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
한초삼걸, 韓信
미상 |
BC 196 |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 소하, 장량과 함께 한초삼걸이라 불린다.
유방의 진영에서 대장군으로 활동했고, 후에 제나라의 가왕(假王)이 되었다.
위, 제, 조, 초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훗날 ‘토사구팽’의 주인공으로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다.
토사구팽의 주인공
기원전 202년 유방은 역사상 두 번째로 대륙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룩하고 한 고조로 즉위했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는 데 최고의 라이벌은 바로 서초패왕 항우였으리라. 대과업을 이루기 4년 전 10만 대군의 항우에게 맞선 유방의 군대는 고작 4만에 불과했다. 수적으로 불리했던 유방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한초삼걸(漢初三杰)’이라고 불리는 소하, 장량, 한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방 스스로도 황제 즉위식에서 소하의 행정력, 장량의 계책, 한신의 전략을 치하하며 이들의 공을 인정했다. 특히 후대의 사람들은 한신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데, 한신의 전투 전략이 유방의 천하 통일에 결정적으로 공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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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에 따르면 한신은 회음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왕족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양친을 잃고 매우 가난한 생활을 했다. 남창정(南昌亭) 정장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는가 하면, 낚시질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며, 빨래터의 아낙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풍채도 좋고 무예에도 능했던 그가 하급 관리의 자리라도 얻으려 하지 않고 무위도식으로 세월을 보내자 사람들은 그를 멸시했다.
어느 날 마을 불량배가 큰 칼을 차고 지나가는 한신에게 시비를 걸었다. 불량배는 키도 크고 몸집도 좋은 한신이 큰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은 실은 그가 겁쟁이기 때문이며, 만약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자신을 칼로 찌르고 죽음이 두렵다면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며 그를 놀렸다. 이에 한신은 화가 났지만 불량배의 얼굴을 한 번 본 후 몸을 숙여 그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지나갔다. 이 일로 한신은 마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의 봉기를 시작으로 반진 세력들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항량은 조카 항우와 함께 오중에서, 유방은 패현에서 진나라 타도를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비록 마을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큰 뜻을 잃지 않았던 한신은 항량의 군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항량은 한신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향량이 전사하고 나서 항량의 군대는 조카인 항우가 이어받았다. 이에 한신은 항우의 휘하로 들어갔지만 역시나 발탁되지 못한 채 낭중이 되어 보초를 서는 등 하찮은 일을 맡았다. 한신은 항우에게 수차례 전략을 제시했지만 귀족 출신이던 항우는 평민 출신인 한신을 무시했으며, 한신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항우에게 크게 실망했다.
기원전 206년 항우와 유방의 연합군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이 되어 공신들을 각지의 제후왕으로 봉했다. 유방은 한왕에 봉해졌다. 항우 아래에서는 장래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한 한신은 한중으로 부임해 가는 유방의 진영에 투항하기로 결심했다.
유방의 진영에 편입했지만 한신은 여전히 주목받지 못한 채 보급품을 관리하는 말단직인 치속도위에 임명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방의 진영에서 유일하게 한신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참모 소하였다. 소하는 원래 패현의 관리로 유방이 무명이었을 때 도움을 주면서 인연을 맺은 인물이었다. 그 후 유방이 진나라에 대항에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를 보좌해 진나라를 격파했고, 유방이 관중을 차지할 수 있게 도왔다. 소하는 유방이 한중의 왕이 된 후에는 승상에 임명되었고, 한나라가 건국된 후에도 승상으로 활약했다. 한신의 능력을 꿰뚫어 본 소하는 연신 유방에게 그를 천거했지만 유방은 한신을 중용하지 않았다.
유방에게서도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한신은 기회를 틈타 유방의 진영을 탈출했다. 한신의 탈출에 가장 민첩하게 반응한 사람은 역시 소하였다. 소하는 유방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한신의 뒤를 쫓아 그를 다시 데리고 오는 데 성공했다. 진영으로 복귀한 소하는 유방에게 한중의 왕으로 머물고자 한다면 한신을 내치고, 천하의 주인의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한신을 중용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유방은 소하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신을 장군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소하의 거듭된 청에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대장군으로 등용된 한신은 유방에게 전국의 객관적인 정세 분석과 패권을 차지할 전략을 내놓았다.
