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史

포에니 전쟁

박송 입니다. 2019. 11. 19. 14:53

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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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발단3. 제1차 포에니 전쟁4제2차 포에니 전쟁5제3차 포에니 전쟁6. 그 후

1. 개요[편집]

또 너희 튀리아여! 영원히 의 핏줄 모두에
미움을 버리지 말라! 너희는 내 주검 앞에 이를
약속하라! 저들과의 평화는 일체 없으리라!
이제든 언제든 아무 때나 무력을 갖출 때에
내 무덤에서 누군가 생겨나 원수를 갚을 것,
불과 칼을 들어 달다냐[1] 백성을 쫓아갈 것이니,[2]
해안이 해안에 대립하고, 바다가 바다에 맞서
원컨대 무기에 무기로 당대도 후손도 싸우라!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이네이아스에게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내린 저주[3]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서기 1985년[4] 기원전 146년 사이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포에니(poeni, 포이니)'라는 말은 라틴어 Poenicus에서 나왔는데, 이는 '페니키아인의'라는 뜻으로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영어로는 퓨닉 워(Punic War)라고 부른다.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얻었고,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는 명실상부한 지중해의 최강대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2. 발단[편집]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고, 로마는 착실히 내정을 다지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카르타고와의 충돌은 없었다. 오히려 피로스 전쟁 때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일시적인 군사적 동맹 관계에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영토였던 시칠리아 섬에서 시라쿠사의 왕 아가토클레스를 받들던 이탈리아인 용병 마메르티니[5]가 아가토클레스 왕이 죽은 후 그리스의 식민지인 메시나 시를 점령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 용병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라틴계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처음에는 근거지 없이 시칠리아 섬을 떠돌아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들은 피로에 지쳐 메시나 시에 그들이 잠시 머물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메시나 시민들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에게 성내에 휴식처를 주고 식량까지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용병들은 이 도시가 살기 좋은 것을 보고 야밤에 시민들을 기습 공격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이들은 메시나 시의 모든 남자들을 죽여버리고, 여자들은 모두 포로로 잡아 각 병사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했다. 이러한 만행은 시칠리아 섬에 있던 그리스계 시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학살당한 메시나 시민들이 그리스계였기 때문이었다. 이들 마메르티니인들은 메시나를 거점으로 하여 20년에 걸쳐 주변 도시들을 상대로 해적질과 약탈을 벌였다. 결국 보다못한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 2세가 이들의 만행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다. 마메르티니와 그 용병들은 시라쿠사 군대에 쉽게 무너져 내렸고, 그들은 같은 라틴인이다라는 이유로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들의 사절을 맞이한 로마 원로원은 이들의 만행을 전해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지원 요청을 처음에는 거부하였다. 그런데 이들 용병이 카르타고에게도 구원을 요청했다는 말을 듣고선 태도가 바뀌었다. 당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의 절반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고 만일 메시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라쿠사를 쳐부수는 일이 생긴다면 시칠리아 섬 전체는 카르타고의 영향력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원로원은 토의를 거듭했지만 결론을 낼 수가 없었고 결국 이 안건을 민회에 회부하였다. 민회의 로마 시민들은 메시나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참전할 것을 결정했다.

3. 제1차 포에니 전쟁[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irst_Punic_War_264_BC.png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는 군단병을 이끌고 야밤에 메시나 해협을 건넜다. 시라쿠사는 로마군이 참전했다는 말을 듣고 카르타고와 연합하여 로마군에게 대항하지만 격파당했다. 그 전쟁을 촉진시킨 메시나의 마메르티니인들은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이후 역사적 기록에서 잊혀져 버렸는데, 수백 년 후에도 마메르티니 와인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와인을 양조하면서 잘먹고 잘산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로마군은 시라쿠사에 승리한 뒤 시라쿠사의 히에로 2세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로마는 승자의 입장에서 맺은 강화조약이므로 사실상 시라쿠사는 로마의 패권하에 들어간 셈이었다. 카르타고는 이것에 반발하여 대규모 군사를 파병하였고 여기서 시칠리아 전역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 두 세력이 충돌하게 되었다.

