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년에 붕어한 명군 효종 홍치제(弘治帝)의 치세를 끝으로, 16세기의 명나라는 악명높은 명 4대 암군의 등장으로 모든 부분에서 내리막선을 타고 있었다. 물론 당시 전세계적으로 보아도 가공할 규모와 체제를 가지고 있는 명나라였기에 급격한 붕괴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역으로 나중에 가면 뭔 짓을 해도 살아나기 어려울 만큼 착실하게 붕괴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 무렵, 만주 지역에서 건주여진의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힘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1589년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모조리 통합했고, 1599년에는 하다부를 복속시켰으며, 1607년에는 후이파부를 멸망시켜 해서여진 4부 가운데 2부를 병합했다. 그리고 다시 6년 뒤인 1613년에 우라부가 멸망했다. 단순히 부족 하나를 멸망시키는데 그런 시간이 든 것이 아니라, 그러는 사이에도 만주(건주여진)는 내부적 역량이 차곡차곡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예허부 뿐이었다. 이에 예허부는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명나라는 유격 마시남(馬時楠)과 주대기(周大較) 등에게 1,000명을 주어 보내는 등 공개적으로 누르하치의 반대편을 들기 시작했다. 아직 명나라와 싸우기에는 시기상조여서, 이때 누르하치는 7개의 성 등을 함락시키고 일단 물러났다. 다른 이유들도 있었는데 1616년 정월, 누르하치가 드디어 가한, 즉 칸(Khan, 여진어로는 '한')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점점 노골적인 반명 행태가 되어가는 누르하치의 모습에, 명나라는 경제적인 제한 조치로 대항했다. 사실 유목민족이라고 해도, 여진족의 주수입원은 어디까지나 수렵과 교역이었다. 인삼이나 가죽을 팔 곳이 없어진 누르하치는 크게 곤궁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격분한 누르하치는 무순(푸순)으로 진격하여 유격 이영방(李永芳)을 항복시켰고, 후퇴하는 군대를 추격하러 온 장승음의 군대 10,000명을 전멸시켰다. 이때 모래 먼지가 명나라 군대를 덮쳤고, 후금 군대는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자세한 전투의 경과는 사르후 전투 항목 참조. 결과적으로 전투는 명군의 대패로 끝났고, 후금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사르후 대패의 책임이 있었던 양호는 당연히 해임되어 감옥에 갇혔고[1], 후임으로 부임된 사람은 웅정필(熊廷弼)이었다. 웅정필의 자는 비백(飛百)이었고, 호(號)는 지강(芝岡)이었다. 호광(湖廣) 강하(江夏, 지금의 호북성 무창) 출신으로 성격이 강직하고 병법에 밝았으며, 궁술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웅정필은 1598년(만력 26년) 과거에 급제(及第)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어사(御史)로서 요동(遼東)에 파견되어 오랜 기간 그곳에서 근무했다. 즉 요동 사정에 밝은 인물을 기용한 것이었다. 웅정필이 요동 방어 전선에 대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싸우지 않는 것이었다. 웅정필의 생각에 지금은 싸우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명나라 군대 자체가 쇠락 현상이 심했는데,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를 당해 큰 타격을 받아 떨어진 사기는 전혀 회복되지 않아 장수와 병사들은 만주 팔기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에다가 무기와 마필 등도 어지러워 정비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승리하여 그 위세가 대단했고 사기 또한 하늘을 찌를 듯 했으므로, 지금 당장 싸우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상황이었다. 최소한 웅정필은 그리 판단했다. 웅정필은 어지러운 군심을 다독이고 쥐어짜서 18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만들어낸 다음, 각지에 배치하여 연락망을 만들고,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작은 공격은 자체 방어력으로 막아내고, 큰 공격은 서로가 즉시 구원을 올 수 있도록 했으며, 소규모 유격대를 조직하여 기습 작전을 벌이기도 하고, 군사훈련을 계속 시키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누르하치도 명군의 이런 태도에 잔뜩 긴장해서 1년이 넘도록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다. 