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장군
거란의 침입과 강조의 절개
제1차 침입 후 계속해서 고려를 침입할 구실을 찾던 거란은 강조가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세우자 이것을 빌미로 삼아 드디어 대군을 일으켰다.
거란의 성종은 이미 마음속으로 고려를 칠 계획을 세우고 신하들을 떠보았다.
“고려의 강조라는 자가 임금을 죽이고 어린 임금을 내세워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하오. 마땅히 옛 군주를 생각해서라도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물어야 하지 않겠소?”
신하들은 할 말을 잃었다. 남의 나라 조정의 정변을 따져 응징한다는 것은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못되지만, 신하들은 성종의 의중을 헤아리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던 것이다. 다만 성종의 장인 소적열(簫敵熱)만이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성종은 장인의 반대 의견을 묵살해 버렸다.
현종 원년(1010) 7월, 거란은 고려에 전왕(목종)이 사망한 원인을 물었다. 침략의 구실을 삼기 위한 책략이었다. 거란의 강경한 태도에 고려는 목종 폐립 사건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거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010년 11월 16일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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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건너온 거란군이 제일 먼저 공격한 곳은 흥화진(평북 의주)이었다. 당시 흥화진에는 도순검사 양규(楊規)가 진사 정성과 부사 이수화 등과 함께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40만 대군으로 흥화진을 에워싼 거란 성종은 고려군에 편지를 보냈다.
목종이 거란 조정을 섬긴 지 오래되었다. 지금 역적 강조가 왕을 죽이고 어린 아이를 왕위에 올렸으므로 짐이 친히 복수를 위해 출병하였다. 너희들이 강조를 붙잡아 내게로 끌고 오면 즉시 회군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너희 처자식을 모조리 죽일 것이다.
편지를 받은 고려군은 거란 성종의 주장에 짐짓 시인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더 이상 흥화진에서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거란 성종은 병력을 철수하여 20만 병력은 인주(의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20만 군사를 이끌고 강조가 있는 통주(선천)로 남하했다.
거란의 20만 군대가 통주로 출동하자 강조는 통주성 남쪽 세 곳에 병력을 배치했다. 제1 병력은 강조의 통솔 아래 통주 서쪽 삼수가 만나는 지점에 진을 치고 제2 병력은 통주 근방의 산에, 제3 병력은 통주성에다 진을 쳤다. 강조는 통주 지역의 지형을 이용하여 교묘히 병력을 배치해 놓고 유인작전을 폈고 예상대로 거란군은 강조의 전법에 말려들었다. 거란군이 몰려오자 고려군은 검차(劍車)를 휘둘러 거란군을 물리쳤다. 이때 사용된 신무기인 검차는 순식간에 활을 쏘아대는 일종의 장갑 수레차였다.
대승을 거두자 강조는 거란군을 얕잡아 보았다. 강조는 방심하고 진중에서 바둑을 두는 여유를 부렸다. 강조가 잠시 여유를 부리는 사이 야율분노가 이끄는 거란군 별동부대가 통주의 서쪽 고려 본영진지를 쳐부쉈다.
“장군, 적의 선봉이 아군의 목책을 무너뜨렸습니다. 속히 대비책을 세우소서!”
급보를 들은 강조는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입 안에 음식물이 적으면 씹기가 불편하다. 많이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어라.”
곧이어 두 번째 급보가 전해졌다.
“장군. 거란의 군사가 이미 입에 넘치도록 들어 왔소이다!”
그제야 강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정말이더냐?”
“화급하오이다!”
강조는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귀에 목종의 꾸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도 이제 명줄이 다 되었다. 천벌을 어찌 피하려는가!”
강조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신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제발 살려주소서. 살려주소서.”
강조가 목종의 환영을 보고 빌고 있는 사이 거란군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강조를 묶어버렸다.
거란군은 강조의 몸을 양탄자에 싸서 수레에 싣고 성종에게 데리고 갔다. 거란의 성종은 강조의 결박을 손수 풀어주면서 회유했다.
