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서
오원(伍員), 伍子胥
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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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BC 484 |
춘추 시대 오나라의 재상.
초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초 평왕에 의해 가문이 화를 당하자 오나라의 합려 아래로 들어갔다.
오나라의 국력을 신장시켜 초, 제 등을 함락하고, 오왕 합려를 춘추 5패의 하나로 등극시켰다.
오나라의 전성시대
오자서는 오(吳)나라 왕 합려(闔閭)를 보좌하여 오나라의 국력을 신장시키고, 제나라에게서 패권을 빼앗아 춘추 5패의 하나로 등극하게 했다.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으나 아버지와 형이 초나라 평왕에게 억울하게 죽임당하고,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 오나라에 망명했다. 초나라를 멸망시킨 오나라의 공신이 되었으나 합려의 뒤를 이어 부차(夫差)가 왕위에 오르자 국정 운영에 대한 견해 차이로 중용되지 못하고, 부차가 내린 검으로 자결하여 생을 마감했다.
오자서는 초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원(員)이다. 그의 선조는 건씨였으나 주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후 오씨 성을 갖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초나라 평왕 때 태자 건(建)의 교육을 담당하는 태부였다.
오자서 일족의 운명이 뒤틀린 것은 태자비를 들이는 논의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태자비를 북쪽의 강대국 진(秦)나라에서 맞이하기로 하고, 소부였던 비무기(費無忌)가 진나라로 파견되었다. 태자비로 거론되던 진나라의 공주는 절세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비무기는 평왕의 환심을 사고자 태자비로 거론되던 진나라 공주를 후궁으로 삼고, 태자비는 다른 인물로 간택하라고 조언했다. 평왕은 진나라 공주의 미색에 반해 이를 받아들였다.
곧 비무기는 태자가 왕이 되면 자신에게 그 복수를 할까 봐 두려워졌다. 비무기는 왕에게 태자를 중상하기 시작했고, 태자의 혼사를 깬 것이 부담스러웠던 평왕은 결국 태자를 변경 성보(城父)의 태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비무기는 태자에 대한 중상모략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태자가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고 고했다. 평왕은 태부 오사에게 진위를 확인했으나 오사는 태자에게 반란의 의지가 없다며 극구 부인했다. 그럼에도 평왕은 분양(奮揚)을 시켜 태자 건을 죽일 것을 명하고, 오사는 옥에 가두었다. 분양이 성보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소식을 접한 태자 건은 송(宋)나라로 도망쳐 목숨을 구했지만, 결국 초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정(鄭)나라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비무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문 오씨 일족을 멸하고자 했다. 그는 평왕에게 오사의 두 아들을 살려 둔다면 후환거리가 될 것이라면서 그의 두 아들까지 주살할 것을 진언했다. 평왕은 오사의 큰아들 오상(伍尙)과 둘째 아들 오자서를 잡아들이기 위해 오사에게 거짓 편지를 쓰게 했다. 오사의 거짓 편지를 받은 오상은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버지 오사와 함께 죽기로 결심하고 오자서에게 복수를 부탁했다. 기원전 522년 오사와 오상은 살해되었고, 오자서는 복수를 다짐하며 도망쳤다.
오자서는 우선 태자 건이 있는 송나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태자를 만났으나 이때 송나라에서 화씨(華氏)의 난이 일어나 태자와 함께 정나라로 피신했다. 하지만 태자가 진(晉)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꾸미다 들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더 이상 정나라에 머무를 수 없게 된 오자서는 남쪽의 오나라로 달아났다.
오자서의 오나라를 향한 구사일생의 여정은 사마천의 《사기》 〈오자서열전〉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태자 건의 아들 승(勝)과 함께였던 오자서는 소관(昭關)이라는 관문에 이르렀을 때 관을 지키는 군사에게 쫓기게 되었다. 다급해진 오자서는 승과 헤어져 혼자 도망쳤고, 군사들에게 잡히기 일보 직전 장강(長江, 양쯔 강)에 이르렀다. 이때 한 어부가 오자서를 배에 태워 강을 건너게 해 주었고, 오자서는 은혜에 보답하고자 금 백 냥의 값어치가 나가는 칼을 건넸다. 그러나 어부는 오자서의 칼을 조용히 되돌려 주며 “초나라에는 오자서를 잡는 자에게 좁쌀 5만 석과 높은 작위를 내린다는 방이 붙은 지 오래라고 하오. 내게 욕심이 있었다면 그깟 금 백 냥의 칼이 대수겠소?”라고 말했다. 오자서는 그 후에도 병에 걸리기도 하고 걸식을 하기도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오나라에 도착했다.
당시 오나라의 왕은 요(僚)였는데, 그의 즉위 과정은 다소 분란의 여지가 있었다. 요의 할아버지인 수몽에게는 제번(諸樊), 여제(餘祭), 여매(餘昧), 계찰(季札)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막내아들인 계찰이 특히 현명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계찰은 권력 싸움에 휩싸이는 것이 싫다며 이를 사양했다. 결국 왕위를 이어받은 장남 제번은 아버지의 의지대로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둘째 동생인 여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여제 역시 셋째 여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형제 상속을 택했다.