이후 한신은 옹왕 장한을 기습하여 제압했다. 이어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 하남왕 신양, 한왕 정창, 은왕 사마앙 등도 그에게 투항했다. 이로써 기원전 206년 8월 관중 지역을 평정한 유방은 서초패왕 항우가 초나라 회왕을 죽이자 기원전 205년 반(反)항우 세력과 연합하여 항우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유방과 연합군 56만은 항우가 제나라를 공략하는 사이 초나라의 도읍 팽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팽성 함락 소식을 들은 항우는 군사 3만을 이끌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진로로 유방을 공격했다. 방심하고 있던 유방은 항우에게 패해 쫓기게 되었다. 한신은 형양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더 이상 항우가 유방을 쫓지 못하게 했다. 유방이 항우에게 패하자 연합군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제나라와 조나라는 다시 항우의 편으로 돌아섰다.
유방은 형양과 성고를 사이에 두고 항우와 대치하게 되었다. 한신은 배후를 공격하여 위기를 벗어나고자 위나라부터 공격했다. 위나라 왕 위표는 임진관(臨晉)에서 강을 건너려는 한신을 방어했는데, 한신은 위표가 볼 수 있게 일부 병력은 임진을 건너려는 척 위장시키고 몰래 대군을 상류에 도하시켜 위나라의 안읍(安邑)을 공격하게 했다. 한신은 위표를 생포하여 위나라를 멸망시켰다.
다음으로 기원전 204년 한신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 왕 조헐(趙歇)과 성안군 진여는 군사를 정경 어귀에 집결시켰다. 한신은 정경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야영장을 꾸리고, 한밤중에 기병 2천여 명을 선발해 산속에 매복시켰다. 다음 날 한신이 선발대 1만 여 명을 보내 강을 등지고 진을 치자 조나라 군사들이 병법도 모르는 장수라며 그를 비웃었다. 전투를 벌이다가 한신이 거짓으로 퇴각하자 조나라 군사들이 추격해 왔고, 그 사이 산속에 매복해 있던 기병대가 조나라 군의 빈 진지를 습격하여 한나라군의 깃발을 세웠다.
한신은 이 전투에서 조헐을 사로잡고, 성안군 진여는 참살했다. 이것이 ‘배수의 진’ 전략이다. 한신이 ‘산을 우편으로 배후를 삼고, 물을 앞으로 왼편에 두라’라는 병법서의 내용과 반대로 진을 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신의 군대는 잘 훈련된 군대가 아니라 일반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등 뒤에 땅이 있다면 자기가 살 땅을 찾아 모두 도망가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기원전 203년 한신은 제나라를 공격했다. 한신이 거듭 승리하자 유방은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 투항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때 한신의 참모 괴통(蒯通)이 제나라를 함락시켜 공을 세울 것을 부추겼고, 한신은 제나라를 급습하여 크게 승리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제나라 왕은 초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항우는 20만 대군을 지원해 주었다. 한신은 초나라와 전투 중에 패하고 달아나는 척하다 초나라 군사들이 유수에 이르렀을 때 둑을 터트려 초—제 연합군을 대파해 결국 제나라를 멸망시켰다.
마지막으로 한신은 연나라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항우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신은 그동안의 설움을 떨쳐내듯 뛰어난 전략들을 구사하여 유방을 천하의 패자로 군림시키는 데 성공했다. 위, 조, 제나라는 왕과 장수들 모두 한신을 과소평가한 덕에 멸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제나라를 멸망시킨 한신은 스스로 가왕(假王)에 올랐다. 유방은 허락도 없이 제나라 왕에 오른 한신이 괘씸했지만, 형양에서 항우와 대치 중인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조언에 따라 한신을 제나라 왕에 책봉했고, 초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기원전 202년 마침내 유방은 해하에서 항우를 포위했다. 한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항우를 공격했고, 좌우 앞뒤로 항우의 10만 대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곧 항우의 진영에 군량미가 떨어지고 군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신은 자기 군대에 초나라 노래(楚歌, 초가)를 가르쳐 부르게 했다. 초가를 들은 항우의 군사들은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리다 속속 진영을 이탈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항우는 결국 대패하여 오강(烏江)까지 후퇴한 후 그곳에서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는 이때의 일을 일컫는 고사성어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래’라는 의미다. 사방이 빈틈없이 적에게 포위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로써 유방은 천하의 주인공이 되었다. 유방은 한나라 고조로 즉위 후 공신들을 각지의 제후왕으로 책봉했다. 그러나 그는 막강한 군사력과 뛰어난 지략을 지닌 한신을 경계했다. 한신은 제나라 왕에서 초나라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01년 초나라 왕으로 책봉되어 임지로 떠난 지 9개월 만에 한신은 반란죄로 체포되었다. 한신이 반란을 꾀한다는 밀고가 들어오자 유방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물었다. 진평은 한신의 군사력이 유방의 군사력보다 강하고, 한신이 뛰어난 장수이기 때문에 그를 토벌할 수 없다고 진언했다.