로마군은 수백 년에 걸쳐 라틴족, 에트루리아인, 삼니움족, 그리스계 이탈리아인들과의 전쟁을 수행하여 이탈리아의 패권을 차지했고 당대 최고의 전술가였던 피로스군마저 격파했으므로 카르타고군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군사적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육지에서 붙은 전투에선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우수한 해군력으로 꾸준한 보급을 하였고 결국 로마는 해군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밀레 해전 직전에 로마 해군은 리파리 제도 인근 해상에서 카르타고 해군에게 기습을 당해 17척의 군선을 나포당하고 함대를 이끌던 집정관이 사로잡히는 등 일격을 허용했으나, 이내 태세를 재정비하고 밀레 앞바다에서 양측의 해군이 맞붙게 된다. 뱃머리에 금속철을 씌운 충각을 단 카르타고 군선들이 로마 군선들을 향해 질주했지만, 로마의 해전 전술은 독특했다. 쇠갈고리를 던져 적의 함선을 끌어당긴 후, 배 앞에 설치한, 소위 까마귀라는 이름의 다리를 내려 로마군 병사들이 그 다리를 건너 적선에 진입하여 백병전으로 적 함대를 공격하는 새로운 전술을 고안해낸 것이다. 충각 전술 같은 전문 해전에 약하니 선상 백병전으로 바꿔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로마를 깔보던 카르타고는 그야말로 큰 코 다치게 되었다. 이때가 기원전 260년이다.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로마 해군은 이렇게 까마귀의 덕을 톡톡히 보았으나 나중에는 단점을 인식하고 떼어낸다.[6]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크게 다섯 번의 대해전이 있었다.

로마는 까마귀라는 신무기를 고안하여 열세였던 해전에서 승리를 하고 그 뒤에도 우세하게 된다. 이후 기원전 256년 에크노무스 곶 해전에서도 대승을 거두어 자신감을 얻은 로마는 이듬해 봄 집정관 레굴루스가 이끄는 군단을 주축으로 아프리카 본토에 직접 상륙하여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기에 이르렀으나,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에게 무모하게 도전했다가 기병의 열세로 로마군은 대패하여 전멸당하고 레굴루스는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이들의 패잔병 일부를 구하러 온 로마의 주력 함대는 헤르마이움 곶에서 공격해온 카르타고 함대를 무찌르는 데 성공했지만 귀국길에 폭풍을 만나 10만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는 대참사를 겪게 되는데, 여기서 포에니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이 참사의 원인 중 한 가지는 앞서 서술했던 까마귀 때문이었는데, 까마귀는 무게중심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조금만 강한 측풍이 불면 그대로 배가 기울어져 버리기 십상이었다. 거기다가 이탈리아 반도에 로마 함대가 가까워졌을 때 바다 사정에 무지한 지휘관들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함대를 무리하게 뭉친 상태에서 해안으로 접근하라는 지시를 선원들에게 내렸다고 한다. 경험 많은 선원들은 이럴 때는 흩어진 다음 해안이 아닌 바다로 나가야 생존률이 높다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지휘관들의 강요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더욱 엄청난 해난 사고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태풍보다 물을 더 무서워하다가 살릴 수 있던 사람들까지 억지로 죽인 게 되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바그라다스 전투의 승리로 아프리카에서 로마군을 축출하긴 했으나 그 여파로 카르타고의 지배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한 리비아인이나 누미디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기미를 보였기 때문에 기원전 255년 직후 바로 함대를 재건한 로마가 다시 주도권을 잡고 공세를 취했다.