따라서 웅정필은 후금군을 저지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적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싸움을 못하니, 눈에 띄는 전공이랄 것이 없었고, 이는 내부에서 공격당할 때 책임을 돌릴만한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2] 이를 알고 있었던 웅정필도 자신이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하면 내부에서 흔들어댈 것을 걱정하여 신종 만력제에게 확실하게 다짐을 받아놓고 현장에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만력제가 그 사이에 붕어했기 때문에, 쉴드를 쳐줄 사람이 사라졌고, 사방에서 웅정필을 마구 쪼아대기 시작했다. 특히 고조(顧慥)와 요종문(姚宗文) 등의 관리들이 웅정필이 도무지 싸우려 들지 않고, 변방에서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한다고 고발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웅정필은 물러나 버렸고, 그 후임으로 원응태(袁應泰)라는 사람이 임명되었다. 원응태는 관리로선 제법 유능하다는 호평을 받았으나, 관리로서의 유능함과 장수로서의 유능함은 당연히 전혀 다른 문제였다. 웅정필이 파면되었다는 소식을 알게된 누르하치는 기회를 잡게 되어 군대를 이끌며 공격했고 원응태는 누르하치의 침략에 제대로된 대응을 못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후금군의 공격에 순식간에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이 무너졌고, 50여개의 요새와 70여개의 성이 무너져 내렸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요하(遼河) 동쪽에서 명나라의 영역은 거의 사라지고 없어졌다. 이 소식은 명나라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고, 화가 난 내각 대신 우일경이 웅정필을 내각 대신으로 보냈으면 이럴 일이 없었을 것이라 말했다. 이에 다급해진 명나라 조정은 웅정필을 다시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와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왕화정(王化貞)을 요동순무(遼東巡撫)로 기용했는데 문제는 이 인사조치가 나중에 가면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웅정필은 싸우지 않는 것을 전략으로 내세우는 인물인데 비해, 왕화정은 큰 공을 세울 비책을 노리는 성향이었다. 둘은 각자 조화가 되기는 커녕 여러모로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왕화정의 비책이란 당초에 무순에서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던 이영방에게 사람을 보내 내통을 권유하고, 피도[3]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모문룡(毛文龍)이 후금의 뒤를 치겠다는 이야기를 믿었던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몽골에서 무려 4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지원해 준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봐도 이건 말이 안 되었지만,[4] 문제는 이런 헛소리를 깊이 믿었던 왕화정이 이렇게 되면 승리야 뻔한 일이니, 자신이 공을 차지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요동순무인 자신은 요동경략인 웅정필의 밑에 있는 처지이니, 공을 독점하려면 웅정필과 불화하여 이를 소문으로 내야만 자신의 의사로 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이 증명이 된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왕화정은 명나라 조정의 실권자였던 환관 위충현과 친하기도 했기에 이런 배경도 믿고 있었다. 수비를 중히 여기는 웅정필은 "이것은 꿈과도 같은 소리다."라면서 극구 만류하며 충고를 했지만 왕화정은 오히려 웅정필이 자신이 세울 공을 시기한다고 믿었기에 별로 중하게 듣지 않았다.
