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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걸쳐 활약했던 정치가이자 유력 군웅의 한 사람으로, 수양제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반란군의 수령이었다. 자는 법주(法主) 또는 현수(玄邃). 가명은 유지원(劉智遠). 칭호는 위공(魏公)
위국공 이필의 증손자이자 형국공 이요의 손자이며 포산공 이관의 아들이다. 이밀은 2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왕수재의 딸 왕씨, 당고조의 사촌 독고씨가 그의 아내들이다.
젊을 때 재주와 지략을 가지면서 뜻과 기운이 크면서 멀리 두고 있었으며,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선비를 좋아해 좌천시에 임명되었다. 조상의 작위를 이어받아 '포산공'을 지냈으며, 양현감과 잘 지냈지만 수양제가 이밀을 쫓아낼 뜻을 우문술에게 비쳤다.
이에 우문술이 병을 핑계로 사직할 것을 권고하자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서 독서에만 힘썼으며, 일찍이 황소를 타고 한서를 읽다가 양소가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 집에 데리고 가서 이야기하면서 크게 기뻐해 아들들에게 이밀의 식견과 도량은 너희들이 미치지 못한다고 했고 이로부터 양현감과 교류하게 되었다.
위국공 이필의 증손자이자 형국공 이요의 손자이며 포산공 이관의 아들이다. 이밀은 2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왕수재의 딸 왕씨, 당고조의 사촌 독고씨가 그의 아내들이다.
젊을 때 재주와 지략을 가지면서 뜻과 기운이 크면서 멀리 두고 있었으며,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선비를 좋아해 좌천시에 임명되었다. 조상의 작위를 이어받아 '포산공'을 지냈으며, 양현감과 잘 지냈지만 수양제가 이밀을 쫓아낼 뜻을 우문술에게 비쳤다.
이에 우문술이 병을 핑계로 사직할 것을 권고하자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서 독서에만 힘썼으며, 일찍이 황소를 타고 한서를 읽다가 양소가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 집에 데리고 가서 이야기하면서 크게 기뻐해 아들들에게 이밀의 식견과 도량은 너희들이 미치지 못한다고 했고 이로부터 양현감과 교류하게 되었다.
2. 생애[편집]
2.1. 양현감을 섬기다[편집]
아버지 이관(李寬)의 포산공(蒲山公) 작위를 이었고, 수양제의 친위부(親衛府) 대도독(大都督)이 되었다.
613년에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계획하면서 양현감이 동도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양현감의 책사로 가담해 세 가지 계책을 제시했는데, 상책으로는 계로 들어가서 험준한 임투를 점거해 고구려로 원정을 나아간 군사들의 목구멍을 조이는 것, 중책으로는 서쪽의 성을 지나면서 장안을 함락할 것, 하책으로는 정예의 군사를 선발해 재빠르게 동도를 함락할 것을 제시했다.
양현감은 동도를 함락하는 계책을 채용했으며, 양현감은 동도를 포위했지만 고구려로 원정을 나갔던 수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불리하자 홍화 유수 원홍사가 모반했다고 널리 알리는 사자를 파견해 영접하게 하면서 관중에 들어가면 많은 무리들을 속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양현감은 홍농에서 양지적이 성 가퀴에 올라 꾸짖자 홍농을 공격했는데, 이밀은 무리들을 속이고 서쪽으로 진입하기에 신속하게 행동해 동관을 점거해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양현감은 이를 듣지 않아 홍농을 공격했다가 함락하지 못하고 수나라의 추격군에게 따라잡힌 끝에 패하면서 자살했으며, 이밀은 망명하다가 붙잡혀 동도로 압송되었고 고양에 도착하자 왕중백 등과 도망가는 것을 모의했다. 사자에게 자신들이 챙긴 황금을 꺼내보이면서 자신들이 죽는 날에 황금을 나눠줄 것이라 했으며, 사자들이 황금을 탐내어 방비하고 금지하는 것이 해이해졌다.
613년에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계획하면서 양현감이 동도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양현감의 책사로 가담해 세 가지 계책을 제시했는데, 상책으로는 계로 들어가서 험준한 임투를 점거해 고구려로 원정을 나아간 군사들의 목구멍을 조이는 것, 중책으로는 서쪽의 성을 지나면서 장안을 함락할 것, 하책으로는 정예의 군사를 선발해 재빠르게 동도를 함락할 것을 제시했다.
