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연구

찬탈의 역사/왕망과 세조

박송 입니다. 2022. 6. 16. 12:53

왕망

왕거군(王巨君), 王莽
출생사망
BC 45
AD 23

신 왕조를 건국한 전한 말의 정치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를 양도받는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신 왕조 건국 후 오행참위설을 나라의 바탕 이론으로 하고, 주나라의 정책을 모방하여 토지, 화폐, 지명에 대한 개혁 정책을 시행했다.

최초의 역성혁명을 일으키다

한 고조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는 후에 전한과 후한으로 나뉘는데, 그 시기는 왕망이 세운 신(新)의 건국과 멸망을 기준으로 삼는다. 신 건국 이전의 한나라를 전한으로, 신 멸망 이후의 한나라를 후한으로 구분한다. 왕망은 한 무제가 죽은 후 권력의 실세로 등장한 외척으로,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 역성혁명을 이름)을 성공시켜 신 왕조를 건국했다. 하지만 신 왕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5년 만에 몰락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짧은 왕조라는 기록을 남겼다.

왕망의 자는 거군(巨君)이며, 한나라의 제11대 황제 원제의 황후 왕씨의 배다른 동생 왕만(王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왕만이 일찍 세상을 떠 그는 불우하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유교 경전 《예기(禮記)》를 배우며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당시 세력가였던 큰아버지 왕봉(王鳳)의 인정을 받았다. 왕봉은 한나라 제12대 황제 성제의 외척으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여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기원전 87년 제7대 황제인 무제가 죽은 후 한나라 조정에서는 권력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겨우 여덟 살이던 태자 유불릉(劉弗陵)이 소제로 황위에 오르자, 곽광(霍光)은 어린 황제를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그 후 기원전 74년 소제가 후사 없이 죽자 곽광은 창읍왕 유하(劉賀)를 황제로 옹립했으나 불량한 품행을 이유로 곧 폐위시켰다. 유하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선제는 곽광이 죽자 곽씨 일족이 쥐고 있던 권력을 되찾기 위해 곽황후의 소생이 아닌 전처 허황후의 소생을 태자로 삼았다.

선제가 기원전 49년에 죽자 허황후 소생의 태자가 원제로 등극했다. 원제가 재위 26년 만에 죽자 그의 어린 아들이 성제로 등극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원제의 황후이자 성제의 어머니인 원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외척 왕씨 일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성제는 정치에 관심이 없던 인물로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조정의 권력은 원태후의 형제들이 나누어 가졌다. 그녀의 다섯 형제는 제후가 되었으며, 특히 왕봉은 대사마와 대장군을 겸했다.

왕봉이 중병에 들었을 때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인연으로 왕망은 기원전 33년 황문랑에 임명되어 관직에 올랐다. 비록 정계에 진출한 시기는 늦었으나 왕망은 빠른 속도로 출세하여 기원전 16년에는 신도후에 봉해졌으며, 기원전 8년에는 대사마의 자리까지 올라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섰다.

기원전 7년 성제가 후사도 없이 돌연 세상을 뜨고 성제의 이복동생의 아들이 애제(哀帝)로 등극했다. 애제의 할머니 부소의(傅昭儀)가 원태후와 연적 관계였기 때문에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원태후와 왕망에게 애제의 즉위는 거북할 뿐이었다. 왕망은 스스로 대사마의 직위를 내놓고 잠시 정계에서 물러났다. 왕망은 정세를 살피며 정계에 복귀할 시점을 기다렸다.

절함도

오른편에는 성제가 앉아서 권신 장우를 호통치고 있고, 좌측에는 주운이 장우를 당장 사형시키라고 고하고 있다. 한나라 시대 왕궁과 관리, 시녀, 환관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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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년 애제가 선대 황제들처럼 후사 없이 죽자 원태후는 왕망을 대사마로 다시 불러들여 후사를 논의했다. 왕망은 원제의 손자인 아홉 살짜리 중산왕을 평제로 옹립했다. 또한 왕망은 성제의 비인 조황후와 애제의 비인 부황후를 자살하도록 해 왕씨 일가 외의 외척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조정의 전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측근을 통해 평제가 자신을 안한공에 봉하도록 했다. 평제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왕망은 딸을 황후로 들여보냈다.