둘의 대립이 얼마나 심했는지, 왕화정이 군대의 명칭을 '평요(平遼)군'이라고 하자 이 지방에서 오래 근무했던 웅정필은 요동 지역의 '遼'자를 사용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것을 우려해 동쪽을 평정한다는 '평동군'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왕화정은 곧바로 성을 내는 판국이었다. 또한 웅정필은 쌍방의 실력과 전력을 분석한 뒤 군사를 3면으로 나눠 광녕을 막고 등주, 내주, 천진에 수군을 배치하며, 산해관에 경략을 특설해 세 곳을 통제하는 형태로 가자고 했지만 왕화정은 요하 지역에 전군을 배치하고, 60,000명의 군대로 일거에 승리를 거두자는 주장만을 고수했다. 이러한 불화는 결국 누르하치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고, 1622년 정월 누르하치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서로 진격해 쳐들어갔다. 요서로 접어든 누르하치는 광녕은 일부러 공격하지 않고 전초인 서평을 공격해 서평을 지키던 명군 장수 나일관을 전사시키고 명군 3,000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서평 전투) 이에 놀란 왕화정은 손득공(孫得功)의 조언에 따라 30,000명의 병력을 그에게 주어 서평을 구원토록 하려고 했는데, 문제는 이 손득공이 정작 후금군과 만나자마자 명군이 패배했다고 소리를 지르고는 말에 채찍질을 하며 달아났던 것이다. 대장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당연히 병사들은 당황하여 제대로 싸움다운 싸움도 못 해보고 패배했다. 사실 손득공은 애초부터 이미 후금군으로 넘어가 버린 사람이었다. 특히 손득공은 광녕으로 돌아와 의도적으로 후금군이 가까이 왔다고 하며 성 내에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사이에 기회를 잡은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광녕성을 공격해서 함락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왕화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사무만 보고 있다가, 갑자기 적이 와서 다급하다. 어서 피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자 놀라며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만 껌뻑거리며 앉아 있었다. 왕화정에게 이런 말을 한 참장은 다짜고짜 그를 말 위에 태워 서쪽으로 도망보냈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손득공의 인도에 따라 무사히 광녕성에 입성했고, 왕화정을 200여리나 추격하다가 그만두었다.(광녕성 전투) 결국 이영방의 내통도, 모문룡의 교란도, 몽골의 천지를 가를 듯한 40만 대군도, 무엇 하나 없었던 것이다. 왕화정이 개꼴이 돼서 웅정필을 만나자, 웅정필은 쓴웃음을 지었다.
"60,000명의 군대면 금나라군을 일거에 무찌르겠다는 사람이 아니오? 그래, 이젠 어찌 할 셈입니까?"
그제서야 후회를 한 왕화정이었지만 그런다고 무슨 도리가 생길 리가 없었고, 둘은 아무 방법도 없이 산해관으로 들어갔다. 이 일은 고작 20여일 만에 결판이 난 싸움이었고, 요동 전 지역을 완벽하게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왕화정과 웅정필 모두 체포되어 죄를 추궁받았다. 굳이 죄를 따지자면 왕화정의 죄가 더욱 컸고, 웅정필은 상관이라 책임도 따라온다는 측면은 있었으나 애당초 그가 무엇을 해볼 방법이 없었으니 상관이라 해도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최악의 간신이었던 위충현 등으로 인해 책임을 혼자 덮어쓰고 참수되었다. 웅정필의 목은 변방의 9곳(遼東, 薊州, 宣府, 太原, 大同, 延綏, 固原, 寧夏, 甘肅)으로 조리돌림을 당했다. 처형이 집행된 것은 1625년의 일이었다. 이때 웅정필은 마지막 절명시를 남겼다. 처형된 웅정필은 1629년 숭정제 시절에 대학사(大學士) 한광(韓爌)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양민공(襄愍公)의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왕화정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져 결국 그도 무사하지 못해 1632년에 사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누굴 죽이고 누굴 회복시킨다고 하여도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올 리는 만무하고, 잃어버린 땅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이제 명군은 산해관 서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수도를 요양에서 심양으로 옮겼고, 이곳을 성경이라 불렀으니 훗날 봉천부로 불리게 되는 곳이다. 이제 팔기군은 요하를 건너 요서에까지 진출했다. 산해관만 넘으면 베이징은 일직선이니, 일이 시간 문제 같아 보이기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천하의 누르하치조차도, 거의 일이 목전에 다다른 이 시점에 생각지도 못한 저항에 직면하여 쩔쩔매야 했다. 바야흐로 원숭환(袁崇煥)이라는 걸출한 지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르하치의 군대에게 양호가 이끄는 명나라-조선 연합군이 대패한 사르후 전투의 광풍이 불던 시기, 35세의 한 문인이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소부의 지현이라는 낮은 직책에 임명된 그 남자의 이름은 원숭환이었는데 자(字)는 원소(元素)였고, 호(號)는 자여(自如)였다.