양현감은 동도를 함락하는 계책을 채용했으며, 양현감은 동도를 포위했지만 고구려로 원정을 나갔던 수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불리하자 홍화 유수 원홍사가 모반했다고 널리 알리는 사자를 파견해 영접하게 하면서 관중에 들어가면 많은 무리들을 속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양현감은 홍농에서 양지적이 성 가퀴에 올라 꾸짖자 홍농을 공격했는데, 이밀은 무리들을 속이고 서쪽으로 진입하기에 신속하게 행동해 동관을 점거해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양현감은 이를 듣지 않아 홍농을 공격했다가 함락하지 못하고 수나라의 추격군에게 따라잡힌 끝에 패하면서 자살했으며, 이밀은 망명하다가 붙잡혀 동도로 압송되었고 고양에 도착하자 왕중백 등과 도망가는 것을 모의했다. 사자에게 자신들이 챙긴 황금을 꺼내보이면서 자신들이 죽는 날에 황금을 나눠줄 것이라 했으며, 사자들이 황금을 탐내어 방비하고 금지하는 것이 해이해졌다.
2.2. 탈출해서 세력을 일으키다[편집]
이밀은 술과 음식을 살 수 있도록 요청해 연회를 열어 술을 마셨으며, 저녁 때가 되어 위군의 석량역에 도착해 방비하고 지키던 사람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담장을 뚫고 도망쳤다. 이밀은 도망가 학효덕, 왕박 등에게 의지했지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곤궁하고 궁핍해 나무 껍질을 깎아내어 먹을 지경에 이르렀고 회양의 시골집에 숨어 성, 이름을 바꿔서 무리를 모아 가르치다가 군현에서 의심해 잡으려고 하자 도망가서 옹구현 현령인 매부 구군명에게 갔다.
그러나 구군명은 받아들이지 않아 협객 왕수재의 집에 머물게 했으며, 왕수재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구군명의 당질 구회의가 이 일을 고발해 이밀에 대한 체포가 내려졌지만 마침 이밀은 자리를 비웠기에 무사할 수 있었고 옹구에서 외강으로 망명했으며, 외강에서 여러 세력들이 모여 천하를 빼앗는 책략에 대해 유세했지만 처음에는 모두 믿지 않다가 오래 지나자 점차 그런 것처럼 여겼다.
이밀은 외강의 세력 중에 가장 강한 적양에게 투항해 그와 일을 꾸몄으며, 수나라의 장수 장수타를 격파한 일로 인해 이밀에게 아장이 세워지고 따로 부하들을 거느려 포산공영이라 불리면서 힘을 가지게 되었다. 617년에 이밀은 여양(黎陽)의 곡식 창고인 낙구창을 함락한 후, 창고 문을 활짝 열어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다. 이렇게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니, 불과 10여일만에 이밀의 군대는 30만명으로 세력이 급속히 불어났다. 또한 여러 차례 승리하면서 위공(魏公)으로 추대받았고 조, 위 남쪽, 장강, 회수의 북쪽 지역의 세력들이 이밀에게 모두 호응했으며, 하남 대부분의 군현은 이밀의 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이어서 이밀은 또다른 창고인 회낙창까지 공격하여 점거한다. 이밀의 밑에 있던 시효화는 이밀에게 적양을 낙구창에, 배인기를 회낙창에 남긴 뒤 이밀 자신은 장안을 습격하여 점령, 그곳에서 군사들을 길러 동진해 하남을 마저 평정한다면 남은 천하는 격문 한 장으로도 평정될 것이라 유세했다. 이밀은 시효화의 계책을 옳게 여겼지만 아직 양제가 살아있고 자신 밑의 장수들은 모두가 산동 출신이라 낙양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따라 장안으로 가지 않으려 할 것인데, 이들은 도적떼 출신이라 남겨두고 서진한다면 각기 자웅을 다투려 할 것이므로 대업이 어그러지게 될 것이라 걱정한다. 이에 시효화가 자신을 보내달라 청하자 이밀은 허락한다.
