰어난 문재(文才)임에도 서얼이란 이유로 천대받는 이달을 보면서 허난설헌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떴다. 허난설헌이 최경창과 백광홍을 예로 들면서 “낮은 벼슬아치 녹 먹기 어렵고/ 변군(邊郡)의 벼슬살이 근심 많아라/ 나이 들어 벼슬길 영락하니/ 시인이 궁핍하다는 말 이제야 알겠네”(‘견흥’(遣興)) 라고 노래했다. 서얼이 아니었던 최경창·백광홍의 궁핍에 대한 노래는 역으로 서얼 출신 이달의 궁핍 정도를 짐작게 한다.

 

남편 없는 집에서 외로움에 떨다

이달을 통해 사회 모순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허난설헌은 열여섯 무렵 혼인하면서 사회 모순에 직접 발을 디디게 된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과거에 거듭 낙방했다. 허난설헌은 ‘강남에서 독서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寄其夫江含讀書)에서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은 오시질 않네”라고 노래하고, ‘연꽃을 따며’(采蓮曲)에서는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 행여 누가 봤을까 반나절 얼굴 붉혔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훗날 이수광(李?光)이 <지봉유설>에서 “이 두 작품은 그 뜻이 음탕한 데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고 평할 정도로 아내의 사부곡(思夫曲)까지 음탕으로 몰던 사회였다. 허난설헌은 사부곡까지 음탕으로 몰던 조선 남성들의 처신을 조롱했다.

 

“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 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탄 그 꼴/ 아침부터 양양주에 취하고 나선/ 황금 채찍 휘둘러 대제(大堤·중국 호북성 양양(襄陽) 남쪽에 있던 색주가)에 다다랐네./ 아이들은 그 모습에 손뼉 치고 비웃으며/ 다투어 백동제(白銅?·악곡 이름)를 불렀다네.”(‘색주가를 노래함’(大堤曲))

 

과거에 거듭 낙방하고 난설헌과도 사이가 서먹해진 김성립은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허난설헌이 ‘술집의 노래’(靑樓曲)에서 “길가에는 술집 10만이 늘어서 있고/ 집집마다 문밖에는 칠향거(七香車·향목으로 만든 수레)가 멈춰 있네”라고 노래한 것은 색주가나 드나들던 남편 같은 인물들에 대한 풍자였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혼인생활만이 아니었다. 18살 때(1580) 아버지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한데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으며, 게다가 스물한 살 때인 선조 16년(1583)에는 가장 의지하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갑산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허봉은 이듬해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한 채 선조 21년(1588) 38살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역시 객사했다.

 

남편 없는 집에서 허난설헌은 외로움에 떨었다. “시름 많은 여인 홀로 잠 못 이루니/ 먼동 틀 때면 비단 수건에 눈물 자국 많으리”(‘사계를 노래함’(四時詞))라는 노래나 “비단 띠 비단 치마 눈물 흔적 쌓인 것은/ 임 그리며 1년 방초 한탄함이로다(‘규방의 한’(閨怨))”라는 노래는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허난설헌은 이 불행이 남성에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한정’(恨情)에서 “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 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라고 노래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 남성들에 대한 실망은 진정한 남성상에 대한 희구로 나타났다.

“선봉대 나팔 불어 진영문을 나서는데/ 붉은 깃발은 얼어붙어 날리지 않네/ 구름은 캄캄한데 서쪽 신호불이 반짝이고/ 밤 깊은데 기병은 평원을 사냥하네/ …/ 장군은 밤중에 용성(龍城) 북으로 진군하고/ 전사들의 북소리 병영을 울린다/ …/ 금창은 선우(單于·흉노족의 왕) 임금의 피로 씻고/ 백마 타고 천산(天山)의 눈을 밟고 개선하네.”(‘변방을 노래함’(塞下曲))

 

중국 고대 한(漢)나라 장수의 북방 흉노족 정벌을 그린 노래로서 비록 중국 남성을 빌렸지만 허난설헌이 바라는 남성상이 담겨 있는 노래이다. 색주가의 남성을 조롱하고, 대륙을 달리는 기상을 지닌 그를 조선의 여성인 시어머니가 사랑할 리 없었다. 허균이 ‘훼벽사’(毁璧辭)에서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있었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라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어머니에게 미움받은 그의 의지처는 두 아이였으나 남매에게도 비극이 잇달았다.