먼 남쪽 광동성 사람이었던 원숭환은 말했다시피 과거 급제까지 한 문인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병법이나 군사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좋아한데다가 일부러 퇴직한 장수와 병사들을 만나 변경의 정세가 어찌한지를 묻고, 친구들을 만나도 시를 짓거나 하는 일보다는 군사 전략에 관해 논의하기를 즐겨했던 묘한 인물이었다.[5] 이런 원숭환의 모습을 어사 후순(侯恂)이 쓸만하다며 눈여겨 보았고, 그리하여 병부(兵部)의 직방사주사(職方司主事)가 되었는데, 이는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당시가 바로 1622년으로, 왕화정과 웅정필이 그야말로 대패를 당했던 시점이었다. 원숭환은 그렇게 불안정하던 시점에 홀로 적의 진영을 염탐하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 그리고 대략의 사정을 파악하고 돌아와서는 병부상서로 있었던 손승종에게 이렇게 말을 올렸다. 웅정필마저도 저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으니, 달리 믿을 사람도 없었기에 희종 천계제는 원숭환에게 은 200,000냥을 내주면서 산해관 밖에 있는 명군을 통솔하게 했다. 산해관 밖에 이른 원숭환은 군민을 동원하여 높이 3장 2척, 넓이 2장의 성벽을 축조하고 각종 화포와 화기들을 배치했다. 병부상서 손승종도 몇 갈래의 군대를 영원(寧遠) 부근의 금주, 송산 등지로 보내어 그곳을 지키는 한편 영원을 지원하게끔 했다. 원숭환의 면밀한 계획으로 영원성이 축성됨으로서 명군은 산해관에서 100km 떨어진 지점까지 방어선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싸움도 면밀하게 분석했다. 그때까지 명군이 연전연패를 했던 것은, 아무리 명군이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 해도, 후금군의 가공할 기동력 때문에 접전지역에서 계속 후금군이 숫자의 우위를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명군은 소수로 다수와 겨룰 준비를 항상 해야 했다. 천우신조로, 명나라 말기의 천재였던 서광계가 서양 문물의 도입을 주장하여 완고한 조정을 설득하고, 아담 샬과의 인맥을 이용하여[6] 포르투갈로부터 홍이포(紅夷砲)라는 신무기를 무려 30문이나 도입하여 11문은 천하의 요충지인 산해관에, 19문은 수도 북경성에 직접 설치한 상태였다. 그러나 환관 위충현의 분탕질에 의해 더 이상의 도입은 못했고, 당시는 서광계가 조정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덕분에 원숭환은 영원성을 축조하고, 산해관에만 배치되어 있었던 11문의 홍이포를 전술적으로 이용하여, 영원성과 산해관의 각 요지에 대포를 재배치했으며 손원화라는 화포 전문가를 불러서 부하들을 교육시켰다. 다른 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서양에서 들여온 신무기의 위력을 빠르게 알아보고 도입한 한 명의 천재와, 그 신무기를 자신의 부하들에게 완벽하게 숙련시킨 한 명의 준걸의 합작으로 '만주의 괴물' 누르하치를 막아내기 위한 준비가 끝난 것이다. 원숭환, 그리고 손승종은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정 내에서 환관 위충현이 전횡을 부려 손승종을 물러나게 만들고 자신의 일당인 고제(高第)를 요동에 보내어 군사를 지휘하도록 했다.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고제는 산해관에 오자 장병들을 모아놓고 후금의 군대가 강해서 산해관 밖은 지키기 어려우니 명나라군을 모두 산해관 안으로 철수시키자고 주장했지만, 원숭환은 철수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고제는 원숭환을 설복시킬 방법이 없자 조금 타협하여, 원숭환이 지휘하는 군대만 영원에 남아 있게 했으며 다른 명나라군은 전부 다 산해관 안으로 철수시켰다., 이 시기 누르하치는 다시 한 번 대군을 움직일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다. 1626년 음력 1월 14일(양력 2월 10일), 그는 팔기군 중심의 130,000~160,000명[8]에 이르는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수도 심양을 출발했다. 반면, 원숭환이 이끌고 있는 명군 병사의 수는 고작 20,000명 이하[9]였다. 사르후 전투 때와는 상황이 180도 바뀐 셈으로, 머릿수로 보면 가히 대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산해관에 틀어박힌 고제는 전혀 지원을 해 주지 않았기에, 원숭환은 20,000명 이하의 병력과 함께 동북 최전선의 영원성에서 외롭게 버텨야만 했다. 