시효화가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섬현에 이르자 주변의 산적 만여 명이 그에게 귀부해왔다. 그런데 당시 이밀이 전투 중에 유시에 맞아서 병영에 드러눕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단달과 방옥 등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이밀을 공격해 이밀은 회낙창을 버리고 낙구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시효화가 모은 무리는 이밀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부분 흩어졌으며, 시효화도 별 소득 없이 이밀에게 돌아왔다. 이후 이밀은 동도의 군사들과 회낙창을 놓고 일진일퇴하며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고[1], 이러는 사이에 장안은 진양에서 일어난 이연이 장악하게 된다.
4월에 동쪽으로 진군해 여러 차례 동도를 공격해 수양제가 보낸 왕세충과 싸웠으며, 적양과 가까운 사람들이 적양에게 이밀의 권력을 빼앗기를 권했지만 거절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이밀은 적양을 미워했다. 적양이 최세추에게 재물을 요구한 일을 했다가 적양이 방언조에게 여남을 격파하고 보물과 재화를 얻으면서 이밀에게만 주고 자신에게는 주지 않았는데, 이밀을 자신이 세웠으니 세상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다가 방언조가 이를 이밀에게 알리자 적양을 술자리에 불러 죽였다.
그러나 구군명은 받아들이지 않아 협객 왕수재의 집에 머물게 했으며, 왕수재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구군명의 당질 구회의가 이 일을 고발해 이밀에 대한 체포가 내려졌지만 마침 이밀은 자리를 비웠기에 무사할 수 있었고 옹구에서 외강으로 망명했으며, 외강에서 여러 세력들이 모여 천하를 빼앗는 책략에 대해 유세했지만 처음에는 모두 믿지 않다가 오래 지나자 점차 그런 것처럼 여겼다.
이밀은 외강의 세력 중에 가장 강한 적양에게 투항해 그와 일을 꾸몄으며, 수나라의 장수 장수타를 격파한 일로 인해 이밀에게 아장이 세워지고 따로 부하들을 거느려 포산공영이라 불리면서 힘을 가지게 되었다. 617년에 이밀은 여양(黎陽)의 곡식 창고인 낙구창을 함락한 후, 창고 문을 활짝 열어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다. 이렇게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니, 불과 10여일만에 이밀의 군대는 30만명으로 세력이 급속히 불어났다. 또한 여러 차례 승리하면서 위공(魏公)으로 추대받았고 조, 위 남쪽, 장강, 회수의 북쪽 지역의 세력들이 이밀에게 모두 호응했으며, 하남 대부분의 군현은 이밀의 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이어서 이밀은 또다른 창고인 회낙창까지 공격하여 점거한다. 이밀의 밑에 있던 시효화는 이밀에게 적양을 낙구창에, 배인기를 회낙창에 남긴 뒤 이밀 자신은 장안을 습격하여 점령, 그곳에서 군사들을 길러 동진해 하남을 마저 평정한다면 남은 천하는 격문 한 장으로도 평정될 것이라 유세했다. 이밀은 시효화의 계책을 옳게 여겼지만 아직 양제가 살아있고 자신 밑의 장수들은 모두가 산동 출신이라 낙양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따라 장안으로 가지 않으려 할 것인데, 이들은 도적떼 출신이라 남겨두고 서진한다면 각기 자웅을 다투려 할 것이므로 대업이 어그러지게 될 것이라 걱정한다. 이에 시효화가 자신을 보내달라 청하자 이밀은 허락한다.
시효화가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섬현에 이르자 주변의 산적 만여 명이 그에게 귀부해왔다. 그런데 당시 이밀이 전투 중에 유시에 맞아서 병영에 드러눕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단달과 방옥 등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이밀을 공격해 이밀은 회낙창을 버리고 낙구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시효화가 모은 무리는 이밀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부분 흩어졌으며, 시효화도 별 소득 없이 이밀에게 돌아왔다. 이후 이밀은 동도의 군사들과 회낙창을 놓고 일진일퇴하며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고[1], 이러는 사이에 장안은 진양에서 일어난 이연이 장악하게 된다.
4월에 동쪽으로 진군해 여러 차례 동도를 공격해 수양제가 보낸 왕세충과 싸웠으며, 적양과 가까운 사람들이 적양에게 이밀의 권력을 빼앗기를 권했지만 거절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이밀은 적양을 미워했다. 적양이 최세추에게 재물을 요구한 일을 했다가 적양이 방언조에게 여남을 격파하고 보물과 재화를 얻으면서 이밀에게만 주고 자신에게는 주지 않았는데, 이밀을 자신이 세웠으니 세상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다가 방언조가 이를 이밀에게 알리자 적양을 술자리에 불러 죽였다.