 

△ 허난설헌이 그린 <양간비금도>. 허난설헌은 둘째오빠 허봉의 배려로 한시를 배울 수 있었다. (사진/ 권태균)

 

슬픈 세상을 떠나 도교의 세계로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더니/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프구나 광릉(廣陵·아이들 묻힌 곳) 땅이여/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네/ 사시나무 가지에 바람 소소히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 속에서 반짝이누나/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불러서/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자식을 애곡함’(哭子))

 

이런 불행은 그를 도교의 세계로 안내했다. 도교는 현실에 상처받은 그에게 피안의 세계였다. 이덕무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규수 허경번(許景樊·허난설헌)은 뒤에 여도사가 되었는데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白玉樓)의 상량문을 지었다”라고 쓴 것처럼 ‘여도사’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슬픔이 가득 찬 세상을 떠나 ‘흰 봉황새 타고’ 도교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신선이 노니는 노래’(遊仙詞)에서 “피리 부는 소리 잠시 꽃 사이에 끊기는 동안/ 인간 사는 고을에는 일만 년이 흐른다오”라고 노래한 것에선 허무한 인간 세상을 떠나 신선들의 세상으로 가고 싶었던 그의 심정이 드러난다. 허난설헌은 ‘달 속에 있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의 마지막 구절에서 피안의 세계를 구체화한다.

 

“육지와 바다가 변해도 바람 수레를 타고 오히려 살아서, 은창(銀窓)으로 노을을 눌러, 아래로 구만리 머나먼 세계를 굽어보리. 옥문이 바다에 임하면 웃으며 삼천 년 동안 맑고 얕은 상전(桑田)을 보도록 하시며 손으로 삼소(三?)의 해와 별을 돌리면서 몸은 구천(九天)의 풍로(風露) 속에 머물게 하소서.”

 

그러나 이런 세계는 마음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허난설헌은 문제의 본질에 접근했다. 불행은 개인적인 성향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산물이란 인식에 도달한 것이다. 모순된 사회구조의 정점에 억압이 있었다. 허난설헌은 억압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여성의 시각을 넘어서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동질감을 갖게 된 것이다.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높은 다락에선 풍악 소리 울렸지만/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느낌을 노래함’(感遇))

 

이처럼 피지배층의 빈곤과 지배층의 부유를 비판하던 허난설헌의 분노는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모든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로 확산되었다.

 

“수(戍)자리 고생 속에 청춘은 늙어가고/ 장정(長征)의 괴로움에 군마도 여위어가네.”(‘변경을 지키러 나가는 노래’(出塞曲))

“모든 백성들이 달공이 쳐들고/ 땅바닥 다지니 땅 밑까지 쿵쿵거리네/… / 성 위에 또 성을 쌓으니/ 성벽 높아 도적을 막아내겠지/ 다만 무서운 적(恐賊) 수없이 몰려와/ 성 있어도 막지 못하면 어찌 할 거나.”(‘성 쌓는 원한을 노래함’(築城怨))

 

노동의 소외까지 간파하다

‘가난한 이웃·수자리 군인·축성하는 백성’은 모두 사회구조의 하부에 있는 피지배층들이었다. 축성으로도 막지 못할 ‘무서운 적’은 바로 그 백성들이란 함의가 담겨 있었다. ‘가난한 여인을 읊음’(貧女吟)에서 허난설헌은 ‘여성’과 ‘빈민’이 같은 처지임을 간파한다.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김쌈 솜씨 모두 좋은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중매 할미 모두 나를 몰라준다네/ 추워도 주려도 내색을 않고/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오직 아버님만은 불쌍하다 생각하시지만/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를 알리요// 밤새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 삐걱삐걱 베틀 소리 차갑게 울리네/ 베틀에는 한 필 베가 짜였는데/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손으로 가위 잡고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가난한 여인을 읊음’)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 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간파한 소외론이었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을 인류(동료인간)로부터 소외시키는 데 나아간다”라는 마르크스의 말과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라는 난설헌의 시구는 같은 인식의 소산이다.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를 알리요’라는 구절은 가난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되는 여성의 아픔을 절절히 노래한 절창으로서 그 자신이 가난한 여인에게 깊게 동감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시구이다. 이렇게 허난설헌은 한 여성의 시각을 넘어 사회 전체의 모순에 칼을 들이대는 저항시인이 되었다.

 

허균은 “우리 누님은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다”라면서 “그래서 삼구홍타(三九紅墮)라는 말이 바로 증험되었다”라고 덧붙였다. 삼구홍타는 허난설헌이 23살 때(1585) 지은 ‘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며’(夢遊廣桑山詩)에서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차갑네”(芙蓉三九朶/紅墮月霜寒)라고 노래한 것이 27살 때 죽을 것을 예견했다는 뜻이다. 야사 <패림>(稗林)도 27살 때의 어느 날 목욕 뒤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27)의 수인데,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고 전한다. 허균이 “유언에 따라서 다비(茶毘)에 붙였다”고 증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한 많은 세상에 그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시집 간행

허난설헌이 세상을 떴을 때 동생 허균은 만 20살이었다. 그는 누이의 시를 묶어 <난설헌집>(蘭雪軒集)을 간행해 서애 유성룡으로부터, “이상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허씨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라는 발문을 받았다. <난설헌집>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에서도 출간되면서 소천지 조선을 넘어 중국에까지 문명이 알려졌다. 숙종 37년(1711)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되었으니 조선 여인 최초의 한류였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개인적인 한으로 삭이는 대신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파악하고, 그 부당함을 노래했다. 그는 불행했던 한 여류시인이 아니라 모순된 현실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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