기원전 254년, 리파리 제도 해전에서 카르타고 함대에 생포되었다가 포로 교환으로 석방된 집정관 스키피오 아시나는 시칠리아 북서부의 파노르무스를 수륙양동으로 공성전을 벌인 끝에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주변의 시칠리아 도시들은 로마군에게 항복하거나 남서부 항구 도시로 도주하였고 이제 카르타고에 남은 도시는 릴리바이움, 셀리누스, 헤라클레아, 미노아 등 4개 도시였다. 하지만 로마가 재건한 함대가 또 다시 폭풍에 휘말려 300척 중 약 150척의 함대가 침몰하였고 로마인들은 안전성의 이유로 해전에서 활약한 까마귀(Corvus)라는 회전식 부교까지 철거하고 50척의 함대를 재건하지만 이미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130척의 함대는 각각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에 상륙한 뒤였다. 하스드루발은 본국에서 데려온 140마리의 코끼리를 앞세워 로마군에게 함락당한 파노르무스를 탈환하려고 하였고 당시 파노르무스에 주둔한 집정관 메텔루스는 로마군이 140마리나 되는 코끼리 부대가 온다는 소식에 두려워하자 병사들을 성내에 대기시키고 투창병과 경보병만을 성 밖으로 보냈다. 마침내 카르타고군의 코끼리 부대가 나타나자 메텔루스는 코끼리 부대를 집중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투창 세례를 얻어맞은 코끼리들은 통제를 잃고 카르타고군을 짓밟아 혼란에 빠트린다. 메텔루스는 대기하던 로마 군단병을 투입하여 2만의 카르타고군을 죽이고 60마리의 코끼리를 포획하였다. 이때 카르타고군을 지휘했던 하스드루발은 패전의 책임으로 사형당하고 이후 카르타고의 지상에서의 공세는 없었다.

기원전 251년, 로마는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의 해상로를 연결하는 릴리바이움을 공략하기 위해 4개 군단 4만 명의 병력과 130척의 함대를 투입하였으나 시칠리아 서쪽 반도 끝에 위치한 릴리바이움은 얕은 여울과 암초가 많고 서풍을 정면으로 받기 때문에 로마 함대의 항구 봉쇄가 어려워서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릴리바이움을 점령하지 못했다.

한편, 드레파나에 주둔하고 있던 카르타고 함대는 로마 함대가 릴리바이움을 봉쇄한 틈을 타 시칠리아 북부와 남부 이탈리아 연안을 약탈하였고 로도스의 한니발(Hannibal the Rhodian)이 이끄는 소규모 기병대가 로마군의 보급로를 습격하는 등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군량이 바닥난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에 의해 공성탑까지 모조리 전소되자 기원전 249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로마군이 릴리바이움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다시 해전에서 승리하여 제해권을 되찾은 카르타고 함대를 격파해야만 한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로마 함대의 절반이 시칠리아 북동부의 카르타고 도시를 공격하는 작전에 동원된 탓에 풀케르는 130여 척의 함대 규모밖에 가지지 못했고 회전식 부교인 까마귀는 두 번의 폭풍으로 인해 철거된 상태였기에 기동력으로 카르타고 함대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풀케르는 드레파나의 카르타고 해군을 기습하기로 결정한다.

드레파나는 릴리바이움과 마찬가지로 육지 쪽으로 패인 만 안쪽에 위치하였고 항구와 외해를 잇는 길은 병목처럼 좁은 수로 하나뿐이라 풀케르는 이 점을 노리기로 하였다. 그는 카르타고 정찰대에 포착되지 않도록 어둠을 틈타 릴리바이움에서부터 드레파나까지 출항하였다. 사람의 주의가 가장 느슨해지는 새벽녘 무렵에 카르타고 해군을 기습하려는 의도였지만 카르타고의 경험 많고 뛰어난 해군 제독인 아드헤르발(Adherbal)은 해전으로 잔뼈가 굵은 장수라 이러한 사실을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에 로마 함대의 접근을 알게 된 아드헤르발은 드레파나 항구를 비운 뒤 외해로 이동했고 로마군은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당황하지만 지휘관인 풀케르가 최후미에서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드레파나로 북상한다. 카르타고 함대는 외해로의 전진을 멈추고 즉시 남쪽으로 선회하여 종렬로 북상하는 로마 함대의 측면을 기습했다. 그때까지도 카르타고 함대가 방심한 채 항구에 정박하고 있을거라 생각한 풀케르는 자신이 있는 로마 함대의 최후미까지 카르타고 함대가 내려오고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뒤늦게 뱃머리를 카르타고 함대를 향해 돌리라고 하였으나 후미에 있었던 탓에 선두로 나아가던 로마 함대는 명령을 받지 못하고 북상을 계속했다. 결국 해안가로 밀려가던 로마 함대는 차례대로 암초에 충돌하거나 카르타고 함대의 충각 전술에 격침되었고 릴리바이움으로 돌아갈 수 있던 로마 함대는 풀케르의 기함을 비롯한 최후미의 30여 척에 불과했다.[7]

기원전 247년, 카르타고에서 시칠리아에 파견된 하밀카르 바르카의 육지에서의 활약으로 카르타고군은 잠시나마 활기를 되찾았다. 로마는 하밀카르를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해군력으로 고립시키기로 하여 기원전 242년이 되어서야 다시 해군을 재편성하였다. 여기서 전함을 건조하기 위해 로마의 부유한 귀족들이 사재를 털어 정부에게 기부했던 것은 공화정 로마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부를 한 것은 아니고 채권을 발행하긴 했지만.