그 대신 유방에게 운몽(雲夢)을 순시한 후 한신의 영지 근처인 진현에서 제후들을 소집하여 한신을 참석하게 한 후 체포할 것을 조언했다. 체포된 한신은 “날쌘 토끼를 사로잡으면 사냥개는 잡아먹히고, 높이 나는 새를 잡으면 활은 곳간에 처박히고, 적국을 멸하고 나면 충신은 죽임당한다더니, 천하가 평정되니 내가 잡혀 죽게 되는구나!”라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한신의 반란죄는 입증되지 않아 그는 목숨을 건지고 회음후(淮陰侯)로 강등되었다. 그 후 한신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기원전 196년 소하가 한신을 찾아왔다. 소하는 유방이 거록(鋸鹿) 태수 진희의 반란을 평정했으니 입궁하여 여태후에게 축하의 인사를 올리라고 전했다. 소하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입궁한 한신은 곧 매복 중이던 무사들에게 포박되어 살해되었다.
후대 사람들은 한신의 죽음을 ‘토사구팽’에 비유하여 그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했다. 하지만 한신에게도 천하의 주인이 될 기회가 있었다. 한신의 참모 괴통은 앞서 한신에게 그의 공적과 지도력은 항우와 유방에 못지 않으니 그들과 천하를 삼분하여 다스릴 것을 조언했다. 그러나 한신은 괴통의 조언을 물리치고 유방을 도왔고, 결국 유방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신은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괴통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한신의 가솔들은 삼족을 멸하는 형을 받았다.
항우
Hsiang Yu , 項羽요약 항우는 한을 세운 유방과 관중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으며, 그의 패배로 중국에서 봉건제가 일소되었다.
항우는 진나라가 전 중국을 통일할 때 진에 흡수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초나라 유력가문의 후손이었다. 진에 대항하는 반란에 합류하여 초군의 최고 지휘자가 되었다. 항우가 이끄는 군대는 진의 수도를 점령하고 마지막 황제를 처형한 후 옛 통치체제를 회복시키려고 했다. 우선 옛 초 왕실의 후예를 맞아 회왕이라고 하고, 반란에 가담했던 여러 장수들에게 전국의 여러 지역을 분봉해주었다. 자신은 옛 초나라의 영토에서 패왕으로 자처했다. 그러나 그는 곧 회왕을 살해했고, 각지의 장수들이 패권을 놓고 싸우게 되었다. 그중 가장 강력했던 서부 지역의 유방이 초를 공격했고, 유방에게 패한 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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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진나라(秦 : BC 221~206) 말기의 장수이며 진을 멸망시킨 반란군의 지도자.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 한(漢 : BC 206~AD 220)을 세운 유방(劉邦)과 관중[關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항우가 패함으로써 중국에서 봉건제가 일소되었다.
항우는 진나라가 전중국을 통일하고 전국에 할거하던 제후국들을 폐지시킬 때 진에 흡수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초나라 유력가문의 후손이었다.
진에 대항하는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을 때 항우는 삼촌인 항량(項梁)이 이끄는 초군(楚軍)에 합류했고, 나중에 그를 이어 초군의 최고 지휘자가 되었다. 항우가 이끄는 군대는 결국 진의 수도를 점령하고 진의 마지막 황제를 처형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옛 통치체제를 회복시키려고 했다. 우선 옛 초 왕실의 후예를 맞아 회왕(懷王)이라고 했다가 의제(義帝)로 존중해주었고, 반란에 가담했던 여러 장수들에게 전국의 여러 지역을 분봉해주었다. 자신은 옛 초나라의 영토에 자리잡고 패왕(覇王)으로 자처했다. 그러나 항우는 곧 의제를 살해했고, 각지의 장수들이 패권을 놓고 서로 싸우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자가 중국의 서부 지역인 파(巴)·촉(蜀)·한중(漢中)에 분봉받았던 유방이었다. 원래 농민 출신인 유방은 민심을 얻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차차 서쪽 지역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입지를 강화했다. 반면에 항우는 봉건제를 재현시키고 있었다. 그는 장신에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학식을 갖춘 시인이었으며, 탁월한 군사전략가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그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인간적 매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두 세력의 공존관계는 유방이 초를 공격함으로써 끝이 났다. 유방은 육박전으로 승부를 내자는 항우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다. 202년 항우는 패하여 포위를 뚫고 도망가던 중 자살했다. 항우의 영웅적 행동, 특히 마지막 전투에서 보여준 용감한 모습은 중국 시와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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