원숭환은 장병들을 소집해 영원성과 목숨을 함께 할 것을 다짐하며 결연한 의식으로 사기를 다잡았고, 성 밖의 백성들은 모두 영원성 내로 들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성 주위를 모조리 초토화시켜 청야 작전을 벌였고, 성 내를 단단히 탐색하여 후금군의 스파이를 색출해냈다. 이런 모든 일련의 준비가 끝났을 무렵, 출병 9일 만인 1626년 음력 1월 23일(양력 2월 19일)에 누르하치가 이끄는 대군이 드디어 영원성 목전에 도착했다. 누르하치는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백전노장이었고, 150,000명이 넘어가는 대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명나라군은 아무리 끌어모아도 20,000명 정도에 불과했으며 총지휘관 원숭환 본인으로 평하자면 단 한 번도 전쟁을 치르어 본적이 없었던, 애초에 무인도 아닌 종이 위에서나 병법을 논하는(紙上談兵) 문인 출신이었다. 수적으로도 격차는 압도적이었고, 계속되는 승전으로 인해 후금 군대의 사기도 절정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한 번의 싸움이면 여태까지 명나라 군대가 그랬듯이 이 가소로운 요새와 풋내기 지휘관이 무너질 것이 자명해 보였다. 그렇게 절망적일 것이 뻔한 싸움이 벌어졌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의 본대는 음력 정월 23일(양력 2월 19일), 마침내 영원성에 도착했다. 후금군은 영원성 정면(동측)에만 포진한 것이 아니라,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자 서쪽 산해관 방향 5리 밖의 산해대로 상에 진영을 설치했다. 혹시나 산해관 방향에서 명나라의 지원군이 올 경우, 영원성 내부의 명군 수비 병력과 합세하기 전에 요격하기 위해서였다. 도착 직후 누르하치는 사로잡은 한족을 사자로 보내 원숭환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이처럼 원숭환은 누르하치의 공갈에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병력을 1.5배로 과장하지 말라며 받아치고, 비장의 무기인 홍이포를 후금군의 진영에 몇 발 날려주는 것으로 답변했다.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후금군이 성곽 서쪽 5리 밖에 진영을 설치한 점에서도 드러난다. 중국의 5리는 대략 2.5~3㎞ 내외의 거리인데, 기존에 접해오던 다른 대포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안전한 거리였다. 그러나 홍이포는 통상 유효 사거리가 1㎞, 최대 사거리가 4~5㎞에 달했다.[10] 충분히 거리를 두었다고 생각한 진영까지 포탄을 날려보내는 홍이포의 위력에, 후금군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책상물림인 줄 알고 만만하게 봤던 풋내기에게 정예한 후금군이 크게 한 방 먹은 셈이니까. 이때의 정황에 대해 당시 계요총독(薊遼總督) 직을 맡고 있었던 왕지신(王之臣)이 3개월 뒤에 올린 전황 보고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원숭환과 명군은 홍이포 사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후금군은 서둘러 홍이포의 최대 사거리 밖으로 진영을 이동시켜야 했다. 후금군은 정월 24일(양력 2월 20일) 매우 이른 인시(새벽 3~5시)부터 영원성의 남서쪽 귀퉁이에 공격을 개시했는데 이는 날이 밝기 전, 명군이 아직 잠에서 덜 깬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성벽을 넘으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금군의 기습을 간파한 명군은 성벽 위에 설치한 많은 대포와 소화기들을 집중사격하여 이를 격퇴했다. 새벽의 기습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후금군은 본격적인 공성태세를 갖추어 남쪽 성벽에 공격을 집중했다. 방패차를 앞세워 명군의 화살 및 소화기 탄환을 막으며 성벽에 접근했고, 일부 병력은 사다리로 성벽을 타 넘는 시도를 했다. 이런 전통적인 방법 외에도 유개차를 성벽에 붙여 위에서 떨어지는 돌과 화살을 막는 사이, 도끼를 든 도부수들이 성벽 아래쪽의 벽돌을 깨고, 토대를 파고 들어가 성벽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도 벌였다. 그러나 원숭환은 이 모든 공격 수단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한 상태였다. 유개차 상판에는 기름 먹인 장작에 불을 붙여 떨어뜨리고, 화약자루를 쇠사슬에 묶어 떨구어 폭파시키는 등 후금군에게 불세례를 퍼부어줬다. 요약하자면 장거리에서는 홍이포 등의 대구경 화포로 중장비 공성무기와 대규모 병력 대열의 접근 자체를 최소화시키고, 근거리에서는 여러 소화기를 퍼부어 성 아래 대기 중인 공성 병력을 쓸어 버리며, 어떻게든 성벽 아래까지 쇄도한 후금군은 각종의 폭발물질과 인화물질을 동원해 폭사 혹은 소사시켰던 것이다. 후금군의 병력 우세가 명군의 균형잡히고 위력적인 화력으로 무력화된 셈이었다. 