로마는 이 재편성한 해군력으로 카르타고 해군을 아이가테스 제도에서 격파하여 시칠리아의 제해권을 다시 되찾았다. 결국 카르타고 본국은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로마군과 강화를 맺기로 결정하여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카르타고는 이 강화조약에서 시칠리아 섬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였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그리고 기원전 238년에는 조약에서 언급한 적 없던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을 잇달아 빼앗겼다.[8]

4. 제2차 포에니 전쟁[편집]

자세한 것은 해당문서 참고. 여기에는 간단히 서술한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에스파냐에 진출한 지 8년째에 전사하고 그 뒤를 사위인 하스드루발이 이어받아 7년간 통치하였다. 이 시기 로마는 카르타고의 에스파냐 진출을 경계하여 하스드루발과 접촉하여 에브로 강을 경계로 더이상 세력을 뻗지 않도록 조약을 맺었다. 그 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그의 뒤를 하밀카르 바르카의 장남인 27세의 한니발 바르카가 이어받았다. 이 시기 로마는 사군툼이라는 명목상 동맹국(사실상 속국) 도시를 내세워 에브로 강 서쪽으로 진출하여 카르타고를 압박했고, 결국 한니발은 집권 2년에 사군툼에서 카르타고계 시민 및 친 카르타고계 인사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사군툼을 포위했다. 이때 로마는 사군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북이탈리아에서 갈리아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중이라 따로 군단을 파병할 여력이 되지 않았고 대신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사절들은 한니발로부터 철수하겠다는 대답을 받지 못했다. 이에 로마 사절들은 직접 카르타고 본국으로 가서 한니발을 사군툼에서 철수시키든지 아니면 로마와 전쟁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카르타고 원로원 의원들은 전쟁을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대답했고 이에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한니발은 로마가 선전포고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군툼을 점령한 다음 그곳 주민 모두를 노예로 팔아버렸다.

로마 원로원은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에게 군사를 주어 스페인 원정을 결정했지만, 한니발은 이 로마군과 스페인에서 싸우는 대신 오히려 군대를 편성하여 북상했고, 이에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에 맞서기 위해 당시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마살리아(현제 마르세유)에 주둔하여 한니발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니발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로 진입한다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진군을 감행했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허를 찌르는 데 성공했으며 이에 놀란 로마는 마살리아의 스키피오와 또 다른 집정관이자 시칠리아에 주둔 중이던 셈프로니우스에게 한니발의 저지를 지시하였으나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 트레비아 강 부근에서 로마 추격군을 대파해버렸다. 이 덕분에 한니발은 북부 갈리아 부족을 새로운 지원세력으로 만들 수 있었다(트레비아 전투).

다음 해에 로마에서는 플라미니우스와 세르빌리우스를 집정관으로 임명후 군단을 내어주고 이들은 각각의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이 남하할 서쪽과 동쪽의 가도를 봉쇄했다. 한니발은 이 두 가도 중 하나를 골라 남하하는 대신 그 사이의 가운데 늪지대를 통과하기로 결정했고 3박 4일간 휴식도 수면도 없는 초강행군을 벌여 이 늪지대를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합류한) 갈리아군과 대부분의 전투 코끼리들을 잃고 한니발 자신도 한쪽 눈이 완전히 실명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강행군의 결과로 카르타고군은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전투 없이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탈리아 중부 지역은 로마의 세력권이었으므로 한니발군은 거리낌없이 약탈을 벌이고 농지를 불태우면서 돌아다녔다. 로마 평민층의 지지를 얻던 플라미니우스는 비록 이 도발에는 넘어가지는 않았으나 한니발군을 빠르게 전멸시켜야할 초조함을 느끼게 되었다. 한니발은 이것을 역이용하여 트라시메노 호수에 기지를 세워 주둔한 척하고 주변에 매복한 후 추격해온 플라미니우스의 군단을 궤멸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플라미니우스도 전사하였다(트레시메노 호수의 전투).