조정의 권력을 잡은 왕망은 자신을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왕망은 주나라 초기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좌할 때 이민족들이 주공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흰 꿩을 선물했던 전설을 흉내 내어 몰래 이민족들을 시켜 흰 꿩을 바치도록 했다. 이를 통해 백성들이 자신이 어린 평제를 보좌하는 것과 주공이 성왕을 보좌했던 일을 같은 것으로 여기게끔 했다. 또한 아들 왕획(王獲)은 노비를 죽인 죄로, 왕우(王宇)는 미신으로 민심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죽이고, 왕망 자신을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 공정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포장했다. 왕망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서기 4년에는 은나라 탕왕(湯王)을 보좌했던 이윤(伊尹)의 관직 ‘아형(阿衡)’과 주공의 관직이었던 ‘태재(太宰)’를 합친 ‘재형(宰衡)’이라는 관직을 만들어 스스로 그 자리에 올랐다. 이 역시 자신을 성인화하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서기 5년 왕망은 평제가 점점 성장하자 부담을 느끼고 그를 독살했다. 왕망은 이미 자신이 황제에 오를 수 있도록 조정과 민심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원태후의 반대로 두 살 난 유영(劉嬰)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자신을 ‘섭정하는 황제’라는 뜻의 ‘섭황제’라고 칭하며 다음을 기약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왕망의 섭황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서기 8년 왕망은 황태자 유영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왕망은 자신의 황제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장(哀章)을 시켜 ‘하늘이 왕망에게 황제가 될 것을 명하노라’ 하고 새겨진 흰 돌판이 나타나게 하는 등 연극을 연출했다. 그리고 한 고조 유방의 영혼에게 선양을 받았다고 하며 선양혁명의 형식을 취했다.

신 왕조를 건국한 왕망은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아 참위 사상적(讖緯思想, 미래의 일을 예언한 도참 사상) 유학을 전공한 유학자들을 등용하여 신 왕조 건국의 이론적 바탕을 마련했다. 더불어 주나라 시대의 정책들을 모방한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첫째, 주나라의 정전제(丁田制)를 모방하여 왕전제(王田制)를 실시했다. 왕전제는 토지의 불균형 분배를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한 후 토지의 사사로운 거래를 금지시키고 자영 농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였다. 그러나 왕망의 토지 개혁은 실시한 지 3년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토지를 빼앗긴 귀족과 관료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약속받은 땅을 미처 받지 못한 백성들도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기존의 화폐를 없애고 새로운 화폐를 단계적으로 새롭게 발행했다. 이때 발행된 화폐를 ‘왕망전(王莽錢)’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왕망전은 필요에 따라 무계획적으로 빈번하게 발행되어 고액의 명목 화폐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경제를 더욱 혼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왕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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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현재 지명을 《상서(尙書)》 등에 나타나 있는 주나라 때의 지명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수시로 바뀌는 지명은 관료와 백성의 혼란만 가중시켰다. 또한 노비매매법을 폐지했고 상공업과 세금 징수를 관리하는 오균(五均)과 소금, 철, 화폐 주조를 담당하는 육관(六筦)을 만들어 국가가 직접 물가를 통제하고 부정거래와 고리대금업 등을 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관리하는 관료로 주로 대상인들이 임용되어 부정거래와 고리대금의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왕망의 육관 제도

국가가 소금, 철, 술을 전매하고 화폐 주조를 독점하며, 그 재료의 채굴과 야련을 장악한다는 등 여섯 가지 물자를 국영화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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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개혁 정책이 모두 실패로 끝나자 왕망은 실책을 만회하고자 흉노 정벌을 계획했다. 그러나 흉노 정벌을 공표하고 나서 주변국의 군주들을 왕에서 제후로 격하시키자 주변국들이 왕망을 이반하기 시작했고, 흉노와의 전투에서도 대패했다.