이 때문에 후금군의 제2차 공격도 무참한 실패로 돌아갔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 《일월록》을 인용한 것에 따르면, 원숭환이 조선 사신단 중 역관(譯官) 한원(韓瑗)을 빌려 달라고 하여 한원은 이 역사적인 전투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한원은 원숭환이 후금군이 오는데도 태연하게 같이 병법을 논의하고 음식을 먹는가 하면, 후금의 대군이 오자 심지어 "적이 왔다."고 말하면서 빙그레 웃고는 후금군을 막아냈다고 전했다. 특히 이 1월 24일 새벽에 벌어진 교전 과정을 좀 더 상세히 기술했는데, 이 내용이 100%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명군의 화력을 묘사한 부분은 제법 그럴듯하다
. 여러 공성 기록에서 엿보이듯이 이 무렵 후금군은 단순히 기병 위주로 평지에서만 잘 싸우는 유목민족의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후금군도 그간 명군과 대적해오며 공성전 경험을 많이 쌓아왔고, 한족 장졸과 기술자들을 계속 귀순시켜 공성 전술과 기술을 흡수해 왔기에 다양한 방법과 병기를 활용했으나 원숭환의 주도면밀한 대비태세 때문에 무위로 돌아간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홍이포의 위력을 과대평가하며 영원성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 원인으로 꼽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당시 영원성에 배치된 홍이포는 단 10여 문에 불과했고, 홍이포는 우리가 흔히 대포하면 떠올리는 화력이 아닌 쇠구슬을 빠른 속도로 쏘는 정도에 불과했으므로 홍이포에만 의존하여 후금군 수만 명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홍이포 등 소수의 대구경 화포는 장거리에서 후금군의 기선을 제압하거나 공성장비들을 파괴하는데 활용되었을 뿐, 원숭환은 그 외 다수의 중~소형 화약병기들을 배치하고, 많은 폭발물 및 인화물을 이용해 근접하여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무너뜨리려는 후금군까지 효과적으로 제압함으로써 후금군 대열에 치명타를 가해 격렬한 맹공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때의 명군도 집요하게 공격해오는 후금군에 필사적으로 맞서 싸워야 했으며, 원숭환도 직접 최전선에서 지휘하다가 후금군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을 정도였다. 후금군은 1월 24일의 공격이 무참히 실패로 돌아가면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이에 다음날인 1월 25일에는 아예 늦은 오후에 공격을 개시하여 여차하면 야간 전투까지 이어가는 방책을 세웠는데 이는 여전히 명군의 화력에 밀리니, 정확한 관측과 사격이 어려운 야간에 승부를 보겠다는 의도로 추측되며, 특히 이 날은 누르하치가 직접 나가 공성 병력을 독려한 것으로 보아 후금 측에서 반드시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숭환의 강력한 방어태세는 무너질 기미가 안 보였고, 후금 측의 사상자만 속출했다. 후금군은 밤이 돼서도 어둠을 틈타 연이어 야습에 나섰는데, 전사한 아군 시신도 소각할 겸 민가를 헐어 얻은 땔감으로 불을 피워 연막까지 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된 야간 전투에서도 결국 공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1월 25일의 전투에 대해서도 왕지신은 훗날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양일간 이어진 치열한 격전에서 후금군은 스스로 고급 장교인 유격(游擊)[12] 2명, 비어(備御)[13] 2명을 포함해 500명 이상이 전사했음을 인정할 정도의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반해 명군은 후금군이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보고한다. 다만 아군의 피해는 축소하고, 적군의 피해는 과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실제 사상자는 그 중간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금군은 사망자 1,000명 이상을 포함하여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금군이 자칭 2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지만 실제 출정한 병력은 최대 약 60,000명 정도였을거라고 본다면, 3일 남짓에 병력의 5% 이상을 잃는 큰 손실을 입은 셈이었다. 더군다나 왕지신이 보고했듯이 다수의 공성병기가 이미 파괴, 탈취, 노획당했고, 여전히 영원성 내의 명군 방어태세는 견고해 보였으므로 더 공성전을 벌일 상황이 못 되었다. 이렇게 되자 누르하치는 영원성에 대한 정면 승부를 깨끗이 포기했다.