2.3. 몰락[편집]
이밀은 동도(낙양)의 왕세충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주변의 군웅들을 착실하게 흡수해나갔고, 세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끝내 낙양 북쪽의 금용성마저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왕세충의 세력을 완전히 포위했다. 618년 3월에 우문화급 등이 수양제를 죽이고 동도에 가기 위해 북상하자 이를 두려워한 낙양에서는 개종을 보내 이밀의 죄를 용서할테니 화친하고 우문화급을 토벌하자고 제안했다. 이밀은 이밀대로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될까 두려웠던지라 그것을 받아들여 우문화급을 토벌할 테니 자신을 받아달라 답했다. 낙양의 원문도 등은 이밀의 말을 믿고 환영했으나 왕세충은 그에 반발했기에 둘 사이에 틈이 생겼다.
우문화급과 여러 차례 싸워 이긴 이밀은 우문화급이 식량이 바닥난 것을 알고는 거짓으로 화해를 요청하고 식량지원을 약속한 뒤 그가 남은 식량마저 모두 소진하기를 기다려 공격하려 했는데, 이밀 밑에 있던 도망가던 사람이 이 사정을 알려주면서 우문화급과 동산 아래에서 치열하게 싸워 죽을 뻔 했으나 진숙보의 활약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싸움 이후 식량이 떨어진 우문화급의 제장들이 연이어 이밀에게 귀부해왔고, 우문화급은 아직 2만여에 달하는 남은 세력을 이끌고 하북으로 향했지만 이밀은 그가 더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공, 락으로 돌아왔다.
우문화급을 물리친 이밀은 약속대로 동도로 들어가 입조하려 했고 원문도, 노초 등이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왕세충은 이밀이 낙양에 들어온다면 이밀과 오래 싸워서 그의 세력에 큰 피해를 입힌 자신의 군사들은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면서 군사들을 선동했다. 원문도는 이를 듣고 두려워서 왕세충을 암살할 모의를 했는데, 이를 알게 된 왕세충은 선수를 쳐서 원문도 등을 모두 죽이고 낙양을 장악했다.
이에 이밀은 낙양의 포위를 더욱 강화했고, 결국 식량이 바닥난 왕세충은 군사들을 끌고 나와 이밀과 마지막 일전을 벌이려 했다. 당시 이밀은 우문화급과의 싸움에서 정예병이 대부분 상했지만 낙구창, 회낙창 등을 점거해 식량이 남아도는 상황이었고, 왕세충의 군대는 본래 상당한 강병에다 죽을 각오를 하고 나온 것이라 기세가 막강했다. 이에 배인기는 이밀에게 왕세충과의 정면승부를 피하고 숫적 우위를 활용해 다른 군대로 동도를 압박하여 왕세충의 군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치게 만들면 손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밀도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진지략, 번문초, 선웅신 등은 자신들의 병력이 월등히 많고 강회에서 새로 항복해온 군사들이 공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으니 왕세충과 결전을 벌여 그를 무찔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징이 배인기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극력 주장했으나 정정에게 서생이 하는 말이라며 면박을 당했고, 계속된 승승장구에 내심 자만하고 있던 이밀은 장수들의 7~8할이 결전을 주장하자 결국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북망산에서 왕세충을 맞이했다.
왕세충과의 전초전에서 이밀의 장수인 배행엄, 정지절은 죽을 뻔 하다가 겨우 살아났고, 그외 이밀의 날랜 장수 손장락 등 10여 명이 모두 중상을 입었다. 이밀은 우문화급을 격파한 뒤로 왕세충을 가볍게 여겨서 벽루도 만들지 않았는데, 왕세충이 다음날 동틀녘에 진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이밀의 군대를 들이친 뒤 싸움이 한창일 때 이밀과 용모가 비슷한 사람을 묶어다가 이밀이 이미 사로잡혔다고 외치게 하니 이밀의 군대는 대패했다. 장동인, 진지략 등은 모두 항복했고 이밀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낙구로 퇴각했다.