이 승전 덕분에 한니발군은 남부 이탈리아까지 방해물 없이 진격할 수 있었고, 로마 원로원은 지구전법론자인 퀸투스 파비우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군단을 맡겼지만 로마 시민들은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집정관 선거에서 적극론자인 바로를 선출하였다. 새로운 집정관인 바로와 파울루스는 무려 8만 6천에 달하는 로마 군단을 조직했다. 한편 한니발은 그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탈리아 남부로 남하하여 로마군의 군량 보관소가 있는 칸나이에 진입하였다. 이에 두 집정관은 대군을 이끌고 칸나이에서 한니발과 대규모 회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한니발은 전사에 남을 기발한 기병, 보병의 유기적인 조합으로 로마군을 포위하여 그들을 섬멸해버렸다. 한니발은 5만 명의 병력으로 8만 6천 명의 로마군을 상대하여 싸웠는데 이 싸움에서 로마군은 4만 5천 명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간신히 탈출한 1만 4천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이 모조리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했다. 거기에 마케도니아 왕국이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고, 남부 이탈리아의 로마의 동맹시들도 한니발 편에 붙기 시작했으며,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도 로마와 동맹을 끊고 카르타고에 붙었다. 칸나이 전투 참조.

칸나이 전투 이후 한니발에게 대규모 회전으로 승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뼈저리게 느낀 로마는 더 이상 한니발과 회전을 벌이는 것은 포기하고 파비우스가 주장한 대로 지구전법, 즉 게릴라 전법 + 초토화전법을 쓰기로 결정하였다. 다시말해 당시 지중해의 강대국인 로마가 겨우 3만의 한니발 군대를 맞서려고 청야전술을 썼다는 것이다. 그 후 10년간 로마와 한니발은 직접적인 대결 없이 지루한 소모전을 계속했다. 한니발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절실하였으나 다른 카르타고 지휘관들의 무능함 때문에 한니발 외의 카르타고 군대는 연전연패했고 여기에 카르타고 본국도 계속해서 터지는 반란과 히스파니아 원조 때문에 한니발에게 제대로 보급을 해 줄 수 없었다. 게다가 로마 해군 또한 결사적으로 카르타고의 보급선을 저지했기 때문에 소수정예의 한니발 군대는 지속적인 병력의 손실을 입었다. 반면 로마군은 본토에서 싸우기 때문에 계속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또한 한니발이 노렸던 로마 동맹체제의 붕괴는 결국 실패했는데 이것은 그의 예상보다도 로마 동맹체제가 훨씬 견고했던 것과 한니발 외에는 사실상 적수가 없었던 강력한 로마군이 동맹을 유지한 도시를 지지하고 이반한 도시는 공격하여 다시 로마 세력권에 편입시켰기 때문이었다.[9] 결국 한니발 군대는 겨우 얻은 이탈리아 내 지지세력도 거의 잃고 이탈리아 장화 발부리 끝으로 몰렸다. 이 과정에서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은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지원병력 3만을 이끌고 스페인에서 북이탈리아로 진입하며 갈리아 부족들의 지원군까지 포함하여 5만으로 전력을 강화하고 한니발을 향해 남하했지만, 먼저 기다리고 있던 리비우스와 네로의 3만 7천의 로마군에 의해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싸우다 전멸당하고 그 자신도 전사하였다. 이로써 한니발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대규모 보급의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한니발이 고립되고 전세가 호전되자 로마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집정관으로 선출된 뒤,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 본국과 그 동맹국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연전연승하여 결국 누미디아 왕국[10]까지 수중에 넣었다. 궁지에 몰린 카르타고 본국은 한니발에게 귀국 요청을 보냈고 한니발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이탈리아를 떠나 카르타고로 귀국하였다. 한니발은 자마 전투 직전 스키피오를 만나 화친을 제의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은 스키피오와 대결하게 되는데 여기서 패배하고 결국 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자마 전투 참조.