5.3. 음력 1월 26일, 각화도 초토화와 퇴어 누르하치는 영원성 공격이 궁지에 몰리자, 음력 1월 26일(양력 2월 22일)에 영원성 인근 발해만에 있는 각화도(覺華島)로 주 공격 방향을 전환했다. 각화도는 영원성 남쪽 약 10㎞에 위치한 섬으로, 발해에서 2번째로 큰 섬이라 명군도 수영을 설치하고 다수의 병력과 물자를 배치해 요새화했다. 특히 각화도는 영원성 등 요동 방어선의 여러 성에 군량을 공급하는 보급기지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후금 입장에서는 육로는 영원성, 해로는 각화도가 침공로를 막고 있는 눈엣가시였다. 당연히 수군이 취약한 후금군은 다른 계절에는 각화도를 넘볼 수가 없었지만, 전세계적인 소빙하기였던 한겨울만큼은 이곳 발해 깊숙한 랴오둥만이 단단히 결빙되어 공격이 가능했다. 후금군은 음력 1월 26일에 일부 정예 병력이 영원성을 견제하는 사이, 공성전에 직접 참가할 수 없는 기병 병력을 총동원해 얼어붙은 랴오둥만을 넘어 각화도 공격에 나섰다. 각화도에서도 약 7,000명에 이르는 명군 수비병력이 얼음 위에 15리에 이르는 참호를 구축하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후금군 기병은 동이 트자마자 추운 날씨에 12개 부대로 나누어 일시에 협공 작전을 전개했고, 예상보다도 전격적으로 몰아닥친 후금군의 말발굽 앞에 각화도의 명군 방어진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여기서 후금군 기병은 영원성 공략 실패에 대한 보복으로 명군 수비 병력 7,000여 명은 물론 섬에 남아 있었던 명나라 양민 7,000여 명까지 모두 죽였다(각화도 학살). 아울러 이곳에 비축되거나 정박 중이었던 양곡 80,000섬과 크고 작은 배 2,000여 척도 모두 불태워버리는 등 완전히 섬을 초토화시키고 퇴각했다.[14] 누르하치는 각화도를 초토화시킨 정도로 체면을 세우자, 이날 영원성 포위를 풀고 수도 심양으로 향하는 퇴각길에 올랐다. 영원성의 명군은 일부가 성에서 나와 후금군의 후미를 괴롭히며 약 30여 리를 추격했다. 이로써 영원성 전투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원숭환의 대승으로 끝났다. 후금을 상대로 씻을 수 없는 패배를 거듭하며 중원까지 위협받을 위기에 처했던 명나라는 드디어 후금을 상대로 적절한 반격을 날리게 되었고, 명나라 조정은 원숭환의 승전에 기뻐하며 큰 공을 세운 원숭환을 병부시랑(兵部侍郎) 겸 요동순무(遼東巡撫)로 임명하고, 승진시켰다. 또한 영원성 전투를 영원대첩(寧遠大捷)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반면 허약한 상대였던 명군에게 생각치도 못한 참패를 겪은 누르하치와 후금군이 입었던 심리적인 타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일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왔던 백전노장 누르하치는 매우 상심하여 쓰러지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청실록》을 보면,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의 패배에 분노하여 수하의 장수들과 자식들을 엄혹하게 질책했는데, 또한 당시 후금은 명백히 세력상으로는 명나라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에 있었다. 물론 당시 명나라는 이미 막장이 되었기에 후금이 군사적으로는 명나라보다 막강했고, 기세면에서는 훨씬 압도적이었으나 그렇다고 거대 제국 명나라와 변방의 소국 만주 간의 싸움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장기전이 벌어지면 절대적으로 열세인 것은 후금이라, 초기의 기세가 꺾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영원성 전투의 치명적인 패배는 이 기세를 순식간에 꺾어버리며 전황을 교착상태에 놓이게 하고, 장기적으로는 국력상 절대우위인 명나라로 기울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히 누르하치가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의 기록에는 누르하치가 이후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나 영원성에서 공성을 지휘하던 중 날아든 포격에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아예 홍이포에 맞지도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문서 참조 실제로 영원성 전투 이후 7개월이란 기간 동안 누르하치는 4월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몽골의 칼가(할하) 부족에 대한 원정을 떠났으며, 또한 5월에 몽골 귀족인 오오바 훵 타이지가 찾아오자 직접 걸어나와 맞이한 행적도 있기에 누르하치가 진짜 홍이포로 인한 부상으로 붕어했다고 보기에는 정황상 힘든 측면이 많다. 