기세를 탄 왕세충은 언사를 공격해 함락시켜 이밀이 붙잡아두었던 자신의 일족들을 구출했으며 배인기, 정정, 조군언 등 수십 명을 붙잡았고, 이어 낙구창으로 향했는데 낙구를 지키던 병원진이 왕세충과 내통하여 그를 끌어들이자 이를 알아챈 이밀은 왕세충이 낙수를 건너는 틈을 타서 기습하려 했으나 척후가 때를 맞추지 못해 왕세충은 아무런 저항 없이 낙구성에 다다랐다.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밀은 호뢰로 달아났고, 이렇게 되자 선웅신마저 왕세충에게 항복했다.
이밀은 처음엔 여양의 서세적에게 향하려 했으나 과거 적양을 죽인 일로 그와의 사이가 소원해졌기에 주저했고, 왕백당 등과 논의를 해보았지만 무리들의 사기가 바닥이라 배신자가 속출했기 때문에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결론이 나오자 관중의 이연에게 투항해 광록경, 상주국에 임명되고 형국공의 작위를 받았다.
이밀은 당나라에 투항한 후에 당고조가 예의를 베풀면서 동생이라 했지만 바라던 것을 채우지 못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그를 가볍게 보거나 뇌물을 요구하자 마음 속에 불만을 품었으며, 이밀은 광록경이라 식사를 올려야 한 것을 수치로 생각했다. 이밀은 이연에게 산동에 가서 자신의 부하들을 수습하겠다고 요청해서 동쪽으로 갔다가 당나라 조정에서 다시 소환을 받게 되자 낙으로 가는 척 하면서 양성으로 달아나 장선상에게 호응하도록 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성언사가 이를 간파하고 추격하면서 공격을 받아 죽었으며, 그 목은 장안으로 보내졌다.
우문화급과 여러 차례 싸워 이긴 이밀은 우문화급이 식량이 바닥난 것을 알고는 거짓으로 화해를 요청하고 식량지원을 약속한 뒤 그가 남은 식량마저 모두 소진하기를 기다려 공격하려 했는데, 이밀 밑에 있던 도망가던 사람이 이 사정을 알려주면서 우문화급과 동산 아래에서 치열하게 싸워 죽을 뻔 했으나 진숙보의 활약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싸움 이후 식량이 떨어진 우문화급의 제장들이 연이어 이밀에게 귀부해왔고, 우문화급은 아직 2만여에 달하는 남은 세력을 이끌고 하북으로 향했지만 이밀은 그가 더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공, 락으로 돌아왔다.
우문화급을 물리친 이밀은 약속대로 동도로 들어가 입조하려 했고 원문도, 노초 등이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왕세충은 이밀이 낙양에 들어온다면 이밀과 오래 싸워서 그의 세력에 큰 피해를 입힌 자신의 군사들은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면서 군사들을 선동했다. 원문도는 이를 듣고 두려워서 왕세충을 암살할 모의를 했는데, 이를 알게 된 왕세충은 선수를 쳐서 원문도 등을 모두 죽이고 낙양을 장악했다.
이에 이밀은 낙양의 포위를 더욱 강화했고, 결국 식량이 바닥난 왕세충은 군사들을 끌고 나와 이밀과 마지막 일전을 벌이려 했다. 당시 이밀은 우문화급과의 싸움에서 정예병이 대부분 상했지만 낙구창, 회낙창 등을 점거해 식량이 남아도는 상황이었고, 왕세충의 군대는 본래 상당한 강병에다 죽을 각오를 하고 나온 것이라 기세가 막강했다. 이에 배인기는 이밀에게 왕세충과의 정면승부를 피하고 숫적 우위를 활용해 다른 군대로 동도를 압박하여 왕세충의 군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치게 만들면 손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밀도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진지략, 번문초, 선웅신 등은 자신들의 병력이 월등히 많고 강회에서 새로 항복해온 군사들이 공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으니 왕세충과 결전을 벌여 그를 무찔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징이 배인기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극력 주장했으나 정정에게 서생이 하는 말이라며 면박을 당했고, 계속된 승승장구에 내심 자만하고 있던 이밀은 장수들의 7~8할이 결전을 주장하자 결국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북망산에서 왕세충을 맞이했다.
