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연구

스페인무적함대/영국

박송 입니다. 2019. 9. 2. 11:26



 
 
16세기에 세계의 패권은 스페인의 손안에 있었다.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무적함대’-당시 스페인에 붙여졌던 별칭에서도 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왜 스페인만이 전 세계로 세력 범위를 넓힐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주된 요인은 다른 유럽 국가보다 한발 앞서, 서쪽으로 우회하는 원양항해에 성공했던 데 있다.
 
그러나 이처럼 세계 최강의 힘과 부를 자랑하던 스페인도 1588년에 당시 아직 약소국으로 여기고 있던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가 불의의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른바 아르마다 해전에서였다.
 
영국 함대와 스페인 함대의 싸움, 1700년 이전, 작가 미상.
 
해적행위를 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선전포고
 
1558년에 영국 여왕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는 해외 진출을 확대해 스페인과 대립했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훨씬 앞서 있는 스페인을 상대로 엘리자베스는 비공식적으로 민간의 자원을 활용해 해적 행위를 감행한다. 훗날 영국 해군의 명장이 되는 드레이크(Drake) 등이 스페인 무역선을 빈번하게 습격해 아메리카의 카리브 해와 대서양 곳곳에서 스페인의 제해권을 위협했던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1년 후인 1588 8월에 펠리페 2세는 동맹관계에 있는 이탈리아의 파르마 공과 연대해서 영국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계획했다. 당시 영국은 연안 방위에는 약체의 민병대밖에 배치하지 않았기에 스페인 군대가 상륙에 성공할 경우에는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해양국가 영국이 해외로 진출할 때 가장 중시했던 것은 자국군대의 무력이 미치는 교역소 등의 거점 확보였다. 반면에, 스페인은 내륙에 수도를 두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원래 대륙국가다. 오랫동안 유럽의 강국으로 머물렀던 프랑스의 벽에 막혀 유럽대륙으로의 진출이 불가능해 해양으로 먼저 진출했던 것이 세계 강국으로 급부상한 배경이었다. 따라서 스페인이 해외 진출을 할 때 가장 중시했던 것은 영토 확보, 즉 식민지 정책이었다.
 
반대로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영국은 국방 전선(前線)을 자국의 해안선이 아니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적국의 연안까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국식 사고방식을 따르자면 항상 전쟁은 다음과 같은 3단계를 밟는 것이 기본적인 전략이다.
 
1. 제해권의 확보
2. 대안(對岸)에 있는 적의 해양기지의 파괴
3. 내륙으로 상륙작전
 
그런데 스페인은 다짜고짜로 세 번째 단계인 상륙을 목표로 삼아 전쟁에 나섰다. 결국 제해권을 확보하지도 않고 적국의 땅에 상륙을 강행해서 영토를 뺏을 작전으로 나섰던 것이다. 당시 군사력이 미미했던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했던 방식을 따랐던 것이다.
 
반면 영국 해군은 먼저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무리하게 영국 본토를 노리는 스페인 함대를 얼씬도 못하게 했다. 아르마다 해전에서 치명적인 패전을 당한 이후 스페인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면에 세계 최강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친 영국은 세계의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착취한 막대한 부의 낭비, 거대한 영토와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거듭되는 전쟁으로 인한 경비 때문에 점점 피폐해져갔다. 또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때까지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던 식민지 네덜란드를 잃었다.
결국 아르마다 해전은 16~17세기에 구교와 신교가 벌이게 될 숱한 전쟁의 단초를 제공했던 전쟁인 것이다.
 
 





무적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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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함대
잉글랜드-스페인 전쟁, 80년 전쟁의 일부
Invincible Armada.jpg
교전국

잉글랜드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네덜란드 공화국

Estandarte Real de Felipe II.svg 이베리아 연합
(합스부르크 스페인)[1]

파르마 공국 파르마 공국
지휘관

잉글랜드 노팅엄 백작
잉글랜드 프랜시스 드레이크
잉글랜드 존 호킨스

네덜란드 공화국 유스티누스 반 나사우

Flag of Cross of Burgundy.svg 메디나시도니아 공작
Flag of Cross of Burgundy.svg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칼데

파르마 공국 파르마 공작
병력
군함 34척[12]
무장상선 163척
(배수량 30 ~ 200 톤)[12]
평저선 30척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갈레온
무장상선 104척
나폴리
갈레아스 4척[13]
피해 규모
작전 중 사망 50–100명[14]
작전 중 부상 400명
화공선 8척 전소[15]
비전투 손실: 6,000–8,000 명 사망(질병)
작전 중 사망 600명 이상
작전 중 부상 800여명[16]
포로 397명
배 5척 침몰 또는 나포[17]
총합:
배 약 35척 손실[18][19] (10척은 자침)[20]
20,000명 사망[21][22]

위대하고 가장 축복받은 함대(스페인어: Grande y Felicísima Armada 그란데 이 펠리키시마 아르마다[*]) 혹은 무적함대(스페인어: Armada Invencible 아르마다 인벤시블레[*])는 1588년 메디나 시도니아(Medina Sidonia) 공작의 지휘하에 영국 상대로 출항했던 에스파냐의 함대이다. 흔히 영국-에스파냐 전쟁에서 영국의 함대에 분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영국 함대와의 교전으로 잃은 배는 3척에 불과하다. 나머지 배는 태풍으로 말미암은 비전투 손실로 침몰하였다.

무적함대는 메리 1세 여왕의 남편이었던 펠리페 2세 왕이 파병하였다. 파병 목적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일부인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억제하고, 신세계에 있는 스페인령 영토와 대서양 보물 선단에 대한 영국의 공격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교황 식스토 5세는 상륙 보상금 계약(the promise of a subsidy should it make land)을 통해 원정을 지원하였다.[23]

본디 무적함대는 많은 경험 갖추었던 알바로 데 바산(Álvaro de Bazán)이 지휘했었지만, 출항 몇달 전인 1588년 2월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메디나 시도니아가 임용되었다. 출항 초 스페인 왕립 해군(Spanish Royal Navy) 소속 22척의 전함과 108척의 개조한 상선이 있었다. 이 함대는 영국 해협을 지나 플랑드르 연안에 정박할 계획이었다. 플랑드르에서 스페인 테르쇼(tercios)의 파르마(Parma) 공작군이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북해를 지나 영국 남동 지방에 상륙하기 위해 무적함대의 호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영국 해협으로의 항해를 강행하여 프랑스와 스페인령 네덜란드 사이의 연안 경계 지역인 그레벨링건(Grevelingen) 남해의 넓은 수면에 정박했다. 그곳에서 파르마군과의 연락을 기다리던 도중, 화선(fire ship) 공격을 받아 대열을 잃고 흩어지게 되었으며, 이후 197척에 달하는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뒤이어 벌어진 그레벨링건 전투(Battle of Gravelines)에서도 소수의 함선을 더 잃게 되었으며, 이 결과로 스페인은 파르마군과의 집결을 포기하게 된다.

무적함대는 비록 뿔뿔이 흩어졌지만 많은 함선이 있었으나, 함선을 재편성하여 남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남쪽 해안 지역까지 영국 함대의 습격을 받았다. 무적함대는 스코틀랜드 주위로 항해하여 대서양으로 나간 후 아일랜드를 지나 스페인로의 퇴각을 시도했다. 그러나 도중에 큰 폭풍을 만나 함대의 일부가 손상되었으며, 24척 이상의 배는 아일랜드 북부 및 서부 해안에서 난파되어, 난파된 배의 생존자들은 스코틀랜드로 피난해야만 했다.

이 전투 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힌 대형 메달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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