제2차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는 에스파냐를 얻었고 카르타고를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기원전 168년에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역시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한니발에게 당한 충격이 너무나도 엄청났던 로마는 제2의 한니발이 나올 것을 두려워해 카르타고를 철저히 탄압했다.

5. 제3차 포에니 전쟁[편집]

문서 참고.

6. 그 후[편집]

포에니 전쟁의 결과, 로마의 세력은 매우 커졌다. 그러나 때를 같이하여 여러 정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작은 규모의 농장을 경영하던 시민권자들이 대부분 전사하면서[11] 인력을 잃고 경영불량 상태가 된 평민들의 농지는 대지주들에게 넘어갔으며, 정복지에서 싼값의 농산물들이 대거 들어옴에 따라 농민들의 삶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반란과 개혁 시도와 대규모 숙청이 이어졌다.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로마인들이 선택한 것이 공화정의 해체와 제정의 성립이었다는 점에서, 결국 포에니 전쟁은 로마 공화정 몰락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카르타고는 아예 멸망당했다. 이 시기의 로마는 대개 패배한 상대국을 바로 정복하기보다 동맹이라는 형태로 자신들의 세력권에 편입시키는 쪽을 선택했는데 카르타고는 그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이 안겨준 엄청난 충격 때문에 로마는 다른 패전국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종료 후에도 그야말로 카르타고를 멸망시킬 명분만 노리다가 끝내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도시도 폐허가 되었다. 로마가 패전국에게 이렇게 가혹하게 대한 경우는 극히 드물며 카르타고는 그 첫 번째 대상국이었다. 결국 한니발 자신은 그 엄청난 능력으로 로마의 최대적수로서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나 역으로 자신이 로마에 남긴 충격 때문에 자국의 멸망에 일조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로 100년간에 걸쳐 3번의 전쟁을 겪었고 마지막 3차 전쟁도 차포 다 뗀 상황에서 3년이나 로마 정예군의 맹공을 버텨냈던지라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의 증오는 대단했다. 3년간의 공성전으로 폐허가 다 된 카르타고를 다시 한 번 건물 한 칸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부숴버렸고[12] 남아있는 카르타고 시민들에 대해선 할 수 있는 만큼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한 다음 그러고도 살아남은 5만명은 모조리 노예로 팔아버렸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카르타고 시민의 용기에 감동한 로마군이 살아남은 시민들을 노예나 전리품으로 삼지 않고 멀리 이주시켜 살게했다고 나오는데 거짓이다. [13]

수백 년간 강대국으로 번영할만한 도시면 지리적 이점만으로도 충분히 도시를 세울 만한데도 이후 카르타고가 복구되기까지는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율리우스 카이사르 때 복구 계획이 세워졌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미뤄졌다). 그만한 요충지를 100년간 황무지로 내버려둘 만큼 로마인들의 카르타고에 대한 공포와 증오는 대단했다.

7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번영을 누렸고 로마와 100년에 걸친 대전쟁을 벌인 강대국이었던 만큼 로마인들도 카르타고의 멸망에 대한 감회가 남달랐던 듯하다. 특히 직접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小스키피오가 남긴 술회가 유명하다. 스키피오와 함께 3차 포에니 전쟁에 참가했으며 후일 '포에니 전쟁史'를 저술한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불타는 카르타고 시를 바라보며 비애감에 젖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의 한 구절을 읊으며 '후일 언젠가 로마도 이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하곤 눈물을 흘렸다.[14]

곁들여서 이 당시 스키피오의 군영에는 후일 유명해지는 그라쿠스 형제의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참전했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공식적으로 1985년 1월에 끝났다고도 할 수 있다. 이날 이탈리아의 로마 시장 유고 베텔레와 튀니지의 튀니스(현재의 카르타고) 시장 체드리 쿠리빈과 만나서 전쟁 종결에 서명했기 때문. 이렇게 양측이 공식적인 종전협정을 맺음으로써,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이 끝났다. 무려 2131년 만이다.