“그대 같은 걸출한 인물이 어찌 작은 고려에서 태어났는가. 짐은 너를 살려주고 싶으니 나의 신하가 될 생각이 없느냐?”
“내가 고려 사람인데 어찌 거란의 신하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
강조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부하 이현운이 거란의 신하되기를 자청하며 말했다.
“두 눈으로 이미 새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일편단심 옛 산천만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너는 고려인인데 어째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
강조는 이현운을 발길질하며 침을 뱉었다. 강조가 뜻을 굽히지 않자 거란 성종은 강조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장렬한 강조의 죽음과 함께 통주를 지키던 행영도병마부사 노정, 서승 등도 모두 진영에서 죽음을 맞았다. 강조가 붙잡힌 후 고려군은 거란군의 추격으로 우왕좌왕하며 도망가다 모두 살해되었다. 고려의 3만 병사가 목숨을 잃고 버려진 병기와 군량이 길을 메웠다.
이때가 1010년 12월 초의 일이니, 1009년 현종을 옹립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강조는 채 2년도 못되어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강종의 굴욕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반역열전’에 오르는 치욕까지 겪게 되었다.
거란의 3차 침입과 명장 강감찬
현종 2년(1011) 1월 거란군이 철수한 뒤에도 거란과 고려 사이에는 계속해서 전운이 감돌았다. 고려는 그해 8월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여 송악성을 증수하고 서경에는 황성을 쌓았다. 이듬해 4월 거란은 현종에게 친조할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자 현종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어 거란에 입조하지 않고 형부시랑 진공지를 대신 보냈다.
화가 난 거란 성종은 강동 6성을 무력으로 차지하겠다며 고려에 통고해 왔다. 현종이 입조하지 않은 데에 대한 분풀이였다.
이 문제로 또다시 국경 분쟁이 재발할 조짐을 보이자 고려는 거란과 단절하고 재빨리 송나라와 친교를 맺으려 했다. 이로써 고려와 송, 거란 3국의 관계는 10여 년 전과 같이 다시 미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거란은 다시 고려를 압박하여 왔다.
마침내 현종 5년(1014) 9월 소적렬이 이끄는 거란군이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는 것을 신호로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이때 소적렬은 흥화진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에게 패배하여 물러나긴 했지만, 그 이후에도 거란군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거란은 앞서 1·2차 때와 달리 소규모이면서 파상적으로 고려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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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압록강을 건너다 참패당하는 것을 본 거란은 이듬해 정월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 양 옆에다 성을 쌓았다. 고려는 곧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거란은 이 여세를 몰아 흥화진과 통진을 공격하였지만 또다시 패전하였다.
6성 가운데 셋을 치고도 번번이 실패하자 거란은 야율행평을 보내어 6성을 반환하라며 또다시 억지를 부렸다. 이때는 거란과 이미 단교를 한 상태라 고려는 야율행평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은 그해 9월 다시 이송무를 파견하여 6성 반환을 재차 요구하고 며칠 뒤엔 압록강을 건너와 또다시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했다.
이에 대장군 정신용, 별장 주연 등 6명의 지휘관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거란군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7백여 명이나 죽였으나 이 와중에 이들 6명의 지휘관이 모두 전사하였다. 다시 거란군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영주성을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거란의 공격이 계속될 기미를 보이자 고려는 송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국력이 쇠퇴한데다 그 무렵 거란과 동맹을 맺고 있어서 고려의 청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저 사이좋게 지내라는 모호한 답변만을 반복하며 고려와 거란 어느 쪽에도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만 했다.
송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한 가운데 고려는 현종 7년(1016) 또다시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그해 정월 야율세량과 소굴렬이 곽주에 침입하여 고려군 수만 명을 죽이고 치중을 빼앗는 등 큰 피해를 입히고 돌아갔다. 이후 두 나라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고 급기야 압록강에 나타난 거란국 사자를 고려 측에서 냉담하게 돌려보낼 정도도 냉기류가 흘렀다. 양국 간의 냉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듬해 8월 소합탁이 이끄는 거란군은 또다시 압록강을 건너와 흥화진을 포위하고 공격하다 패주하였다.