왕망의 대내외적 정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각지에서 왕망에게 불만을 가진 집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7년 호북의 녹림산에서 왕광(王匡)과 왕봉이 녹림병(綠林兵)이라는 반란군을 일으켰고, 18년에는 번숭(樊崇)을 선봉으로 한 적미병(赤米兵)이라는 반란군이 등장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반란이 들끓자 지방의 호족과 귀족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중 유연(劉縯)과 유수(劉秀)는 한 왕조인 유씨 일족이었기 때문에 따르는 무리의 수가 많았다. 유연과 유수는 녹림군과 연합해 일족인 유현(劉玄)을 경시제로 추대하고 왕망의 군대에 맞섰다. 왕망은 40만 대군을 보내 경시제의 군대를 포위했지만 패배하고, 녹림군의 공격을 받아 도망치다 상인 두오(杜吳)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전한을 멸망시키고 건국된 신 왕조는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왕망의 신 왕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선양으로 권력을 찬탈한 왕조였다. 그리고 왕망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이 실패하면서 이후 200년간의 후한 시대는 호족의 시대가 되었다.

 

세조

출생사망

 

1417년
1468년

조선 제7대 왕(재위 1455~1468년).
세종의 제2왕자로 1428년 수양대군에 봉해졌고, 1455년 단종을 선위(禪位)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하고 6조직계제를 부활시키는 등 왕권을 강화했고, 호적과 호패 제도를 강화하고 진관 체제 등을 실시하여 국방력을 신장시켰다.

왕위 찬탈자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에 대한 평은 좋지 않다. 사료는 그에 대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통치 체제를 다시 6조직계제로 고쳤으며, 자신의 활동을 견제하는 집현전을 없앴다. 경연(經筵)도 열지 않았으며, 태종 이후 정치 참여가 제한되었던 종친들을 등용하기도 했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의 성리학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던 세종이나 성종과는 반대였다. 그러나 그는 태종에 이어 조선의 정치, 군사 등을 정비하고 조선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다.

세조가 집권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 그가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수십 명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을 말한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4개월 만에 세상을 뜨자 열두 살의 어린 단종이 즉위했다. 그러나 궐 안에는 수렴청정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을 낳은 후 한 달 만에 산욕열로 죽었고,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는 정치적 발언권이 없이 궐 안의 일을 관장할 뿐이었다. 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아직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아 단종의 후원 세력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모든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유지를 받든 황보인과 김종서 등의 대신뿐이었다.

당시 수양대군(훗날의 세조)과 안평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많은 문객을 모으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주로 불교 서적을 번역하거나 병서를 편찬하는 일에 관여했고, 진법(陣法)을 지휘하는 일도 했다. 반면 안평대군은 문학과 예술을 좋아했다.

단종 집권 이후 황보인 등의 대신들로 인해 의정부가 지나치게 비대화되자 집현전 출신인 신숙주, 성삼문 등이 대간직으로 진출하면서 의정부 대신들의 권력을 축소할 것을 요구했다. 단종이 의정부를 옹호하자 황보인 등은 대간의 업무를 탄압하게 되었고 이에 상당수 집현전 출신들이 수양대군과 함께 정변에 참여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사, 내금위 무사, 내시부의 내시를 규합하고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그는 즉위한 다음, 제2의 창업지주(創業之主) 혹은 조종지주(祖宗之主)임을 내세웠다. 그리고 왕이 죽은 제도라 하여 의정부서사제는 혁파하고 6조직계제를 선택했다. 정적을 숙청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사, 영경연사, 영춘추관사, 영서운관사, 판이병조, 내외병마도통사 등 중직을 겸하는 등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 등 43명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했다.

〈대사례도〉

대사례는 왕이 성균관에서 석전례를 지낸 뒤 신하들과 행하는 활쏘기 의식이다. 활쏘기는 육례의 하나로써 단순히 기예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함양하는 것이었다.

ⓒ 고려대학교 박물관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문종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세종은 통념적인 종법대로 적자로서 왕위를 승계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형인 문종 역시 군주의 자질이 충분했기에 둘째 아들인 그가 왕위에 오르기는 불가능했다. 세조는 그저 왕실 종친 중 한 사람으로 남게 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문종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세종은 자신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에 다소 이르지만 문종에게 섭정을 하게 하여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했다.