하지만 여매가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할 때 계찰은 은둔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오나라의 왕위는 왕의 아들에게 물려준다는 원래의 상식대로 여매의 장남인 요에게 돌아갔다. 이에 대해 원칙대로라면 왕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제번의 장남 광(光)이 사촌 동생이 왕이 된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광의 처지를 간파한 오자서는 그를 오나라 왕으로 옹립해 초나라에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기원전 515년 요는 초나라의 왕위 교체기를 이용하여 초나라를 공격했다. 하지만 초나라 공격은 장기전이 되었고, 요의 정예군 수가 적어지자 오자서는 자객을 보내 요를 제거했다. 이후 광이 오나라 왕으로 즉위하고, 오자서는 재상이 되었다. 광이 바로 오왕 합려다. 합려는 우리에게 《손자병법》의 저자로 유명한 손무(孫武)를 영입했고, 오자서와 손무로 인해 합려의 시대에 오나라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오왕 합려(혹은 그의 아들 부차)는 춘추 시대의 5패 중 하나로 꼽힌다.
기원전 506년 합려는 손무를 대장, 오자서를 부장으로 삼아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郢)을 함락했다. 하지만 오자서의 원수인 평왕과 비무기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고, 평왕의 아들 소왕은 도망쳐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시신에 300번의 채찍질을 하여 복수를 완성했다. 《사기》 〈오자서열전〉에는 오자서의 옛 친구이자 오나라의 충신 신포서(申包胥)가 “일찍이 평왕을 섬겼던 신하로서 행동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힐책하자 오자서가 “나의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이미 늙어 앞으로 목적한 것을 쉽게 달성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오자서는 초나라의 멸망을 원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포서가 진(秦)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 진나라가 초나라에 원군을 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나라 내에서 합려의 부재를 틈타 동생 부개(夫槪)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합려는 서둘러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했다 해도 초나라는 오나라의 신하국으로 전락했고, 오나라의 국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기원전 496년 합려는 남쪽의 월(越)나라가 힘을 키워 압박해 오자 몸소 군대를 이끌고 월나라를 공격했다. 월나라는 왕 윤상(允常)이 죽고 구천(句踐)이 왕위를 이었는데, 그의 참모진에 범려(范蠡)라는 뛰어난 자가 있었다. 그는 오나라 군대에 자살결사대를 보내 오나라 진영을 흐트러뜨린 후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합려는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기원전 496년에 죽고 말았다. 합려의 뒤를 이어 차남 부차가 왕위를 계승했다.
부차는 섶 위에 누워 자며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臥薪, 와신)하며 결국 월나라에 설욕전을 폈다. 기원전 494년 부차는 상국 오자서와 태재(太宰) 백비(伯嚭)의 도움으로 부초(夫椒)에서 월왕 구천을 크게 물리치고 회계산(會稽山)으로 몰아넣었다. 구천은 부차에게 굴욕적인 조건을 내세워 강화를 요구했다. 오자서는 구천을 죽일 것을 주장하며 강화를 극렬히 반대했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뿌리치고 구천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오나라의 인질이 된 구천은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월나라 재건에 힘을 쏟았다. 태재 백비에게 뇌물을 주어 부차와 오자서를 이간시키고, 몰래 월나라의 국력을 회복하는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기원전 489년 부차는 제나라의 내분을 틈타 제나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기에 아직 오나라의 국력이 약하니 시기상조이며, 구천을 경계하여 월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간언했다. 하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제나라 공격을 감행했고, 제나라의 애릉(艾陵)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자신감을 얻은 부차는 오자서의 만류에도 북방 원정을 되풀이하여 국력을 소모하는 한편 매번 자신을 반대하는 오자서를 멀리했다.
기원전 485년 부차는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했고, 그다음 해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오자서는 부차가 자신의 충언을 번번이 무시하자 오나라의 앞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제나라행에 동행했던 아들을 제나라의 포씨에게 맡긴 채 혼자 귀국했다. 태재 백비가 이 사실을 이용하여 오자서를 모함했고, 부차는 오자서에게 ‘촉루(屬鏤)의 검’을 보내 자결을 명했다.
기원전 484년 오자서는 부차를 원망하며 가신에게 자신의 무덤에 가래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만들 때 목재로 쓰고, 자신의 눈을 뽑아 동문에 걸어 두어 후에 월나라의 공격으로 오나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오자서의 유언을 전해 들은 부차는 격노하여 그의 시신을 말가죽 자루에 담아 강물에 던져 버릴 것을 명했다.
부차는 춘추 시대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했지만 오자서는 자신의 사후 오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기원전 475년 부차는 쓸개를 핥으며 고난을 극복(嘗膽, 상담)한 월왕 구천의 공격을 받아 고소산(姑蘇山)으로 쫓겨갔다. 기원전 473년 부차는 “오자서의 얼굴을 볼 낯이 없구나.”라며 오자서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오나라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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