그러나 이렇듯 쉴 새 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의 공격은 소합탁이 패배한 뒤로 약 1년 동안 잠잠하였다. 잠시 소강기를 갖게 되자 고려는 거란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 척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빈틈없는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거란의 침략을 막기 위해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에 쌓은 성이다. 1014년 고려의 군사와 백성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반격하여 거란군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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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의 신화
고려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이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8년 12월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소배압은 앞서 1차 침입 때에 왔던 소손녕의 형으로 2차 침입 때에는 거란 성종을 따라 개경까지 왔던 인물이다.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고려는 예전의 무방비 상태가 아니었다. 고려 역시 거란의 대규모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해 놓고 있었다. 이 20만 군대를 지휘한 상원수가 바로 평장사 강감찬이었다.
강감찬이 처음 병력을 이끌고 진을 친 곳은 영주(안주)였다. 그러나 곧 흥화진으로 나아가 기병 1만 2천을 복병으로 배치해 놓고 흥화진 앞을 흐르던 내를 소가죽으로 꿰어 막았다. 그런 다음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물을 터트려 흘려보내고 복병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흥화진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소배압은 퇴각하기는커녕 무모하게 개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이에 부원수 강민첨이 소배압을 추격하여 자주(자산)의 내구산에서 격파하고, 동시에 시랑 조원이 남하해 내려온 거란군을 마탄(대동강 근방)에서 섬멸하였다.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 입성을 고집했다. 결국 이듬해 정월, 그는 개경에서 백여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태조의 재궁(梓宮)을 부아산 향림사로 옮기고 개경 일대에 계엄령을 내렸다. 소배압이 개경에 근접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도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철거하게 하는 한편, 비밀리에 기병 3백여 명을 금교역(금천)으로 보냈다. 기습부대들은 어둠을 타고 적병을 습격하여 이들을 거의 다 죽여 버렸다.
그 사이에 서북을 지키던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개경을 수비하게 하고 동북면 병마사 역시 군사 3천 3백 명을 파견하여 개경을 사수하게 했다. 그러자 개경을 코앞에 두고 그만 탈진해 버린 소배압은 개경 공략을 포기하고 철군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이 회군을 시작하자 강감찬은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이들을 급습하게 했다. 퇴각하는 소배압은 마침내 외나무다리에서 강감찬과 맞부딪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귀주’였다.
처음 양 진영은 서로 팽팽하게 맞선 채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개경에 내려갔던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더구나 그때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자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고려군의 기세가 한층 높아졌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도망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하여 거의 몰살시켜 버렸다. 당시 살아서 본국으로 도망친 거란군은 단지 수천 명밖에 안 되었으며 게다가 적장 소배압은 갑옷에 무기까지 버리고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소배압에게는 그야말로 한 맺힌 압록강이었다.
소배압이 패전하고 돌아오자 거란 성종은 진노하여 “네 낯가죽을 벗겨 죽여 버리겠다.”며 노발대발하였다. 이후 소배압의 낯가죽이 실제로 벗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파직되어 귀양 갔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듯하다.

압록강에서 청천의 길목을 지키던 귀주성은 고려를 침입하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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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의 지휘로 거란군의 침략 야욕을 분쇄해 버린 이 날의 전투는 우리 역사상 귀주대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거란 역사에서는 가장 비참한 패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패장 소배압이 자신의 낯가죽을 걱정하는 사이, 승장 강감찬은 3군과 포로를 이끌고 당당히 개선했다. 강감찬이 개경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친히 영파역으로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금화 8가지를 강감찬에게 꽂아 주었다. 이 날을 기념하여 영파역은 흥의역으로 개칭되고 이곳의 역리는 지방관리와 같은 관대(冠帶)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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