당시 세조는 궁 밖에서 자라고 있었다. 궁 밖에서의 삶은 그에게 오히려 좋은 영향을 주었다. 궁에서 애지중지 귀하게 자라 세상 물정을 모르기보다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활달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부당함, 진실과 거짓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다. 그는 또한 다섯 살의 나이에 《효경(孝經)》을 외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러한 영특함은 형제들 중 단연 돋보여 세종과 형인 문종에게 인정을 받았다.

또한 세조는 무예에 대한 체득도 남달라 궁마술에 뛰어났고, 매사냥을 좋아하여 자신이 직접 매를 사육시켜 사냥을 다니곤 하였다. 그가 이렇듯 마음껏 무예를 닦을 수 있었던 것은 왕자로서 덕을 키우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는 성리학적 윤리 규범이 강하게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열두 살에 훗날 여장부로 명성을 떨치게 될 정희왕후 윤씨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당시 윤씨의 나이는 세조보다 한 살 아래였다. 정희왕후는 세조를 내조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세조가 중대한 날에 판단을 주저할 때에는 그의 결단을 이끌어 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순간에도 그녀는 갑옷 입기를 주저하는 세조에게 “지체할 시간도 없는데 아랫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할 사람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고 질책하며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녀는 세조가 붕어(崩御)한 뒤에도 왕실을 안정시키고 왕위 계승 문제를 분명하게 처리했으며,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행한 여장부였다.

그는 1428년에 진평대군, 1432년 함평대군에 책봉되었다가 이해 7월 진양대군으로, 다시 1445년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 그는 세종 시절 토지 개혁을 맡았으며,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 《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의 책을 썼고, 중국의 《운회(韻會)》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가 왕위에 머문 기간은 14년 정도지만 그동안 많은 제도를 개혁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아버지였던 세종이 하나의 제도를 몇 년 동안 고심한 것과는 정반대로 대부분의 제도 개혁을 독단으로 결정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집현전의 공신들과는 집권 초기부터 사이가 벌어졌고 이는 단종 복위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세조는 집현전의 유교적 이상주의가 왕권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해 집현전을 혁파하고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학자들을 배출하던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서적들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 버렸다. 이 때문에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 밖에도 왕권 강화책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 때 실시했던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 《동국통감》을 편찬하고 《경제육전》을 정비했으며, 왕조 일대의 총체적 법전인 《경국대전》 찬술을 시작했다.

호패

조선 시대에는 16세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호패를 지니고 다녀야 했다. 앞면에는 이름과 출생년이, 뒷면에는 호패의 발급연도와 직책 등이 기재되어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중박201010-463)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역모와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군정을 정비하는 데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 각 고을에 명해 병기를 만들게 했고, 종래에 현직·휴직·정직 관원에게 나누어 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는 등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살폈다.

그러나 그는 측근 중심의 정치를 펼치며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은 가차 없이 제거했지만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게 굴었다. 일례로 계유정난의 공신이자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공이 많았던 양정이 그에게 불손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진 반면, 또 다른 공신인 홍윤성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수하로 하여금 사람을 죽였음에도 주의만 주고 사건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승정원과 6조는 모두 그의 심복들인 정난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예조 판서, 군사통인 한명회는 병조 판서, 재무통인 조석문은 호조 판서를 지내는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봉직했다. 또 이들은 비록 현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 자격으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했다.

그렇게 많은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세조는 말년이 되면서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일종의 원상제(院相制)로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제도였다. 그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1468년 9월 세조가 세자에게 전위(轉位)한다는 뜻을 밝히자 대신들은 불가하다며 나섰다.

“운(運)이 다한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 것인데, 너희들이 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그는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그다음 날 죽었다. 이것은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었다고 생각해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나 그 피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문인지 세조는 불교에 큰 관심을 두었다. 궁 안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왕자 시절에 불경 언해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교학(敎學)에도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세조가 불교 융성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인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 사상 아래에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친불 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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