왕세충과의 전초전에서 이밀의 장수인 배행엄, 정지절은 죽을 뻔 하다가 겨우 살아났고, 그외 이밀의 날랜 장수 손장락 등 10여 명이 모두 중상을 입었다. 이밀은 우문화급을 격파한 뒤로 왕세충을 가볍게 여겨서 벽루도 만들지 않았는데, 왕세충이 다음날 동틀녘에 진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이밀의 군대를 들이친 뒤 싸움이 한창일 때 이밀과 용모가 비슷한 사람을 묶어다가 이밀이 이미 사로잡혔다고 외치게 하니 이밀의 군대는 대패했다. 장동인, 진지략 등은 모두 항복했고 이밀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낙구로 퇴각했다.
기세를 탄 왕세충은 언사를 공격해 함락시켜 이밀이 붙잡아두었던 자신의 일족들을 구출했으며 배인기, 정정, 조군언 등 수십 명을 붙잡았고, 이어 낙구창으로 향했는데 낙구를 지키던 병원진이 왕세충과 내통하여 그를 끌어들이자 이를 알아챈 이밀은 왕세충이 낙수를 건너는 틈을 타서 기습하려 했으나 척후가 때를 맞추지 못해 왕세충은 아무런 저항 없이 낙구성에 다다랐다.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밀은 호뢰로 달아났고, 이렇게 되자 선웅신마저 왕세충에게 항복했다.
이밀은 처음엔 여양의 서세적에게 향하려 했으나 과거 적양을 죽인 일로 그와의 사이가 소원해졌기에 주저했고, 왕백당 등과 논의를 해보았지만 무리들의 사기가 바닥이라 배신자가 속출했기 때문에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결론이 나오자 관중의 이연에게 투항해 광록경, 상주국에 임명되고 형국공의 작위를 받았다.
이밀은 당나라에 투항한 후에 당고조가 예의를 베풀면서 동생이라 했지만 바라던 것을 채우지 못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그를 가볍게 보거나 뇌물을 요구하자 마음 속에 불만을 품었으며, 이밀은 광록경이라 식사를 올려야 한 것을 수치로 생각했다. 이밀은 이연에게 산동에 가서 자신의 부하들을 수습하겠다고 요청해서 동쪽으로 갔다가 당나라 조정에서 다시 소환을 받게 되자 낙으로 가는 척 하면서 양성으로 달아나 장선상에게 호응하도록 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성언사가 이를 간파하고 추격하면서 공격을 받아 죽었으며, 그 목은 장안으로 보내졌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4. 둘러보기[편집]
[1] 시효화는 이 과정에서 전사한다.[2] ‘동이’라는 표현은 전근대 중국에서 중국 대륙 동쪽에 있는 이민족들을 포괄하여 일컫는 표현으로 여기에는 고조선과 같은 한민족 국가들 뿐만 아니라 퉁구스 계통의 숙신 계열, 일본 등도 있었다. 심지어 춘추전국시대 중기 까지는 중국 대륙 동쪽의 현재의 산둥성, 안후이성 등에 존재하던 이족(夷族) 국가들을 지칭하는 뜻이었다. 환빠들이나 주장하는 것을 드라마에서 정설인 것 마냥 넣은 것이다.[3] 고조선에 관련하여 유사역사학과 환단고기 이야기가 줄거리에 깊이 반영된 드라마 특성상 이밀은 청년기 연개소문 파트에서 그런 역사 의식이 등장하게 되는 주범 중 하나이다. 연개소문과 만나기만 하면 이밀이 자꾸 유사역사학적인 언급을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구려가 한나라보다 먼저 건국되었다", "한나라가 역으로 고구려에게 봉건을 했다" 같은 언급까지 나온다.[4] 25화에서는 한 풍수사가 양광에게 매수된 채로 양견에게 수나라의 운명이 앞으로 200대 및 2000년은 갈 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고 풍수사가 돌아갈 때 붙잡아 이실직고하게 했으며 그때 한자로 '二千年'을 쓴 후 다시 고쳐서 '三十年'으로 수정하여 실제로는 수나라가 30년 밖에 가지 못한다는 걸 지적한 바 있다. 현실적인 부분에서도 이밀은 양광의 성품과 자질을 파악하여 양광 통치하의 수나라가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파악한다.[5] 유폐되어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폐태자 양용에게 음식을 갖다준 적도 있었고 양광에게 여러 번 직언을 한 적 있었다.[6] 드라마의 창작 인물로 배우 손태영이 연기했다. 그러나 청년 배우들의 연기가 좋지 못한 드라마 특성상 이화 역시 발연기로 혹평을 받다가 결국 1부에서 퇴장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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