이 종전 선언의 명분은 카르타고가 항복했지만, 그 이후로도 공식적으로 종전선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탈리아-튀니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운 상징적인 협정이다. 어차피 현대 이탈리아나 현대 튀니지가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포에니 전쟁의 직접 당사자도 아니었고, 고대에는 이런 식의 종전, 강화 협정을 맺는다는 개념도 없었다.

그리고 설령 포에니 전쟁 참전국의 현대 후계 국가들이 종전협정을 맺는다면 시장들이 체결할 게 아니라 실제로 외교권이 있는 이탈리아와 튀니지 정부 사이에 체결하는 게 옳을 것이다

[1] Dardania, 트로이가 위치하고 있던, 아나톨리아 북서쪽에 위치한 반도의 명칭. 다른 이름으로 트로아다(Τρωάδα)라고도 한다.[2] 로마는 트로이 전쟁에서 아이네이아스가 함락된 트로이를 탈출해 이탈리아로 건너와 로마의 전신 격인 라비니움을 건설한 신화를 들어 아이네이아스와 트로이의 후예를 자처했다.[3]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4권 622-629행, 김남우 번역[4] 밑의 '그 후' 문단 참고.[5] 마메르티니(Mamertini)는 마메르스(Mamers)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마메르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라틴족들이 군신 마르스를 부르던 이름이다. 끝이 i로 끝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복수형 명사이나. 이 용병대 전체를 싸잡아 마메르티니라고도 하기에 본 문서에서는 그냥 마메르티니인이라고만 서술한다.[6] 까마귀가 장착된 선수 부분에 지나치게 무게중심이 쏠려 조금만 거센 풍랑을 만나도 배가 전복될 위험이 컸던 점 등[7] 아드헤르발은 이미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연안을 몇 번이고 성공적으로 강습하며 로마의 수송선단을 끊는 등 해전에 능숙한 장군이었고, 로마 해군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차리자 카르타고 함대를 인근 섬에 매복시킨 후 로마 함대가 항구를 포위하자 후방을 기습, 역포위하고 충각전술로 승리했다. 거기다 풀케르가 로마 함대 최후방에서 지휘하느라 함대 전체의 지휘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함대 운용이 제대로 안 된 것도 패배의 원인 중 한 가지였다.[8] 카르타고가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느라 자국에서 고용한 용병에게 돈을 제때 못 줬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문제는 반란을 사르데냐에서 일으킨 것. 본래 조약에서는 사르데냐는 중립으로 하되 카르타고가 이곳에 올 수는 없게 해놨는데 이걸 안 용병들이 사르데냐로 가서 반란을 일으켜 카르타고를 공격했다가 불리해지자 사르데냐로 철수한 것이었고, 이에 카르타고가 사르데냐로 건너가 반란을 진압하려다가 로마에게 걸려버린 것이었다. 결국 로마에게 사르데냐를 잃은 건 물론이요 배상금까지 추가로 내놔야 했다.[9] 이 시기에 로마와 동맹을 유지한 도시와 배신한 도시의 이유는 제각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일괄적인 서술이 어렵다. 다만 칸나이의 대패를 보고도 대다수의 동맹시가 로마를 배신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칸나이 전투가 일어난 동맹시는 그 이후로도 동맹을 유지하여 이후 인접 지역의 방파제 역할을 했고 한니발에게 넘어간 도시도 도시 내 친로마파가 다시 로마군을 끌어들여 로마 체제로 복귀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전쟁 종료 후, 로마 원로원은 배신한 동맹시에 대해서 영토를 박탈하는 등의 엄중한 처벌을 집행했다.[10] 한니발 군대의 핵심인 기병의 대부분이 갈리아의 용병들과 누미디아의 기병들이었다.[11] 후반에는 무너지지만 로마제국의 경우 시민권자만 군인이 될 수 있었다.[12] 단 토펫이라 불리는 인신공양에 쓰인 아이들의 무덤만은 멀쩡했다. 아이들의 혼이 저주를 내리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 실제로는 카르타고가 멸망할 때 토펫 제사장이 파괴되었다. 토펫 자체는 손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13] 이전 서술에서는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잊혀지도록 그 땅에 소금을 뿌렸다고 했으나 실제 로마인들은 한 세대 후 그 땅에 식민지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따라서 소금을 뿌렸다는 서술은 명백한 과장이라 볼 수 있다.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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