굳이 연관을 짓는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영원성 전투의 패배로 누르하치가 크게 상심하고, 이것이 병으로 이어졌다는 가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원숭환이 격파한 것은 누르하치 뿐만이 아니었다. 누르하치가 붕어하고 후계자가 된 홍타이지는 1627년 5월 11일, 요서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금주(錦州)를 둘러싼 전투에서 홍타이지는 명군 지휘관인 조솔교(趙率敎)를 상대로 우위를 보였지만, 그렇다고 금주를 함락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원숭환은 이미 홍타이지의 속내를 다 뚫어보고, 자신의 주특기대로 미리미리 준비를 해 놓은 뒤였다. 이를테면 누르하치의 붕어 이후 홍타이지가 즉위할 때, 양국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원숭환은 34명의 사신을 심양에 파견하여 축하하는 뜻을 보였는데, 이는 정탐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금주성을 보수하고 성벽을 쌓아 올려 방어력을 튼튼하게 갖추었고, 홍타이지의 공격이 현실화되자 편지를 보내 조솔교 등을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수하인 조대수에게 기병 400명을 파견하여 금주성을 구원토록 했다. 홍타이지는 금주 공략이 여의치 않자 아예 원숭환이 있는 영원성으로 와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원숭환이 이미 튼튼히 방어력을 갖추게 한 데다가 직접 성 위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니, 2일 만에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홍타이지는 또다시 금주로 돌아가 금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오락가락하는 전선으로 병사들은 무더위에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병사들의 사기가 엉망이 되는 것을 본 홍타이지는 당황하여 군대를 뒤로 물릴 수 밖에 없었다(영금 전투 혹은 영금대첩). 영원성 전투의 의의는 명군이 처음으로 거둔 승리라는 데 있다. 누르하치가 처음 군사를 떨치고 후금을 개국한 이래, 명군은 계속해서 패배를 거듭하며 요동에서 주춤주춤 물러나고만 있었다. 그러한 후퇴가 산해관에 이를 지경이었는데, 영원성에서 이를 막아내면서 후금군의 맹공은 이제 저지되었던 것이다. 전략 및 전술적으로 볼 때도 모범적인 사례인데, 일단 아군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보급에 만전을 기하며, 병력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끝까지 사기를 유지하는 등 명장이라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행위를 정확히 수행한 사례이다.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가 이렇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기본을 제대로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만 깨달아도 그런 오해는 삽시간에 깨진다. 당장 이런 조건을 제대로 만들 수 없어서 대부분을 운에 걸고 대충 추스린 병력으로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하는 일이 전사에 비일비재하다. 때로는 정공법이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울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사례이다. 게다가, 1626년에는 호왈 160,000명의 대군을 이끈 누르하치를 막아내고, 1627년에는 정묘호란으로 기세가 등등한 홍타이지까지 격파했는데, 이는 이전까지 만주족과 싸웠던 어떤 지휘관도 해내지 못했던 큰 공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요동 방어선이 확립되었던 것이 큰데, 실제로 이런 시스템은 원숭환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도 1642년 홍타이지가 금주 등을 모조리 함락시킬 때까지 이어졌다(송산 전투). 영원성은 송산, 금주 등 장성 이북의 대부분 지역이 청군에 함락되었음에도 끝까지 버티다가 1644년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이 북경 인근까지 진입하자 숭정제가 영원성을 포기하고 북경으로 와서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서야 청군이 접수했다. 덧붙여 홍이포를 도입한 천재 서광계는 영원성에서의 승리 덕분에 홍이포의 위력과 함께 자신의 선견지명이 옳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숭정제 즉위 이후 다시 조정으로 불려갔다. 홍이포의 대량 생산 담당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